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현관문을 나와 몇 발자국을 채 떼기도 전에 우정은 막막함이 느껴졌다. 하리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만으로 한껏 신경 써 차려입고 나섰음에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사람처럼 우뚝멈춰섰다.
하리를 만날 생각만으로 옷을 챙겨 입고 무작정 나선 길.
늘 가까이 있던 하리가 순간 아득히 먼 사람처럼 여겨졌다. 당혹스러웠다. 몸만 돌리면 하리를 볼 수 있다고 여겼던 마음이 낯설어졌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정은 방황했다.
한번 틀어지기 시작한 관계는 절친한 부녀였더라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애써 마음 쓰고 애써 노력했어야 된다는 사실. 하리가가출을하기 전에 어떻게든둘사이의 관계부터 회복해야 했다. 하리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럼에도 방관만 해왔다는 사실에 우정은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리를 만나러 간다는 달뜬 마음은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풀죽었다. 하리가 함께 지내겠다는 친구의 집은커녕 그 친구의 이름조차 막막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인간을 봤나. 우정은 자신을 한껏 비웃어주고는 모든 게 다 잘 될 것이라고 스스로 용기를 북돋았댜 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없는 하리.
우정은 하리의 휴대폰에 문자를 남겼다.
‘아빠가 학교로 갈게.'
우정은 오토바이를 타고 하리가 지나갔을 골목을 쫓아갔다.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하리가 좋아하던 치즈 케이크와 음료수를 샀다. 그러고 5분여를 달려 도착한 하리의 학교 건물은 노란색 일색이었다. 간간이 칠해진 빨강이 강렬하게 그의 눈에 부딪혀왔다.
수업 중인 학교는 조용해서 우정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초등학생 하리가 다니던 학교는 햇살이 반짝이던 곳이었다. 운동회 같은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학교를 드나들었다. 우정에게 하리가 있는 곳은 집처럼 친숙한 곳이었다. 가을 햇살이 반짝거리고 아이들의 함성이 꽃처럼 날리던 그날에 정연은 또 얼마나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펼쳐 놓았던가.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둘러앉아 마주한 김밥도시락 하나로 그들은 마냥 행복했다. 학부모 일일교사로 집배원의 하루에 관해 들려주자면 아빠에 대한 하리의 자랑스러움은 야생초처럼 피어났다.
하리가 있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던 우정인데. 하리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아빠였는데.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딸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들만 부찍 늘었다. 교문 앞에 한동안 머무르자니 수위가 멀찍이서 우정을 홀깃거렸다. 그러더니 우정이 학교 안으로 들어서자 달려와 그의 길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 딸이 아침을 못 먹고 등교해서 빵을 좀 사왔는데······."
"전화해서 학생더러 나오라고 하십시오."
하리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고 임무를 수행하는 수위는 엄격했다. 할 수 없었다. 우정은 2학년 3반 김하리 학생한테 들고 온 빵 봉투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정문 앞에서 아빠가 기다리고있다는말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수위는 교실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정은 그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다. 5분여의 시간이 지났을 터였다. 그럼에도 한 시간은 기다렸던 것처럼 길었고 우정은 초조했다. 하리는 나오지 않았다. 빈손의 수위가 다시 나타나 전해줬다는 말만 남겼다.
"수업은 언제 다 끝납니까?"
수위의 감시 아닌 감시가 신경 쓰이는 우정은 2학년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올 생각이었다.
"학년마다 다르고 끝났다고 해도 동아리 활동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언제 다 끝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용건을 마친 수위는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이 온전히 끝나자면 서너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우정은 우편물도 없이 도로와 주택가를 달리자니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있어도 시간은 더디 홀렀다. 꽤나 시간이 흘렀겠지 싶어 시계를 보면 고작 20여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금쪽같은 휴가를 이렇게 허비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뭔가는해야했다.
우정이 하리를 위해 뭔가를 준비하는 그 시각. 하리는 친구 나희와 함께 교실에 있었다. 수업은 이미 끝났고 동아리 활동이 없는 날이란 게 야속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치즈 케이크를 입에 넣은 나희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대로 아빠와 마주하고 나면 난감할것같아."
하리는 빵 먹는 나희를 뻔히 바라보았다.
