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자 며칠 뒤에 진사 황현은 아편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그는 절명 시 4수와 유서를 남겼다.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 머리가 되기까지 /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지만 여지껏 그러지를 못했어라. /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어 가물거리는 촛불만 하늘을 비추네.
요사스런 기운에 가리어 임금별 자리를 옮기니 / 구중궁궐은 침침해서 햇살도 더디 드네. / 조칙도 이제는 다시 있을 수 없어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가닥을 모두 적시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 버렸어라. /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 보니 /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내 일찍이 나라를 버티는 일에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었으니 / 겨우 仁을 이루었을 뿐 忠을 이루진 못했어라 / 겨우 尹穀을 따른 데서 그칠 뿐 / 陳東을 못 넘어선게 부끄럽기만 하여라.'
그가 쓴 절명시이다.
황현은 평생을 벼슬을 하지 않고 향촌에 묻혀 살았다. 따라서 망국의 책임이 그에게는 없을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나라를 위해 한 일이 하나도 없음을 부끄러워하며 결국 죽음을 택했다. 힘든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글 아는 사람, 즉, 선비의 도를 다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면서도 그는 결국 선비의 도를 다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지금 경제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들리는 소리는 모두 '네 탓이오' 하는 구차한 변명뿐이다. 누구 하나 국가 부도의 위기까지 가게 한 데 대해 목숨을 끊기는커녕 쥐꼬리만큼의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도 없다. 도대체 이 시대에 진정한 선비는 없는 것일까?
관직 포기하고 독서와 제자 양성에 전념
梅泉 黃玹은 1855년(철종 6년) 전라도 광양현 서석촌에서 몰락 양반 黃時默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세종대 명재상인 황 희의 후손이었지만 17세기 이후 200여년간 벼슬 길이 끊겨 몰락하였다가 조부 때부터 상업으로 일어난 집안이었다. 부친은 영특해 보이는 아들 황 현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되찾아 보려고 선생을 초빙하여 가르치고 1천권의 서적을 구입해 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7세부터 향리의 서당에 다니며 열심히 학문을 닦던 황현은 20세에 더 높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이건창·강위 · 김택영·정만조 등과 교유하였다. 당시 대문장가였던 이건창은 황현의 시문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황현은 개항을 전후해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내외의 상황을 가까이 접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으며 그것들을 틈틈이 기록하여 뒤에 저술활동의 바탕이 되었다.
1883년(고종 20년) 황현은 고종의 특명으로 시행된 保擧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초시 초장에 제일 높은 점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가서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밀려나자 남은 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과거 급제가 부친의 간절한 바람이었지만 모멸감과 실망감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1886년 구례 만수동 지리산 밑으로 이사하여 독서에 전념하던 황현은 부모의 간절한 뜻에 따라 1888년 다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성균관 생활을 하던 그의 눈에 보인 현실은 갑신정변 이후 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간섭 속에서도 부정부패와 가렴주구로 썩어만 가는 민씨 정권의 모습뿐이었다. 결국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구례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安室이란 서재를 짓고 3천여권의 책을 벗삼아 독서와 제자 양성에 전념했다.
그 사이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갑오경장 등 조선의 역사를 뒤바꾸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그는 망국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梅泉野錄」과 「下記聞」, 「東匪紀略」 등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택영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가정 형편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때 황현은 「五哀詩를 지어 조약에 반대하며 순국한 민영환 · 조병세 · 홍만식 등의 애국충정을 기렸으며, 또한 중국 역사에서 난세에 처해 지조를 지켰던 고염무·매복 등 10인의 초상과 행적을 병풍으로 만들어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나라가 망하자 그는 자신의 집에서 자결하였다. 유서에는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담담히 밝히고 있다.
'국가가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에 이제 최후로 망국의 날이 왔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국가를 위하여 殉死한 사람이 없다고 하니 어찌 통탄 할 일이 아니냐. 나는 黃泉에 대하여 바른 덕을 책임질 필요는 없으나 평생을 독서한 선비이기에 그 뜻을 남기기 위하여 길이 잠들고자 한다. 너희들은 지나치게 애통해 하지 말라.”
