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 벌인 한바탕의 소란 뒤에 마주한 아침은 가시방석이었다. 심사가 뒤틀린 우정은 건건이 성질을 부려댔다. 해자가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어깃장부터 놓았다. 우정의 가시 돋친 눈초리가 날아와 박히자면 해자는 “안 한다, 안 해”하며 팩 돌아앉아 등을 보였다. 하리는 이게 또 무슨 전쟁 같은 일인가 싶어 멀뚱멀뚱 그들의 눈치만 살핀다.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린 우정. 그는 진지 드세요, 하는 딸의 소리에도 꼼짝하지 않는다. 할머니 걱정시키는 일은 하지 말자더니. 하리는 홀로 쓴 입맛을 다셨다. 해자가 신경 쓰이고 걱정할까, 우정을 다시 불러보지만 대꾸는 역시나 없다.
“놔둬라, 놔둬. 딸내미 보는 앞에서 지 어미한테 성질 부리는 것이 꼭 애다, 애야.”
해자는 관두라고 손짓했다. 그들이 상을 물리도록 우정은 방에 틀어박혀 나와 보지 않았다. 아들의 심통이나 어떻든 해자는 밭에 나갈 채비를 했다. 우정의 새벽녘 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농사일이란 게 미루다 보면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해자는 자외선 차단용 모자를 쓰고는 호미를 챙겨들고 대문을 나섰다.
“할머니, 아빠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대신 내가 할게.”
하리가 따라 나서며 말했다.
“그러자. 골난 놈은 골이나 내고 있으라고 놔두고 우리끼리 하면 되지, 뭐. 하리 너는 저어기 주전자에 물이나 가득 담아 와라.”
“네, 할머니.”
흥을 타고 하리의 목소리가 옥타브 올라가는데, 해자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쉿! 행여 우정이 쫓아 나오기라도 할까 봐 노파심이 일어서였다. 우정은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해자는 고추 모종과 농기구들을 주섬주섬 손수레에 챙겨 담았다.
산자락의 텃밭에서는 해자의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정이 들락거리는 걸 볼 수도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잠잠한 것이 도로 잠이라도 자는 모양이다. 해자의 심란한 마음은 고추 모종을 심는 땅에 묻혔다. 따라 붙은 하리는 해자가 두둑에 심어놓은 모종에 물을 주었다. 반복되는 일에 따분하고 힘들기도 할 텐데, 하리는 군소리 없이 도왔다.
“네 아빠가 이제는 변했나 보다. 전엔 내가 이러고 밭에서 일하면 옆에서 우스갯소리도 곧잘 하고, 일도 잘만 도와주더니만…….”
“할머니 힘드실까 봐 그런 거지.”
“골난 놈 보는 게 힘들지. 아무렴, 손바닥만 한 밭일하는 게 더 힘들까? 자식 겉 낳았지 속까지 낳는 거 아니라더니만 그 말이 딱 맞다. 옛말 그른 거 하나 없어.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아야지.”
해자의 상한 속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이 뭣 때문에 저리 구는지,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하소연이라도 해야 속이 뻥 뚫릴 것 같다. 해자 자신의 말이면 옳다 그르다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순한 양 같다가도 어깃장을 놓을라치면 고집불통도 그런 고집불통이 없다. 착하기만 할 때는 너무 착해서 모자란 녀석은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우정이 있어서 해자는 지금껏 행복했다. 그 좋은 시절도 다 간 모양이다. 뒤늦게 자식 때문에 속 썩는 일만은 없어야 할 텐데. 해자는 은근 걱정이 든다. 관 속에 들어가고 나면 하라고 해도 못 할 일이다. 아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은 해자. 혼자 하는 호미질에 툴툴거려본다.
“할머니 미안해요.”
“하리, 네가 왜?”
“아빠, 겉으론 멀쩡한 것 같지만 아직도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누구는 안 힘들어서 이러고 사는 줄 아나? 오랜만에 와서는 꼴통 짓이라니……. 하리 네가 많이 힘들겠구나.”
“말해 뭐해요. 할머니는 오늘 하루만 봐주면 되지만 난 매일 봐야 하는 걸요.”
해자는 안쓰러운 듯 쳐다보았다.
