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팔관회, 연등회가 국가적인 행사가 되다시피 할 정도로 흥성했던 불교는 조선에 들어서서 신흥사대부들이 세운 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박해를 받게 되었다. 조선 건국의 이념적 기틀을 마련했던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석가모니는 왕 노릇도 사양했고, 아비의 자리를 이어받지 않고, 또 아내도 버리고 집을 나왔으니 이른바 군신, 부자, 부부의 도리를 저버렸다고 불교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불교는 혹세무민(惑世民)하는 사교(邪敎)라는 것이다. 나아가 만약 불교의 교리대로라면 남녀가 교합하지 못하니 인구가 늘지 않을 것이요, 남은 사람도 일하지 않고 빌어먹으니 결국은 모두 굶어 죽어 사람의 씨가 마를 것이며, 더구나 군대도 가지 않아 나라에 보탬이 되지 않으니 중들은 한 마디로 천하의 '큰 좀' 이라는 것이다. 새로 임명된 수령이 왕에게 하직인 사를 올릴 때에는 고을 원으로서 명심해야 할 일곱 가지일,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왕 앞에서 외우곤 하였는데, 호구를 늘리고 농업을 흥성하게 하고 군비를 튼튼히 하는 일은 수령칠사 가운데서도 아주 중요 한 일이었다. 불교는 여기에 정면으로 배치되었으니 중들은 언제나 밉살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정선의 「백천교」 부분에 보이는 금강산의 남여승(藍輿僧)
건국 초부터 도첩제 시행
그래서 승려들에 대한 대우는 현격하게 달라졌다. 건국 초부터 도첩제가 시행되어 중노릇을 하려면 나라에서 발급하는 승려자격 증명서인 도첩(度牒)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도첩을 받으려면 엄청난 재물이 들어갔다. 또한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서울 도성 안에는 중들이 드나들지 못 하도록 법으로 금해 놓았다. 사실 도성 안에는 중이 머물 절도 곧 없어졌으니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의 원찰(願刹) 흥천사(興天寺)와 세조가 지은 원각사(圓覺寺)도 16세기 중엽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흥천사는 연산군 때와 중종 때 두 차례의 화재로 사라져 버렸고, 원각사도 연산군 때에는 기생 양성소로 변해 버렸다가, 그나마 연산군이 쫓겨난 뒤에는 억울하게 헐린 민가를 복구하는데 쓸 재목을 얻기 위해 아예 건물마저 헐어버렸으니 빈 터에 탑과 비만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되었다. 가까스로 남은 것이 비구니들이 있던 자수원(慈壽院)과 정업원(淨業完)이었는데 이것마저 17세기에 들어 완전히 폐지되고 비구니들은 성 밖으로 쫓겨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라에서는 사실상 승려들이 조용히 불도를 닦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실제로는 온갖 잡다한 일들을 떠맡겨 부려먹었다. 그 중에 가장 큰 일은 종이를 만드는 일이었다. 닥나무를 베고, 쪄서 껍질을 벗기고, 흐르는 맑은 물에 불리고, 잿물에 넣어 삶고, 다시 으깨고, 한지를 뜨는 일은 여간 번잡 하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 힘든 일이 절에 떠넘겨 졌으니 조선의 종이 절반은 절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중들은 도망을 하고, 절이 아주 망해버리는 일이 간간이 일어났다. 종이 만드는 일이 절에 맡겨진 것은 종이의 재료인 닥나무가 산에 많기도 하려니와 펄프를 만들 때 흐르는 맑은 물이 필요한데 그런 장소로는 절이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종이 만드는 조지서(造紙署)가 세검정 쪽에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조선조의 문예부 흥기라 할 만큼 출판사업이 활발해져서 종이가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정조는 선비들이 게을러져서 누워 서 책을 보기 위해 크기가 작은 당판본(唐版本: 중국책)을 수입해다가 본다고 자주 책망했으므로 커다란 책을 많이 만들다 보니 종이가 더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종이를 만드느라 하도 부산하여 그때 만든 종이를 '헐레벌떡 종이'라 불렀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온갖 힘이 드는 막노동 일은 중들 몫이었다. 궁궐을 지을 때에도 동원되고, 강화도의 돈대(數臺)를 쌓는 일에도 동원되고, 성을 쌓는 일에도 동원되었으니, 특히 산성 쌓는 일에는 어김없이 중들이 동원되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살겠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늘 산길을 오르내리겠다. 더군다나 여색을 멀리하여 다리가 후들거릴 일도 없으니 돌이나 재목을 끌고 산판을 오르내리는 일에는 중들이 제격이었다. 돌을 떠내고, 떠낸 돌을 칡줄에 매어 산꼭대기로 나르는 일에 동원되다가 죽고 다치는 중이 적지 않았다. 「난중일기」에서도 이순신이 읍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는 일에 중들을 동원했는데 일을 시원치 않게 한다고 하여 우두머리 중을 매를 때리는 대목이 등장한다.
