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파 중심인물들이 머지않아 정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은 친청사대파는 물론 청군 장수들도 알고 있고,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들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친청사대파와 청군 장수들은 자주 회동하며 밀담을 나누고 경비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공사나 영국영사 등 개화파와 가까운 외교관들은 개화파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거사 시기를 늦추라고 충고하곤 했다.
거사일을 10여 일 앞둔 어느 날 김옥균이 영국영사 애스턴을 찾아갔다. 화제가 청불전쟁에 이어 일본과 청국 간의 관계로 넘어가자, 김옥균이 넌지시 거사 문제를 꺼냈다.
“조선의 내정이 날로 위급해지고 있어 청국과 불란서가 싸우는 틈을 타 내정 개혁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공의 생각은 어떠하오?”
“공들이 나라를 위해 결정한 뜻을 살펴 아는 바 있기에 이미 파크스 공사에게 보고한 바 있소. 공사가 내년 봄에 임지로 올 것인데, 그때 공들과 인사를 나누게 될 것이오. 공들은 그때까지 시기를 늦추는 것이 어떻겠소?”
애스턴은 은연중에 거사 시기를 늦추도록 권했다.
파크스(Harry S. Parkes)는 주일영국공사를 거쳐 주청영국공사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로 1883년 11월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이었다. 영사 애스턴의 직접적인 상사였다.
“만약 기다리기만 하다 일은 성사되지 않고 위험이 닥쳐오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오?”
“그것은 내가 답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소. 그러나 나의 얕은 소견으로는 이웃 나라가 귀국을 위해 변혁을 꾀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공은 일본이 그런 일을 할 것이라고 보는 거요?”
김옥균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농담으로 한 말이오. 그러나 나의 얕은 소견으로는 멀지 않은 장래에 귀국에 갑작스러운 변고가 생길 것이니 공들은 모름지기 조심하기 바라오.”
“그 점은 나도 염려하는 바이오. 우리야 조선 사람이니 죽더라도 한이 없겠으나, 만일 변고가 생기게 되면 각국 사람에게 누가 될 것이니 그 점이 실로 걱정이오.”
“만일 변고가 생기면 공들은 어떻게 처신하겠소?”
애스턴 역시 웃으며 물었다.
“만일 변고가 생기면 마땅히 국왕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하겠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오?”
“공도 역시 우리와 같이 처신해야 할 것이오. 외국에 사신으로 나와 있으므로 그 나라에 변란이 생기면 각국 사신은 그 나라 임금과 안위를 같이하는 것이 곧 공법(公法)일 것이오.”
“공의 말씀이 참으로 옳은 것 같소. 그러나 나라 임금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위태로운 형세에 이르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오?”
“그것은 지나친 걱정이오. 사세가 그 정도에 이르면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소. 우리 대군주께서는 각국 사절에 대하여 늘 걱정하고 계시니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위험한 처지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실 것이오.”
거사를 서두르지 말고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김옥균은 그 길로 미국공사를 찾아갔다. 미국공사 푸트를 만나 똑같은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만일 공들이 시일을 끌 수 없는 상황이거든 잠시 국내 산천을 유람하거나 상해(上海)나 나가사키(長崎) 등 해외를 여행하다 몇 개월 뒤에 돌아와서 일을 꾸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나의 진심을 토로하는 바이니 양찰하기 바라오.”
푸트는 간곡한 말로 거사를 미루라고 권했다.
“지금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나 혼자서 한가하게 외국 여행을 떠날 수는 없지 않소.”
김옥균은 푸트의 권고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나는 그동안 평양 등 평안도 일대를 유람하려 한 지 오래였으나 시간이 나지 않아 미루었소. 지금은 추운 계절이긴 하나 춥고 더운 것을 따지지 않고 공을 위해 잠시 다녀올까 하오. 마침 나가사키에 있는 우리 군함을 급히 인천으로 오도록 연락했으니 그 배가 온 뒤 나와 함께 잠시 평양에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합시다.”
