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일단 가고 봅시다!
서른 살이 된 막내아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젖어 삶에 의욕까지 잃어버린 어머니를 위해 조금은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여행. 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여행을 통해 그것을 이겨내 왔던 태원준 작가는 자신이 그랬듯, 낯설고 새로운 곳이 주는 청량감이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 줄 거라고 믿었다.
“주변에서 모두 말렸죠. 나이 지긋하신 어머니와 세계여행이라니, 그것도 달력 몇 장이 넘어가는 긴 기간 동안? 어머니 당신도 가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치셨을 정도니 출발부터 쉽지 않은 여행임에는 분명했어요. 하지만 전 여행을 통해 어머니가 다시 행복이란 감정을 되찾길 바랐고 반드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한 달여를 넘게 설득한 끝에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죠.”
처음엔 그도 어머니와는 ‘함께 다니는’ 것이 아닌 ‘모시는’ 여행을 해야 함에 조금 긴장했다. 워낙 여행을 좋아해 이미 대학 시절 서른 군데 넘는 나라의 향취를 보고, 듣고, 즐겨왔던 그였지만 어머니와 다니는 여행은 많은 것이 달랐다.
“전 트레킹을 좋아해서 할 수 있다면 최대한 걸어 다니며 여행하거든요. 그래야 하나라도 더 눈에 담고 사진도 찍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와는 그럴 수 없으니 그간 다니던 것과는 동선부터 달라져야 했죠. 남미 최고의 트레킹 코스를 눈앞에 두고도 발길을 돌려야 할 때는 아쉬움이 한가득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저는 ‘난 여기 다시 올 수 있어, 또 올 거야’라고 되뇌며 마음을 달래곤 했어요. 상대적으로 어머니보다는 제가 다시 올 기회가 많을 테니까요. 욕심을 참고 어머니를 위했던 효심이 하늘에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나중에 저는 그곳을 다시 찾아가 마음껏 트레킹을 즐길 수 있었어요.(웃음)”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지친 나를 다시 일으켜주는 힘이 되거든요. 당장 눈앞에 많은 이유와 걱정들로 선뜻 용기 내기가 어렵다면, 각자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행에서 찍은 사진첩을 한번 열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30일? 6개월? 525일!
500일이 넘게 세계일주를, 그것도 어머니를 모시고 떠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어떻게 해낸 것일까?
“저도 처음부터 그렇게 긴 여행을 떠나려던 건 절대 아니었어요. 어머니와의 여행 계획은 딱 한 달이었죠. 하지만 어머니께서 저와의 여행을 너무나 좋아하셨고 기어이 한 달이 지나고서도 집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으셨어요. 한 곳만 더, 한 달만 더 하던 여행이 결국 6개월 가까이 계속되자 제가 모아둔 돈은 전부 바닥나고 말았어요. 다행히 한국에 남아 일을 하던 누나가 돈을 조금씩 보내주면서 저희의 여행은 끝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렇게 500일 넘는 긴 여행이 이루어진 거죠.”
여행이 길어지며 태 작가는 자신들의 소식을 궁금해할 지인들을 위해 블로그에 매일 여행일지를 남겼다. 여행 중에도 1시간 이상은 꼭 일지를 쓰며 그날 하루 자신의 발자국과 눈길이 지나간 곳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를 남긴 덕에 그들의 특별한 여행은 세상에 알려졌고, 여행이 끝난 지 반년이 조금 넘은 뒤 《엄마, 일단 가고 봅시다!》라는 이름의 책으로 두 모자(母子)의 이야기가 엮어졌다.
'당장 눈앞에 많은 이유와 걱정들로 선뜻 용기 내기가 어렵다면, 각자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행에서 찍은 사진첩을 한번 열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때의 즐거웠던 기억과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추억들을 되새겨 보는 시간만으로도 잠시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리라 믿습니다.'
편견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
“여행 초기, 전 어머니가 한식과 최대한 비슷한 것을 좋아하시리라 생각해 식사 때면 늘 국물과 면 요리를 위주로 대접했어요. 어머니도 별다른 불평 없이 잘 드셨고요. 그러던 어느 날, 일정이 생각보다 늦어져 저녁 아홉 시가 지나서야 겨우 식당엘 들어갔는데 메뉴엔 온통 파스타, 피자뿐이더군요. 할 수 없이 몇 가지를 시켜 먹기 시작했는데, 어머니가 너무 맛있게 드시는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얼떨떨하는 저를 보며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이제야 사주니?’라며 핀잔 아닌 핀잔을 주시더군요. 어머니의 아들로 살며 처음으로 편견이란 것이 깨지는 순간이었어요. ‘우리 엄마는 이러실 거야’라고 제 스스로가 재단한 어머니의 모습은 그날 이후부터 점차 바뀌어 갔죠. 도로 한가득 몰려나온 젊은이들이 물싸움을 벌이는 태국의 ‘쏭크란 축제(물의 축제)’에 갔던 날,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구경만이라도 하겠다며 나선 뒤 길 한복판에서 처음 보는 청년들과 어울려 물장구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깨달았어요. 내가 엄마를 편견이란 틀에 가둬 놓았다는 것을요. 어머니 본인 스스로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두려움을 걷어내고 먼저 앞서 걷기 시작하셨어요. 그때부터 더 이상 ‘모시는’ 것이 아닌 ‘함께 다니는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요.”
