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의 세계를 향해
강원도 인제 원대리에 자리한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을 찾아가는 길이다. 언제부턴가 운전하는 내내 뭔가를 흥얼거리고 있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왔던 ‘라라의 테마곡’이다. 노랫말은 모르지만 기억나는 것은 남성 가수의 목소리가 아주 부드럽고 감미로웠다는 것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고개나 넘었을까? 구중궁궐 같은 산허리를 따라 굴곡진 길을 계속해서 달린다. 이른 아침인 탓에 오가는 차도 별로 없다. 비탈진 길모퉁이에 상상 이상으로 넓은 주차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깊은 산속에 어쩜 이렇게 넓은 주차장이…’ 듣는 사람은 없지만 너른 주차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자작나무 숲이 있는 원대리는 한자로 ‘집터’를 뜻하는 ‘院垈里’이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 1990년부터 산림청이 국유림 138ha(41만7천 평)에 자작나무 1~2년생 묘목을 본격적으로 심었다. 모두 41만4천 그루를 심었으니 자작나무의 집터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자작나무를 만나려면 3.2㎞의 임도를 걸어가야 한다. 원래 인제 사람들이 양양으로 소금을 사러 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길이 완만해 걷기에 수월하다.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면 수묵화를 펼쳐놓은 것처럼 농담이 서로 다른 산세가 그려진다. 그 사이사이 깡마른 나뭇가지들이 처연한 모습으로 겨울 한 가운데 서있다. 이따금씩 숨을 돌려가며 50여분을 걸었다. 얕은 길을 내려서자 분지처럼 옴팍하게 파인 너른 터가 나온다. 사방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덫에 걸린 듯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 채 ‘웅웅’ 거린다. 주변에 벤치도 있고 화장실도 있다. 오른쪽에는 겹겹이 층을 이룬 산들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우뚝 서있다. 눈을 돌려 반대편을 살펴보니 몽환의 신세계가 기다린다. 드디어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에 도착했다. 거인이 큰 삽으로 흙을 파낸 것처럼 움푹 파인 숲속에 새하얀 수피를 뽐내는 자작나무가 빼곡하게 자리를 잡았다.
영혼을 표백하는 순백의 절경
자작나무는 사계절 특별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중에서 겨울 자작나무는 백미에 꼽힌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북유럽의 깊은 숲속이나 광활한 시베리아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래서 더욱 몽환적인 매력이 있다. 백야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닮았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뽀얀 속살을 드러낸 순결한 미녀가 한둘이 아니다. 미끈한 몸매 또한 여느 나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다. 탁했던 영혼마저 표백해 줄 것처럼 순백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한 폭의 수채화’라는 식상한 표현을 하지 않으려했건만 도리 없이 하게 된다. 운전하는 내내 영화 <닥터 지바고>의 테마곡을 흥얼거렸는데 그 느낌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진 셈이다. 숲에 들어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자작나무 우듬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자작나무 수피처럼 새하얀 구름이 나뭇가지에 걸렸다가 두둥실 날아간다. 하늘나라 천사가 땅에 빨대를 꽂고 물을 흡입하기 위해 자작나무를 심었을까? 아니면, 창조주가 땅과 하늘이 소통하는 통로로 삼기 위해 자작나무를 심었을까? 별의별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자작나무는 불에 탈 때 ‘자작자작’소리를 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키는 20~30m정도 자라는데 원대리 자작나무가 딱 그 키만큼 자랐다. 그래서 이제는 몸통을 키울 차례라고 한다. 하늘 높은 줄만 알고 자랐으니 땅 넓은 줄도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숲에는 모두 세 개의 탐방로가 있다. 1코스 자작나무코스(0.9㎞)는 자작나무숲을 탐방하고, 2코스 치유코스(1.5㎞)는 자작나무숲을 지나 혼요림과 천연림을 만난다. 3코스 탐험코스(1.1㎞)는 숲 속 계곡과 임도를 함께 탐방하는 코스이다. 그런데 눈이 온 뒤에는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웬만큼 걷다보면 코스가 겹치기 때문이다. 코스를 돌아보는 순서는 1에서 3코스까지 걷고난 뒤에 원대임도를 따라 하산하면 된다. 이렇게 전체 코스를 다 걸으면 약 10km에 달한다. 길이 순탄해서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숲의 중심은 유치원생들을 위한 숲속교실이다. 한편에 자작나무로 만든 낭만적인 움막이 있다. 그 옆에는 역시나 자작나무로 만든 전망대가 있다. ‘하늘만지기 전망대’ 이름만큼이나 전망대에 오르면 자작나무와 눈높이를 맞춘 채 하늘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향한 속삭임
숲에 있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들이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답답했던 생각들이 정리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자작나무는 경제적 가치보다 정서적 가치가 더 크다. 삭막한 도시생활자들에게 숲의 가치는 계량화할 수 없는 감성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자작나무의 순결함은 파란 하늘을 향한다. 나무의 근원은 비록 흙에서 나왔으나 나무가 향한 곳은 언제나 높은 하늘, 밝은 빛이다. 하늘이 파랗지 않다면 모든 풍광이 흑백사진으로 처리될 것 같다. 나무가 그렇고, 숲이 그렇고, 땅이 그렇다. 겨울 한가운데 서서 병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하늘의 빛을 전하는 자작나무가 고맙다. 그 모습이 순교자처럼 의연하다. 자작나무가 귓전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다. 그것은 세미한 울림이다. 하늘을 향한 자작나무의 순결함은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라 말한다. 흙탕물 같은 세상에서 찌들대로 찌든 슬픈 과거를 숲에 던지라 한다. 네가 떠나고 나면 순백의 눈으로 덮어 주겠단다.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도 내려놓고 가라한다. 삭풍이 불어와서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날려 버릴 거란다. 발목을 잡고 있는 과거의 상처도 묻고 가라 한다. 발목보다 깊이 쌓인 눈이 상처를 덮어줄 테니.
