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은 순로구분대 안으로 우편물을 던져 넣으며 홀로 구시렁거렸다. 행랑을 챙겨 우체국을 나오면서도 못내 서운하고 불편한 마음을 거두지 못했다. 정연을 온전히 떠나보내지도 못했는데, 하리마저 자신을 떠날 궁리만 하고 있는 것 같아 괘씹했다.
그들의 이사는 모두 하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여겼다. 하리와 떨어져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그 자신의 속내를 뒤로한 체였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해자가 부추기기도 했지만 하리의 곁에 있고 싶은 건 누구보다 우정 자신이었다. 서울로의 이사는 하리와 함께 있고 싶은 우정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랬음에도 순전히 하리 때문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괘씹한 것. 고약한 것. 아파트 우편함에 우편물을 넣어두다가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하리 또래의 여학생만 눈에 들어와도 우정의 불편한 심사는 볼쑥불쑥 거친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그러다가도 영미선배를 찾아간 하리를 떠올리자면 코끝이 찡해왔다.
혼자서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그 자신이 얼마나 미덥지 않았으면 그랬을까. 하루하루를 좀비처럼 보내는 아빠가 두렵고 불안했을 터였다.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아빠가 저승사자처럼 여겨졌을 터였다. 자신을 미워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을 터였댜 그런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멀쩡한 집을 놔두고 기숙사로 들어가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우편함에 우편물을 꽂다가도 우정은 느닷없이 불끈한 마음이 치솟았다. 집배가 제대로 이뤄질리 만무다.
벌써 끝났어야 할 집배는 더디기만 했다. 우정 자신의 분을 못 이겨 집배순로를 이탈하거나 집배주소지를 건너뛰기 일쑤였다. 순로역행을 번번이 반복해야 했댜 이 모든 게 하리 때문이라고. 우정은 화풀이할 곳도 없이 신경질을 길바닥에 뿌리고 다녔다. 지난 6개월의 시간이 어떻게 홀렀는지 신통하기만 했다. 생기라고는 없었지만 집배를 놓치거나 반복하는 실수 따위는 없었다. 현실을 자각하게 된 순간부터 우정의 심사는 사나워졌다. 순로역행을반복한우정은저녁 8시 무렵이 되어서야우체국으로 돌아왔다. 동료 집배원들은 퇴근준비를 끝마쳤거나 이미 퇴근한 다음이었다.
'많이 늦었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아침의 영미 선배였다. 퇴근을 하려던 그녀는 처진 어깨로 들어오는 우정을 보고는 그냥 가지 못했다.
“오늘따라 바보 멍청이가 된 기분입니다.’’
우정은 어이없는 웃음을 홀리며 말했다.
“마무리하고 퇴근하려면 한참이겠군. 내가 좀 도와줄게.'
“아뇨. 그것보다는…….'
“뭐? 뜸들이지 말고 말해봐. 내가 뭘 도와줄까?'
우정은 한동안 침묵했다. 입술도 달라붙어 것처럼 잘 떨어지지 않았댜 영미는 무슨 일이든 괜찮다는 표정으로 우정의 입이 떨어지기를기다렸다.
“선배가 우리 하리한테 말 좀 잘 해줘요. 나 대신 맛있는 것도좀사주고.'
우정의 말은 힘들게도 나왔다.
“싫어. 그렇게 안 할 거야.'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 같던 영미는 단박에 거절했다.
“부탁해요,선배.'
“그래도 싫어. 하리에게 할 말이 있음 직접 해. 하리 마음도 달래주고, 맛있는 것도 갇이 먹고…… 하리가 6개월을 참아주고 기다려줬으면, 우정 후배도 양심은 있어야지. 아빠 노릇하기가 어디 그리 쉬우냐고.'
영미는 엷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힘들었던 사람은 우정만이 아니었다. 정상이 아닌 그를 매일 봐야 하는 집배실의 동료들 또한 걱정과 우려를 덜지 못했댜 우정의 하루하루를 지켜보며, 마음 졸인 사람은 그 중에서도 영미였다. 그녀는 정연과 언니동생하며 지낼 정도로 친분이 돈독했고 자주 왕래했다. 우정이 넋을 놓고 다닌 지난 6개월 동안 휴일이면 그의 집을 점검하듯 들여다보고 갔다. 휴일이면 집배순로를 따라 성지 순례하듯 거니는 우정은 매번 집에없었다.