"나랑 있겠다고 했을 때, 정말 믿기지 않았거든. 솔직히 우리 모범생 하리가 가출까지 할 줄은 몰랐다. 학교까지 찾아오셨는데 얼굴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냐? 언제까지 이렇게 교실에만 있을 수도 없고."
"뭐라고 말하지?"
하루라도 결근하면 무슨 큰일이 생기는 줄 아는 우정이 우체국을 뒤로하고 학교에 나타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관심한 아빠로 인해 횟김에 집을 나오긴 했지만 막상 우정이 학교로 찾아오자 하리는또 은근 겁이 났다.
"막상 가출해놓고 보니 아빠 보기가 겁나? 아니면 아빠한테 복수하고 싶은 거야?"
"복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너랑은 말도 안 했다며?
복수가 아니면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런 거지. 일어나."
"왜?"
나희는 하리의 가방을 막무가내로 챙겨 들고 앞장섰다. 가방 때문에 얼떨결에 나희를 쫓아 나온 하리는 교문 앞의 우정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헤어졌다가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가족처럼어색했다.
"무슨 짓이야?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했잖아."
하리는 성질을 부렸다.
"아빠를 만나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해. 저런 아빠라면 난 당장 뛰어간다. 로맨틱하신 분이네. 네 아빠."
나희는 하리의 가방을 손에 쥐어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아빠랑 얘기하고 그다음에 우리 집에 와도 늦지 않을것같다."
나희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우정을 향해 하리를 보란 듯이 돌려세웠댜 간간이 학교를 나서는 학생들이 우정을 보고는 환호했댜 우정의 플래카드에는 ‘하리야, 미안하고 또 사랑해!'란 내용이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다.
"하리야, 이제 그만 아빠한테 돌아와!"
하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정을 세워둔 채로 종종걸음으로 지나쳤다. 우정이 뒤따라왔다. 몇 발자국 앞서가던 하리가 책, 뒤돌아섰다.
"나 데리러 온 거라면 꿈 깨 지금은 아빠가 뭐라고 해도 안 들어갈거니까."
"나중엔 들어오겠다는 말이네. 그게 언제야?"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할머니가 전화하셨어. 많이 걱정하고 또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주말에 함께 갔으면 해."
우정이 우체국에 가지 않고 학교에 온 것이 할머니 해자 때문이란 생각이 든 하리는 괜스레 화가 났다. 해자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왠지 서운했다.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는 하리의 팔을 우정이붙잡았다.
"아빠가 우리 딸 마음 좀 풀어주려고 신경 써서 준비한 건데. 별로 효과가 없나 보네."
"창피해.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거 하지 마. 그리고 나도 그냥이대로놔줘."
"아빠가 원망스럽니? 그렇겠지. 좋아. 당장은 네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을게. 그렇지만 네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일 또 아빠는 여기에 있을 거야. 모레, 글피, 그글피도…… 하리 네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빠도 노력할게, 달라질게. 아니 벌써 달라졌어. 우체국 일이라면 나 몰라라 하지 못하는 아빠가 지금 이렇게 우리 하리 앞에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정의 손을 쌀쌀맞게 뿌리치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들을 지켜보던 나희가 우정에게 죄송합니다, 하고는 하리를 뒤따라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우정은 멀뚱멀뚱 서 있었다. 하리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자위했다. 휴가가 별다른 소득도 없이 날아가 버렸지만 괜찮았다.
뗄날 우정은 우체국 내에 있는 직원식당을 마다했다. 집배 도중에 입국해 점심을 먹고 나오는 시간을 비축해 하리가 좋아하는 치즈 빵과 녹차 소보로빵을 사서 학교로 갔다. 하리가 나오길 기다리며 우정은 빵과 김밥으로 학교 앞에 서서 끼니를 때웠다.
하리가 나오지 않으면 수위에게 맡기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날도 하리의 점심시간에 맞춰 우정은 학교로 갔다. 수위에게 빵을 맡기고 이번엔 메모도 함께 전했다. 마음이 바뀌면 그때 집에 들어와도 좋다고. 그러나 가급적, 장기간 머물러 친구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리를 만나지 못해도 익숙한 일상처럼 우정은 집배하는 일과 딸의 학교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그날은 특별한 일도 없이 괜히 피곤하고 지쳤다. 날은 후덥지근했고 이런 날에는 비라도 시원하게 쏟아져야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케케묵은 아내의 편지라도 와야 하지 않을까. 화창한 날의 소나기처럼 시원하던 정연의 편지가사라진지 꽤나되었다.
