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배원 신참 하나가 우거지상으로 들어왔다. 신참의 고충을 대충은 짐작하는 우정은 홀로 웃음을 지었다. 당사자가 봤다면 왜 웃느냐고 서운함을 드러냈을지 몰랐다. 우정은 웃음기를 거두고 그에게 다가갔다.
“기분이 엉망인 것 같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신참 집배원은 땅이 꺼져라 큰 한숨부터 내쉬었다.
“택배 물건을 포장은 그대로 두고 누가 알맹이만 빼갔지 뭡니까. 어째 이상하다 싶었는데 빈 상자만 갖다 줬으니 욕은 진창으로 먹고……. 배상해주는 건 별문제 아닌데 이 도둑을 어떻게 잡죠?”
일 년이면 두세 번은 우체국에 택배 물량이 넘쳐났다. 택배 직원만으로는 부족해 일반 집배원들까지 택배 물건을 전달하는 일에 동원됐다. 문제는 부피가 있는 택배 물량을 이륜차에 싣고 다닐 수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 보니 구역별로 택배 물건을 다 전달할 때까지 보관해두는 곳이 있었다. 신참은 열심히 택배 물건을 각 가정으로 날랐고 사건은 그 와중에 터졌다. 쌓아놓은 택배 물건에 누군가 손을 댄 것이다. 그것도 용의주도하게 상자의 내용물만 챙기고 빈 상자를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설마, 누가 가져갈까 싶었던 신참은 꼼짝없이 당한 일에 울분을 토했다.
'걱정할 것 없어.”
우정은 신참의 어깨를 토닥토닥 했다. 집배구역이 따로 없이 지내는 우정은 동료들을 대신해 견배를 나가거나 물량 많은 동료의 일을 돕고 있었다.
“선배님 일이 아니라고 태평하게도 말씀하십니다.”
“자네가 그렇게 울분을 토한다고 사라진 물건이 제 발로 돌아올 것도 아니잖아. 일단 경찰에 신고하고 택배 물건 집하장소에 CCTV가 있으니 그거 돌려보면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제발이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택배 업체에서 일할 때는 밤낮은 물론 쉬는 날도 따로 없어서 힘들었는데……. 우체국 직원이 되면 좀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이런 문제가 터질 줄이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내일부터 중간 집하장에 사람을 세워둔다니까, 그런일은 없겠지. 물론 오늘 도둑맞은 물건도 금방 되찾게 될 거야.”
우정은 난감해하는 신참을 위로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어찌 순탄하기만 할 것인가. 그도 만만찮게 겪어온 당혹스런 순간의 일들이 있음에야. 그 시절을 홀로 곱씹는 우정은 쓴웃음을 슬며시 삼켰다.
“그나저나 선배님 발령은 언제 난답니까? 제가 여기 오기도 전부터였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전근 발령이 하도 안 나서 동료들 눈치가 보이는 중이야. 책임이 없으니 더 죽겠어. 도와달라는 사람은 많고 말이야.”
“선배님도 참.”
우정이 눈을 부릅뜨고 진짜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휴대폰 벨소리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해자였다. 우정은 걱정할 것 없다며 신참을 손 인사로 보냈다. 그러고는 해자의 전화를 받았다. 수시원서를 낸 하리의 결과가 궁금해서 했나 싶었다.
손녀보다는 아들의 궁금한 해자였다. 도대체 언제 발령이 나는 거냐고. 해자는 우정이 돌아올 날을 아이처럼 기다렸다.
고향의 우체국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했을 때, 해자는 시큰둥했다. 발령은 나지 않고 해는 바뀌었다. 해자의 요양병원 근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낮과 밤이 바뀌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환자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는 일은 칠순이 넘은 해자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젊은 사람들도 삼일을 못 버티고 관두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3개월을 버틴 것은 순전히 당장 관두라던 우정 때문이었다. 해자의 자존심에 한번 시작한 일을 쉽게 관둘 수는 없었다. 해자의 기다림은 그때부터였다. 요양병원 일을 관두면서. 우정은 언제 오느냐는 물음에 곧 간다고 해자를 달랬다. 점점 애가 되어가는 그녀다. 하리의 문자는 해자를 달래느라 통화가 길어지던 그때에 와 있었다.
“누구랑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해? 나 합격이야, 아빠.”
기쁜 소식은 몰아서 터졌다. 하리의 합격소식과 함께 우정의 전근 발령을 알리는 전화도 함께 이어졌다. 드디어 간다. 그의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격스러움에 눈물은 절로 맺혔다.
