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 들판에는 일거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하기야 길 떠난 첫날부터 들판에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그 분이, 집에서 싸 보낸 도시락을 한사코 퇴해내는 바람에 비롯된 일이었다.
'사모님 정성을 생각하셔서 이건 잡수셔야지요?'
'싫네, 자네나 먹게.'
'그럼, 사 잡수십시오. 제가 음식점을 찾아보겠습니다.'
'유혹하지 말게. 나는 점심을 먹지 않기루 작정했다구 자네한테 알려 주지 않았었나? 고행을 끝낼 때까지 많아두 하루 두 끼 이상은 먹지 않기루 했네.'
'한 군데 자리를 잡으신 뒤에는 아침 저녁을 잡수시구 점심을 굶으셔두 되지만, 이렇게 온종일 걸으신 땐 아침이나 저녁 중 하나 때를 거르시더라두 점심은 잡수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기진해서 걷지 못하십니다.'
'자네 말에 일리가 있더라두 난 음식을 사먹지는 않겠네. 불교 스님들처럼 얻어먹기는 할지언정 말일세.'
그때 마침 길가 비닐하우스 단지 앞 공터에서 일꾼들이 모여 앉아 점심 먹는 모습이 내 눈에 띄었다.
'어르신. 제가 저기 가서 어르신 잡수실 걸 얻어 오겠습니다.'
나는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듯 말하고는 일꾼들이 점심 먹는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보게. 내가 먹을 음식은 내가 얻겠네.'
그분도 내 옷자락을 잡듯 말하고는 뒤쫓아왔다. 일꾼들 옆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 그분은 나에게서 아주 조금 뒤처져, 그러나 어깨를 서로 댈 듯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섰다. 일꾼들은 숟가락질,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궁금해 하는 눈길로 그분과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분에게 먼저 대답할 기회를 드려야 할지, 그분을 대신해 내가 먼저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우물쭈물 서 있었다.
'저一”
그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잠자코 귀기울였다.
'저一나는 지나가는 사람인데···”
그분은 말의 핵심을 혀에 담아 입 밖으로 내 놓지 못했다. '···배가 고파서 여러분에게 도움을 청할까 해서 왔습니다. 잡수시구 남는 음식이 있으면 도와 주십시오.' 이런 말이 그분 입 안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놓을 마음의 준비가 채 되어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싶었다.
'일자리 구하러 댕기슈?'
일꾼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을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요? ”
내가 대답했다.
'멀쩡한 몸뚱이에 배가 고프다니 일을 하지 않았구려? 농사철이라 들판 여기저기에 발에 걸리적 댈 만큼 일거리가 널려 있는데다가 일꾼이 모자라서 쩔쩔매는 판국이니까 일만 해주면 배고플 틈이 없을 거요. 시장기를 면할 만큼 음식을 드릴 테니 음식값으루 일을 해야 하우. 당신들 같이 멀쩡한 사람들한테 공짜밥을 먹여 줄 순 없다우.”
일꾼들 가운데 늙수그레해 보이는 남자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얼른 구별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일을 해 드려야 하면 해 드려야 하구 말구요. 여러분 처분대루 하겠습니다.'
나도 농담인듯 진담인듯 대꾸했다. 그분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된 사실이 내 기분을 확 틔워 주었다.
'어서 그리 앉으세유.'
음식을 담은 들통들과 술병들과 그릇 수저를 앞에 옆에 잔뜩 거느린 아주머니가 그분과 나를 향해 말했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조금도 섞여 들지 않은 표정이었다.
'고맙습니다.”
그분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땅바닥에는 깔아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풀이 듬성듬성 난 맨 흙바닥일 뿐이었다. 나는 그분이 깔고 앉으실 만한 물건이 없을까 해서 두리번거리는데, 그분은 서슴지 않고 맨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동작은 마치 깔개를 찾는 내 정성에 찬물을 끼얹기 위한 것 같았다. 그 분은 내 성의를 살갗에 달라붙는 거미줄처럼 귀찮게 여기곤 했다.
'나나 내 식솔만 먹구 살자구 농사짓는 게 아니구 어쩌다가 지나가는 길손의 고픈 배두 채워 주자구 농사짓는 거라구 옛어른들은 말씀 하셨대유.”
식사 담당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봉으로 담은 밥그릇과 넘치게 담은 국그릇을 그 분과 내게 전해 주었다.