푸트는 다시 간곡한 말로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권했다. 진정한 우정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자칫 실패로 끝날 수도 있는 정변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에서였다. 벼슬자리마저 잃어 외로운 김옥균에게 더없이 고마운 말이었다.미국공사 푸트는 의리의 사나이였다. 개화파가 정변을 꾸미고 있음을 훤히 알고 있음에도 친청사대파에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친청사대파가 접근하며 구체적으로 물어도 모르는 척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는 개화파의 진정한 정신적 지지자였다.
그날 김옥균은 미국공사관에서 저녁밥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푸트와 밤늦도록 이야기하다 밤이 깊어서야 귀가했다. 김옥균과 푸트는 그처럼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지기나 다름없었다.
거사 시기를 늦추라고 충고한 사람은 외교관들만이 아니었다. 개화파의 스승 유대치도 김옥균 등을 만날 때마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중요하므로 적절한 때가 오기를 근신하며 기다려야 한다”고 타이르곤 했다. 그 역시 개화파의 실력으로 볼 때 정변을 단행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 보았던 것이다.
드디어 거사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으나 우정총국은 이미 개국했으므로 계속 미룰 수도 없었다. 아무리 늦어도 음력 10월 중에는 단행해야만 했다.
거사의 큰 원칙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민영익, 민태호 등 민 씨 일파와 그들에 추종하는 사대파 몇몇을 제거한 뒤 고종을 설득하여 개화파 중심의 개혁 내각을 구성하기로 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왕궁의 수비는 일본군에 맡기기로 했다. 청군이 개입할 경우에 대비하여 행궁을 창덕궁에서 바로 옆에 있는 경우궁으로 옮기기로 했다. 창덕궁은 너무 넓어 수비하기에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청군과의 교전 등으로 사태가 불리하게 전개될 경우, 왕과 궁인들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는 문제까지도 검토했다.
그처럼 역모나 다름없는 거사계획은 홍영식을 비롯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핵심인사들만이 알고 있는 기밀사항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제대로 성사되려면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협조와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조에에게 거사 계획의 전모를 알리며 이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개화파가 아무리 일본과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그 같은 기밀사항을 터놓고 의논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사일을 확정하기에 앞서 김옥균은 혼자서 다케조에를 찾아갔다. 양자 간에 솔직히 의견을 교환하고 조율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정부의 대조선 정책을 탐지하고 양자 간의 이견을 조율하는 일은 아무래도 사교와 외교에 능한 김옥균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다케조에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두루 알리고, 영국영사 및 미국공사와 나누었던 대화도 그대로 전했다. 그 말을 듣자 다케조에는 김옥균이 교제에 민첩하다며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 이어 김옥균이 민태호, 민영익을 비롯한 민 씨 몇몇과 간신 몇몇을 제거하겠다고 하자, 다케조에는 그 말에도 찬동했다.
“지금 우리가 거행하고자 하는 것은 곧 일의 실마리를 터놓는 것일 뿐이고 끝매듭은 귀국 정부의 선택에 따라 결정돼요. 지금까지 이 사람은 조금도 숨김없이 말했으니 귀공도 조금도 숨기지 마시기 바라오.”
김옥균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공은 어찌 그리 의심이 많소. 내가 아무리 변변치 못하나 이미 공사의 직을 가지고 외국에 주재하고 있기에 그 직책이 매우 중하오. 무릇 외교란 천리만리 사이를 각 정부가 조석으로 연락할 수 없기 때
문에 공사를 두어 정부를 대신하여 외교에 관한 업무를 맡기는 것인데, 어찌 그것을 모르시오.”
다케조에 역시 웃으며 대꾸했다.
다케조에 공사와 거사의 세부 계획을 의논하다
다케조에의 적극적인 자세가 일본 정부의 방침임을 확인하자 김옥균은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세부적인 계획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다케조에의 의견을 물었다. 큰 원칙에는 줄곧 찬성하던 다케조에가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했다. 첫 번째로 이의를 제기한 사항이 어가의 이동이었다. 만일의 경우, 고종이 탄 어가를 강화도까지 모시고 가야 한다고 하자 다케조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대했다.
“대군주 한 분을 강화도로 모셔 가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비빈이나 궁녀들이 동행하면 문제가 커집니다. 만일 동행하던 비빈이나 궁녀들이 청국 병사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소?”