그동안의 우정에 관해 하리는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해자의 기분에 편승하여 고자질할 것이거나 아니거나 하나씩 죄 주워섬겼다. 양말은 앉아있는 자리가 벗어놓는 자리다. 신발은 뒷발질로 내 벗어던진다. 현관 앞에 있는 신발들은 죄 뒤집어져 있다. 같은 옷을 일주일 내내 입고 다니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한 달 내내 딸과 눈도 안 마주쳤다. 휴일에도 집배순로를 유령처럼 다녔다. 몇 개월간을 웃지도 않고 산송장인 줄 알았다.
“그래도 아빠가 날 찾아 학교까지 왔을 땐 조금, 아주 조금 감동이었어…….”
“다 큰 딸 학교에는 왜 찾아갔는데? 가출이라고 했던 거야?”
“설마, 내가? 아니거든요.”
하리는 아니라고 양손까지 휘저었다.
“다 안다. 언젠가 네 아빠도 일주일 동안이나 가출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가 아마 네 아빠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을 거다. 학교 친구들과 대천 해수욕장으로 무전여행을 떠나면서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간 거야. 나한테 흠씬 욕을 얻어먹은 다음이라 이 녀석이 그것 좀 혼났다고 끝내 가출했구나 싶었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통이 끓어오른다니까.”
해자는 손으로는 고추 모를 심고 입으로는 지난 일들을 주워 섬겼다.
“그래도 난 쪽지는 남겼는데, 친구 집에 있겠다고. 그런데도 내가 무슨 무단가출이라도 한 것처럼 난리였어.”
하리는 뽀루퉁해져서 말했다.
“하리 너도 결국 가출했던 거네?”
“아니지. 아빠는 무단가출, 나는 그냥 외출.”
해자는 코웃음이 절로 났다. 그럼에도 한편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정은 아직 젊다. 어떻게든 새장가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정의 재혼에 하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도 걱정이 되기는 했다. 서로의 마음이 허심탄회하게 오가는 지금이 말 꺼내기 좋은 기회 같았다.
“하리야, 네 아빠 재혼시킬까? 너도 다 컸고 시집가고 나면 네 아빠 혼자 외로울 텐데…….”
“할머니 먼저 시집가고 나면 그다음에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농담하는 거 아니다.”
“할머니, 나도 농담 아닌데…….”
“여자는 혼자 살아도 남자는 혼자 살면 못써. 하리 너도 그동안 지켜봐서 알 거다. 평생 네가 아빠 곁에 있어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도 큰일이지, 아무렴.”
혼자 사는 남자의 생활이 어떨지는 하리도 상상이 갔다. 나아졌다고 하지만 언제 또 슬픔에 젖어 살지 모를 일이다. 기숙사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무슨 이산가족이 되어 영영 만나지 못할 일인 양 받아들이고 있는 우정이 아니던가. 우정의 재혼을 꺼낼 수밖에 없는 건 해자로서는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그래도 하리의 좋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갑갑증이 밀려들었다. 고추 모종의 뿌리로 가야 할 물이 비닐 위에서 미끄러져 고랑으로 스며들었다.
“아이고야, 눈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야? 물이 엉뚱한 데로 다 새잖아.”
'…….”
하리는 시무룩했다.
밭일도 신이 나야 했다. 며느리 정연이 있을 때는 힘들어도 재미가 있었다. 손발이 잘 맞는 고부간이라 마을 사람들의 시샘을 사기도 했다. 혼자 하자니 해자 역시 밭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우정의 실없는 농담도 함께하던 그때는 마냥 행복한 웃음으로 번졌는데. 지금은 농사든 뭐든 하지 말라 야단하는 아들의 속내가 짐작되는 해자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우정은 밭에는 나와 보지도 않았다. 고약한 놈.
“아빠랑 엄마는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어?”
“글쎄다. 어느 날인가,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하더니만 어딘가로 데려가더라. 내 생일이라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 감쪽같이 속았다, 내가……. 가서 보니까 웬 얌전하게 생긴 아가씨가 거기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더라. 연애는 하는지, 장가갈 마음은 있는지 통 종잡을 수 없더니만 뒤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었지 뭐냐.”
“엄마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
“곱게 생겼더라. 이런 시골에서 썩기는 아까울 만큼.
그때는 얼마 못 살고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나 했지. 결국, 이렇게 도망가고 말았지만. 생때같은 내 자식 홀아비 만들어놓고……. 무심한 것.”
해자는 옴팡지게 해대던 호미질을 멈췄다. 엉덩이에 붙어있는 이동용 쿠션을 땅에 대고 앉아 널브러졌다. 딸도 아니고 아들이 엄마 팔자를 닮나 싶어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해자는 텃밭에 일렬로 들어선 고추 모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텃밭 옆 좁은 도로로 가끔씩 차가 지나갔다. 해자의 시끄러운 속내에도 마을은 고즈넉하고 또 평화로웠다.
