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편지지와 은밀히 씨름하며 보내던 그때. 애인이라도 생긴 거냐고. 숨겨놓은 아들이라도 있는 거냐고. 해자와 우정은 농담 아닌 농담을 주고받았다. 장난처럼 입씨름을 하면서 숨기고 있는 서로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염탐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바탕의 즐거운 소동으로 넘어갔던 일들. 아직도 생생한 그때의 기억들이 이제 와 우정의 가슴에 파편처럼 오소소 박혔다. 방안에 널브러진 편지들을 하나씩 주워 챙기는 해자의 등은 폭격에 폭삭 무너진 지붕 같았다. 지켜보고 있자니 힘이 들었다. 우정은 활화산 같은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손으로 머리를 헝클었고 돌아섰다. 신경질적으로 마당을 지나 대문 밖에 나와 섰다. 어디를 가야겠다거나 어디로 갈 생각이라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도망치듯 대문을 벗어난 우정은 마을 입구의 슈퍼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춰 섰다. 노여움인지 분노인지 서글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짜증으로 밀려들었다.
“이거 좀 드시고 기분 좀 가라앉히세요.”
뒤따라온 성철이 잽싸게 캔맥주 하나를 내밀었다.
격한 한숨을 토해놓는 우정은 슈퍼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슬픔의 파도가 철썩이는 해자의 등이 아른거려 먹먹한 채였다. 성철의 캔맥주를 받아든 우정은 성철을 세워둔 채로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총각이었던 우정의 아빠 노릇은 쉽지 않았다. 어설프고 엉뚱하고. 그래도 각자의 방에서 편지를 쓰던 그 시절은 애틋하고 행복에 겨운 날들이었다. 비밀스럽긴 해도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해자의 비밀편지 상대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에 우정은 시름시름 앓는 웃음이 절로 새나왔다. 지금껏 몰랐던 아버지의 존재를 알았다고 이제 와 새삼 달라질 것은 없었다. 우정 자신 또한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였고 자신의 아버지가 필요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 알싸하니 내장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해자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한 번도 말해주지 않은 걸까. 혹여 가정이 있는 남자라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어릴 때는 상처를 받을까봐 그렇다지만 우정이 성인이 되고 아버지가 된 다음에도 부친의 존재에 대해 해자는 왜 함구해야만 했던 것일까. 아버지에 대해 묻거나 찾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해자를 위해서였다. 그랬음에도 이제 와 알게 된 부친의 존재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우정은 허탈함에 조소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줄 수 있어요, 아저씨?”
성철은 우정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네가 받은 아빠의 편지가 가짜라는 걸 알았을 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어?”
우정은 진실로 알고 싶었다. 어린 성철이 가짜 아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그의 조부 부탁으로 이뤄진 일이긴 하나 진실을 알고는 내심 상처를 받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당연히 들었죠, 배신감. 하지만 그보단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컸어요. 진짜냐 가짜냐 하는 건 내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남들 다 있는 아빠가 내게만 없다는 건 외롭고 슬픈 일이잖아요. 가짜아빠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아저씨는 아마 모를 거예요.”
성철은 활짝 웃었다. 잘 여문 옥수수처럼 그의 대문니가 하얗게 드러났다. 순간, 우정은 가슴이 뭉클했다. 한때는 아들이었던 성철. 지금도 아들이나 다름없는 그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어서 해보세요.”
말을 꺼내놓고도 말문이 열리지 않는 우정을 성철이 재촉했다. 우정이 뜸을 들인 그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까닭에 아버지 노릇이란 게 뭔지 알지 못했다. 받아본 적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흉내 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신할 수 없는 누군가를 대신한다는 일은 뿌듯함을 안겼다. 아버지의 역할이 뭔지도 모르면서 편지로 만나는 성철은 진짜 아들 같았다.
“만약에 지금껏 없던 아버지가 어느 날 불쑥 네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 것 같아?”
마흔 넘은 남자가 아버지의 존재에 혼란스러워하다니. 그야말로 웃기는 얘기였다. 성철은 웃지 않았다. 진지했다.