다케조에의 반대에 대해 김옥균은 몇 마디 변론을 펼쳤으나 상대방의 반대가 워낙 완강하자 그 문제는 재론하지 않기로 했다. 고종이 머무르게 될 행궁을 경우궁으로 옮기는 문제도 다케조에가 반대함에 따라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또 일본군으로 하여금 왕을 보호하게 하려면 왕의 친서가 필요하다고 하자, 다케조에는 고종이 글자 한 자만 써 주어도 좋다고 했다. 고종의 친서를 전달할 칙사로는 박영효를 보내기로 합의했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일본공사관이 조선에 있는 일본 상인들로부터 염출하기로 했다.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그처럼 세부 사항까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입을 맞췄다.
“가령 중국 군사가 천 명이 된다 해도 우리 일개 중대의 군사가 먼저 북악을 점거하면 2주 동안은 지탱할 수 있고, 남산을 점거하면 2개월 동안은 수비할 수 있으니 결코 걱정할 것이 없어요.”
다케조에는 그렇게 큰소리쳤다.
“오늘 이후로 이 사람은 귀 공사관을 다시는 방문하지 않겠소. 다만 거사 일시를 정하거나 모의 실행 절차 등을 결정할 경우에는 박영효나 홍영식 중 한 사람을 보내 귀공에게 알리도록 하겠소. 오늘 헤어지면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헤어지는 것이 좋겠소.”
김옥균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케조에는 손뼉을 치고 좋아하며 중문 밖까지 나와 김옥균을 전송했다.
이튿날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핵심 참모 이인종 등을 동대문 밖에 있는 절 탑골승방으로 불러 근일 중에 거사할 뜻을 밝히고 자세한 행동지침을 논의했다. 부평에 있는 신복모도 불러 올렸다. 일본 육군 도야마(戶山)학교 출신인 신복모는 당시 해방총관(海防總管) 민영목 밑에서 교관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개화파 거사의 행동대장으로 활동한 지 오래였다.
행동대장 신복모를 소환한 것은 거사 시기가 임박했음을 의미했다.
한편 우정총국을 개설한 지 며칠 안 되었기에 총판 홍영식은 몹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과 인천 간에 개설한 우편 업무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앞으로 우편 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하려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차적인 목표는 이듬해 1월 초까지 우편의 실시 지역을 부산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우편 사업의 실시 지역을 부산까지 확대하려면 우선 서울에서 부산까지 우편물을 운송할 수 있는 우편선로를 개척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월 중으로 우정총국 사사 신낙균과 일본인 고문 오비(小尾輔明)를 부산으로 내려 보내기로 했다. 부산에 분국이 세워지고 나면 개성이나 평양 등지로 분국을 넓혀 나가는 문제도 아울러 검토해야만 했다.
인천에 있는 일본영사관 내에서 운영되고 있는 일본 우편국을 폐지하는 것도 신속히 처리해야 할 문제였다. 그동안은 조선 정부에서 우편 사업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우편국의 운영에 대해 시비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조선 정부에서 우편 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만큼 더 이상 일본의 주권 침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 우편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우편 업무는 한성·부산 간에 우편이 개통되는 대로 인수하기로 합의했으나, 일본이 그 약속을 지킬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개화파의 결정적인 흠은 인재 부족이다
그처럼 자신이 맡고 있는 개화 업무만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천지개벽을 시도하는 개화파의 거사 계획마저 겹쳐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당시 개화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재 부족이었다. 개화파의 중심인물로는 홍영식 외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들 수 있었는데, 그 밖의 인물은 그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하수인에 불과할 뿐 거사계획에 참여하긴 어려웠다. 한때 개화파로 분류되었던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윤웅렬 등 온건개화파는 그들과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중심인물 중에서도 으뜸은 글 잘하고 말 잘하고 다재다능한 김옥균이었다. 그러나 천하의 재사 김옥균에게도 단점이 있었다. 재사라는 사람이 흔히 그렇듯 말이 앞서는 경향이 있었다. 아이디어가 좋아 일은 잘 벌였으나 마무리할 줄 몰랐다. 경제관념도 희박했다. 말을 잘해 돈은 잘 빌렸으나 갚는 데는 서툴렀다.
