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카페의 창으로 녹음의 기나긴 풍경이 펼쳐졌다. 논과 밭의 샛길로 경운기가 덜덜거리며 지나가고 밀짚모자의 농부가 오토바이를 타고 논둑을 가로질렀다. 산자락 아래 염소가 무리 지어 노닐고 기차 지나는 소리에 농장의 사슴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동네 꼬마들은 놀기를 잠시 멈추고 기차를 향해 손을 높이 흔들었다.
아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다. 열차에 반가운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방이 산과 농지로 둘러싸인 산중의 아이들은 달리는 기차를 통해 뭔가 흥미진진한 상상을 한다. 그들이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는 그런 상상 같은 것 말이다.하리는 열차카페에 앉아 차창 너머의 꼬마들과 풍경에 눈길을 내주고 있었다.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기도 하면서. 한때는 기찻길 옆에 살았던 하리가 곧잘 했던 일이었다.
“여행은 이래서 좋다니까. 모르는 사람도 괜히 친숙하게 만들잖아.”
간식거리를 사러 갔던 우정이 어느새 의자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핫바 하나를 하리에게 건넸다. 그것 말고도 그의 손에는 달걀과 음료수 등이 잔뜩 들려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먹어도, 먹어도 왜 이렇게 배가 고픈지 모르겠다.”
우정은 하리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하리가 돌아와서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면서. 적막했던 집은 하리가 돌아오자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거렸다. 집배를 나가서도 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지고 퇴근시간이 기다려졌다. 막상, 귀가하고 나면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장기외출에서 돌아온 하리는 우정의 시답지 않은 장난들에 시큰둥했다. 말을 걸면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손톱깎이 어딨어, 하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직접 가져다주는 식이었다. 그럴 때면 우정은 더 큰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아, 이게 거기 있었구나. 근데 빗은? 양말은? 아빠 면도기는? 어떻게든 하리가 말을 하게 만들 작정이지만 쉽지 않았다. 우정은 뭐는 어딨지를 반복했다. 보물찾기 놀이처럼 뭔가를 끊임없이 찾아댔다.
그만 좀 성가시게 하라고 끝내 하리의 입이 떨어지고 나면 우정은 그제야 씨익 웃었다. 자신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냐는 얼굴을 하고서. 딸의 목소리를 들으니 살 것 같은 행복한 얼굴을 하고서.
이왕 웃는 거 활짝 웃으면 더 좋지 않겠냐고. 하리의 입꼬리를 양손으로 집어 올렸다. 우정의 손을 뺨에서 거둬내는 하리는 하는 거 봐서라며 새침하게도 돌아섰다. 돌아온 탕자를 받아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느냐고 구시렁거릴라치면 하리의 눈 흘김에 우정은 찌릿해 왔다. 집 나가는 일만은 절대로 말아 달라고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 앞에서는 되도록 환하게 웃기다. 우리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니까.”
혹시나 싶은 우정의 노파심은 깊고도 길었다. 해자가 걱정할 일은 만들지 않기 위해 주의사항을 늘어놓기 바빴다. 무엇보다 하리가 가출했던 일만은 절대 비밀이라고 덧붙였다.
“그건 가출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장기외출이야.”
“미성년자가 허락도 없이 집 나가면 가출이지, 다른 게 가출인 줄 알아? 난 네가 남의 집에서 자는 거 절대 허락 안 했다.”
“나는 분명히 알리고 나왔거든.”
가출이냐 외출이냐를 놓고 그들은 또 티격태격했다. 그들의 기차가 목적지에 당도하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입씨름을 하느라 하마터면 내리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기차가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에서야 그들은 목적지에 와 있음을 알아챘다.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허둥지둥 내렸다. 플랫폼에서 거친 숨을 달래며 목적지에 내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기차가 역을 완전히 벗어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해자에게 줄 선물을 놓고 내렸다는 것을.
하리는 당혹감을 지우지 못했다. 흙냄새. 바람냄새. 사람냄새. 공기마저 친숙한 고향의 향기를 만끽하지 못했다. 해자의 선물을 놓고 내렸다는 자책과 아까움에 하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괜찮아. 다른 걸 사가면 되지, 뭐.”
“누군가 운수 대통했네, 오늘.”
두고 내린 화과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하리는 한참을 툴툴거렸다. 우정은 하리를 달래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익숙한 풍경 안에 낯익은 얼굴들이 이게 누구냐며 우정을 반기는 사람들이 하나둘 이어졌다.
