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와 둘만 있는 시간은 매일이 가시방석이었다. 우정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좁은 집안에서 부딪기라도 할라치면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내뺐다. 하리가 할 말이라도 있는 양, 아빠를 부를라치면, 우정은 엉뚱한 말과 부산한 몸짓으로 선수를 쳤다. 우체국 일로 머리가 복잡하다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다거나, 몹시 피로한 상태여서 금방 잠이 들 것처럼 하품을 크게 하거나 했다. 우정은 하리를 앞에 두고 홀로 설레발쳤다. 어떤 말도 꺼낼 수 없게 틈을 주지 않았다. 자식이 이토록 불편하게 신경 쓰일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우정은 하리의 용돈과 생활비를 미리 챙겨서 식탁 위에 놓아두었다. 퇴근하여 벗어놓은 양말과 빨아야 할 옷가지들을 챙겨 세탁기에 넣거나, 그의 방을 청소하는 일도 솔선수범으로 처리했다. 전에는 정연이 다 알아서 했던 일.
하리의 입에서 나올 말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집을 나가겠다는 것. 그동안 고마웠다며 안녕히 잘 계시라는. 하리와 있자면, 우정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둥댔다. 딸이 차린 밥상 앞에는 앉지도 않았고, 불러도 왜냐고 묻지 않았다. 자신이 이토록 소심한 아빠였는지 알 수 없게 우정은 두려웠다. 용건은 확인하지도 않았다. 무조건, 나중을 들먹였고 지금은 바빠서 안 된다고 홀로 설레발쳤다.
“집배실 동료 하나가 나랑 술 한잔 해야겠다고 하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부부싸움을 크게 한 모양이더라고. 지난번엔 쓰레기 분리를 누가 할 것인가를 놓고 밤새 실랑이했다더니 이번엔 또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청혼할 때는 평생 싸움 한 번 안하고 살 것처럼 굴더니만 고작, 쓰레기 분리문제로 다투다니. 웃기는 일이지 뭐냐. 그런데도 녀석은 무지 기분 상한 모양이더라. 고작, 그만한 일로 아옹다옹하는 그들이 귀엽고 부러운 거 있지. 여자가 간호사라나 뭐라나. 바쁘게도 생겼지.”
우정은 말을 비집을 짬을 내주지 않았다. 하리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부산하게 부려놓았다. 그런 다음이면, 피곤이 역력한 기색을 했다. 방문 앞, 하리 기척이 느껴지면 서둘러 잠을 청했다. 잠든 척 코를 고는 시늉을 했다. 잠들 수 없는 밤. 뒤척이다보면 새벽은 창문가에 있었다.
“아침 차려 놨다. 집배 물량이 많아서 오늘도 많이 늦을 거야.”
현관 앞의 운동화를 신은 다음이었다. 하리의 방문이 열리지 않은 틈을 타서였다. 많이 늦을 거라는 말에는 오늘도 너와 진지한 대화를 나눌 짬은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깨어있는 하리와 마주하는 일이 못내 불길해진 우정이었다. 가끔 하리가 차리던 아침상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우정의 몫이 되었다. 이제라도 하리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일 년 전만 해도, 싫다는 하리의 뺨에 억지로 뽀뽀를 남기고 출근하던 그였다. 지금은 출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이다. 겁쟁이가 되어버린 우정은 줄행랑치듯 그렇게 우체국으로 향했다.
집배실의 아침은 분주하고 활기찼다. 들어서자면, 집에서의 소심했던 마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지워졌다. 부산한 일과가 시작됐다. 집배 물량이 많다는 것은 그냥 빈말만은 아니다. 이륜차의 집배 상자를 다 채우고도 미어터지는 붉은색 행랑자루 두 개가 더 있었다. 일이 많다는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서 다행인 우정이었다. 그의 손과 몸에 익은 일들은 기계가 돌아가듯 순조롭게 처리되었다.
동료 집배원들과 무탈한 집배를 기원한 우정은 우체국을 제일 먼저 빠져나왔다. 그의 뒤를 이어 동료 집배원들의 이륜차가 저마다의 집배 구역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우정의 집배 구역은 북한산자락의 아파트단지와 그 밑의 주택단지 일부를 포함했다. 2천 세대쯤 될 터였다. 아파트단지 세대수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지 내의 집배는 세대가 밀집되어 있는 만큼 한 집 한 집 들러야 하는 주택단지에 비해 훨씬 수월했다.
“우리 집에 온 등기우편 있다면서. 지금, 갖다 줘. 내가 바로 또 나가봐야 하니까, 빨리 가져와.”
우정이 집배 구역인 주택단지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고객의 뜬금없는 전화가 우정의 퍽퍽한 일과를 재촉했다. 몇 번지의 누구라는 말도 없이 전화는 무례하게도 끊겼다. 우정은 휴대폰 겸 PDA(Personal Digital Assistant)에 찍힌 발신자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실례지만, 거기가 몇 번지죠?”