해가 바뀜과 동시에 우정은 고향 우체국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이야기는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났다. 정애네 막내아들 얘기부터 재철네 작은 딸내미 얘기, 필리핀 아가씨를 며느리로 들인 전 교장댁 얘기, 황 영감의 치매와 박 노인의 장례식 등이 쉴 새 없이 마을을 수놓았다. 내년엔 또 누가 세상을 등지게 될 것인지, 올 농사는 작년보다 나을 것인지, 농민의 마음을 달래줄 정책은 없는지, 마을 주민들의 수다와 근심 속에서도 새봄은 경이롭게도 다가왔다. 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정열적인 여름이 눈앞에 머물렀으며 찾아온 가을은 들녘을 황금으로 물들였다.
집배원 김우정은 고향 우체국의 사계절을 함께 했다. 그는 노모가 해주는 밥상에 앉아 하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거나 집배를 다녀온 옆 마을 사람들에 관한 안부를 늘어놓았다. 저녁을 물린 시간이면 객지에서 학교에 다니는 하리에게 편지를 썼다. 이메일도 있고 전화도 있지만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만 한 것이 없었다.
내 딸 하리야, 오랜만이지?
그간 어떻게 잘 지내고 있었는지 궁금하구나. 통화를 자주 함에도 편지지를 앞에 두면 오랜만이란 인사가 왜 절로 나오는지 모르겠다. 네게 편지를 쓰자면 밤하늘의 별빛과 마주한 것처럼 오롯한 까닭일 거야. 강의 들으랴, 작품 준비하랴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테지.
기숙사 생활은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흥미진진한지.
학교생활은 또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함께 강의를 듣는 친구들 중에 눈에 차는 녀석은 없는지. 요즘엔 또 무슨 놀라운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아빠는 하리의 모든 일이 궁금하고 알고 싶은 생각뿐이란다. 시시콜콜 캐묻자면 새침하게 돌변할까 싶어 쉽게 묻지도 못하는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지난번 통화할 때는 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는 것이 못내 마음 쓰였는데, 그 일에 대해선 아직 아무 말이 없네. 별일 아닐거라고 생각은 한다만 그래도 신경이 자꾸 곤두서는 건 어쩔 수가 없네. 힘들 땐 언제든 네 뒤에, 네 옆에 이 아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렴. 너는 나의 또 다른 미래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길…….
참, 우리의 해자 씨는 아빠한테 푹 빠져서 살고 있단다. 전에는 손녀딸만 찾더니만 이제는 나만 찾는다. 할아버지를 본 듯이 내게 효천 씨라 종종 부르면서 말이지. 서운해하지는 마라. 해자 씨에겐 이 아빠가 전부고 아빠한테는 또 우리 하리가 전부니까.
보고 싶다, 하리야. 사랑한다, 하리야.
11월 12일 아빠 쓰다
우정은 밤새 쓴 편지를 출근길에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평소라면 득달같이 쫓아 나와 배웅했을 해자가 오늘따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정은 출근을 미루고 주방으로 방으로 화장실로 해자를 찾아다녔다.
“어머니 아들, 출근합니다. 어디 계세요?”
해자는 골방에 홀로 있었다. 새로 사온 벽지를 방바닥에 펼쳐놓고 꼼지락거리면서. 우정을 본체만체했다. 하리가 방학에 온다는 말에 골방의 벽지를 새로 바를 생각을 한 건 우정이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방이라 곰팡이 자국이 그대로였다.
며칠이라도 깨끗한 방에서 쉬게 하고 싶어서 며칠 전에 우정이 사다 놓은 벽지였다.
“아들한테만 빠져 사시는 줄 알았더니만 손녀도 기억하고 있었네?”
“바쁘니까 말 시키지 말고 출근이나 어여 해.”
“하리는 김우정 딸이지 해자 씨 딸이 아냐. 벽지를 발라도 내가 바를 거니까 그대로 놔둬…… 알았어요.”
“그럼 저녁에 같이해요.”
뒤돌아보는 해자는 미덥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우정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었고 염려 말라는 의미였다.
요즘 들어 해자는 조금씩 시간을 거슬렀다. 밥을 먹다가도 우정을 효천으로 착각했다. 청춘의 그 시절로 돌아가 수줍은 말들을 우정 앞에 불쑥불쑥 던져놓았다. 그러다가도 이내 말짱한 상태로 돌아오는 해자였다. 장난인지, 진짜인지 헷갈리는 우정은 순간순간 암담했다. 그러나 해자가 효천을 부를 때마다 우정은 효천을 자처했다. 정신상태가 오락가락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해자의 증세가 더 심해질까 걱정스러워서였다. 해자의 효천이 되거나 옆집의 한기사가 되거나 전혀 낯선 또 다른 남자가 되거나. 우정은 해자 앞에서 변신의 변신을 거듭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해자가 잠시 잠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챌 수 없게.
“효천 씨가 올 거야.”
해자는 지금 우정과는 다른 시간에 있었다.
“좋겠네, 우리 해자 씨. 효천 씨랑 결혼할 건가?”