우편행랑과 더불어 이십여 년을 안 간 곳 없이 곳곳을 누비던 고향 땅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외지에서 이사 온 지 일 년이 안 된 이들일 터였다. 기차역에서부터 지인들의 짧은 안부를 챙겨가며 도착한 해자의 집.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집 주변의 밭 어디에서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정은 옆집의 초록대문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 집에는 택시영업을 하는 한 기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집에 볼일이 있어 들렸다 다시 택시영업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우정을 보자 어쩐 일이냐며 아들인 양 반겼다.
“잘 지내셨어요?”
“물론이지. 자네도 별일 없고? 잘 지내지?”
“네.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안 보이시네요. 어디 가셨는지, 아세요?”
“집에 없으면 요양원에 갔겠지.”
“요양원이라뇨?”
해자가 병원에 입원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싶은 우정은 깜짝 놀라 말했다.
“한두 달쯤 된 것 같은데…… 자네 어머니, 요양병원에서 일하는데, 몰랐던 거야?”
아픈 게 아니라니 안도해야 했다. 우정은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해자가 요양원에 있다는 사실은 뜬금없었다.
한 기사는 그동안 아무것도 몰랐던 거냐며 쯧쯧거렸다.
그들이 마당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이 한 기사의 아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중풍에 걸린 그녀는 거동이 불편해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지만 사람 소리가 나니 그냥 있지 않았다.
“나도 집사람 때문에 영업 뛰다 말고 수시로 들락거린다네.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한 기사의 아내를 멀뚱히 바라보던 우정은 갑자기 한 기사의 택시에 올라탔다.
“어머니 있는 요양병원이 어딘지 거기까지만 좀 데려다 주세요.”
“병원까지는 나도 모르는데…….”
한 기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차로 십 분 되는 거리 안에 요양병원은 세 곳이나 있었다.
한 기사는 찾으러 가는 것보다는 집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이라 했다. 지금 집에 없다면 야간근무를 하고 오전 중에 퇴근할 것이란다. 낮도 아니고 밤에 일한다고? 우정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에 요양병원에서 일을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복잡한 심사에 조바심만 일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당에서 배회하는 사이였다. 해자가 언제 왔느냐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퉁명스럽고 짜증 어린 우정의 말이 포탄처럼 날아간 것은 자명했다. 집 비우고 대체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 거냐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고개 너머 하영엄마네 집에서 수다 좀 떨다 왔다. 왔으면 왔다고 전화라도 할 일이지.”
“요양병원에서 일하다 온 건 아니고?”
우정의 말에 해자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이내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주눅들 일이 없잖은가.
“집에서 혼자 놀면 뭐해. 나처럼 다 늙은 사람도 써준다는데 고맙고 황송해서 나간다, 왜?”
“낼모레면 엄마 연세가 어찌 되는 지나 알아요? 칠순이라고요, 칠순!”
“내 나이가 어때서? 일하기 딱 좋은 나인데…… 아직 사지 멀쩡하고 노인네라도 내가 필요하다는데, 고맙지 뭐. 병원에 한 번 가봐라. 죄 침대에 붙어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사람들 부지기수다. 거기 비하면 몸 성한 네 엄마는 청춘이다, 청춘! 다시 시집가도 될 판이구만.”
우정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환자를 돌보는 일은 젊은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든 환자들을 씻기고 돌보는 일을 해자가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간병은 칠십의 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젊은 사람의 손이 귀하다지만 칠순의 노인이 간병인이라니. 아버지 없는 아들을 홀로 키우느라 당신 몸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한 해자였다. 생활비 때문에,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파도 병원과는 담쌓고 지내다시피 한 그녀였다. 우정에게 손 벌리기 싫어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해자였다.
제대를 하자마자 우정이 고향으로 온 건 그 때문이었다. 남에게 아쉬운 말은 하지 못하는 해자의 성격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하리의 학업을 핑계로 그간 해자를 방치한 것은 아닌가. 우정은 가슴이 먹먹했다. 정연의 말대로 일찌감치 해자를 보내줬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와 제 가슴을 치고 마는 우정이다.
“어머니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가만 보면 엉터리라니까. 당신은 어머니한테 진실로 무심한 아주 나쁜 아들이야. 여자 혼자 그것도 미혼모가 되어 자식을 키운다는 게 어떤 건지 남자인 당신이 알 리가 없지. 암튼 당신은 이기적인 아들이라고.”