'175번지.”
전화는 성질 급하게도 다시 툭, 끊겼다. 그리고 우정은 기억해냈다. 175번지. 집을 비우는 날이 많음에도 우편물은 꼭 등기로만 이뤄지는 바로, 그 집이었다. 우정은 175번지의 최근 우편물에 대해 조회했다. 등기우편물 집배 당일, 175번지는 빈집이었다. 다음 방문 일정을 고지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해외여행이라도 갔는지 집을 장기간 비운 터였다. 아파트단지나 경비실이 있는 건물 같으면, 양해를 얻고 맡겨놓을 수도 있는 일이다. 주택단지의 등기집배는 경우가 달랐다. 받을 사람이 없으면 다음 방문 일자를 고지했다. 그럼에도 수령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우체국에 보관되었다. 175번지의 우편물은 우정의 손을 떠난 것은 물론 지환처리 되었을 터였다.
우편물에 대한 안내문을 분명 받았을 터였다. 우정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등기우편을 재방문 고지에도 받지 못했다면 우체국으로 직접 찾으러 가야 한다고. 그러나 175번지의 우편물은 날짜가 한참 지났으니 지환우편물로 벌써 처리됐을 것이라고. 괜한 민원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되거나 징계를 감수해야 한다. 불쾌한 기분에도 우정은 친절히 내용을 전달했다.
'내 우편물을 누구 마음대로 반송해. 거기에 얼마나 중차대한 내용이 담겼는지도 모르면서. 고객이 가져다달라면 갖다 주는 거지, 무슨 잔말이 이렇게 많아. 집배원이면 공무원 아냐? 공무원이면 당신 월급은 누가 주는데?”
뒷골이 당겼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는 담을 쌓았나?
우정은 고객의 고압적인 태도에 비위가 상했다. 집을 비운 것은 그쪽이고 고지를 이행해야 할 쪽도 그쪽이었다. 부탁을 하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 했다. 그랬어도 반송된 우편물이 고객에게 다시 돌아올 일은 없었다. 상대가 재발송을 하지 않는 한. 우정의 거친 숨을 홀로 내뿜었다. 그러고는 또 실없이 허허거렸다. 가끔은 몰상식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는 부류들이 있었다. 잘못은 자신이 저지르고도 앞뒤 없이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님에도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본의 아니게 주인과 늦게 만나게 되는 우편물이 있다. 분류 착오로 다른 구역을 돌다가 제주소를 찾아갈 수도 있고, 우편번호나 주소를 온전히 기재하지 않아서 집배원이 헤매는 경우도 있다. 등기우편의 경우는 주소에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혼자 거주하는 세대가 많아지면서 그들이 장기간 집을 비운 사이면, 등기우편물이 주인을 찾아가는 일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없는 독신 세대의 우편함은, 주인이 집을 비우면, 금방 표시가 났다. 기다리지도, 반기지도 않는 우편물이 우편함 안에서 귀퉁이를 쑥 내민 채로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반겨주던 정겨운 사람들의 손에 우편물을 직접 전해주는 기쁨은 맛볼 수 없다. 저 멀리서도 우정의 빨간 자전거만 보면 쫓아와 반기던 그 시절의 사람들이 우정은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운 정경들이 손에 잡힐 듯이 아른거렸다.
“군대 간 우리 아들 녀석한테 온 편지네. 집배원 선생님이 한 번 읽어봐 주소. 내 까막눈이라서.”
묏골에 사는 창남모는 우정이 건넨 편지를 다시 내밀었다. 그때마다 우정은 다리도 쉴 겸 그늘진 툇마루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디, 군에 간 아들 편지뿐이랴. 시집간 딸의 편지도 읽어주었고 때로는 해외노동자로 파견 나간 가장의 편지를 읽어주기도 했다. 글을 몰라 쑥스러워하는 것도 잠시였다. 편지를 다 읽어주고 나면, 그들이 전하는 내용을 받아 적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답장을 대신 써주고 그 편지를 부쳐달라는 그네들의 청탁을 받는 일은 정해진 절차나 다름없었다. 끼니 무렵엔 밥 한 숟가락 뜨고 가기를 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던 그네들이다. 시골마을에 들어서면 식당은 구경하기 어려우니 시장기가 도는 날에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신입 집배원 시절엔 도시락을 챙겨서 다니기도 했다. 집배 중에 허기가 지면, 언덕배기에 앉아 소풍 기분을 내거나 논둑에 앉아 새참 먹는 기분을 내기도 했다.
“오늘 내로 돌려야 할 우편물이 많아서, 어서 가봐야 합니다.”
누가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붙잡을라치면 우정은 뜨악해하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밥을 먹어야 기운도 나고 편지 배달도 할 게 아니오.”