그게 전부겠지 싶으면서도 혹시 또 모를 일이다. 밤 시간이 긴 우정은 컴퓨터 앞에 앉아 편지함으로 가기 위한 로그인을 했다. 새로 들어온 수십 개의 읽지 않은 메일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전부가 대량의 스팸메일이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메일이었다.
"당신마저 내 속을 썩이는군. 당신의 편지에 나를 길들여놓고 이제 더는 보내지 않는 거야. 참으로 얄미운 당신이로군."
우정은 무심한 정연만 애꽂게 타박했다. 홀로 투덜대던 찰나에 놀라운 생각이 스쳤다. 상대가 깜깜무소식이라면 우정 자신이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정연이 만들어준 편지 안의 새로운 시간들처럼 하리에게도 그런 추억을 만들어주면 좋지 않을까. 하리가 숙녀가 되고 아가씨가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는 그때에 조금씩 꺼내보며 힘을 얻고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는 그 시간들을. 우정은 달에 착륙이라도 한사람처럼 흥분했댜 굳이 기다릴 필요가 뭐란 말인가. 하리에게 편지를 쓰자. 휴대폰은 꺼져 있었지만 켤 때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한 목요일 아침이었다.
우리 하리 잘 갔니? 오늘도 아빠는 새벽같이 출근한다. 오늘은 빵 대신
점심시간에 맞춰 피지를` 수위 아저씨한테 맡겨둘까 해.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건 막아도 피자를 전해달라는 부탁은 들어줄 거야.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나희는 물론이고 반 친구들과 같이 먹도록 해.
넉 줄이었다. 정연이 보낸 편지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았다. 그럼에도 휴대폰 자판으로 내용을 쓰자면 우정에게 그리 녹록한 일만은 아니었다. 엄지손가락은 개구리손톱이라 머리가 컸다. 잘못 눌러 지우고 다시 입력하기를 반복해야 했지만 우정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얻굴이었다. 우정의 휴대폰 편지는 금요일에도전해졌다.
피자는 어떻게 맛있게 잘 먹었나 모르겠다. 뭐니 뭐니 해도 피자는 따끈따끈할 때 먹어야 제맛인데…… 수위 아저씨가 네 간식을 들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다음에도 난 교문 근처에 있었다. 혹시 네가 나오지 않을까 지켜보다가 5교시를 알리는 수업 종소리가 들리자 아빠도 집배를 하러 갔단다.
하리의 답장은 없었다. 보기나 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우정은 젊은 애들이 사용하는 이모티콘이나 애니 스티커가 들어간 문자를 하리에게 남겼다.
토요일.
학교도 쉬겠네. 오늘은 뭐할 거야? 할머니와의 약속을 아빠는 못 지킬 것 같댜 우리가 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실 텐데… ... 하지만 걱정 마.걱정하지 않으시도록 할머니한테는 아빠가 전화해 놓을게. 우체국에 일이 있어서 다음 주에 가겠다고. 주말 잘 보내라.
일요일.
오늘은 대청소를 했어. 하리가 없으니 집안 꼴이 엉망이지 뭐야. 이불은 세탁소에 갖다 주고 밀린 빨래는 세탁기 돌려 베란다 건조대에 널고…… 방이며 거실이며 구석구석을 청소기로 청소했지. 청소를 끝내고 나니까 하루가 다 갔다. 완전 녹초야. 이런 일을 엄마와 하리가 매일같이 했디는게 믿기지 않아. 그저 놀랍다는 생각뿐이야.
월요일.
둥기우편물 집배를 하다가 고등학교 친구 녀석을 만났지 뭐야.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잘리고 난 뒤로 주부가 됐다더군. 그 짧은 시간에도 아들 자랑을 어찌나 해대던지 팔불출이 따로 없었어. 하지만 아빠도 그 마음을 충분히 아는 터라 꾹 참고 들어주었단다.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내 딸 하리. 보고 싶다…….
화요일.
배웅해주는사람이 없으니 오늘따라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해. 어제 만난 친구 녀석 자랑 때문인지도 모르지. 하리도 할머니도 볼 수 없으니 심하게 외롭고 쓸쓸하댜 답장이 없으니 더 그런 것 같다. 아빠 편지, 확인은하고있는거니?