그때마다 하리는 홀로 집에 있었다. 의연한 척 굴었지만 영미가 갈라치면 하리는 골목까지 따라 나와 그녀의 발길을 더디게 했다. 하리가 지난 6개월을 어떻게 보냈는지, 우정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영미는 괜한 화만 내다가 퇴근해버렸다.
정연의 전자우편은 그날 밤에도 배달되었다. 우정은 떨리는 마음과 손으로 그녀의 편지를 클릭했다. 글 속의 정연은 생기발랄했다. 살아있는 사람이었고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다. 당장에라도 우정의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정연의 편지는 하리에 관한 이야기로 꽉 들어차 있었다. 영미도, 정연도, 모두 하리 편이로군. 우정의 서운함은 그 안에도 있었다. 하리가자신의 속을 얼마나썩이고 있는줄이나아느냐고 정연의 글 앞에서 우정은 홀로 두덜거렸다. 그의 투정에도 정연은 온통 하리얘기뿐이었다.
정연의 진통이 시작되고 하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원하던 그날이었댜 예정일보다 앞선 진통에 정연은 당황했다. 병원까지 가자면 험난한 길이었고 우정은 언제 올지 몰랐다. 정연을
태운 옆집의 경운기는 덜덜거렸다. 어떻게든 병원에 가야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세상을 보고 싶은 아기 하리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얼굴을 밖으로 내밀었다.
하늘뿐 아니라 누렇게 변한 세상을 그때에 보았노라고. 정연은 하리가 태어나던 날을 상기하자면 혀부터 내둘렀다. 그러나 눈앞의 하리는 그때의 노란하늘은 어느새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아기 하리가 싼 첫 똥을 우정은 신기한 음식처럼 맛보았다. 정연의 젖을 물고 먹는 작은 생명이 신기했다. 우정의 손가락을 꼭 쥐고 놓지 않는 하리가 대견했다. 하리의 홀로 선 첫발은 땅을 정복하는 순간이었고, 첫말은 세상의 언어를 터득한 순간이었으며, 돌잡이한 붓은 골동품으로 남아 박물관에 보관되어야할 물건이었다. 첫 그림은 천재화가의 출현을 알리는 작품이 될 터였댜 하리의 눈물방울은 다이아몬드였고, 해맑은 웃음은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었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우주였다, 하리란존재는.
하리가 안겨준 기쁨과 세상의 그 무엇도 부럽지 않던 그 시절의 행복을 우정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리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우정은 그야말로 슈퍼맨 아빠이고 싶었다.
옆집의 경운기를 몹시도 사랑했던 꼬마 하리. 경운기가 되고 싶다던 하리의 꿈은 변신로봇처럼 수시로 바뀌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면 새가 되고 싶다 했고, 여름의 아름드리나무를 보면 나무가 되고 싶다 했다. 배고폰 날엔 밥이 되고 싶고, 아빠가 보고 싶은 날엔 아빠의 빨간 자전거가 되고 싶고, 정연에게 야단맞은 날엔 회초리가 되고 싶은 하리였다. 한시도 우정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하리였다.
하리와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다. 딱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정연은 우정과 하리 사이를 시샘하기도 했다.
'눈꼴이 시려서 못 봐주겠네. 난 딴 데 가볼 데니까 둘이서만 잘 살아봐, 어디.'
정연이 토라지는 시늄이라도 할라치면 화들짝 놀란 하리가 그녀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의 목에 매달려 안 된다고 야단했다.
아기 하리는 꼬마 하리가 되었고 어린이 하리가 되었다. 하리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될 무렵,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다는 어른스런 진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엉뚱하고 기발한 생각들을 펼쳐놓을 때면, 우정은 하리를 ‘우리 감독남하고불렀다.
예술을 하면 삶이 고달프다고 정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마다 우정은 자신했다. 능력 있는 신랑을 만나면 된다고. 그렇게 되지 않더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자신이 평생 하리의 곁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정연의 글로 그 시절의 일들은 생생하게도 떠올랐다. 우정이 아이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라던 정연이었다.
총각 집배원 우정만 나타나면 달라붙어 장난을 걸던 시골마을 개구쟁이 아이들이었다. 우정을 따르던 아이들에게 집배원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정이 입은 제복이 멋있어 보였고 그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부러운 순진한 아이들이었다. 우정이 나타나면 그 뒤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지어 달렸다. 아이들의 장난에 부응하는 우정은 서행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숨 가쁜 아이들은 우정의 자전거가 제발 멈췄으면 싶다.
