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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의 지혜와 정성 그대로
고려 태조왕건 때부터 이어져온 천 년의 역사, 남북정상회담 공식 건배주, 전통주 최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등 문배술을 일컫는 말에서 술의 진가가 진하게 묻어난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잡곡을 주원료로 빚는 술임에도 문배열매 향기가 난다고 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술이기 때문이다. 이기춘 명인이 설명하는 문배술의 가장 큰 특징 또한 이와 결부되는 얘기다. “술을 빚는 저도 굉장히 신기하고 놀랍긴 마찬가지죠. 수수와 조를 6대 4의 비율로 발효시켜 만든 술인데 어떻게 문배 향이 나는지 말입니다. 한번은 문배로 술을 담근 적이 있어요. 한데 곡물로 담근 것보다 훨씬 향이약하더군요. 우리 선조의 지혜가 그 향에 오롯이 담겼다고 봐요. ‘문배술’이라는 순한글 이름도 우리 선조가 지어준 것이고요.”
‘잘 익은 문배나무 돌배향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그 이름, 문배술에는 독특한 향만큼이나 특유의 역사와 이야기가 배어 있다. 이 명인의 증조모인 박씨 할머니 때부터 문배술을 담그기 시작해 이 명인의 조부 이병일 선생이 1946년 평양에 ‘평천양조장’을 설립한 후 본격적인 문배술 제조가 이뤄졌다. 이후 이 명인의 부친 3대 이경찬 선생에 이어 4대에 전해져 온 것이다. “사실 연수나 횟수를 계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죠. 어머니가나를 누룩방에서 낳았고, 평양에 살던 시절 양조장이 내 놀이터나 진배없었으니까.태어나 지금까지 일흔이 넘도록 평생을 문배술과 같이 살았다고 봐야지. 어찌 시간을 따질 수 있겠어요?”
문배술과 평생을 함께해온 이 명인에게 철칙은 오직 하나다. 정성을 다해 술을 빚는 것, 명인으로서 갖는 사명감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누룩과 발효, 증류과정을 거쳐 일 년 정도 숙성을 해야 문배술이 완성되지요. 현대 과학이 발달해 냉난방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해도 술을 빚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의 힘에 달려 있어요. 계절의 변화에 따른기후와 온도가 술의 품격을 좌지우지하는 겁니다. 술을 빚는 사람도 마찬가지죠. 시대가달라졌다고는 해도 우리 선조들의 마음 그대로 정성을 다하는 것, 그것에서 전통은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이죠.”
문배술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명인 하면 그의 고향 ‘평양’을 빼놓을 수 없다. 1940년대 당시 그의 조부가 설립한 평천양조장은 평양 감흥리, 우포리, 성교리 3곳에 큰 규모로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그의 집안은 평양에서 제일가는 재벌가로 불렸다. “그 규모를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죠. 당시 한 해 공장에서 내는 세금이 평양시 일 년 치 예산과 같았으니까. 문배술이 이북 땅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로 수출이 되고 그랬어요. 故 김일성 주석이 우리 공장을 찾았으니 말 다 한 거지. 김 주석이 방문했을 당시 우리 집안의 맏아들로서 꽃다발을 건네준 기억이 나요.”
우포리 공장 안에서 생활했던 이 명인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집 밖을 나갈 정도로 삼엄한 경비가 항상 그를 따랐다. “우리 집안이 ‘현금부자’라는 소문이 돌면서 여기저기서 나를 납치하겠다는 말에 아버지가 바깥 출입도 못하게 말리곤 했었어요. 학교도 못 가는 지경이 되니까 아버지가 공장 안에 인민학교를 세웠었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온 가족이 남한으로 피난을 온 이 명인. 그의 나이 아홉에 멈춘 고향 땅의 기억은 일흔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남아 있다.