“옛어른들이 남기신 말씀 중에 그른 것이 하나두 없구말구. 그렇지만 요즘엔 길손이 여간 많아졌어야지? 옛날엔 목마른 길손이 참외밭에서 참외 한두개 따서 먹구 가는 것쯤 우물에서 물 한 모금 퍼먹는 거루 치부했지만. 요즘 그렇게 치부하다간 참외농사 길손들 좋은 일만 돼버려. 길손이 여간 많은가 말여?'
공짜밥을 먹여 줄 수 없다고 했던 늙수그레 한 남자의 말이었다.
'갈 길이 바쁘지는 않으니 서투른 일솜씨두 괜찮다구 받아 주시겠다면 일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고 어리둥절했다.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분이 막일을 하다니···. 두 가지 방면으로 안될 말이었다. 첫째, 내가 일년 동안 계약을 맺은 대장인 사모님이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그분이 밥 한끼 얻어 먹은 대가로 막일을 한다면 사모님은 노하고 나를 용서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그분은 내 어릴 적의 우상이었던 먼 친척아저씨처럼, 내 정신이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나는 마음 속에 그분에 대한 존경심을 쌓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분이 고픈 배를 채운 대가로 막일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일을 거들어 주면 오늘 해 안으루 일을 끝낼 수가 있을 거 같기는 한데···”
늙수그레한 남자가 말했다.
'점심 한끼 먹은 값으루 지금부터 해질 때까지 일을 하라구요?'
내가 그 남자의 말을 막고 나섰다.
'아따, 젊은 사람이 따지기는···. 갈 길두 바쁘지 않을 거 같으니 경험 삼아 농사일 한번 해보시우. 농사일이 어떤 건지 알게두 되구. 농사지어 먹구 사는 사람들 도와 주는 거두 되구. 또 품삯두 받구 말이우. 일 마치구 나면 반날 품삯을 받게 될 거유.'
“품삯 안 주신대두 일을 거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분이 말했다.
'어르신. 농사일이 보기보다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어르신은 새벽부터 줄곧 걸어 오시느라구 지치셨습니다. 지금 다시 농사일을 하시면 힘에 부쳐 몸살나십니다.'
입술에 바른 말이 아니었다. 그분이 몸살을 앓게 되면, 우선 그분이 고달파지는 것은 물론이고, 덩달아 나도 신역이 고되질 테니 말이었다.
'일하는 게 내키지 않거든 자네 혼자 떠나게. 자네는 내게 매여 있지 않구 나두 자네한테 매여 있지 않잖은가?”
그분의 말소리는 정끈을 단칼에 잘라 버리듯 매몰찼다. 나는 서운함이 불뚝 가슴 한구석에 뭉치는 것을 느꼈지만 생각을 가다듬어 흩어버렸다.
'그럼 어르신은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십시오. 제가 일을 하겠습니다.'
“자네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만. 나는 나구 자네는 자네야 자네와 내가 동업자가 돼 함께 사업을 하구 있다구 생각하지 말게. 이제 알아 듣겠나?”
나는 알맞은 대답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분과 내가 주고 받는 말을 일꾼들이 이상하게 들을 일도 생각해야 했다. 나는 그분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대신 싸 가지고 온 도시락 생각을 했다. 일꾼들 앞에 풀어 놓을 걸 그랬나.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배고프다고 밥을 구걸한다면 자칫 미친 사람 취급받기 쉬웠다. 그렇게 되면 도시락은 빨라도 저녁으로나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자, 점심 먹구 담배두 한대씩 피웠으니 일 시작합시다.'
늙수그레한 남자가 말하고는 몸을 털고 일어 섰다. 남자 여자 섞인 여덟명의 일꾼이 우루루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분을 따라 나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파를 뽑아 단으로 묶는 일이었다. 파를 뽑는 일을 하는 사람과 뽑아 놓은 파를 단으로 묶는 일을 하는 사람은 따로였다.
'아무래두 파 뽑는 일보다는 팟단 묶는 일이 좀 수월할 테니까, 나이 지긋한 분은 팟단 묶는 일을 하구 젊은 사람은 파 뽑는 일을 하는 게 좋겠구만…”
늙수그레한 남자가 그분과 나를 새삼스럽게 훑어보듯 하며 말했다.