읽었다면 답장을 보내달라는 내용을 넣으려던 참이었다. 할 말을 다쓰지도 못했는데 우정은 전송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답장을달라는 말을 다시 보낼까 하다가 관뒀다. 처음부터 답장을 바라고 쓴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우정은 하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스스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랬음에도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문자편지를 이틀씩이나 건너뛰었던 것은 아니었다. 낮에는 바빴고 집에 들어와서는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이틀씩이나 문자편지를 보내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퇴근하던 그날, 우정은 집 앞 가로둥 아래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무리 봐도 하리가 답문을 보냈다거나 전화를 걸었던 흔적은 없었다. 그리고 얕은 한숨을 내쉬는 그의 시선이 하늘을 향하던 그 순간이었다.
불빛! 빈집의 창문으로 선명한 불빛이 비쳤다. 하리가 집에 와 있다……. 달뜨고 설렌 우정은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올랐고 현관문을 벌킥 열어젖혔다. 심호흡을 하는 코끝으로 밥 냄새가 와 닿았댜 얼마 만에 맡아보는 집 냄새, 가족 냄새인지 알 수 없었댜 가슴 끝에서 안도감과 평온함이 느껴졌다.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해?"
하리가 현관 앞에 서 있는 우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격스러워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하리가 집에 있으니까 이제야 진짜 내 집에 온 것 같은 실감이 나."
"쳇……."
"진짜로 돌아온 거 맞지? 이제 가출은 안 하는 거지?"
"휴대폰 편지를 매일 쓴다고 약속하면, 한번 생각해 볼게."
하리는 우정의 시선을 외면하고 말했다.
"뭐든 우리 딸이 원하는 거라면 어디, 우리 딸 한번만 안아보자."
우정은 양팔을 활짝 벌리고 하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껴안으려 하자 하리는 인상을 쓰며 몸을 뒤로 뺐다. 우정은 싫다고 도망치는 하리를 극구 안아봐야겠다며 달려들었다. 그러다 의자에 발이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기분은 좋았고 아파도 웃음이 나왔다.
"고소하다. 이틀 동안 나를 잊어버린 벌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널 잊어버리다니?"
"문자편지를 이틀 동안이나 남기지 않았잖아."
뿌루퉁해진하리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매일 보낸다고 해놓고선 갑자기 뚝끊어버리는 사람이 어딨어?"
우정은 자신이 걱정돼서 돌아온 것이란 생각에 하리를 포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하루아침에 뭔가를 뚝 끊는 일은 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한집에 살아도 꼬박꼬박 보내야 돼."
우정의 팔을 풀고 눈에 힘을 준 하리가 말했다.
"이번 주말에 할머니한데 가자."
"기숙사 들어가겠다는 말을 취소하는 건 아냐."
하리는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정은 그렇더라도 전처럼 정색한 얼굴은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함께 생각해보자고 다독였다.
그동안 어둠에 묻혀 있던 집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하리 돌아온 집은 불빛이 사라진 다음에도 환한 그대로였다. 감기는 눈에도 우정의 마음은 기쁘고 설렌다.
전체 줄거리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우정은 멈춰버린 시계처럼 182일째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날은 죽은 아내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었다. 5년 전의 시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우정은 실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고향에서 엄마 해자와 함께 지내며 집배원 생활을 하던 스물셋 그때. 우정은 가슴 설레는 일상을 맞이했고 행복했다. 소식을 나르는 일뿐 아니라 담당지역민들의 온갖 심부름을 자처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필요하다는 것이 뭐든 빨간 자전거로 실어 날랐다. 집배원 배지를 단 우정은 그들에게 가족이었고 반가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아내를 잃은 우정은 제2의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 스스로 아픔을 극복하고 그 옛날의 행복한 집배원으로 거듭나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우정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총 12화에 걸쳐 펼쳐질 예정이다.
작가 소개 양수련
시나리오작가이자 추리문학가이며 은평구평생학습관에서 문학적 글쓰기 강좌를 운영 중에 있다. 제6회 대한민국영상대전과 제2회 추계시나리오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하얀심장을 가진 사람들」, 창작소설집 「G빌라」「지옥문을 여는 방법(공저)」외 대중예술서인 「시나리오 초보작법」 「시나리오 Oh! 시나리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