“아저씨, 이렇게 빨리 어디 가세요?'
'산 너머 이웃마을에 편지를 배달하러 가야 해.' “강남 간 제비는 언제 온대요?'
'글쎄다.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네.'
“아저씨,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돼요?'
'안돼.'
“아저씨 행랑 안에는 뭐가 들었어요?'
“비밀'
그러는 사이 발이 빠른 아이에게 우정의 자전거는 길을 내주고 만다. 그러다 다친다고 경고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우정이 자신들과 놀아줄 것이라는 것을. 저마다 자신의 집에 온 편지를 달라고 이구동성이지만 녀석들이 노리는 것은 정작 따로 있다.
빨간 자전거를 타보고 싶어서였고, 행랑 안에 든 내용물이 궁금해서였다. 가끔씩 편지 아닌 과자며 풍선 둥을 우정이 행랑 안에서 꺼내는 것을 보아서였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우정은 행랑 안에 챙겨갖고 다녔다. 집배가 일찍 끝난 날이면 자전거를 따라온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했다. 우정이 아이들을 좋아했던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밑바닥을 드러낸 아무것도 없는 행랑에 아이들은 적잖이 실망했다. 집배가 끝난 다음이니 행랑이 빈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뭔가 감춰져 있을 거라고 기대를 품는 아이들이었다.
‘‘오늘은 진짜 아무것도 없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정을 향해 물을 뿌려댔다. 냇가가 바로 옆이고 아이들의 물공격에 우정은 꼼짝없이 당해준다.
가만 안 두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우정의 물싸움은 모두가 흠뻑 젖고나서야막을내렸다.
우정은 살금살금 집으로 숨어들었다. 동네 꼬맹이들과 어울려 노는 걸 원했던 거냐고. 해자가 보면 또 한바탕의 잔소리를 늘어놓을 터였댜 젖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갈 참이었다. 해자는 우정이 피하고 싶은 순간을 용하게도 알아겠다. 그녀는 근엄하게 서서 우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척하는 우정은 능청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왔으면 왔다고 소리 좀 내요. 냇가를 지나가는데 애가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지 뭐야. 요단강을 건널 뻔했는데, 때마침 내가 그곳에 있어서 목숨을 구했지. 내가 다 십년감수했다니까.'
“그러고 다니니까 좋냐, 만족스럽냐고?'
'누가 뭐래도 배달민족의 자랑스러운 집배원이지. 엄마도 곧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거야.'
“터진 입이라고 말은 청산유수네.'
해자는 아니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화가가 되고 싶다던 우정이었다. 관광분야가 전망이 좋다며 진로를 바꿔야겠다고 할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날품팔이든, 식모살이든, 채소장사든, 무엇을 해서라도 학비만은 대줄 생각이었다. 몸을 다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일상이었다. 밭을 옮겨 다니며 일했다. 그럼에도 병나자고 드니 재간은 없었다. 뻐끗한 발에 넘어졌다. 하필이면 시멘트 계단 모서리에서였다. 금이 간 다리뼈에 서너 달은 깁스를 하고 있어야 했다.
우정의 두번째 학기를 앞두고서였다. 우정은 군에 입대했다. 복무 먼저 마친 다음에 학교를 다니겠다는 말을 남기고서였다. 그러나 30개월의 군복무를 끝낸 우정은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배원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자는 기가 막혔다. 남자가 포부를 가슴에 담았으면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한번은 끝까지 해봐야 되지 않겠냐고. 그다음에 다른 일을 해도 늦지 않는다고. 학교공부만이라도 마치자고. 그녀는 우정을 설득했다. 그는 설득당하지 않았다.
우정이 집배를 하느라 힘든 기색이라도 비치자면 해자는 남은 공부를 다시 하자고 종용했다. 학교는 자퇴했고 돌아갈 수 없었다. 해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결국은 알게 될 일이었댜 가냔폰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뿜어져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해자의 분이 풀릴 때까지 우정은 흠씬 얻어맞았다.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 화가나 호텔리어 뭐, 그런 것보다 내 적성에도 딱 맞는 일 같아. 엄마랑 이렇게 옥신각신할 수도 있고. 엄마는 안 그래? 나랑 사는 게 싫으면 시집을 가든가. 내가 이웃마을에 사는 마음씨 좋게 생긴 홀아비를 하나 알고 있는데…… 한번 다리를 놔볼까?'
