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의 지적 호기심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민속학 박사로서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일
하고 있는 유승훈(38세) 씨는 새로운 논문의 주제를 버스 안에서 만났다. 원래 그의 전공은 생산민속 가운데 ‘소금생산’이다. 박사학위도 <제염업과 소금 민속>이란 주제로 논문을 써서 받았다. 지난 2002년, 소금과 관련한 글을 찾기 위해서 국회도서관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들려온 라디온 뉴스는 호기심의 촉수를 들깨웠다.
“주부도박단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조선시대에도 주부도박단이 있었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종 자료를 찾다가 조선시대 대표적 도박이 투전임을 알았습니다. 투전에 대한 공부를 하다보니 재미를 느껴서 <투전고>라는 논문을 쓰게 되었고 결국 도박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음지에 묻혀있던 도박과 노름은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는 그의 남다른 시선 속에 새롭게 포착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지나치게 왕과 귀족층, 곧 지배층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고, 민중들의 생활사에 대해서는 연구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 유승훈 씨의 생각이다.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민속학의 놀이 분야 연구도 협력하고 단결하는 대동성, 건강한 민중성 등을 강조하는 양지의 놀이에 치우쳐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놀이에는 도박과 같은 음지의 놀이도 있는데 양지의 놀이만 강조되고 있었다.‘ 새는 양날개로 난다’는말처럼 부족한 쪽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도박에 대해 연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굳히게 되었다고 한다. 2002년부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에 들어가 2005년에 알찬 결실을 맺었다. 우리 역사 속 도박과 노름, 꾼들의 면면을 소개한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를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선행연구가 부족한 분야이다 보니 산고는 남달랐다.
“일본에서는 이미 1930년대에 <도박사>라는 책이 나왔고, 중국도 도박의 역사에 대한 책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도박이 매우 중요한 학문 주제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서는 심리학 쪽에서 도박에 대한 심리치료 측면에서 연구가 있지만 역사와 문화의 관점에서 도박을 연구한 선행연구는 거의 없는 편입니다. 화투에 대한 글들이 조금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집필하는 기간 내내 가시밭길을 혼자서 걷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벽의 하얀 눈밭을 걷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그 길을 걸으니 내 발자국이 선명히 남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들었지요. 책이 완성된 이후 부족한 점도 많고 학술서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도박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을 처음으로 출판했다는 보람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 역사 속 도박과 노름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의 이면을 만날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은 젊은 날 기생과 쌍륙판을 벌여 3천전을 뿌리며 놀았고, 연암 박지원은 편지를 쓰다 문장이 막히면 혼자서 왼손과 오른손을 양편으로 삼아 쌍륙을 쳤다. 고매한 선비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상류층의 놀이였던 쌍륙은 조선시대 평민층에도 널리 퍼져갔다. 선비로부터 사대부가 여인네들, 평민에 이르기까지 인기가 높았던 쌍륙의 매력은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학자‘다산 정약용’이란‘상’은 사실 역사가들이 그의 문집과 각종 사료를 보면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근거를 찾아내서 그것으로부터 창안한 것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정약용 선생을 직접 만난다면, 실제의 인물 정약용은 조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위대한 학자인 정약용보다는 인간적인 면을 풍부히 갖춘‘사람 정약용’에 주목해 보았습니다. 정약용 역시 쌍륙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거지요. 쌍륙의 매력은 역시 주사위 놀이와 행마 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쌍륙은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우연성’과 말을 움직이는 ‘생각과 지략’을 결합해서 즐기는 놀이입니다. 한편, 쌍륙은 둘이서 하는 놀이면서 남녀가 함께 할 수 있는 놀이입니다. 조선시대에 여인네들의 방에서 혹은 기방에서할수있는놀이는많지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쌍륙이 크게 유행했다고 봅니다.”
도박의 동의어는 노름이다. 노름의 어원은 놀음, 곧 놀이에서 출발했다. 하여 놀이의 순기능을 도박이
가지고있다고볼수있다. 놀이는일상의스트레스를해소하고, 활력을 되찾는 기능을 하고 있다. 다만 도
박은대부분실내놀이가많다. 실내놀이는운동처럼힘을들이지않고스트레스를해소할수있고,‘ 에듀테인먼트’처럼 어린이들의 두뇌 개발을 위한 게임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금전 추구가 아닌 사교와 교육의 목적이라면 도박은 좋은 놀이가될수있다.
유승훈 씨는 책을 쓰면서‘도박에 관한 책’을 최초로 쓴 미치광이 천재이자 도박사, 이탈리아 수학자인
‘카르다노’가 부러웠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도박놀이를 좋아하지 않은 그로서는 카르다노처럼 도박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있었다면 더 재미있는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며 웃음 짓는다.
“앞으로도 민중 생활사에 관련된 책을 계속 쓰고 싶습니다. 예를 하나 든다면 여성들의 출산 풍속에 대해서 쓰고 싶습니다. 조선시대의 혼인과 출산, 성(性) 관념, 삼신 신앙, 아기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 등을 다루어 보고 싶습니다. 아이보다는 부부가 중요하고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어른들에게 귀감이 될수 있을 겁니다.”
이 특별한 학자가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호기심에서 퍼 올릴 다음 책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