“어떤 일을 하게 되든지 어르신과 함께 일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전에 농사일을 해보아서 알지만. 농사일에 경험이 없을 그분한테는 파를 뽑는 일이나 파를 단으로 묶는 일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내가 틈틈이 그 분을 도우려면 그분 곁에서 일해야 한다.
'그거야 좋을 대루 하구려'
늙수그레한 남자가 비켜섰다.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자네와 내가 똑같은 일을 해야 할 까닭이 뭔가? 다시 말하네만 자네는 자네구 나는 나야. 저 양반이 시키는 대루 따루따루 일하세. 내 일에 참견하러 들지 말게.”
그분은 역정을 내듯 말했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저는 농사일을 해봤구 어르신은 못해보셨으니 지가 옆에서 일하는 법을 가르쳐 드려야 옳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나만 빼구는 자네 보다 농사일 모르는 사람 없을 것이네. 걱정 말구 자네 맡은 일이나 잘하게. 뭐가 못미더워서 안절부절 못하나? 밝은 대낮에···”
그분은 말끝을 흐렸다. ‘밝은 대낮에 도망이라도 갈까봐 그러는 건가?’ 그분의 잇지 못한 뒷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르신이야말루 왜 그렇게 저를 못미더워하십니까?’ 나는 입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분과 떨어져 파 뽑는 일꾼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파는 함부로 쑥쑥 뽑아 낼 수가 없었다. 앞을 쥐고 뽑았다 가는 잎이 끊어지거나 으깨지기 때문이었다. 파 대가리를 쥐고 뽑아 내야 한다. 일 자체가 크게 힘든다기보다 오랜 시간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 마음 써서 손을 놀리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파를 단으로 묶는 일도 그랬다. 분량을 어지간히 고르게 잡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 지만, 지푸라기로 묶는 일도 초보자에게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냥 묶는 게 아니라 뿌리에 엉겨 붙은 흙을 물에 헹구어 떼어 내야 한다. 그래서 팟단 묶는 일꾼들은 펌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분이 일을 잘해 낼 수 있을까. 힘에 부치는 일을 무리하게 하지는 않을까.
나는 파를 뽑으면서 틈틈이 뽑은 파를 나르는 일을 맡아 했다. 그분의 일하는 모습을 살 펴보기 위해서였다. 몇번짼가 파를 날라다 놓고는 “어르신, 힘들지 않으십니까? 힘에 부치시면 쉬십시오.'
하고 말했을 때. 그분은 모난 눈길로 나를 쏘아보며 역정부리듯 대꾸했다.
“자네. 한시두 나를 감시하지 않으면 안되나?'
'어르신. 그렇지 않습니다.'
“듣기 싫네.”
그분의 옷에는 흙물이 튀었고, 그분의 얼굴은 힘이 부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나는 더는 말을 건네지 못하고 내 일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일에서 놓여날 수가 있었다. 펌푸물에 몸을 씻고 늙수그레한 남자의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분은 저녁을 먹고 나자 곧 길을 떠나려고 했다.
'어르신, 오늘 밤은 이 동네에서 묵으셔야 합니다.”
내가 그분의 앞을 막아섰다.
“나는 가겠네. 자네는 묵게.”
그분은 나를 옆으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비켜서지 않았다. 내가 비켜나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그분의 힘 가지고서는 나를 밀어버릴 수가 없었다.
“자네. 이제는 내 걸음걸이까지 다스릴라구 하나? 썩 비키게.”
그분은 눈을 부릅떠 보였다.
'어르신의 말씀이 명령처럼 제 귀에 들립니다만 이 일에서는 어르신 말씀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제 곧 밤이 될 겁니다. 밤에는 길두 제대루 가지 못하구 힘만 빠집니다. 오늘 밤은 이 마을에서 묵으시면서 편히 쉬십시오. 아직 길 떠나구 만 하루두 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루 일년이 남았습니다. 힘을 아끼셔야 합니다.'
“끔찍이두 생각해 주는 거 같군.'
'어떻게 생각하시든 어떻게 말씀하시든 좋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밤은 이 동네에서 묵으셔야 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단호한 태도에 그 분은 같잖다는 표정이면서도 한편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이 동네 어디서 묵는대는 건가? ”
'동네 사랑방에서 묵어갈 수 있습니다.'
“자네 맘대루?'
나는 늙수그레한 남자를 비롯해 일꾼들에게 물었다.
“오늘밤에 부모 제사를 뫼시러 간대면 떠나야 하지만, 길이 바쁘지 않으면 당연히 묵어야 하구 말구.'