목수 노릇도 힘들었다. 신관 사또가 부임하면 관아를 수리하고 미장이 일을 하고 도배를 하느라 중들이 징발되었고, 양반들이 정자를 짓거나 별채를 지을 때에도 동원되었다. 이것뿐이 아니라 누룩, 송홧가루, 산나물에 각종 짚제품도 절에 맡겨졌으니 짚신, 미투리에 자리는 물론이요 무과 시험 볼 때에 필요한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만드는 일도 절에 떠넘겨졌다.
임진왜란 뒤로는 상황이 또 바뀌었다. 사실상 중들이 그나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왜란 때였다. 유명한 서산대사, 사명당, 처영, 영규 등이 의병장으로서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는 데 크게 일조하고 나서는 나라에서도 이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법맥 (法脈)이 끊길 정도로 피폐된 불교가 그나마 다시 일어서게 된 것도 그 덕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것이 또 다른 화근거리였다. 이제부터는 아예 승군(僧軍)으로 상비군을 만들어 산성을 지키도록 한 것이다. 결국 산에 성을 쌓으면 성 쌓는데 동원되고, 성 안에 절 짓는 데 동원되고, 마지막에는 성을 지키는데 동원된 것이다. 그래서 서울의 외곽방어선인 북한산성에 13개, 남한산성에 7개의 절이 지어졌고 전국에서 '의승(義僧)이라는 이름이 붙은 승군이 징발되어 이곳에 교대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내고 보따리 빼앗긴 꼴이 되고 말았다.
신윤복의 풍속화점 중 「노상탁발 (路上托鉢)」
‘삶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는게 뭔지’로
나라에서 그러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생들과 양반 토호들의 행패는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못된 유생들이 떼로 몰려와 기물을 부수기도 하고 불경을 제멋대로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관아에 종이 바치는 일도 벅찬데 지방에서 힘깨나 쓴다는 토호 양반들도 가세하여 종이 상납을 강요하니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런 일화가 생겨났다. 어느 양반 문중에서 족보를 간행하기 위해 가까운 절에다가 종이를 만들어 내라고 하여 절에서 문중 사람들을 초청하여 의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한 기골이 장대한 중이 “모씨 가문 보지(譜紙)는 천하에 좋은 커다란 보지라서 우리가 정성껏 해주지 않으면 해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며 은근히 야유를 하자 양반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 채 항변도 못하여 일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절은 일종의 두부공장 노릇을 했다. 지금은 콩나물과 함께 두부는 서민들의 요긴한 찬거리가 되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두부는 별미여서 사대부들도 두부를 먹을 때에는 벗들을 불러 모아 함께 두부 파티를 하곤 했다. 왕릉 근처에 죽은 왕과 비를 위해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도 제를 올릴 때에 두부(泡)를 만들어 대는 조포사(造泡寺)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양반들은 종을 데리고 말에다 콩을 싣고서 절에 올라가 그곳에서 두부를 만들어 먹으며 놀았다. 중들로서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으나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임진왜란 중에 오희문이 쓴 일기 「쇄미록」에도 섣달그믐에 종에게 콩을 주어 두부를 만들어 오라 했는데 중들이 거부하고 불손한 말을 했다하여 분한 김에 사또에게 일러 중들을 잡아들여 발바닥을 때리려는 대목이 나온다.