해자의 재혼을 고려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먼저 말을 꺼낸 건 정연이었다. 해자가 마흔 중반이던 무렵이었다. 아들에 며느리, 손녀까지 있는데 재혼은 무슨 재혼이냐고 우정은 정색했다. 정연의 마음을 단칼에 잘랐다. 시집살이하는 정연의 마음이 순수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만 행복한 것 같다는 정연의 말을 우정은 납득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오해도 했다. 해자를 모시기 싫어 그런 것이라고. 해자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우정이 해자의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참, 젊었구나 싶다. 처음부터 엄마였던 해자에게 다른 인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우정은 알지 못했다. 태어나면서 없었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다는 것 자체도 거북살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때에 해자의 재혼에 대해 적극적이었다면 지금의 상황과는 달라졌을까. 요양원을 들락거리며 품을 팔아야 하는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까. 밤새워 벽이나 종이와 씨름하지 않으니 됐다고 여겼다. 홀로 고독한 시간을 보내지 않으니 그럭저럭 잘살고 있다고 우정은 자신 편한 대로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밤, 그들은 한 방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웠다. 힘든 병원 일 때문인지 해자는 부쩍 야윈 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리의 얼굴이 핼쑥해졌다고 되레 걱정했다.
“예쁜 내 새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역시 우리 할머니야. 나 힘든 것도 알아주고. 이러니 내가 할머니한테 반하지. 이렇게 마음씨 착하고 매력적이고 또 씩씩한 하리 할머니잖아.”
“이제 그만 털어놔봐.”
“뭘요?”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이 할머니 눈은 못 속인다. 니들 데면데면한 것이 한판 하고 온 거 맞잖아. 잘 지내고 있는 나 말고 니들 얘기나 해봐. 뭐가 문제인지.”
“우와, 우리 할머니 진짜 눈치 백단이네.”
하리는 허풍을 떨었다. 우정과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해자가 가엽고 측은해서였다. 하리는 아이처럼 온갖 재롱을 떨었다. 그걸 바라보는 우정은 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린양 피우는 하리를 보자니 아직 한참 아이구나 싶은 생각에.
“엄마, 우리 세 식구 같이 살까? 하리도 고생 덜하고 엄마도 요양원 관두고.”
“늙은 엄마 부려 먹을 생각이면 됐다.”
“아무리 힘들어도 병원 환자 돌보는 것만 할라구. 그리고 누가 엄마를 부려 먹는다 그래요?”
“어쨌거나 나는 싫다.
네 인생은 네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지.
나는 이대로가 좋다.
요양원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에 그만큼 안 힘든 일이 어디 있다고. 산목숨 지켜내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아나?”
“엄마가 젊은 사람도 솔직히 그런 일 할 연세도 아니잖아.”
“언제부터 오지랖 넓게 내 생각을 그렇게 해줬다고.
난 됐으니 니들이나 잘 살아.”
그들의 언성이 높아가고 분위기가 싸해지려는 찰나였다. 하리가 해자의 젖가슴을 파고들었다. 해자는 하리의 등을 토닥토닥했다. 우정의 심사는 홀로 사나웠다. 혼자 몸 가누기도 힘든 나이에 갓난아기를 돌보는 것도 만만찮다. 하물며 덩치 크고 고집 센 환자를 돌보는 일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우정은 답답한 속을 게워내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방안으로 어둠이 깔리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리를 불렀지만 잠잠했다. 우정은 또 해자를 가만히 불렀다. 잠든 줄 알았던 해자가 왜, 하고 대답했다.
“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새삼스럽게 별걸 다 물어. 그냥 잠이나 자.”
지금껏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다. 그렇다고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남들 다 있는 아버지가 자신에게만 없다는 게 이상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집에는 사진 한 장이 없었다. 우정이 본 사진 속에 해자는 늘 혼자였다. 어딘가에 아버지라 부를 만한 이의 사진이 있을 것도 같았다. 있어야 정상이었다. 없었다. 아버지가 궁금해 견딜 수 없던 순간이 우정에게도 분명 있었다. 다 지나간 일이다.