“이놈의 자식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여태 출근도 안 하고?”
해자의 눈꼬리가 성질 사납게 올라갔다. 말없이 등 돌리고 있을때보다 호통치는 해자가 우정을 훨씬 안심시켰다. 정신줄 놓지 말고 그렇게만 있으라고, 해자 씨. 차마 겉으로 말하지 못하는 그의 속내다. 해자의 행동반경이 그다지 넓지 않아 다행이었다.
집과 밭 그리고 마을회관이 그녀가 다니는 곳의 전부. 우정이 출근하고 나면 밭에 있는 농작물을 들여다보거나 풀을 매는 일로 시간을 보낼 터였다.
“해자 씨, 나 다녀올게. 마을을 벗어나면 안 돼. 그러면 저녁이 돼도 나를 볼 수 없을 거야.”
해자의 주먹이 우정을 향해 날아오다 멈췄다. 헛소리 말고 출근이나 하라며 눈을 흘겼다. 우정은 그녀의 빈축을 사고서야 우체국 이륜차에 시동을 건다. 자신이 퇴근해 올 때까지 별일 없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출근길에 만나는 사람에게 일일이 해자를 부탁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농작물 수확기인 가을은 집집마다 일손이 딸렸다. 우정의 집배 또한 더뎌졌다. 들로 밭으로 나가 있는 농부들을 위해 강아지 먹이를 챙겨주거나 어르신들의 심부름은 우정이 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멈춰버린 농기계를 점검하고 고장의 원인을 찾아주는 일은 만능 집배원 우정의 일인 것이다. 그가 고향 우체국으로 돌아오고 가장 반긴 이들은 그가 집배를 다니던 마을의 어르신들이었다. 당신 자식이 돌아온 것처럼 반겼다. 끼니때 나타나면 예전처럼 당신들 먹는 밥상에 숟가락젓가락을 하나 더 올려놔 주었다. 찬은 없지만 들어와 먹고 가라고 가족처럼 대해주는 사람들. 우정은 그 안에서 또 해자를 떠올린다.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아무 일 없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짠하고 걱정스런 순간은 불쑥불쑥 찾아들었다. 그때마다 전화를 걸어보는 우정이다. 일하다말고 왜 자꾸 딴 짓이냐는 해자의 지청구가 또 고맙기만 했다.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도감이 들었다.
고향 우체국은 전 국민 편지쓰기 행사로 우편이 상당량 늘어있었다. 행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분량이었던 것이 요즘엔 매일 행랑 가득하였다. 우정은 오늘도 손글씨가 적힌 마지막 편지뭉치를 확인하며 행랑에 담았다.
“디지털시대라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데는 편지가 좀 더 운치 있고 낭만적이죠. 오늘도 집배 물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려.”
집배를 나서는 우정과 마주한 우체국장이 한마디 했다.
가족에게 편지쓰기를 제안한 사람은 우정이었다.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에 밀려버린 편지의 정성과 감성을 되살려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빠르고 쉽기만 한 소통 앞에서 생각의 자리는 없었다. 그만큼 관계조차 가벼워지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백지를 앞에 두고 뭔가를 적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생각을 깊게 했다. 습관처럼 보내던 문자도 백지 앞에서는 한번 더 마음을 쓰게 만들었다. 상대방을 생각하게 하였다.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했고 문장의 표현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우정이 직접 느껴본 것들이었다. 하리와 곧잘 통화를 하기도 하지만 주고받는 편지는 특별했다. 손편지가 그들 부녀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우정은 확신했다. 편지를 쓸 때나 읽을 때나 서로에 대한 관심과 마음이 듬뿍 담겼다.
그 행복감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으면 싶었다. 가족에게 편지쓰기 운동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우정의 지나는 말을 우체국장은 허투루 듣지 않았다. 나날이 줄어드는 우편량에 따른 고민이 있어서기도 했을 터였다. 우정의 편지쓰기 제안은 가족에서 친구, 연인, 은사, 동료, 상사에게로 확대됐다. 초중고 학교는 물론 군부대, 기업까지 참여하면서 손편지 쓰기 열풍이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전 국민 편지쓰기에 대한 반응은 의외였다. 가슴 한켠에 숨겨두었던 저마다의 마음이 봇물 터지듯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날마다밀려드는 우편물에 우체국장은 흥분했다.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편지들을 전해주고 오길 바랍니다.”
“정성이 담긴 이런 편지들이라면 얼마든지요. 몸이야 좀 고단하지만 마음만큼은 흐뭇합니다.”
우정은 빙그레했다. 손편지를 실어 나르는 지금이야말로 진짜 집배원이 된 기분이었다. 막내따님한테서 편지 왔습니다. 올편지가 없는데……. 왕년에 선생님이셨군요. 제자가 보내온 편지입니다. 세상에나,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나 봅니다. 눈이 침침하니 한번 읽어주면 고맙겠군. 가슴이 뜨거워지는 건 편지를 받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전해주는 우정의 마음 또한 뜨거웠다.