또 절의 승려들을 괴롭힌 것은 절이 놀이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도 지방의 관광 코스에 절이 꼭 끼듯이 예전에도 절은 산수를 즐길 수 있는 좋은 휴양지로 지목되었다. 절은 단순히 불도만 닦는 곳이 아니라 사대부들이 친구들과 함께 기생들을 불러서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연회 장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하찮은 시종들조차 짚신을 내놓으라고 토색질을 하고 행패를 부렸으니, 양반의 가마를 메고 온 가마꾼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행차를 맞이하는 중들의 머리를 매만지며 '그것 참 잘 밀어버렸네” 하고 조롱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양반 관료들이 휴가를 얻어 절에 가서 질탕하게 잘 놀고 나서는 '반나절 한가로움을 얻었다.”고 시를 짓자 곁에 있던 중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리께서는 반나절 한가롭게 즐기셨겠지만 노승은 하루는 차일(遮日)을 치고 준비하고, 하루는 잔치를 차리고, 하루는 청소를 하느라 사흘 동안 바쁘게 되었습니다.” 하더란다. 더군다나 사또가 한 번 절에 놀러오면 수행 인원도 많고 잔치도 화려해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의하면 한 번에 절간의 반년 경비가 들어간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수령이 값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중간에 아전들이 떼어 먹어도 하소연할 길이 막막하였다.
18세기 오명현의 점괘도 : 떠꺼머리 총각에게 점을 쳐주는 노승
깊은 산속이라고 월등히 나은 것도 아니었다. 3대 명산이라는 금강산·묘향산·지리산의 승려들은 남여승(籃輿僧) 노릇을 하느라 어깨가 휘었다. 양반들이 산을 주유할 때에는 남여를 타고 다니는데 이를 그곳 중들에게 메게 한 것이다. 특히 사대부들이 강원도에 수령으로 부임하면 친지들을 초대하여 천하제일 명산이라는 금강산에 놀러 가는 일이 자주 있어 장안사·표훈사·유점사의 중들이 수시로 징발되었다. 이런 악습은 16세기 양사언이 회양부사로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는데 당시의 그림에도 뚜렷이 남아 있다. 북학파 실학자로 이름 높은 박제가도 묘향산 구경을 갈때 남여 위에 올라 앞에서 들채를 메고 가는 중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 어깨는 들채 자국으로 움푹 파이고 등줄기는 굵은 땀방울로 흥건하여 보기에도 안쓰러워서 그 때마다 잠시 쉬었다가곤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환경에서 참선이 될 리가 없었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인 사색을 할 겨를도 없이 '사는 게 뭔지!” 하는 한숨부터 나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불도를 닦으려는 스님들은 절은 비워두고 더 깊숙한 산 속으로 들어가 작은 암자나 토굴 속에서 참선을 했다고 한다. 양반들 등쌀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임진왜란 때에 이정암이 쓴 「서정일록」이라는 일기를 보면 해주 근처 쌍암사라는 절로 피난을 하는데 늙고 어린 중 몇 명이 절 뒤의 작은 암자에 있다가 양반들이 몰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도망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왜적도 무섭지만 양반도 그 못지않게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중들은 거리로 나서 탁발을 했다. 바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밥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점을 쳐주면서 아녀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먹고 살아 야했다. 그러니 사회적인 인식이 호전될 수 없었다. 조선 전기에 천한 일에 종사하는 일곱 가지 칠반천인 (七賤人)이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중을 포함하여 팔반천인이라 불렀으니 사회적인 멸시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대부분 살기가 어렵거나 일반 백성들에게 부과된 군역(軍役)이 무서워 부득이 중이 된 경우가 많았지만 진실로 불도를 닦고자 중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스님들은 당시 글도 꽤 읽고 시도 지을 줄 아는 지식인층이었으니 이런 수모가 더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모두 이렇게 힘든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큰 시주를 만나 거창한 불사를 치르고 호의호식하는 승려들도 없지는 않았다. 또 당대의 쟁쟁한 유학자들과 당당하게 토론을 벌이면서 고승대덕으로 추앙받았던 스님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승려들은 삶이 매우 고달 펐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야 울력(運力)을 하여 채소밭이라도 일구어 먹고 살지만 정말 놀고먹는 좀은 양반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