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와 처음 접한 우리한과
1970년대, 삼시 세끼 쌀밥을 챙겨먹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집안에서 쌀을 이용해 떡을 빚거나 한과를 만드는 것은 지체나 신분이 높은 양반집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문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처갓집으로 널리 알려진 담양 문화 유씨 집안이 박순애 명인의 시댁이다. “시집오자마자한과를 배웠어요. 명절이나 제사가 돌아오면 떡을 하듯 으레한과를 직접 만들었어요. 한과가 집에서 만드는 음식이라는 것을 시집와서 처음 눈으로 보고 알게 된 거죠. 그 당시엔 쌀도 귀했고 한과도 참으로 귀한 음식이었어요.” 박 명인의 시댁이 자리한 담양군 창평 일대는 조선 초기 양녕대군이 낙향해 지낼 무렵 그와 동행했던 궁녀들이 쌀엿 제조 비법을 지역에 전수해 만들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창평 쌀엿과 조청은 남도의 풍부한 곡물과 어우러져 한과 생산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 박 명인의 이야기다.
결혼과 동시에 ‘문화 유씨 6대 종부’라는 종갓집 며느리 타이틀을 달게 된 박 명인.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한과 제조 비법을 시댁어른들로부터 물려받고 나자 그녀는 우리 고유의 전통음식을 담양을 넘어 전국 곳곳에 알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유독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집안에 행사가 있거나 명절 때면 한과를 만들어 이웃들에게 나눠줬는데 ‘참 맛있게 잘 만들었다’ 고 다들 한마디씩 칭찬을 하더군요. 더 많은 사람들과 한과를 나누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죠.”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겠다는 그녀의 열망은 전통음식에 대한 배움으로 이어졌고, 1990년대초 박 명인은 광주무형문화재 17호 최영자 여사에게 폐백과 이바지 음식 관련 전통 제조 비법을 전수받기에 이른다.
대한민국 최초 엿강정 식품명인
입소문은 실로 대단했다. 박 명인의 한과를 맛본 사람들은 다시금 그녀를 찾았고, 그들에 의해 한과를 맛보려는 사람들 또한 늘어갔다. 살던 집의 방 한 칸을 내어 한과 제조를 시작한 박 명인은 늘어나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집 한편에 가건물을 지어 본격적인 한과 생산에 들어갔다. 1994년, 담양 최초의 한과업체 ‘명진식품’의 첫 출발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전국적으로 지역특산물을 애용하고 장려하기 위한 행사가 많았어요. 그 당시 우리 한과가 전라도 특산물전에 포함돼 서울은 물론 전국 곳곳에 소개가 많이 됐었죠. ‘담양에서 온 한과’ 라고 소개를 하다 보니 이를 접한 사람들 사이에서 ‘담양한과’ 라불려지게 된 겁니다. 명진식품은 몰라도 담양한과는 제대로유명세를 탔죠.” 이 흐름을 타 상호명을 ‘담양한과 명진식품’으로 바꾼 박 명인은 입소문의 힘을 빌려 전국 유명백화점 입점에 성공했다. 이후 창평 일대에 한과를 생산하는 업체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해 ‘한과마을’이 조성되고 그 수는 현재 10여 곳에 이른다.
담양한과를 이끈 첫 주자, 선봉대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2000년대 들어 박 명인은 ‘대한민국 식품명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담양한과를 국내외로 더 널리 알리고 명맥을 잇기 위해서는 ‘명인’이란 타이틀이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개인의 욕심보다 잊혀져 가는 전통음식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컸죠.” 박 명인은 옛 문헌에 소개된 전통방식의 콩강정을 재현하고, 건고추식혜를 기반으로 직접 개발해낸 조청을 전면에 내세웠다. “어린 시절 감기에 걸리면 시골이라 약을 구하기 어렵다 보니 친정어머니는 항상 건고추가 들어간 식혜를 만들어줬어요. 엿기름과 밥을 큰 항아리에 넣고 아랫목에 앉힐 때 빨간 건고추를 듬뿍 집어 넣었죠. 식혜에서 칼칼한 단맛이 배어났어요. 웬만한 감기는 그걸 마시고 나면 뚝 떨어졌죠.” 조청은 한과의 맛을 좌우한다. 건고추식혜에서 착안해 만든 조청은 단맛을 감하고 매콤함을 더했을 뿐 아니라 빨간 고추가 갖는 여러 가지 효능 즉, 풍부한 비타민C와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등 맛은 물론 건강까지 잡았다. 그 결과 2008년 박 명인은 엿강정 분야 국내 최초 대한민국 식품명인이 되었다.
