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의 탄생일인 천장절 행사를 마치고 난 다음 날, 개화파 주역들은 일본공사대리 시마무라를 박영효의 집으로 초청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국정을 개혁하기 위해 거사를 단행하기로 했음을 밝혔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시마무라는 전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구체적인 계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튿날 개화파의 우두머리 김옥균은 영국영사 애스턴과 미국공사 푸트를 찾아다니며 분위기를 살폈다. 먼저 애스턴을 찾아가 물었다.
“어제 일본공사관 연회 때 일본공사가 보여 준 언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올시다. 뼈 없는 해삼을 먹겠다는 뜻일까요.”
애스턴은 농담조로 응수했다.
“다케조에 공사의 행동을 보니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혹시라도 일본이 청국과 전쟁의 실마리를 만들려는 것 아닐까요?”
애스턴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듯 김옥균은 넌지시 물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지금 일본 육·해군이 청국보다 강한 듯하나 일본 재정이 매우 어려운 형편이어서 청국과 한판 붙는 것이 쉽지 않을 겁니다. 내 생각에는 다케조에 공사가 조선인들에게 강함을 보이려고 일부러 그런 행동을 취했던 것 같습니다.”
애스턴은 대범하게 받아넘겼다.
이에 비해 푸트는 진지했다.
“어젯밤 일은 공과 내가 본 대로라 할 수 있어요. 다케조에 공사가 다시 오면서 유약하던 태도가 많이 변했으니 그 점은 기쁜 일임에 틀림없어요. 그러나 지금 귀국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국과 일본이 다 같이 군대를 철수하는 것이오. 이 일에 도움이 된다면 나 자신도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노력할 터이니, 정세의 흐름을 살펴 일을 서서히 추진하기 바랍니다.”
푸트는 또다시 거사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추진하라고 충고했다.
거사의 큰 원칙이 일본공사관 별실에서 결정되다
그 무렵 서울 시내에는 청나라와 일본 군대 간에 전쟁이 곧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양국 군대가 곧 결판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하려는 듯, 일본공사관은 일본인 전사자들의 초혼제를 지낸다는 구실로 남산 밑에서 씨름과 격구시합을 벌였다. 김옥균도 초청을 받았으나 참석하지 않고 서광범과 서재필을 대신 보냈다. 서재필은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관생도들을 거느리고 참관했다.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村上)는 병사들을 두 편으로 갈라 한 편은 백기, 한 편은 적기를 들고 시합하도록 했다. 다케조에는 관람석에 앉아 적기가 이길 때마다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백기는 청나라, 적기는 일본으로 편을 갈랐던 것이다.
이튿날 김옥균은 일본공사관을 찾아가 바둑 시합을 벌였다. 서울에서 고수라는 기사 두 명과 일본공사관 직원 중에서 고수인 자를 골라 대국을 시키고,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관전했다.
바둑 시합은 핑계에 불과했다. 김옥균은 다케조에와 거사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바둑 시합이 끝나자 김옥균은 다케조에와 별실로 옮겨 거사 계획의 일부를 털어놓았다. 다케조에는 김옥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그의 계획에 전적으로 찬동했다. 거사의 큰 원칙은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이튿날 김옥균은 이인종 등 행동대원들을 불러 그의 집 밀실에서 술을 마셨다. 행동대원은 대부분 상놈 출신이었으나 이인종은 양반 출신이었다. 그는 종5품 판관을 지낸 벼슬아치로 김옥균의 핵심 참모였다. 그는 행동대원들을 포섭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실제로 행동대원들을 모아 탑골승방과 박영효의 압구정 별장에서 훈련시키는 교관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거사에 참여하기를 주저하는 자가 있으면 상놈도 좋은 관직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 설득하곤 했다.