“글쎄요. 어떤 아버지냐에 따라 다르겠죠? 돌아가셨다고 믿었던 아버지라면 믿기지 않을 테죠…… 버젓이 살아있었음에도 나를 모른 척 외면한 아버지라면 저주스러워할지도 모르죠…… 모르고 살았던 아버지가 나타나 원망도 하고 미워도 하겠지만 복잡한 감정들이 지나가고 나면 그래도 아버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지도 또 모르는 일이죠.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아, 아저씨도 아버지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알게 된 건가요?”
우정의 시선과 맞닥뜨린 성철은 피식 웃었다. 없던 아버지 문제에서만큼은 성철이 어른처럼 느껴졌다.
“믿지 않겠지만 난 내가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람인 줄 알았다.”
“에이, 설마요. 초등학생도 다 아는 일인데…….”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거기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거야. 너처럼 남들 다 있는 아빠가 왜 나한테만 없는 거지? 누구한테 물어볼 생각조차 안했다면 믿어지겠어?”
“한 번도요?”
“응. 단 한 번도…….”
우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지금껏 물음 한 번 던져놓지 않고서는 해자의 편지에 화를 내는 자신이 우정은 터무니없었다. 반칙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해자는 어쩌면 아들이 한 번만이라도 아버지에 대해 물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들이 궁금해 하지 않는 얘기를 굳이 앞서 꺼내놓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쩐지 편지가 이상하다 했어요.”
'왜?”
“다른 아빠들은 공부해야 된다고 잔소리한다는데…… 내 아빠는 재밌게 놀았냐, 다친 데는 없냐, 궁금한 거는 없냐 뭐 그런 말뿐이었죠. 공부하란 말을 어디에도 없었어요. 아빠는 내가 공부하는 게 싫은가? 그러다 공부를 안 해도 되는구나, 싶었죠. 하지만 열심히 공부했어요. 왜냐면, 언젠가 아빠가 집에 오면 자랑할 게 있어야 했으니까요.”
우정은 전혀 몰랐던 일들이었다. 두서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오갔다. 그러는 사이 해는 산머리에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 시각이 되도록 우정을 찾아 나선 사람은 없었다. 해자도. 하리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함께 상경하자는 성철을 먼저 보내고 우정은 혹시나 싶어 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자가 어쩌고 있는지 동태를 살핀 다음에야 집에 들어가도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리의 휴대폰은 연결되지 않았고 해자의 동정은 확인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우정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슈퍼에서 집까지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 한 이십여 분을 소요해 간신히 돌아온 우정이었다. 대문 안에 서니 하리와 해자의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아빠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내가 있잖아요.”
“아무리 내 아들이지만 예뻐하려야 할 수가 없다. 나이만 먹었지 마음 쓰는 게 우리 하리만도 못해. 영 형편없다.”
“아빠가 변했다는 거 할머니도 아시잖아요. 그래도 할머니 생각하는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으려던 우정은 해자의 낡은 슬리퍼에 눈이 갔다. 바닥이 닳고 닳아서 발바닥이 땅과 맞닿게 생겼어도 겉은 멀쩡하다며 버리지 못하던 해자. 여전한 그녀가 낡은 슬리퍼에 옹골차게도 들어앉아 있었다. 젠장. 우정의 울화통은 그 순간에 다시 터져왔다. 목청껏 엄마를 불러댔다.해자는 주방에 있었다. 하리의 시중을 받으면서 아들과 손녀에게 들려 보낼 반찬을 꾸리고 있었다. 우정이 좋아하는 나박김치와 열무김치는 물론이거니와 멸치볶음과 우엉볶음 등 언제 이런 걸 다준비해뒀나 싶게 상당한 양이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어. 내가 너무 무심했어.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안 챙겨주고.”
우정이 주방으로 들어서자 해자가 미안한 듯 말했다.
“이러고 싶으세요,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했다. 마음과 달리 우정은 공격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하리의 뜨악한 표정과 맞닥뜨리고 나서야 우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게 아닌데……. 봇물처럼 엉뚱하게 터져버린 감정은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았다.
핵심을 비켜가는 우정의 어깃장에도 해자는 묵묵했다. 편지에 관해서나 우정의 아버지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해자는 우정의 내일 출근과 하리의 등교를 걱정했다. 우정은 끝내 그게 아니지 않느냐고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지금 이 판국에 이런 걸 챙기고 싶어? 내게 아무 말이나 해봐. 해명을 한 번 해보라고요?”