중년이 된 지금, 아버지의 존재가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해자와 나란히 누운 지금 순간만큼은 알고 싶었다. 팔자를 고치려고 작정했다면 우정이 안 된다고 말렸어도 재혼했을 것이다. 하지 않은 건 우정의 기억에는 없는 아버지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해자를 지금껏 붙잡고 놔주지 않는 사람은 우정이 아니라 아버지였을지 모르는 일이라고. 우정은 한편으로 자위했다.
마을 어른 모두가 성장하는 우정에겐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집에만 있는 아버지가 따로 있어야 한다고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 없었다. 다른 집의 모자보다 해자와 우정의 유대감은 무엇보다 굳건했다.
무뎌. 당신, 진짜 무뎌. 결혼 전의 정연이라면 하지 않던 말이었다. 해자와 함께 살면서 정연은 무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냐고 타박하기도 했다. 어떻게 어머니에 관한 일이라면 제 편한 대로냐며 번번이 도리질을 해댔다.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 쪽은 정연이라고 우정은 구시렁거렸다.
“내일 일찍 일어나. 고추모종이나 좀 심어주고 가.”
“엄마는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아.”
“내가 뭘 또 어쨌다고 엉뚱한 소리 하기는.”
“일 못 하다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느냐고? 요양원 일도 모자라서 밭일까지 하시게요?”
우정은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에 관한 얘기는 그 무엇도 듣지 못한 채였다.
“멀쩡한 땅을 그럼 그냥 놀려? 촌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 때 되면 씨 뿌리고 때 되면 작물 거두고 그렇게 사는 거지. 별거 있는 줄 알아.”
우정은 농사일만 하라고 하자니 그것도 탐탁지 않았다. 두 손 놓고 마냥 놀면서 지내라고 하자니 일이 습관이 되어버린 해자가 또 병날 것만 같은 것이 진퇴양난이다. 근심걱정에 홀로 빠진 우정은 잠이 오지 않았다. 하리와 해자가 잠들고 난 다음에도 홀로 말똥말똥했다.
다음날이었다.
우정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해자는 곁에 없었다. 주방으로, 담장 옆 텃밭으로 그는 슬리퍼를 질질 끌었다. 해자는 산자락 밑 텃밭에 있었다. 고추모종을 심기 위해 밭에 비닐 씌우는 작업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우정은 슬리퍼가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득달같이 달려갔다.
해자가 삽을 들면 삽을 뺐고 호미를 들면 호미를 빼앗았다.
우정은 심술 난 놀부였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평생 해오던 일을 왜 막고 야단이야.”
“앞으로 이런 거 하지 마요. 고추도 심지 말고, 고구마도 심지 말고, 아무것도 심지 마요.”
“이 녀석이. 너 그만 하리 데리고 네 집으로 가라. 전엔 잘만 도와주더니 참 별스럽게, 고약스럽게 변했네. 내가 옥살이하는 죄수도 아니고 왜 꼼짝을 못하게 하는데?”
“싫어. 그냥 싫으니까 이제 이런 거 하지 말라구요.”
어이없고 기막힌 해자는 밭두둑에 주저앉았다. 놀부 심통을 부려놓는 우정의 꼴을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하룻밤 사이 뭘 잘못 먹었다냐? 해자의 넋두리가 밭고랑으로 흘러들었다.
전체 줄거리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우정은 멈춰버린 시계처럼 182일째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날은 죽은 아내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었다. 5년 전의 시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우정은 실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고향에서 엄마 해자와 함께 지내며 집배원 생활을 하던 스물셋 그때. 우정은 가슴 설레는 일상을 맞이했고 행복했다. 소식을 나르는 일뿐 아니라 담당지역민들의 온갖 심부름을 자처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필요하다는 것이 뭐든 빨간 자전거로 실어 날랐다. 집배원 배지를 단 우정은 그들에게 가족이었고 반가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아내를 잃은 우정은 제2의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 스스로 아픔을 극복하고 그 옛날의 행복한 집배원으로 거듭나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우정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총 12화에 걸쳐 펼쳐질 예정이다.
작가 소개 양수련
시나리오작가이자 추리문학가이며 은평구평생학습관에서 문학적 글쓰기 강좌를 운영 중에 있다. 제6회 대한민국영상대전과 제2회 추계시나리오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하얀심장을 가진 사람들」, 창작소설집 「G빌라」「지옥문을 여는 방법(공저)」외 대중예술서인 「시나리오 초보작법」 「시나리오 Oh! 시나리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