또 하나의 중심인물인 서광범은 이조참판 서상익의 아들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호화롭게 살다 보니 사치를 좋아했다. 22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대교(待敎)에 임명되면서 관원생활을 시작했는데, 1882년 두 차례나 일본을 다녀온 데다 이듬해에는 보빙사절단으로 미국을 다녀오다 보니 개화파로 성장하게 되었다. 재주는 인정받고 있었으나 병약하여 대사를 주도해 나가기는 어렵다는 평이었다.
갑신정변과 같은 상전벽해의 변혁을 추구하려면 인재도 많이 모아야 하지만 거사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중심인물인 김옥균에게 그런 능력이 부족해서였을까, 거사 동지인 박영효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12세에 철종의 부마가 되어 남다른 특권과 지위를 누렸기 때문인지 박영효는 보스 기질이 있었다.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거사를 1년 앞두고 교동 저택을 5000원을 받고 일본공사관에 팔았다. 왕실 부마가 되면서 하사받은 집이어서 그의 집은 대지가 2000평이 넘는 대저택이었다. 일본공사관은 그곳에 2층 양옥을 짓고 공사관 건물로 사용했으나 갑신정변 때 성난 주민들이 방화한 바람에 소실되었다.
교동 저택을 처분하기 전까지 박영효는 곧잘 그 집을 개화파의 집회 장소로 제공했다. 그 집은 드나드는 사람이 쉽게 드러나지 않아 개화파에게 더없이 좋은 아지트가 되었다. 압구정에 있는 박영효의 별장도 개화파의 은밀한 회합 장소로 이용되었다. 박영효는 이따금 개화파 사람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며 사기를 북돋우곤 했다.
개화파의 결정적인 흠은 인재 부족이었다. 특히 국정을 담당하는 관원으로서의 경력을 제대로 쌓음과 동시에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는 인사가 거의 없었다. 개화파를 이루고 있는 인사들이 20~30대의 청장년층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개화파의 우두머리인 김옥균은 호조참판까지 올랐으나 일본으로만 나돌아다녔을 뿐 이렇다 할 관직에 앉아 차분히 경력을 쌓을 겨를이 없었다. 박영효는 한성판윤과 광주유수를 지냈으나 그 기간은 1년밖에 안 되었다. 서광범은 승정원 동부승지까지 지냈으나 그 역시 일본과 미국 등지로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개화파 중에서 과거에 급제한 뒤 관원으로서 제 코스를 밟아 착실히 성장한 사람은 오로지 홍영식 하나였다. 그는 18세 때 칠석제에 합격한 뒤 규장각의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 협판교섭통상사무, 병조참판, 우정총국 총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렇게 성장하는 과정에 직무에 충실했기 때문에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총명하면서도 모나지 않은 성품에 대인관계가 좋아 민영익 등 민 씨 일파와도 가깝게 지냈고, 청국 장수 원세개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30세밖에 안 된 탓에 백성들의 신망을 얻기에는 이르다 할 수 있었다.
초기의 개화파 중에는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관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화파가 처음 형성될 무렵에는 김홍집을 비롯하여 어윤중, 김윤식, 윤웅렬, 민영익 등 장래가 촉망되는 관원들이 개화파로 활동하며 개화사상의 도입과 전파에 앞장섰다. 그러다 그들의 지위가 높아져 보수적인 색채를 띠게 되면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온건개화파로 분류했다.
그처럼 개화파는 중심인물이 부족한 데다 명망 있는 인사가 없어 백성들의 신망을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유학과 사대사상에 찌들대로 찌든 유생들은 개화와 개혁을 주장하는 개화파에 뿌리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어 개화파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이래저래 개화파가 택할 수 있는 패는 정변밖에 없었다. 관료로서 장래가 창창한 홍영식의 입장에서 보면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대로 나간다 해도 언젠가는 일인지하에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 자리에까지 오를 것이요 그때쯤이면 소신껏 이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나,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너무나도 야속했다. 또 그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권력과 멀어지고 있는 김옥균이나 박영효 같은 동지들이 쓸모없는 야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을 감지했기에 정변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했던 것이요,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한 이상 반드시 성사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