젊은 연인들과 가족들 때로는 혼자서 숲을 찾는 이유는 자작나무의 속삭임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소리에 집중해보자. 나를 향한 속삭임을 듣기 위해서.
자작나무 숲에는 눈이 잘 녹지 않는다. 올라가는 건 큰 문제가 없지만, 내려올 때가 특히 문제다. 때문에 스틱이나 아이젠 등 겨울등산 장비를 챙기는 게 좋다. 자작나무 숲의 진면목을 보려면 정오경에 숲에 도착해야 한다. 주변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 시간이 늦을 경우 산 그림자가 져서 순백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즐길 수 없으니 명심할 것.
모더니스트 시인의 삶을 엿보다
산골오지마을에서 멋쟁이 모더니스트가 태어났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 당대 시인 중 최고의 멋쟁이로 통하는 시인 박인환이다. 열한 살 때 도시로 나가서 펜으로 서울 명동을 휘어잡았다.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더욱 안타깝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처럼 주옥같은 시가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를 위로한다. 인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인제교차로 삼거리 방향으로 걸어가면 시인 박인환 거리와 문학관이 있다. 짙은 눈썹, 오뚝한 코, 바람에 휘날리는 넥타이…. 흉상만 봐도 당대 최고의 멋쟁이임을 짐작할 수 있는 동상이 먼저 반긴다. 옆에는 대표작 <목마와 숙녀>를 형상화한 목마도서관이 있다. 박인환은 195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다. 대표작으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이 있다. 문학관은 1950년대 명동거리를 재현해 놓았다.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마리서사’, 모더니즘 시운동의 시초가 된 선술집 ‘유영옥’ 해방이후 명동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봉선화 다방’ 등 시인과 연관된 당시 명소들을 사실감 있게 재구성했다.문학관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촌민속박물관이 있다. 깊은 산속 오지에 살았던 인제사람들의 삶을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워낙 눈이 많고 겨울이 긴 곳이다 보니 주거환경이나 음식, 의복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당시에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었을 음식들이 지금은 건강음식으로 대접받는 대목에서 헛웃음이 나온다. 자연과 가깝게 생활했던 그들의 삶이 지혜롭게 여겨지는 건 우리가 너무 자연에서 멀리 떠나 있기 때문 아닐까.
Information
맛집
인제는 우리나라 황태 생산의 80% 가량을 차지할 만큼 황태가 유명하다. 용대리황태덕장에는 황태 맛집들이 많이 모여 있다. 뽀얀 국물이 우러난 황태해장국은 무와 황태, 콩나물을 넣어 시원하다. 황태구이는 포슬포슬한 속살과 구수한 황태의 식감을 즐길 수 있다. 각종 해산물을 황태와 함께 요리한 황태찜요리도 먹음직하다. 황태강정은 황태에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뒤 매콤달콤한 양념을 묻혀 강정으로 만든 것으로써 남녀노소 누구나 반할 맛이다. 3대 산골황태식당(t.033-462-9361)이 황태강정을 특히 잘한다. 부흥식당(t.033-462-1900)과 털보네 황태(t.033-462-4825)도 손님이 많다.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산 75-22인제국유림 관리소 t.033-460-8031박인환문학관
강원도 인제읍 상동리 415-1
t.033-462-2086
인제산촌민속박물관
박인환문학관 옆 건물 t.033-460-20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