피난 이후 부산과 제주 등지에서 생활하던 이 명인의 가족은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와 터를 닦았다. 이 명인의 부친은 남한 땅에서 문배술의 명맥을 잇기 위해 서울에 ‘거북선’이라는 양조장을 설립했다. 그러나 문배술은 1965년 양곡관리법에 의해 생산이금지되어 이후 20여 년간 중단되었다. 정부에서 희석식 소주, 맥주, 막걸리를 제외한곡식으로 만드는 술 제조 금지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아버지는 확고했어요. 정부에서 희석식 소주 생산을 권유했지만 증류식 소주만 고집하던 아버지는 ‘희석식 소주를 만들 바에는 양조장 문을 닫겠다’고 하셨죠.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는 날에만 차례상에 올리기 위해 집안에서 소량의 문배술을 빚곤 했었어요.”
양조장이 문을 닫자 이 명인은 대학 졸업 후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보건사회공무원을 거쳐 대한항공에 입사해 17년간 근무하던 그가 또 다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건 1990년 무렵이었다. “전두환 정권 들어서 양곡관리법이 풀린 겁니다. 드디어 가업을 이을 수 있게 된 거죠. 게다가 문배술이 오랜 역사를 인정 받아 국가 관리 아래 우리 전통술로 지정되기에 이르렀죠. 그게 1986년 11월 1일에 발표가 났었어요.” 그의 부친 이경찬 선생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6-가호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면서 1990년 비로소 정식으로 전통주 제조허가가 내려졌다. 그 시기 서울 연희동에 양조장을 다시 열면서 본격적인 문배술 제조가 이뤄졌다.
전통이 미래, 5대에 걸친 ‘전수보전’
“문배술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되고 난 뒤 주류업계 여기저기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옵디다. ‘남한에도 좋은 술이 많은데 왜 하필 이북 술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했느냐’하는 겁니다. ‘반대로 이북에서 남한 술을 국주로 추대하겠냐’라고도 합디다. 문배술을 국가문화재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지 뭡니까.” 각 분야별 학자들에 의해 수년에 걸쳐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국가문화재가 되는 그 과정을 보려 하지 않고, 그저 남북으로 나눠 생각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에 그는 격분했다. “가장 먼저 학 자들의 반발이 컸어요. ‘쉽게 바꾸고 제거한다면 그게 어디 한 나라의 문화라고 볼 수 있겠냐’는 주장이었지. 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찾아갔었어요. ‘남한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실향민이 몇 천 명이 넘는데 한민족이라고 말하면서 실상은 남과 북을 나눠서야 되겠냐’고, ‘애국가에 백두산도 동해도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애국가도 잘못된 거 아니냐’고, ‘서울 시내에 있는 평양냉면, 함흥냉면 식당도 다 없어져야 하는 거냐’ 고 목소리를 높였지.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 문배술 지키는 게 목숨보다 귀한데.” 그렇다. 1992년 문배술 제조전수교육을 수료한 이 명인은 부친에 이어 1995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6-가호 향토 술 담그기 ‘문배술’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고, 같은 해 농림축산식품부 전통식품명인 제7호에 지정되면서 오로지 문배술을 지키는 일에 평생을 매달렸다. “아버지 밑에서 하나하나 전수받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이 생생해요. 엄한 가르침에 불평불만도 더러 있었지. 기합도 많이 받고 꾸지람도 많이 들었어요. 그때는 ‘아버지가 왜 화를 내실까’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와 보니 그게 다 좋은 술 빚으라고, 전통 잘 지키라고 아들을 다독인 거였어.”
2003년 문배주양조원에 입사한 이 명인의 아들 이승용 씨가 5대째 가업을 잇는 전수자로 이름을 올렸다. 현대적인 감각의 용기 디자인과 언더록, 칵테일 등 문배술을 마시는 방법을 다양화해 이 씨는 젊은 층의 감성에 다가가는 데 집중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찾는 이가 없으면 의미가 없죠. 전통은 지키는 것만큼 널리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 그런 면에서 아들이 이끌어나갈 문배술의 미래에 기대감이 커요.” 2000년대초 전통을 널리 알리기 위해 우체국쇼핑을 택했던 이 명인. 전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로 문배주의 명성은 실로 대단했다.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문배술의 인기는 전통이 갖는 의미에서 비롯된다. “전통을 지키는 것이 곧 문배주를 있게 하는 힘이지요. 국가문화재 문배주를 말입니다.”
이기춘 명인(문배주 양조원)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7호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6-가호 기능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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