일꾼 하나가 그분과 나를 사랑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늙수그레한 남자는 사랑방으로 떠나기 전 품삯을 계산해 주었다. 그분은 막무 가내로 받지 않고 퇴해냈지만 내가 돈을 받아 챙겼다. 앞으로 돈 쓸 일이 생길 때 사모님이 넣어 준 돈보다는 일해서 품삯으로 받은 돈이 그분 앞에서 떳떳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품삯으로 받은 돈의 액수보다 그 날의 경험은 아주 유익한 것이었다. 앞으로 하루 하루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도 벗어버릴 수가 있었다. 일년 동안 내내 이쪽이 원하기만 하면 일거리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나도 얼마 동안 농촌에서 품을 팔아보았지만 농촌이라고 해서 사시장철 일거리가 널리고 쌓인 것은 아니었다. 겨울철을 빼고 봄 여름 가을 같은 농사철이라도 모낼 때, 논밭 김맬 때, 곡식 거두어 들일 때 같은 농번기가 아니면 외지 일꾼들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농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농촌이 이제 마악 농번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보리베기, 모내기 등으로 앞으로 한 달 동안 농촌에서는 일꾼 구하기가 힘들어질 것이었다.
농사일에 대한 그분의 태도도 내가 불안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분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로 고행길을 떠났거나, 계획을 세웠더라도 조금 늦췄거나 일정을 변경했을 것 같았다. 그분은 농사일을 고행의 한 방편으로 삼는 것처럼 보였다.
“일손이 모자라지 않습니까? 품삯은 받지 않구 거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분은 들길을 걷다가 일하는 농민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농민들은 얼씨구나 하고 그 분의 제의를 받아들이곤 했다.
“저는 다른 분들 품삯의 반만 받겠습니다. 일 거리가 있으면 주십시오.'
나의 제의였다. 농민들은 나와 그분을 번갈아 살핀 뒤 나의 제의도 선선히 받아들이곤 했다.
그분이 과로할까 걱정이 되곤 했지만 그분한테 음식 대접할 걱정과 잠자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 편했다.
잠자리 구하는 일이라면 농사일을 해주지 않아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 알아 낼 수가 있었다. 도시에서 멀어지면서 농촌 마을에는 으레 빈 집이 한두집씩 있곤 했다. 농촌에서 살기 어려운 사람이 버리고 떠난 집이 었고, 도시 사람이 되고 싶어 버리고 떠난 집 이었다.
“지나가는 길손이 하룻밤 묵어 갈라구 그러는데 마을에 비어 있는 집 있습니까? ”
동구 밖에서 마을 사람을 만나 이렇게 물으면 주저 않고 빈 집을 대주곤 했다.
그분은 안방에서 잠을 자고 나는 건너방에서 잤다. 작은 집이어서 아래 윗방밖에 없을 때는 그분이 아랫방에서 자고 나는 윗방에서 잤다.
'자네 나와 한 방에서 자지 왜 따루 자나?'
그분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은 나를 믿게 되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믿지 못하는 데서 나 온 말이었다. 내가 그분을 감시하려면 한 방에서 자면서 감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분의 말 속에 담은 그런 뜻은 어렵지 않게 헤아려졌다. 그분이 나를 못 믿는 일쯤 이제 내 마음에 크게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혼자 방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도 나는 그분이 있는 방 쪽에 귀를 기울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상한 믿음이 내 가슴 한 귀퉁이에 생겨나 있었다. 그분이 내가 잠들기를 기다려 몰래 떠나가거나 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분이 나를, 그분을 시샘하는 자들이 보낸 첩자로 믿고 있는 이상에는 그분은 나를 몰래 남겨 두고 떠나가지는 않으리라는 신념에 가까운 예감은 어디 서 비롯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대로 내 가슴 속에 꽤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할 때 내 머리와 가슴을 차지하는 생각과 느낌은 오히려 그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 집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그 사람들은 왜 이 집을 떠나갔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을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해도 괜찮단 말인가.
초희는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나와 함께 살면서, 방 두셋 딸린 집과 딸 아들 남매를 원했었다.
'남편이 생겼으니까 아이 둘은 낳게 될 테구. 그렇게 우리 네 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갈 집을 장만하자면 얼마나 더 세월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네.”
초희의 그 말 속에는 막막함보다는 모습을 갖추어 가는 희망이 들어 있었다.