여행 작가의 사명은 많은 것을 ‘대신’ 보여주는 것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요? 저는 무조건 볼거리,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으로 가요. 걷는 것도 좋아하니까 아무래도 휴양지보다는 관광명소나 유적지 등을 찾아다니는 편이죠. 무엇보다 여행 작가란 내가 다녀온 곳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뿐만이 아닌 내 눈과 귀가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글과 사진으로 표현해, 보는 이들에게 전달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여행지에서 직접 느낀 많은 것들을 그대로 전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곳에서 느낀 감정과 찰나의 순간을 최대한 생생하게 담아내야만 해요. 그래서 저는 여행 중에 어떤 감흥이 떠오를 때마다 계속 메모하고,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아예 녹음기를 켜고 떠오르는 감정과 느낌을 언어로 남기곤 해요. 사진 역시 순간의 모습을 바로 담기 위해 눈을 대지 않고 방향만 잡아 셔터를 누르고요. 후에 이렇게 찍은 사진들을 보며 녹음을 들어보면 마치 다시 여행지에 온 듯한 기분이 되살아나 생생한 글을 쓰는 데도 많은 도움이 돼요.”
올여름, 여행 작가 태원준의 Pick
여름은 1년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여행을 떠나는 시기이다. 올 휴가철, 여행 작가 태원준이 추천하는 국내외 여행지는 어디일까?
“제가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여름엔 어차피 어딜 가도 덥더라고요. 그래서 시원하기만 한 휴양지보다는 휴식과 즐길거리가 함께 있는 곳을 추천하고 싶어요. 여행하면 해외를 떠올리기 쉬운데 저는 국내 여행도 무척 즐기거든요. 이맘때쯤 찾았던 경북 울진군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이곳은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찾으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곳이에요.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하기에도 무척 좋고요, 관동팔경 중 하나인 망양정에 오르면 넓은 동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도 있어요. 울진 엑스포공원 내 아쿠아리움과 동물농장은 어린 자녀들이 무척 좋아할 것 같아요. 해외로는 태국 북부 지방을 추천할까 해요. 치앙마이, 치앙라이 등으로 대표되는 이곳은 고산지대라 선선하기도 하고 우리나라로 치면 남도 지방처럼 음식문화가 많이 발달되어 있어 식도락까지 즐길 수 있어요. 치앙마이 근교에는 여러 예술가들이 모여 촌락을 이룬 빠이라는 마을이 있는데요, 이른바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라고 불리는 곳이죠. 매일 밤이면 그곳의 예술가들과 여행객들이 어우러져 저마다의 재능과 열정을 선보이는 파티가 열려 볼거리도 무척 많답니다.”
마지막 여행의 사진첩이 힐링의 열쇠
앞으로도 여행 작가로서 지금처럼 쉼 없이 여행하고 글 쓰고 싶다는 태원준 작가. 그에게는 여행이 최고의 취미이자 직업이며 삶의 이유란다. 그의 끝인사가 무척이나 기억에 남았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지친 나를 다시 일으켜주는 힘이 되거든요. 하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여행을 떠나기엔 우리 삶이 늘 여유롭지만은 않잖아요. 당장 눈앞에 많은 이유와 걱정들로 선뜻 용기 내기가 어렵다면, 각자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행에서 찍은 사진첩을 한번 열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때의 즐거웠던 기억과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추억들을 되새겨 보는 시간만으로도 잠시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리라 믿습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여행이 주는 즐거움 또한 우리에겐 다양한 색으로 나타난다. 태원준 작가와 마주하며 나는 줄곧 생각했다. 올여름, 아니 앞으로의 삶 동안 나는 무엇을 위한 여행을 떠날 것인가.
Profile
태원준(여행작가)
1982년生,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경영학, 신문방송학 학사
전 세계 87개국 400여 도시 여행
2013 《엄마, 일단 가고봅시다!》 출간
EBS, 한국경제신문 등 여행칼럼 기고
KBS, MBC 등 각종 프로그램 여행자료 협조 및 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