“내가 왜? 내가 뭘 어쨌다고? 사과할 사람은 따로 있고만…….”
해자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위선이었다. 당장에라도 해자가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정은 알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엄마가 먼저 내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녜요? 멀쩡하게 있는 아버지를 어떻게 지금껏 말 한마디 안 하실 수 있었냐고요? 왜, 대체 왜 그러셨어요?”
반찬을 챙기던 해자의 손이 힘없이 늘어졌다. 땅이 꺼져 들어가는 그녀의 숨으로 인해 주방의 공기가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가라앉았다.
“나도 말해 주려고 했어. 말할 기회를 어쩌다 보니 놓친 것뿐이야.”
“기회를 놓쳐요? 아들이 마흔 넘도록 기회가 없었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설마?”
“네가 안 믿어도 할 수 없는 일이야.”
해자와 우정의 입씨름은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낀 하리는 안절부절못했다. 어떻게든 그들을 진정시켜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들의 신경전은 팽팽했다. 보다 못한 하리는 주방의자에 주저앉았다. 참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리고야 말았다. 새우 등 터지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냐고. 언제까지 감정만 앞세워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작정이냐고. 그동안 꼭꼭 눌러두었던 하리의 응어리진 속내가 용암처럼 분출했다. 해자와 우정을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리의 맺힌 응석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우정의 죄송하다는 말은 그때에 나왔다.
“뭐가 죄송한데?”
해자의 목소리는 한풀 꺾였다. 그럼에도 가시가 박혀 있어서 우정은 고분고분 대답하지 못하고 툴툴거렸다.
“지금껏 말하지 않고 아들인 저한테까지 숨겨두고 있었을 때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던 거겠죠.”
정적이 주방으로 흘러들었다. 엉엉거리던 하리마저 조용해졌다. 짧고도 길기만 한 침묵의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나서였다. 주방을 나서는 해자는 우정을 안방으로 불렀다. 장성하다 못해 늙어가는 아들을 앞에 두고도 해자의 말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우정이 홀딱 뒤집어놓았던 편지들은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해줘야지, 해줘야지 하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네가 물어주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며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지. 그랬어도 말해줬어야 했어. 네가 본 편지봉투에 있던 그 사람, 김효천. 네가 짐작하는 바대로 네 아버지셔. 네가 집배원이 되어 나타났을 때 정말이지 가슴이 철렁했다. 꼭 네 아버지가 내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으니까.”
해자는 긴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 들었다. 그녀 홀로 간직해온 이야기였고 언젠가는 아니 이미 오래전에 아들에게 들려줬어야 마땅했던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말해주지 말자거나 끝까지 감출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된 녀석인지 아버지에 대해 일절 묻지 않았다. 친구들 때문에라도 자신의 아버지는 누구냐고 물었어야 했다. 우정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해자의 얼굴에 그늘이 드는 것만 봐도 딴소리를 해댔다. 굳이 말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잊고 살았다. 어릴 때에도 해주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제 와 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우정이 집배원이 되어 나타났을 때, 반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해자의 시끄러운 속내가 들끓었다. 피는 못 속이는 것인가. 혹시라도 제 아버지 김효천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많은 직업 중에 하필이면 왜 집배원이란 말인가. 진즉에 말해 주었더라면 다른 길을 선택했을까. 집배원이 된 아들을 가까이 두고 해자의 가슴은 수시로 벌렁거렸다. 아버지를 꼭 빼다 박았다.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넌 잊고 살았을지 몰라도 난 아니다. 네가 집배원이 되어 이 집에 들어선 그날부터 네 아버지가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네 아버지를 꼭 닮았어, 넌. 훤칠한 이마하며, 정직한 눈매하며 그 입술까지…….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냐면…….”
우정은 확인하는 일도 묻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묵묵함이 그 어떤 질문보다 더 많은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었으므로. 무엇보다 해자의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어서 생소해야 마땅했다.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알았다. 집배원이 되기 전, 우정이 읽었던 책을 통해서 김효천의 이야기를 접한 바 있다는 사실을.