하리에게 편지가 올 때가 지났는데. 전화로 확인해도 될 일이었지만 우정은 하리의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편지를 전하면서. 뜻밖의 편지에 사람들은 몹시 반가워했다. 기다림 끝에 받은 하리의 편지는 애틋했다. 아내 정연과 연애할 때 주고받던 편지만큼이나. 하리가 기숙사로 들어가고 우정이 해자의 곁으로 오는 동안 정연의 이메일은 없었다. 그래도 서운하지 않았다. 정연의 편지가 아니었으면 혼자만의 슬픔에 빠져 딸 하리를 잃었을 지도 몰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정연의 편지가 새삼 고마운 우정이었다.
“아저씨…… 우리 아빠는 김재식, 엄마는 마리자 그리고 나는 김민재. 우리집에 온 편지 있어요?”
대여섯 살의 남자아이였다. 자전거를 뒤따르던 이십년 전의 아이들은 사라졌지만 우정의 이륜차를 발견하고 아는 체하는 아이들이 가끔씩 있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조금은 이국적인 인상의 아이 앞에서 우정은 편지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깨를 조금 으쓱거렸을 뿐이었다. 아이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기다리는 편지는 언젠가 꼭 오게 돼있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은 멋진 일이야. 아저씨도 지금 기다리는 중이거든.”
실망의 빛을 거두지 못한 아이를 향해서였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구부린 우정이 말했다.
“뭘 기다리는데요?”
“음…… 누군가의 마음을 기다리는 중이지. 실은 아저씨의 딸 편지를 기다리는 중이야.”
“기다리면 와요?”
“무작정 기다리면 안 오지. 그 전에 누군가에게 네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야만 기다리는 일도 할 수 있지.”
아이의 동그란 눈망울을 보며 우정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기 전에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보라는 무언의 표현이기도 했다.
아빠한테 손편지를 받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고. 친구들이 구식이라 흉보고 놀리기도 하지만 다 부러워서 하는 소리라는 걸 알아. 그리고 아빠, 내 일에 관심 가져주는 건 고맙지만 너무 많은 관심은 사양하고 싶어. 매일 내 생각만 하다가 우체국 일도 미루고 나 보러 온다고 할까봐 걱정이야. 이럴 땐 일만 알던 예전의 아빠가 그립기도 해. 학교생활은 아직 흥미진진해. 친구들과 함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지. 이번 방학에는 잠시라도 집에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할머니도 보고 싶고, 아빠도 보고 싶지만 마음뿐이야. 내년 봄에 있을 애니메이션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을 친구들과 함께 만들고 있거든.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겠다고 했던 내 말을 아빠도 기억하지? 조금씩 그 길에 접어들고 있는 거야. 내 꿈, 응원해줄 거지?
내게는 특별한 아빠, 김우정 집배원님 사랑해. 앞으로도 쭈~욱.
11월 22일 아빠 딸 하리 드림
못 온다는 편지를 목 빠져라 기다린 거야? 하리의 편지를 읽자마자 우정은 씩씩대며 휴대폰을 들었다.
“ 하루라도 다녀가야지, 무슨 소리야? 기다리는 해자씨 생각은 안 해? 너 온다고 골방에 벽지까지 새로
발랐는데……. 내가 이깟 편지 기다린 줄 알아?”
우정은 따발총처럼 말을 쏘아댔다. 글로는 잘도 하던 보고 싶다,
말로는 왜 이렇게 힘든 건지. 알 수 없다.
전체 줄거리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우정은 멈춰버린 시계처럼 182일째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날은 죽은 아내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었다. 5년 전의 시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우정은 실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고향에서 엄마 해자와 함께 지내며 집배원 생활을 하던 스물셋 그때. 우정은 가슴 설레는 일상을 맞이했고 행복했다. 소식을 나르는 일뿐 아니라 담당지역민들의 온갖 심부름을 자처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필요하다는 것이 뭐든 빨간 자전거로 실어 날랐다. 집배원 배지를 단 우정은 그들에게 가족이었고 반가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아내를 잃은 우정은 제2의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 스스로 아픔을 극복하고 그 옛날의 행복한 집배원으로 거듭나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우정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총 12화에 걸쳐 펼쳐질 예정이다.
작가 소개 양수련
시나리오작가이자 추리문학가이며 은평구평생학습관에서 문학적 글쓰기 강좌를 운영 중에 있다. 제6회 대한민국영상대전과 제2회 추계시나리오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하얀심장을 가진 사람들」, 창작소설집 「G빌라」「지옥문을 여는 방법(공저)」외 대중예술서인 「시나리오 초보작법」 「시나리오 Oh! 시나리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