'언제쯤이면 우리 식구가 기 펴구 살 수 있는 집을 장만하게 될지 알아맞춰봐요.'
초희의 기분이 평균치보다 높이 솟아오른 날에는 그렇게 불쑥 묻기도 했다. 그것은 대답을 듣기 위한 물음이 아니라 자랑을 하려는 물음이었다.
내 머리 속에, 가슴 속에 엉뚱한 계산이 숨어 있는 것을 깨닫기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모아 놓은 돈이 있구나. 집을 살 때까지 놀려 두지 말고 유익하게 사용하는 것이 어떤가. 어떤가가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였다.
'난 요새 내가 살아 있는 건지 꿈을 꾸구 있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나는 어느날 엄살을 떨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초희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한편 당신한테 미안하기 그지없구 말야.'
'점점? 무슨 소린지 속시원하게 털어놔봐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남자 나이 삼십에 여자한테 얹혀 사는 게 제대루 사는 거야?”
'당신은 실업자가 아니라 쉬구 있는 중이에요. 말하자면 병을 앓구 난 뒤에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몸조섭을 하구 있는 거라구.'
“충분히 쉬었구, 건강두 충분히 회복했어. 여기서 더 빈들거리면 내 눈치 남의 눈치 보게 되구, 결국 주눅들어. 햇볕 속에 나서기 부끄러워 밤에만 나돌아다니구 싶어진다구. 그런 기분이 어느 만큼 이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이것저것 집어던지구 때려부시구 싶어지구 이상한 짓을 하구 싶어진다구.'
'그렇게 되두룩 내버려 두면 안되지요. 그럴 땐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내 일을 가지구 내가 돈을 벌어 당신을 들어 앉히구는, 당신은 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루 살림만 하게 하구 싶다구.'
'난들 왜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겠우?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만으루 고맙구 행복해요. 그렇지만 당장에 그럴 수는 없잖우? 돈두 좀 모으구, 당신두 좀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구 말유. 그런데 당신 혹시 내가 하는 일이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우?'
나는 잠시 생각한 뒤에,
'솔직하게 말해서 그래.'
하고 대답했다.
“내둥내 그런 말이 없더니 왜 갑자기 그래요? 내가 싫어졌우?'
초희의 안색이 침침하게 가라앉으면서 흔들리는 눈길이 내 속마음을 알아내고 싶어 내 얼굴을 쓸고 더듬었다.
'싫어졌으면 말없이 떠나버리지 그런 군색한 얘기 늘어 놓구 앉았겠어?”
“하기야 이 세상에 자기 여자가 술집 작부 노릇하는 거 좋아하는 남자 없겠지. 그걸 좋아 한다면 제 정신 박힌 남자가 아니겠지. 내가 당신한테 털어 놓구 말할께. 내 계획은 일이년만 더 꾹 참구 지낸 뒤 모아진 돈을 가지구 당신 이름으루 집을 사구 나서, 나는 술집 고만두구 들어앉아 아이 낳아 기르며 살림만 하구, 당신이 직장에 다니며 생활비 벌어오는 거였어요. 그런데 내가 지금 술집을 고만두면 죽두 밥두 안되잖우?'
'일이년을 더 당신이 술꾼들한테 술시중 들구, 술주정꾼들 희롱거리 되는 걸 참구 견디란 얘기야? 남자의 자존심과 체면으루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일이야.'
나는 내 말발이 서는 것을 느꼈다. 내 말을 그르다고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었다.
“난 당신과 만나서 살게 된 뒤루 술자리에서 아주 몸조심하구 있어요. 주인 마담한테 주의를 들을 정도루 말예요. 절대루 당신 앞에 양심 가책 느낄 짓 하지 않을 테니까 믿구 참아 줘요. 모두 당신과 내 앞날을 위해서잖아요? 당신이 당장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두 아니구, 설혹 일자리를 얻는대두 우리 계획을 이룰 만큼 수입이 생기는 것두 아니잖우? 안 그러우. 여보?”
조희는 저자세가 되어 호소하듯 구슬리듯 말 했다.
'당신과 내가 사업을 하면 되잖아?'
이윽고 나는 마음속 깊이 꿍쳐 두었던 속셈을 슬쩍 드러내 놓았다.
“사업? 무슨 사업?”