우정의 넉살을 키워준 것은 그들의 인심이나 다름없었다. 사양은 하더라도 마음만은 든든했던 시절의 집배원 김우정은 누구나가 반기는 사람이었다. 붙박이 삶을 사는 시골마을의 사람들에게 우정은 봄소식을 전하는 제비는 물론 개나리, 진달래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빨간 자전거를 그네들은 아기제비보다 더 목을 길게 늘이고 기다렸다. 타지로부터 온 소식들이 우정의 행랑 가득이었다. 가족의 편지거나, 일간 신문이거나, 월간 잡지거나, 외국 친구와의 펜팔편지거나. 누군가는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우편물들로 꽉 찬 우정의 행랑가방은 보기만 해도 배부른 무엇이었다. 우정이 처음 집배원을 하던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시골마을 개구쟁이들에게 제복의 집배원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돌이키자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흐뭇한 시절이다.
“당신, 이름이 뭐야?”
등기우편물을 받지 못한 175번지 고객은 민원을 넣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우정은 앞뒤 없이 흥분한 고객에게 자신의 이름을 고분고분 일러주지 않았다. 집배원마다 담당 구역이 있으니, 민원이 들어가자면 동과 번지만 말해도, 누구인지는 말 안 해도 훤히 아는 일이었다. 우정은 같은 안내를 반복했다.
“앵무새야? 왜 같은 말을 자꾸 해. 사람 열 받게.”
고객의 폭언은 자동소총처럼 발사되어 나왔다. 맨몸으로 받아내자니, 우정은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다. 쇳소리 나는 음성에 귀청이 다 먹먹하다. 사나운 발톱을 아무 데서나 꺼내는 걸 보면, 그의 얼굴은 보나 마나 고약한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을 터였다. 길게 상대하지 않는 게 수였다. 우정은 열 받지 않으려고 인내했다. 내용을 확인시킨 후, 끊었다. 다시 전화가 와도 묵살할 작정이었다. 심통은 그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참이었다.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우정은 손에 들린 등기우편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집도 분명 빈집일 터였다. 아침부터 불미스런 일이 생기더니 오늘도 일이 꼬일 모양새였다. 우정은 다음 방문 일정을 공지하고
다음 우편물을 확인했다. 이번에도 등기우편물이다. 역시나 빈집. 우정은 우편함 겉면에 재방문 일정 붙이기를 몇 차례 더 반복했다. 오늘 일이 내일로 미뤄지게 되면, 내일은 더 분주해질 것이다. 오늘 일을 오늘 다 처리해도, 내일은 내일대로 바쁜 일정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네들은 집에 있었고 비워봐야 마을 안이었다. 동네가 한가족이나 다름없어서 멀리 출타라도 했으면 옆집에서 기꺼이 맡아주었다. 만능재주꾼 집배원 김우정을 반기고 기다려주는 사람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고장 난 농기계를 고쳐주고, 편지를 대신 읽어주고 발송해주는 소박한 정을 나누기란 그야말로 언감생심인 도시다.
“귀한 일 하는 사람한테 이런 일을 시켜서 어째. 아직 총각 같은데 만나는 아가씨는 있어?”
총각 집배원 우정은 배시시 웃기만 했다.
“말을 못하는 걸 보니 마음에 둔 처자가 있기는 한가 보네.”
그들은 우정의 마음을 넌지시 떠보았다. 그러고 나면 아는 처자의 고운 심성을 칭찬하며 소개하기 바빴다.
잔재주 많고 집배원이란 직업도 있으니, 그들 사이에서 우정의 인기는 높았다. 가려운 곳을 알아서 긁어주니 탐나는 인재가 따로 없었다. 여기저기서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아가씨를 불러다 놓고 우정이 오면 그 자리에서 직접 선을 보이기도 했다. 호사스럽고 행복하기만 했던 날들.
우정이 어느 때보다 인기를 독차지했던 때는 1990년대 말이었다. 정부시책으로 농촌에 컴퓨터가 공급되면서 우정의 갈고 닦은 또 하나의 재능이 밖으로 나왔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이들이 농촌에 늘어감에도 한 번 고장이 나면 수리할 곳을 쉽게 찾지 못했다. 찾더라도 이를 수리하기 위해서 운송하는 일은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컴퓨터가 도입되던 당시, 우정은 틈틈이 컴퓨터를 익혔다. 사용에 능숙할 뿐만 아니라 간단한 고장쯤은 스스로 해결할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고장의 문제가 심각해도 서비스센터를 찾아야 하는 컴퓨터를 수거하고 수리가 완료되면 가져다주기도 했다. 컴퓨터가 있는 집이라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우정의 발길과 손길이 반가울 수밖에.
“홍길동님 오셨구만. 우리 집에 문제가 있는데.”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되었다. 우정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이었고, 못하는 게 없는 그네들의 해결사였다.