이인종 등 행동대원들은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도 겸하고 있었다.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가 며칠 전부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야간에도 군복과 신발을 벗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있다는 정보를 물고 온 것도 그들이었다. 우영사 민영익 역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동별궁에 머무르며 병사들을 단속하고 있었다.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등이 이끄는 다른 부대 군사들도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처럼 거사 일정이 구체화되기 전부터 양대 세력 간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며칠 뒤 남산 밑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한밤중에 야간훈련을 실시했다. 난데없는 포격 소리에 깜짝 놀란 서울 시민들이 밤잠을 설쳤다. 이튿날 아침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고종이 김옥균을 불렀다. 일본군이 사전 통보도 없이 야간훈련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놀라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다케조에에게 물어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김옥균은 다케조에를 만나기에 앞서 외아문으로 찾아가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외아문에서 일본공사관을 찾아가 지난 밤 포격 소리에 놀란 서울 시민들이 밤잠을 이루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사전에 알리지도 않고 포격 소리를 냈던 이유가 뭐냐고 따졌다. 그러자 다케조에가 내놓은 대답이 실로 엉뚱했다.
“지금 천하 각국의 병사들은 상시적으로 훈련을 실시하고 있소. 만일 대사격이나 대훈련을 실시했다면 마땅히 귀 아문에 알려야 하겠으나, 야간훈련이란 병사들의 근태를 살피기 위해 불시에 시행하는 것이어서 공사에게도 알리지 않소. 오로지 병사를 통솔하는 지휘관이 자기 판단 하에 실시하는 것이오. 그런데도 중국인이나 조선인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이오.”
다케조에는 태연히 웃으며 상식 밖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는 그처럼 일본 군대가 남의 나라에서 포성을 울리며 야간훈련을 실시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였다.
포격 소리에 놀란 사람은 서울 시민만이 아니었다. 미국공사와 영국영사, 독일영사가 차례로 외아문을 방문하여 포격 소리가 났던 이유를 물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아문을 나서자 김옥균은 그 길로 홍영식을 찾아갔다.
“죽첨(竹籤)공사가 새로 도임한 뒤로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음은 어리석은 백성도 다 알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청국 병사들의 경계가 더욱 엄해지고 있고, 또 사대당들의 의심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 장차 무슨 변이 생길지 알 수 없소이다. 참으로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소이다.”
홍영식이 자못 근심 어린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일본군의 훈련은 참으로 뜻밖이었소. 오늘날 우리가 좌우를 돌보지 않고 변혁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의 현실로 볼 때 불가피한 선택이라 하겠소. 죽첨공사가 다시 와서 과격한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이 걱정스럽긴 하나, 오히려 그것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 폐일언하고 속히 도모하되 늦추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오.”
김옥균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이다. 그러나 죽첨공사가 하는 일이 일본 정부의 정략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죽첨공사 개인의 일시적인 기분에서 한 일인지 그 점이 궁금하오.”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무릇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있는 자가 어찌 본국 정부의 훈령도 받지 않고 자의로 행동할 수 있단 말이오? 더구나 죽첨은 천성이 나약한 서생인데, 어찌 정부 명을 받지 않고 이처럼 무모한 일을 할 수 있겠소. 너무 의심하지 맙시다.”
김옥균은 목소리를 높여 충고하고 나서, 홍영식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구체적인 거사 방안을 논의했다. 홍영식은 일찍부터 개화파의 일원이 되었으나 맡고 있는 관직이 많은 데다 맡은 업무에 충실한 성격이어서 거사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거사계획이 구체화되고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면서 그 날 밤에 이르러서는 그 뜻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밤새워 추진 방안을 논의하다 먼동이 튼 뒤에야 헤어졌다.
김옥균과 다케조에가 한마음이 되다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군주 고종으로부터 누구보다도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고, 30세밖에 안 된 나이에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하는 협판 자리에 올랐기에 장래가 탄탄히 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홍영식이 개화파의 거사에 앞장서기로 한 것은 백척간두에 서 있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 개화를 추진하는 길밖에 없다는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 길이 정도가 아님을 잘 알면서도 인위적인 정치 개혁을 단행하여 개화파 중심의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일본을 모델로 한 자주적인 개화운동을 펼쳐 나가기로 굳게 결심했던 것이다. 거사에 실패할 경우 자칫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수도 있었으나, 개인이나 가족의 이해관계를 따지기에는 나라가 돌아가고 있는 꼴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백성들의 삶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30세밖에 안 된 창창한 나이에 ‘모의 총람의 제일인자’라는 역할을 맡아 거사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고종으로부터 일본군이 남산 밑에서 야간훈련을 실시한 까닭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은 지 3일 만에 김옥균은 다케조에를 찾아갔다. 일본군이 야간훈련을 실시한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사람에게 들은 바 있어 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었고, 다케조에 역시 고종에게 좋은 말로 아뢰어 달라는 말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그때 이미 한 배를 탄 동지나 다름없었다.