해자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녀는 빗자루를 찾아들었다. 그사이우정은자전거를타고 가버렸다.
스물셋. 공부와꿈을 집기엔 이른 나이였다. 해자는 그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라 고 자책했다. 근무가 끝나거나 휴일이면 우정은 책과 떨어지지 않았다. 틈만 나면 새로운 것을 익혔다. 그의 자격증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해자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착잡했다. 그녀의 시간은 그렇게 홀렀다. 미안한 마음과 마음의 빚을떠안은채로.
해자가우정의 선택을존중하 고자랑스럽게 여기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미안한 마음을 던 것은 우정의 모친이라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나서였다.
그날, 해자는 우정과 함께 오일장 나들이를 했다. 집배원 김우정을 알아본 사람들은 해자까지 아는 척을 했다. 좋은 아들을 둬서 먹지 않아도 배부르겠다고. 해자에 대한 부러움과 우정에 대한 칭찬으로 그들의 침이 말랐다. 남 속도 모르고 하는 말들임에 해자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나 해자는 조금씩 마음의 빚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살 물건이 많다며 은근히 우정을 앞세우는 날이 잦았다. 평범한 일상. 그 일상에 우정의 꿈은 소박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해자를 매일 웃게 만드는 것. 아기울음소리가 나는 가정을 꾸리는 것 남들처럼만 살아보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댜 그리고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다던 딸 하리의 설레는 꿈을 우정은 보았다.
하리와 마주한 방안의 공기는 우정의 어깨를 턱없이 짓눌렀다. 그들의 침묵은 깊고 정적은 무거웠다. 누구라도 먼저 말을 꺼내야했지만 서로 눈치만 살폈다. 끝내 먼저 말문을 연 쪽은 우정이었다.
“네 엄마를 잃은 것만으로 충분해. 하리 너까지 잃고 싶진 않아.'
“내가 어떤 것 같아? 아빠가 보기에 괜찮은 것 같아? 그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 나까지 잃기 싫다고? 난 이미 아빠를 잃었어. 나와는 눈도 안 마주치는 아빠 때문에 난 엉망이야. 원망스러워, 내 꿈이. 망가져 버렸어.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닌데. 내 꿈 때문에 난, 나는……엄마와 아빠를 다 잃었어.'
하리는 침울했고 또 침착했다. 쌓였던 감정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우정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자신의 아픔과 고통에만 젖어있었다. 하리의 상실감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망가져 버렸어. 그 한마디가 우정의 가슴이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리에게 든든한 지원자이자 후원자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우정 자신이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전거를 타고 수십 리를 오가는 일이 매번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일을 쉴 수 없어 하리의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날이 더 많았으며, 예상치 못한사고로 병실 신세를 져야 했던 적도 있었고, 우편물을 물에 빠뜨려 난감했던 적도 있었다. 귀중품이 없어지는 날이면 도둑으로 오해를 받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힘이 되어준 건 하리였다. 처음부터 집배원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집배원이 되었기에 해자 곁에서 그녀를 돌볼 수 있었다. 집배원이 되었기에 정연을 만나 결혼했으며 하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빠가 되었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러나 지금,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은 분명 하리였댜 기숙사는 생각도 말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리와 마주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전체 줄거리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우정은 멈춰버린 시계처럼 182일째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날은 죽은 아내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었다. 5년 전의 시간으로부터 날아온 편지. 우정은 실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고향에서 엄마 해자와 함께 지내며 집배원 생활을 하던 스물셋 그때. 우정은 가슴 설레는 일상을 맞이했고 행복했다. 소식을 나르는 일뿐 아니라 담당지역민들의 온갖 심부름을 자처한 그는 그들의 손과 발이었다. 필요하다는 것이 뭐든 빨간 자전거로 실어 날랐다. 집배원 배지를 단 우정은 그들에게 가족이었고 반가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 아내를 잃은 우정은 제2의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 스스로 아픔을 극복하고 그 옛날의 행복한 집배원으로 거듭나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우정의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총 12화에 걸쳐 펼쳐질 예정이다.
작가 소개 양수련
시나리오작가이자 추리문학가이며 은평구평생학습관에서 문학적 글쓰기 강좌를 운영 중에 있다. 제6회 대한민국영상대전과 제2회 추계시나리오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하얀심장을 가진 사람들」, 창작소설집 「G빌라」「지옥문을 여는 방법(공저)」외 대중예술서인 「시나리오 초보작법」 「시나리오 Oh! 시나리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