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한 장의 그림, 한줄의 시, 한 소절의 음악이 주는 순정한 감동은 삶의 고비에서 힘이 되기도 하고 일상의 여백을 아름답게 채워준다. 경상북도청과 영주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조기석(66세) 선생은 지난 1998년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온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의 삶 굽이굽이에서 흔들림 없는 정신적 나침반이 되었으며 커다란 마음의 위안이 되었던 화가투(花歌鬪)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우리 어릴 적에는 형제자매나 친구들이 모이기만 하면 하던 놀이가 화가투였어요. 부녀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고요. 그만큼 재미있었죠. 철없던 시절에는 재미있는 놀이로만 여겨졌던 것이 자라면서 좋은 선생이 되고 또 마음자락에 풍류를 일으키는 예술이 되었지요. 우리 조상들이 참 슬기로웠어요. 아이들 인성교육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또한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는 문학으로도 이만큼 안성맞춤인 것은 없어요.”
시조잇기놀이나 시조연상놀이로 표현되는 화가투놀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모여 즐기던 전통 민속놀이의 하나로서 구전과 암기에 의존해 시조를 초장부터 이어가며 즐기는 것이다. 차츰 사라져서 명맥조차 찾기 힘들었던 화가투를 되살리기 위해 조 선생은 관련 학과의 대학 교수들을 찾아 다니며 고증을 받는 등 꼼꼼한 작업을 거쳤고 2001년 드디어 복원에 성공했다.
“선인들이 남긴 시조 가운데 교육적으로 가치가 있는 100수를 선정해서 시조카드와 시조풀이 책자로 구성하여 옛날의 놀이 방식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화가투놀이는 아주 쉬워요. 손자와 할아버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죠. 시조의 종장이 적힌 명함 크기의 시조카드 100장을 놀이하는 사람 앞에 흩어 놓은 뒤 놀이를 이끄는 사람이 100수가 수록된 시조집의 초장부터 읽어 내려가면 다른 사람은 바닥에 흩어져 있는 시조의 종장 카드를 찾는 방법입니다. 게임이 끝나면 가장 많이 카드를 가진 사람이 우승하는 것이죠. 제가 어릴 때는 어른들이 우승자에게 학용품이나 과자 같은 것을 상품으로 주셨어요.”
조 선생은 시조카드에 연상작용을 돕는 아기자기한 그림을 넣었으며 상세한 시조풀이집을 부록으로 만들어 작품 해설과 작가 소개, 낱말 풀이, 역사적 사실 등을 간결하고도 재미있게 정리하여 학습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화가투놀이를 복원하고 나니 참 보람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교육대학에 몸담고 계신 교수님들께서 구입하시기도 하고 고견을 들려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좋은 일 했다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도 많았고요. 일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구입하셔서 교육 현장에서 활용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오기도 합니다.”
조기석 선생의 고향은 문향의 고장으로 알려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이다. 청록파 시인의 한사람으로서 맑고 높은 선비정신을 간직했던 조지훈 선생도 주실마을이 고향인데, 조기석 선생은 그와 인척관계이다. 기묘사화때 조광조의 죽음과 더불어 가문이 멸문을 당할 때 전국으로 흩어졌던 그의 후손들 가운데 한 집단이 첩첩산중 영양 땅에 정착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송곳은 주머니에 넣어도 뚫고 나오게 마련이듯이 일가의 빼어난 학문적 재량은 깊은 산중에서도 빛을 발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문학가와 역사학자들을 배출해내고 있다. 문향 가득한 고장에서 자란 소년 시절, 화가투놀이를 하면서 암기하게 된 시조는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시조가 술술 나와요. 까마귀하면 정몽주 선생의 모친께서 지으신‘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성낸 가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창파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라는 시조를 읊조리게 되는 식이죠. 손자 손녀들에게 전화를 하기보다 편지를 쓰는데, 말미에 들려줄 만한 시조를 한 수 적어 넣습니다. 명절 때마다 아들딸, 며느리 사위, 손자손녀들이 모두 모여 화가투를 즐기지요. 자연스럽게 시조를 접하면서 아이들이 그 속에 깃들인 우리 조상들의 정신과 기개, 아름다운 시적 정서, 풍류를 알아가길 바랍니다.”
100장의 시조카드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시의 구절을 물으니 조선생은 정철의 시를 한 수 읊는다.“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 보아라/뉘에게서 태어났기에 모습조차 같단말가/한 젖 먹고 자라나서 딴 마음 먹지마라.”시 한 수를 읊고 나서 그는 모름지기 사람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슴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며 따사로운 웃음을 짓는다.
조기석 선생은 서예가로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서예에 정진하고 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고 말했던 안중근 선생처럼‘학서무일불임지(學書無日不臨池)’곧 하루라도 글을 배우고 글자를 쓰지 않으면 서예의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한다. 선생의 서풍은 당나라 명필 구양순의 해서 작품으로‘구성궁예천명체’로 완전한 균형미 속에 추상같은 정신이 전해진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붓을 들고 있기를 바랍니다. 더딘 걸음으로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그 삶은 향기로운 것 아닐까요?”
향기로운 종장을 위해 치열하게 중장에 매진하고 있는 그의 삶은 고고한 시조로 완결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