“난 미장기술을 가지구 있어. 철물점을 겸한 물력가게를 차리구, 공사를 얻어 돈을 버는 거지. 당신은 주문받구 돈 계산하는 일 맡구, 난 일 맡아 일꾼들 부리며 공사하는 걸 맡는 거야 당신은 술집 벗어나서 좋구. 나는 할 일 생겨서 떳떳하구···. 내 생각이 어때?'
초희는 입을 다물고는 한참 동안이나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철물점을 차린다면 집 장만할라구 저축하는 돈 꺼내야 되는 거지요?'
초희가 조심조심 물었다.
“그 돈을 축내자는 게 아니구 불리자는 거니까. 어차피 은행에 저금해 두는 걸 텐데 일이 년 둬봤댔자 이자가 몇푼 늘겠다구? 철물점, 물력가게를 차리면 집 장만하는 시기두 훨씬 앞당길 수 있을 거야.'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해요.”
초희는 이윽고 승낙했다. 자신 있으면, 이라는 다짐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생각하기 따라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철물점과 물력가게는 손해날 게 없는 장사야. 생각해봐. 철물은 아무리 오래 둬두 상하거 나 썩지를 않잖아? 물력가게두 그래. 공사 주문을 맡으면 그 규모에 맞게 일꾼을 불러다가 일해 주구 공사비 받아 일꾼들 품값 나눠 주구 나머지 챙기면 되는 거야 돈 들어갈 거라구는 가게센데 가게세두 못낸다는 건 생각할 수두 없잖아?'
'그럼 가게를 얻어야겠네요.'
초희와 나는 가게를 얻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빛을 보이던 초희는 막상 가게를 얻으러 나서자 나보다 더 신이 나고 적극적이었다. 칼로 끊어버리듯 술집과 발을 끊었다.
“술집 종업원 생활이 내가 타구난 팔잔가, 하구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가봐. 괜찮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술집 벗어나는 게 내 하나밖에 없는 소원이면서두 정말 그런 날이 오긴 올래나, 꿈 같은 생각일 테지, 했는데 정말 그 꿈 같은 일이 일어났잖아? 여보, 가게 차리구 나서 우리 결혼식두 올리구 혼인신고두 해요. 당신 생각 어때요?'
초희는 소녀처럼 조잘거렸다.
'물론 그래야지. 열씸히 돈 벌어서 여보란 듯이 살아보자구.'
자금도 아주 넉넉한 것은 아니어서 돈에 맞추려고도 했지만, 경험도 없는데다가 빨리 가게를 얻고 싶은 생각에 앞 뒤 옆을 차근차근 살펴보지 않고 덜컥 결정해 버렸다. 경기도와의 접경지역이었다. 주택들이 아주 밀집해 있지는 않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가게를 얻고 내부를 철물점 차리도록 고치고, 간판을 만들어 붙이고, 이윽고 철물 도매상에서 철물을 주문해다가 진열했다. 가게를 얻고 나서 개업하기까지 보름이 걸렸다. 개업식하는 날 술과 안주를 장만해 놓고 동네 사람들을 청했다.
'가게를 차렸으니 축하하구 잘되기를 빌겠지만, 좀더 살펴보구 정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화장지를 사 들고 찾아온 통장의 말이었다.
'찾아와 주시구 격려를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좀더 살펴보구 정했으면, 하구 말씀 하신 뜻은 어떤 겁니까?'
나는 마음이 찜찜해서 물었다.
'동네두 과히 크지 않은데 철물점은 벌써 셋이나 들어와 있어요.”
통장이 대답했다.
'철물점이 넷이면 너무 많겠습니까? 동네가 커지구 있는 것 같던데요?'
'글쎄一 오래 참구 견디면 모를까, 철물점 셋만으루두 일거리가 넉넉치 않다구 하던데···'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면 손님들이 찾아 주시겠지오 뭐.”
나는 자위하듯 말했다. 그리고 참고 견디는 일이라면 나도 누구 못지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가게문을 열었고, 밤 열한시가 되어서야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가게 안팎을 수시로 청소했다. 공사 맡을 경우를 생각해 일꾼을 소개해 주는 복덕방과도 연락을 취해 두었다.
그런데 손님이 오지를 않았다. 못, 송곳, 개줄, 빗자루 따위 자자분한 물건을 찾는 손님은 가물에 콩 나듯 찾아왔지만, 집수리 따위 굵직한 공사를 해달라는 손님은 없었다.
'썩는 물건은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 자위했지만 기분 좋은 노릇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초희가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