그날 밤 김옥균은 고종을 알현하고 다케조에와의 면담 결과를 보고했다.
“오늘 죽첨에게 가서 힐문했더니, 그가 소신에게 한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지금 청국과 불란서가 교전하고 있는 것은 마치 이웃집에 도둑이 들고 불이 난 것과 같아 수비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야간훈련 같은 일은 언제나 불시에 실시하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군대 또한 이런 일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지난날 밤의 일은 실로 제가 모르는 바입니다. 나중에 들으니, 청국 진영의 원세개와 귀국의 우영사 등에서 밤만 되면 계엄을 실시하여 군사들이 옷을 벗지 않고 마치 전시처럼 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양국 군대가 한 곳에 주둔하면서 비록 적대시하는 일은 없으나 한쪽에서는 계엄을 실시하고 있으니, 일본군의 처지로서는 어찌 홀로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라카미 대위가 뜻밖의 일에 대비하기 위해 야간훈련을 실시했던 것입니다. 일의 전말이 이러할지라도 대군주께서 놀라셨다 하니 황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다케조에는 이렇게 말하며 몇 차례나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김옥균은 그처럼 교묘한 말로 다케조에의 입장을 대변했다.
“청국 진영이나 전영사, 좌영사, 우영사가 까닭 없이 계엄을 실시하여 일본인들의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 것은 사려 깊지 못한 일이로다.”
고종은 그처럼 탄식하며 친청사대파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화파의 정변은 개화파 단독의 힘으로는 성사시킬 수 없었다. 정변을 성공으로 이끌려면 반드시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외국 여러 나라의 이해와 협조를 얻어내야만 했다. 당시 한반도 정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나라 중에서 개화파가 기대를 걸고 있는 나라는 바로 한반도 이웃에 있는 일본이었다. 일본처럼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없으나 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이나 영국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때문에 개화파는 일본공사에 못지않게 미국공사와 영국영사에게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공사 푸트 부처가 김옥균을 집으로 찾아왔다. 공사 부인을 먼저 돌려보내고 나서, 김옥균은 푸트와 마주앉아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귀공도 아다시피, 지금 우리 조선의 정세가 매우 위중합니다. 청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은 남의 나라에 군대를 주둔시킨 채 일전을 불사할 태세를 취하고 있고, 정권을 틀어쥐고 있는 친청사대파는 나라의 안위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급급하고, 위정자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는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제반 정세가 이대로는 잠시도 더 끌고 갈 수 없는 형편이라 하겠습니다. 해서 우리 개화파는 불원간에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개혁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귀공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김옥균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상대방의 반응을 살폈다.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푸트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공들이 오래전부터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은 잘 알고 있고, 존경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사로 부임한 이래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지시한 사항이나 개인적으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항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해서 마땅히 일찍 귀국했어야 함에도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은 귀국의 독립에 대해 귀공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었소. 청국 병사를 철수시켜 달라는 공들의 부탁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했소. 다케조에 공사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시마무라 씨와 상의하여 그로 하여금 일본 외무상과 의논하도록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나 개인의 의견만은 아니었죠. 바라건대, 공들은 나라와 자신을 위하고 또 나의 충고를 받아들여 우선 조용히 기다려 봄이 좋을 듯하오.”
그처럼 푸트는 개화파의 거사 계획에 찬동하면서도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충고했다.
목 씨가 곧 조선의 왕이오 조선 정부가 될 것이다
그 무렵 미국공사 푸트는 공사 자리를 사임하고 귀국하는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성실하면서도 곧은 성격의 소유자인 푸트로 하여금 공사 자리를 놓고 갈등하게 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묄렌도르프와의 불화였고, 또 하나는 조선공사에 대한 미국 정부의 푸대접이었다.