『매천야록』 등의 명저 남겨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가 살았던 시기는 격동의 시대인 동시에 절망의 시대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침략의 고삐를 멈추지 않았지만 정권은 무능하였고 거기다가 심하게 부패하기까지 하였다. 뜻있는 지식인은 개혁을 요구하고 민중들은 총칼을 들고 저항했지만 결국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지는 못하였다.
현실 참여 의지는 강했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못하고 위선과 허위를 극도로 혐오했던 황현이 부패한 정권 아래서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고향으로 내려간 뒤 당시 대신이었던 신기선•이도재와 친구인 이건창•정만조 등이 서울로 올라와 같이 일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어찌 나를 귀신 같은 나라의 미치광이 틈 속에 끌어 들여 같이 미치광이가 되라 하느냐.”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렇다고 지리산 산수 좋은 곳에서 현실을 외면한 채 산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몸은 산골벽촌에 있었지만 도수 높은 안경 뒤의 날카로운 눈빛은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냉엄한 국제 현실 속에서 천천히 침몰해 가는 조국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력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하기도 했지만 그는 망국의 과정을 역사로 기록하고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그의 희망을 그 기록 속에 담는 길을 택하였다. 「매천야록」과 「오하기문」 등 그가 남긴 명저들은 바로 그 산물인 것이다.
그가 맨 먼저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오하기문」은 19세기 당쟁의 폐단, 세도정치의 폐해, 동학농민전쟁, 일제의 침략, 의병전쟁 등을 다루고 있는데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에 관한 내용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동학농민전쟁에 관한 기술이 제일 풍부하고 자세하다.
「매천야록」은 「오하기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 자료들을 추가로 수집하여 정리한 것이며 「동비기략」은 「오하기문」의 내용 가운데 동학농민전쟁에 관한 것만 추려 보충한 것이다. 말하자면 「오하기문은 이 두 책의 초고본의 성격을 지닌다고도 볼 수 있다.
황현의 대표적인 저서라 할 수 있는 「매천야록」은 1864년 고종 즉위부터 1910년 일제의 병합까지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정사라기보다는 야사에 가깝다. 사실 국내외의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왕실 내부의 갈등, 매관매직의 실상, 사회 지도층의 윤리적 타락, 창녀촌의 개설 등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궁벽한 시골의 선비가 어떻게 이런 책을 썼을까 신기하게 여길 정도이다.
그렇지만 황현은 서울 생활에서 기록해 두었던 것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입수한 자료, 구독했던 신문과 관보 등을 이용하여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당시의 실상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비판과 해결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야사이면서도 정사보다 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망국의 원인으로 내부적 모순을 지적
그러나 그의 서리발 같은 비판도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황현은 개화를 開物化民', 즉, 문물을 개발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으로서 동양의 治道와 같다고 보았다. 동양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東道西器論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는 당시 갑신정변, 임오군란, 동학농민전쟁 등 급진적인 개혁운동에 대해 모두 비판적이었다. 개화당을 諸賊, 黨' 등으로 표현하면서 갑신정변을 정권 탈취 수준으로 간주하였으며, 동학농민군은 '東匪; 匪賊', 심지어는 '賊軍'으로 지칭 하면서 철저히 섬멸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갑오개혁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보자는 것이 황현의 개혁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의 저술 곳곳에서 보이는 위정자들의 실정과 부정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체제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민본적인 유교 지배 질서로 돌아가자는 것과 다름 아니다.
망국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그는 망국의 일차적인 원인으로 외세의 침략보다 부정부패 등 국내적인 요인을 들었다. 이러한 재앙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모순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곪아 터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이 잘못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세계 자본주의의 팽창,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볼 때 조선이 제국주의 열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역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 나라가 부패의 몸살을 앓고 있으면서도 힘 없는 자는 몇 십만 원만 먹어도 쇠고랑을 차는 반면 수천억 원을 먹은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수억 원을 먹은 국회의원, 수천만 원을 먹은 검사·판사 등 힘있는 자들은 멀쩡하고, 나라를 망쳐먹은 자들이 오히려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큰소리 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황현 같은 선비가 다시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일까?
필자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뻔뻔스러운 이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다. “다시 선비를 읽으라. 그래야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고,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