해자의 방에 틀어박힌 우정의 시간은 무료하도록 잘 흐르지 않았다. 새벽부터 해자의 밭일을 뒤엎어놓은 지라 밭으로 나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괜스레 귀만 간지러웠다.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우정은 일어나 앉았다. 예전 같으면 가족 중 누군가를 찾아 나섰겠지만 그럴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밭일이든 부엌일이든 거들고 나섰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의 고향집 방문에도 우정은 즐겁지 않았다. 막막하고 답답했다. 이리저리 한숨만 내쉬던 그의 시야로 들어온 물건 하나. 그것은 해자의 앉은뱅이책상 밑에 있었다. 귀가 닳고 삭은 듯한 낡은 종이 상자. 뭐지? 갸우뚱한 우정은 책상 밑에 있던 종이상자를 잡아당겼다.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는 것이 책상 밑에 넣어둔 지 꽤나 됐음을 짐작케 했다. 먼지가 쌓이도록 책상 밑에 숨겨둘 물건이 무엇이란 말인가. 버렸어도 벌써 내다 버렸어야 할 물건은 아닌가. 그리고 상자의 뚜껑을 활짝 젖혔을 때, 우정은 조금은 의아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편지봉투가 빼곡하게 그 안에 들어있었다.
주마등처럼 그 짧은 순간에도 우정의 뇌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그 옛날, 해자가 밤마다 써대던 것들의 정체가 그 안에 숨어 있었다. 그것은 해자의 비밀상자였다. 빛바랜 편지가, 그것도 부치지 못한 편지가 상자 한가득이었다. 당시는 찾아도 찾아지지 않았던 것들이다. 부쳐주겠다고 우정이 손을 내밀면 해자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며 묵살해버렸다. 어림잡아 수백 통은 되었다. 우정은 그중의 하나를 뽑아들었다. 편지 겉봉에는 주소도 없이 낯선 이름 하나만 덩그렇게 적혀 있었다.
김.효.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상자 안의 편지는 모두 그 사람의 것이다. 종이의 색상마저 누렇게 변해버린 여태 부치지 못한 오래전의 편지. 주인에게 전해지지도 못한 편지였다.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써서 대체 어쩌자는 거였을까. 무슨 할 말이 해자는 이토록 많았던 것일까.
해자의 비밀이란 것을 알면서도 우정의 호기심은 멈출 줄을 몰랐다. 편지지를 펼치는 그의 손이 긴장했다. 나쁜 짓을 하는 아이처럼. 그의 심장은 두 근 반 세 근 반으로 콩닥콩닥 뛰었다.
- 당신, 내일이 어떤 날인지 알아요?
편지의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문장의 줄을 따라 우정의 눈동자가 잽싸게 따라갔다.
- 우리 아들이 장가를 가요. 우리 아들 우정이가 드디어 결혼을 한다고요.
우리 아들이라고? 콩닥거리던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 저 혼자 우리 아들을 키운 게 아니라는 건 당신도 잘 아실 테죠? 아비 없는 자식 키우겠다고 작정했을 때부터 내겐 당신과 우리 아들 우정이세상의 전부였어요. 당신 없는 세월을 그래도 내가 이렇게나마 버틸수 있었던 건 글로나마 당신에게 투정도 부리고 마음도 털어놓을 수 있어서였을 거예요. 당신 없는 하루하루를 내 아들과 당신에게 쓰는 이 편지가 내게 있었으니까.
한 줄. 두 줄. 석 줄……. 내용을 읽어갈수록 모든 것이 확연했다.
우정 자신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 불구덩이에 들어앉은 것처럼 심장은 뜨거웠다. 간밤에 해자에게 넌지시 물었던, 그러나 답해 주지 않았던 아버지의 존재가 그 안에 있었다.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날 밤까지도 우정은 오해했다. 그저 외로워서, 그저 누군가와 하지 못한 말들을 해자 홀로 푸는 것이라 짐작했다. 그 상대가 자신의 아버지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김효천이란 남자에게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그날에도 털어놓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편지 한 통을 떨리는 가슴으로 읽어치운 우정은 또 다른 편지를 펼쳐 들었다. 전부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상자 안에 있는 몇 백통에 이르는 편지의 수신인은 모두 김효천. 허탈한 웃음이 맥없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가도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우정은 혼란스러웠다.