조선 정부의 사실상의 외교 책임자인 묄렌도르프와의 갈등은 1883년 푸트가 공사로 부임한 뒤 얼마 안 돼 시작되었다. 공사로 부임하자 푸트는 정동에 있는 집을 사 수리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기에 한동안 박동에 있는 묄렌도르프 집에 머물렀다. 그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는 동안 두 사람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진 것은 어떻게 보면 우연이었다. 묄렌도르프가 대단치 않은 병으로 며칠 결근하는 동안 미국공사 푸트가 고종을 설득하여 보빙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 푸트는 일국의 공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며 당연하게 생각했으나, 외아문 협판으로 조선 정부의 외교 업무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묄렌도르프는 자신의 소관 업무를 사전 상의도 없이 추진했다며 몹시 화를 냈다. 묄렌도르프는 “미국 공사가 내 병을 그 따위로 이용하다니 야비하다”고 일기에 적을 만큼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서양의 어느 나라보다 미국을 좋아했던 고종은 바로 그해 여름 푸트에게 미국 정부를 통해 프랑스,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푸트의 보고를 받은 미국 정부는 두 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선 정부의 뜻을 전했다. 따라서 이듬해 봄이면 두 나라에서 조선에 사절을 보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1884년 1월 느닷없이 묄렌도르프가 북경 주재 프랑스 및 러시아 공사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 나라가 조선과 조약 맺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소개하겠다며 푸트의 공을 가로채려 했다.
그 일이 표면화되면서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푸트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보다 조선의 외교권을 전횡하려는 묄렌도르프의 처사가 못마땅했다. 묄렌도르프는 외아문 협판이 된 지 1년이 채 안 되어 조선의 외교와 세관 업무를 혼자서 쥐락펴락했다. 푸트는 조선어 통역인 윤치호에게 그런 문제점을 지적하며 조선의 앞날을 크게 걱정했다.
“무릇 조선의 외교나 세관 등에 관한 일은 모두 다 목 씨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 외아문 관리들은 모두 그의 부림을 받고 있어 내가 비록 외아문에 가서 일을 의논한다 해도 필경에는 목 씨가 결정하게 된다. 내가 불가불 목 씨와 일을 상의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흙이나 나무와 다를 바 없는 귀국의 관원들과 상의한다는 것은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다.
한탄스러운 것은 조선 정부에 사람이 없어 목 씨로 하여금 모든 외교권을 장악하게 했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조선 천지에 목 씨가 있는 것만 알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몇 해가 지나면 조선에 오는 관원이나 상인들은 목 씨와 더불어 일을 의논하고 결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즉 목 씨의 권세는 일취월장하여 천하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목 씨가 곧 조선 왕이요 조선 정부다. 목 씨가 진짜 왕도 정부도 아니나, 그 무진장한 권력으로 하지 못할 바가 없다.’ 고 하게 될 것이다.”
‘목 씨’란 고종이 묄렌도르프에게 내린 이름 ‘목인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조선의 관원들이 얼마나 무지몽매하고 무기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정말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처럼 조선 천지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고 있는 묄렌도르프에게 대항하여 무모하게 대드는 사람이 둘 있었으니, 하나는 조선 제일의 한량 김옥균이었고 또 하나는 허우대가 큰 미국공사 푸트였다. 푸트는 묄렌도르프가 조선의 외교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에 반대했고, 그것도 청나라의 이익을 위해 행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기에 반대했다. 또한 조선 정부의 부탁으로 이미 미국이 주선에 나선 일에 묄렌도르프가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고, 조선의 자주적인 외교권 행사에 청나라를 개입시키려는 처사에 반대했다. 그는 영사관을 찾아온 홍영식에게 그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조선 정부가 발분하도록 촉구하곤 했다.
또 하나 푸트를 괴롭힌 문제는 주한미국공사의 지위를 격하시킨 것이었다. 1884년 9월 미국 정부는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국격이 낮다고 판단했던지 주한미국공사의 지위를 ‘특명전권공사’에서 ‘변리공사 및 총영사’로 격하시켰다. 은둔의 나라 조선에 와서 외교관으로서 조선의 개화에 보탬이 되겠다는 큰 포부를 품고 있는 푸트에게 충격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공사 자리를 내놓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