전통음식은 ‘정성’이 전부다
대한민국 식품명인으로서 책임감은 막중했다. “어느 날 한과를 제조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과가 어떤 재료로, 어떠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지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있겠다 싶었죠. 그것이 전통음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몸소 체득한 것은 절대 잊혀지지 않죠.” 박 명인이 전통한과만들기 체험장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투철한 사명감에 따른 것이었다. “유치원생부터 초·중·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주로 어린 친구들이 많이 찾아요. 특히 호남쪽 초등학교 중에 이곳에 안 와본 학교가 없을 정도죠.” 한 해 3만 명 이상이 체험장을 다녀간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체험장의 규모도 점차 늘려 현재는 150여 명이 동시에 수용 가능할 정도로 살림을 넓혔다.
“체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재료에 가장 놀랍니다. ‘재료가 정말 간단하다’고 입을 모아 말하죠. 이를 테면 엿강정을 만들 때 튀긴 쌀, 식용유, 조청, 약간의 설탕만 들어가요. 그렇게 한과가 만들어지죠. 시중에 판매되는 과자 봉지 뒷면을 보세요. 첨가물이 스무 가지는 족히 넘을 거예요. 전통음식이 그래서 중요하고 잊혀져선 안 되는 겁니다.” 한과의 색을 내는 것은 100% 천연에서 온다. 분홍색은 백련초, 노란색은 치자나 유자, 검은색은 검은 쌀 등 친환경 국내산 농산물이 한과의 맛을 더한다. “모든 음식이 다 그러할 테지만 특히 전통음식은 ‘정성’이 전부예요. 이 음식이 하루이틀 생산된 게 아니잖습니까? 한과를 배우기 시작한 40년 전, 시할머니는 늘 강조하셨어요. ‘제조과정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한과가 될 수 없다’ 고 말이죠.”
나를 성장시킨 우체국쇼핑
박 명인이 정성으로 엮은 세월 속에는 우체국쇼핑과의 특별한 인연도 자리한다. 1999년 담양한과가 우체국쇼핑에 첫 선을 보인 이래 20여 년 가까이 한과 부문 판매 1등을 고수하고 있다. “우체국쇼핑 입점하고 2~3년 뒤쯤, 그러니까 2000년대 초 소위 말해 대박이 났었어요. 그날 주문이 들어오면 송장을 써서 다음날 물건을 보내야 하는데, 주문이 한꺼번에 몰리니까 그 물량 맞춘다고 24시간 한과를 만들었어요. 매일매일 물량을 예상할 수
가없으니 고역이었지.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그때 기억이 가장생생해요.” 불철주야 한과생산에 매진해야 했던 시기, 박 명인의 고된 노동의 피로를 씻겨준 건 한과를 맛본 우체국쇼핑 고객들의 후기였다. “한번은 제주도에서 감귤이 왔지 뭐예요. 그 옛날 부모님이 만들어준 한과 맛과 똑같다며 감사인사로 귤을 보낸 겁니다. 어떤 고객은 자신이 만든 빵을 직접 보내주기도 하고요. 이보다 더한 칭찬이 어디 있겠어요?”
쌀이 귀했던 옛날과 달리 이제 한과의 경쟁력은 재료가 아닌 제품개발에 있다. 유과, 강정, 약과 등의 전통한과뿐 아니라 최신 트렌드에 맞춘 영양바, 곡물바, 꿀건빵, 소소한바, 화이트스틱바, 초코스틱바 등의 신제품 개발에 박 명인이 앞장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한 한과업계 최초 낱개포장을 시도하고, 자동포장기기를 도입해 공기접촉을 전면 차단한 밀폐 포장을 실현한 것도 그녀가 세운 기록이다. 십 수년 전 이웃과 나누고자 시작된 한과제조, 이제는 국내를 넘어 아시아, 미주, 중동까지 박 명인의 무대는 세계를 향한다.
박순애 명인 (주)담양한과 명진식품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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