통신분야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체신학교는 체신공무원훈련원의 발족과 더불어 16년 만에 폐지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1963년의 졸업생을 끝으로 체신학교는
완전 폐교되었다. 우정의 아버지 김효천은 체신학교의 마지막 졸업생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집배원은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지금이야 발에 채고 손에 잡히는 것들이 죄 통신수단이지만 그때는 아니었거든. 드물게 만나는 귀한 통신이었고 네 아버지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집배원이었어…… 자신의 일 말고 다른 건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서른이 넘도록 결혼도 못 하고 있었겠지…… 병원에서였다, 네 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침상 곁에 앉아 환자에게 편지를 읽어주고 있더라.”
해자가 자신을 낳기 전까지 큰 병원의 간호사였다는 것쯤은 우정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병실의 장기입원 환자에게 전하는 편지를 효천은 매번 병실까지 찾아가 직접 전했다. 수신자가 여의치 않을 때는 편지를 대신 읽어주고 가기도 했다. 환자의 침상 곁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주는 효천은 듬직했다. 환자와 소통하는 집배원은 편지를 배달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였다.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였고 인생의 상담사였고 봄소식을 안고 돌아온 제비였다. 집배원 김효천이 오는 시각이면, 다리 성한 환자는 물론 휠체어를 탄 환자들까지 정문까지 나와 그를 반겼다. 편지가 있거나 없거나 그가 읽어주는 누군가의 편지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동화였고 때로는 소설과도 같았다.
집배원 김효천을 기다린 사람은 환자들만이 아니었다. 간호사였던 해자 역시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병원의 일상으로 들어서는 그가 기다려졌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폭포처럼 쏟아진 김효천이란 남자는 해자의 온 마음을 차지해 버렸다. 감당할 수 없게 커져 버린 사랑 앞에서 해자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편지의 읽어주고 돌아나가는 그를 홍당무가 된 얼굴로 붙잡아 세웠다.
그날부터였다. 효천과 해자의 사랑은 감출 것도 없이 아름다운 것이 되어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서로의 것이 되었으며 그들의 피는 뜨거웠다. 병원에서 병실에서 그들의 사랑은 애드벌룬처럼 부풀어갔다. 병원 내에서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효천의 죽음은 믿기지 않았고 해자의 사랑은 봄날의 햇살만큼이나 짧고 강렬했다.
달달하고 싱그럽기만 하던 그들의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다가오던 어느 해였다. 이른 장마에 폭우가 유난히도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강가에 물이 불어 건너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사명감과 직업의식이 투철했던 집배원 김효천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가 배달할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 고객이 우선이었다. 눈발이 거세어도 폭우가 쏟아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날은 집배원 김효천의 마지막 근무가 되었다. 폭우로 불어난 강을 온전히 건너지 못했다. 효천은 그렇게 급류를 타고 사라졌다.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 그의 시신은 장마가 물러가고 난 다음에야 강어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단풍드는 가을이 오면 양가부모의 허락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때에 결혼식을 올리고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보자던 효천이었다.
우정이 냇가에 빠져 옷을 적시고 돌아오는 날이면 해자는 벼락같이 화를 냈다. 행여, 우정과 효천의 되풀이되는 운명이 해자 자신 앞에 놓이게 되는 건 아닌가. 두려워서였다.
전체 줄거리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우정은 멈춰버린 시계처럼 182일째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날은 죽은 아내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었다. 5년 전의 시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우정은 실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고향에서 엄마 해자와 함께 지내며 집배원 생활을 하던 스물셋 그때. 우정은 가슴 설레는 일상을 맞이했고 행복했다. 소식을 나르는 일뿐 아니라 담당지역민들의 온갖 심부름을 자처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필요하다는 것이 뭐든 빨간 자전거로 실어 날랐다. 집배원 배지를 단 우정은 그들에게 가족이었고 반가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아내를 잃은 우정은 제2의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 스스로 아픔을 극복하고 그 옛날의 행복한 집배원으로 거듭나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우정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총 12화에 걸쳐 펼쳐질 예정이다.
작가 소개 양수련
시나리오작가이자 추리문학가이며 은평구평생학습관에서 문학적 글쓰기 강좌를 운영 중에 있다. 제6회 대한민국영상대전과 제2회 추계시나리오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하얀심장을 가진 사람들」, 창작소설집 「G빌라」「지옥문을 여는 방법(공저)」외 대중예술서인 「시나리오 초보작법」 「시나리오 Oh! 시나리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