집배원 생활 20년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만능재주꾼 김우정의 존재감은 흐릿해졌다. 집배원은 힘들어서 기피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도시 사람들이 반기고 기다리는 방문자는 택배원이다. 적어도 택배는 청구서이거나 독촉은 아니다. 실물이 오는 일이다. 유용한 쓰임이 오는 일이다. 누군들 택배원을 반기지 않을 것인가.
“이런 걸 누가 기다리겠어. 나부터도 죄 안 왔으면 싶은 것들뿐인데.”
우정은 월마다 배달되는 통신회사나 은행 등의 영수청구 봉투를 우편함에 넣으며 홀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누군가는 또 전달해야만 되는 것들이었다. 등기우편물을 주인에게 직접 전해야 하는 일로 더디기는 했지만 이륜차의 행랑상자 내용물은 조금씩 줄었다.
주택단지의 집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우정은 마지막 집배 주택을 찾았다. 오늘따라 등기우편이 유난히 많다. 기쁨은 한꺼번에 들이닥치고 슬픔도 떼로 몰려온다. 인생 매 순간이 고비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정은 등기우편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대문 기둥의 초인종을 눌렀다. 잠잠하다. 듣지 못했나? 우정은 초인종을 다시 눌렀다. 대문이 열리고, 우정은 좁은 마당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노크했으나 나와 보는 사람이 없다. 대문을 열어준 사람이 분명, 집에 있을 터였다.
“아무도 없습니까? 등기 왔습니다.”
조용했다. 불길한 생각은 그때에 스며들었다. 팔십 가까운 남자가 홀로 사는 집이다. 신음소리에 우정은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열렸다. 그 안에 가슴을 틀어쥔 남자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했다. 거실 바닥으로 그가 쓰러졌다.
심장발작. 우정은 순간, 당황했다. 119에 구조요청을 하는 일만은 잊지 않았다. 그들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만한 상황은 되지 못했다. 남자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심장을 마사지하기를 여러 번. 넘어가던 남자의 숨이 돌아와 한시름 놓고 있을 때, 119는 도착했다.
우정은 자신이 생사의 고비를 넘긴 양, 진땀을 흘렸다. 아침나절의 불쾌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자가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오늘 사람 목숨을 구했다며?”
저녁나절, 우정이 귀국하자, 그에 관한 소문이 집배실을 점령하고 있었다. 우정의 심폐소생술이 누군가의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로 집배실이 들썩거렸다.
'그 어르신이 나를 살린 거지.”
진심이었다. 집배를 하다 보면 별의별 일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과 만나게 되는 일이, 과연 있을 것인가. 죽음의 순간과 맞닥뜨리고 나면, 삶의 의지는 더욱 강하게 살아나는 법이다. 그나저나 그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우정은 의아하기만 했다.
“자네가 목숨을 구해드린 분의 아드님이 우체국으로 전화를 했다던데. 집배원이 자기 아버지를 살렸다. 그 사람이 누구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뭐, 대충 그런 얘기인 거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영미선배가 그간의 상황을 압축해 말했다.
'나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군.”
우정은 무감흥이었다.
'그게 전부가 아냐. 자네가 집배를 하는 그 사이, SNS에 고마운 집배원에 대한 글이 올라왔지. 정확히 말하자면 자네에 대한 글이야. 사실, 멀리 있는 가족보다 청구서일망정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찾아주는 집배원이 더 가까운 사람일 수 있잖아. 우리처럼 같은 길로 매일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 독신세대가 늘어가는 요즘에 집배원만한 파수꾼도 없지. 아무렴!”
전체 줄거리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우정은 멈춰버린 시계처럼 182일째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날은 죽은 아내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었다. 5년 전의 시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우정은 실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고향에서 엄마 해자와 함께 지내며 집배원 생활을 하던 스물셋 그때. 우정은 가슴 설레는 일상을 맞이했고 행복했다. 소식을 나르는 일뿐 아니라 담당지역민들의 온갖 심부름을 자처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필요하다는 것이 뭐든 빨간 자전거로 실어 날랐다. 집배원 배지를 단 우정은 그들에게 가족이었고 반가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아내를 잃은 우정은 제2의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 스스로 아픔을 극복하고 그 옛날의 행복한 집배원으로 거듭나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우정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총 12화에 걸쳐 펼쳐질 예정이다.
작가 소개 양수련
시나리오작가이자 추리문학가이며 은평구평생학습관에서 문학적 글쓰기 강좌를 운영 중에 있다. 제6회 대한민국영상대전과 제2회 추계시나리오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하얀심장을 가진 사람들」, 창작소설집 「G빌라」「지옥문을 여는 방법(공저)」외 대중예술서인 「시나리오 초보작법」 「시나리오 Oh! 시나리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