부치지도 못할 고작 이따위 편지나 쓰면서 무슨 황홀한 시간이라도 보내는 양 굴었단 말인가. 가엽고 측은한 마음은 뒷전에 있었다. 생각할수록 분노는 조금씩 끓어올랐다.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 아버지에 대해 그동안 왜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걸까? 네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라고 왜 말해주지 못했을까.
아버지의 함자조차 비밀에 부쳐야 했던 해자.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면서 진정으로 위로를 받았을까.
우정의 복잡한 속내가 의문과 노여움으로 점철되었다. 가정 있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자신을 낳았다 하더라도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지 않고 평생 감춰둘 수 있단 말인가. 김효천이란 사람의 정보를 얻기 위해 해자의 편지를 손에 잡히는 대로 우정은 펼쳐 들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쓴 것도 있었다. 미혼의 몸으로 아기를 낳아야 하는 여자의 두려움과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우정이 태어나기도 전 그때에 이미 김효천이란 남자는 해자와 결별했다. 온갖 불순한 상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뒤늦게
보지 말걸, 하는 후회가 일기도 했다.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는 아버지라면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나을지 모른다. 손만 뻗으면 알 수 있을 것 같은 아버지의 존재 앞에서 그는 참혹하게도 무너져 내렸다.
해자의 음성은 마당에서 들려왔다.
“우정아, 손님 왔다. 어서 나와 봐.”
방안엔 해자의 비밀상자에서 쏟아져 나온 편지들로 난장판이었다. 그동안 해자가 숨겨온 일. 당연히 알아야 될 일이지만 우정의 당혹감은 어쩔 수 없었다. 꽁꽁 감춰두었던 편지들을 그가 봤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해자가 받게 될 충격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범죄의 흔적을 지우듯 우정은 허둥지둥 상자 안에 편지를 쓸어 담았다.
“나가요, 나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정은 나갈 수 없었다. 주워담아야 할 편지는 방안에 여전했다. 그렇게나 많은 분량이었다는 사실에 우정은 또 난처했다. 해자가 홀로 달랜 시간들이 그만큼이나 많았다는 방증이었다.
“손님이 왔다는데 뭐 하느라고 나와 보지도 않는 거야.”
방문은 어이없게 열렸다. 우정이 남은 편지들을 양손으로 막 쓸어 담던 찰나였다. 해자는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 열린 방문 앞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경악과 절망이 엇갈렸다. 어쩌면 화가 나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어, 엄마. 그, 그게 아니고 나, 나는…….”
당황한 우정은 말을 더듬었다.
“손님 왔다. 나가 봐.”
다른 말은 없었다. 우정은 주워담지 못한 방바닥의 편지들과 해자를 번갈아 보았다. 엉거주춤 밖으로 나왔고 해자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편지를 상자에 주워담았다.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우정은 소리치고 싶었다. 할 수 없었다. 아픔을 머금은 해자의 등에 우정은 말할 수 없게 혼란스러웠다.
“조부모 산소에 들렀다 가는 중인데, 이렇게 또 아빠를 뵙네요. 우리 인연이 한 깊이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죠, 아빠?”
하리와 함께 마당에 들어선 손님은 다름 아닌 회계사 성철이었다. 그를 반기지도 못하는 우정은 방안의 해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와 성철 사이에 계면쩍게도 서 있었다.
전체 줄거리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우정은 멈춰버린 시계처럼 182일째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날은 죽은 아내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었다. 5년 전의 시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우정은 실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고향에서 엄마 해자와 함께 지내며 집배원 생활을 하던 스물셋 그때. 우정은 가슴 설레는 일상을 맞이했고 행복했다. 소식을 나르는 일뿐 아니라 담당지역민들의 온갖 심부름을 자처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필요하다는 것이 뭐든 빨간 자전거로 실어 날랐다. 집배원 배지를 단 우정은 그들에게 가족이었고 반가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아내를 잃은 우정은 제2의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 스스로 아픔을 극복하고 그 옛날의 행복한 집배원으로 거듭나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우정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총 12화에 걸쳐 펼쳐질 예정이다.
작가 소개 양수련
시나리오작가이자 추리문학가이며 은평구평생학습관에서 문학적 글쓰기 강좌를 운영 중에 있다. 제6회 대한민국영상대전과 제2회 추계시나리오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하얀심장을 가진 사람들」, 창작소설집 「G빌라」「지옥문을 여는 방법(공저)」외 대중예술서인 「시나리오 초보작법」 「시나리오 Oh! 시나리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