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사람 조재삼(趙在三)이 지은「송남잡지(松南雜識)」라는 책은 백과사전처럼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수록해 놓은 책인데, 그 책에 이런 설화가 전한다.
일본에 담박고(淡姑)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절세미인이라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 여자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병으로 온몸에 부스럼이 나서 천하의 명약을 다 써 보았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어 결국은 죽게 되었다. 그 기생이 죽을 무렵에 유언하기를 '내 무덤 위에 풀이 나서 이런 몹쓸 병에 걸린 사람들을 낫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무덤 위에 풀이 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풀을 태워 연기를 마시면 담(痰)과 회(脚)를 고치고, 또 끓여서 달인 물로 씻으면 부스럼이 나았다고 한다.
강희언의 풍속화 「사인시음 (士人詩岭)」
기생의 이름 ‘담박고'란 물론 토바코, 즉 담배를 말 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담배의 원산지는 중남미로 서 1492년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콜럼버스 일행이 그 곳 인디오들이 타바코(tabaco)라고 부르는 기다란 대롱에 처음 보는 풀 잎사귀 말린 것을 넣고 불을 붙여 연기를 빨아들이는 것을 보고서는 그 풀이름을 타바코라 붙였는데, 이 말이 세계를 뱅뱅 돌다가 조선에 와서는 담배구가 되었고 그것이 지금의 담배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이 설화에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 우선 담배 이야기에 일본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나라 담배가 일본에서 왔기 때문이다. 담배의 전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임진왜란 직후 1600년경에 일본에서 담배가 전래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래서 남쪽에서 전해온 풀이라는 뜻으로 남초(南草)라는 이름이 붙었다.
둘째로는 하필이면 기생이 등장할까? 그것은 당시 사람들도 담배를 요사스러운 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공주 지방에 전하는 이야기에도 옛날 어떤 남자를 사랑하게 된 기생이 죽어서라도 입이라도 맞춰보고 싶어 하여 죽은 기생의 넋이 무덤 위에 피어 담배가 되었다고 한다. 즉 담배는 정신과 기력을 쇠잔하게 하면서도 유행가 가사처럼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할 요사스런 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배를 일명 상사초(相思草)라고도 부른다.
셋째로는 담배를 약초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담배에는 남령초(南靈草)라는 이름도 붙어 뭔가 신령스러운 힘을 지닌 풀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니, 서양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담배는 처음에 신기한 화초로, 그리고 약초로 재배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서양에서도 만병통치약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급기야는 프랑스에서도 어린 학생들에게 요즘 급식하듯이 담배를 나누어 주었는데 이를 괴로워하여 몰래 버리거나 하면 선생님 이 매를 때렸다고 한다.
신윤복의 풍속화첩에서
다섯 가지 이익과 열 가지 해악이 있다는 담배
도대체 담배가 어떻게 약이 된단 말인가? 17세기 성호 이익(李翼)은 담배를 피우면 다섯 가지 이익과 열 가지 해악이 있다고 했다. 머리가 희어지고 이가 빠지고 쉽게 늙는다는 등의 해악이야 지금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바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담배의 이득이란 것이 지금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다. 가래가 목에 걸려 떨어지지 않을 때, 비위가 거슬려 침이 흐를 때, 소화가 잘 안되어 눕기가 불편할 때, 먹은 것이 걸려 신물이 올라올 때, 엄동에 추위를 막을 때에 담배가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담배의 효험 가운데 서도 당시 가장 흔하게 거론되는 것은 가래, 소화불량의 치료제라는 것이고 더욱 재미난 것은 앞서 담박고 전설에도 등장하듯이 회충을 없애는 데 유효하다는 것이다. 담배가 횟배를 없애 주다니,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런 황당한 말을 믿고 살았나 할지 모르지만 불과 삼사십년 전만 하더라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또한 담배를 피우면 소화가 잘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식후 불 끽연(不煙)하면 우연 득병(得病)하여 3초 후 즉사' 운운하며 억지소리를 곧장 읊조리는 애연가들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좋다는 담배가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켜 나라에서 배척받는 대상이 되었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나랏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해결책이 잘 떠오르지 않으면 신하들이 담배를 자꾸 피우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연기가 왕이 있는 윗자리로 올라가 왕이 담배를 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설화이고 담배를 금지하려고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우선 화재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담배로 인한 실화는 곳곳에서 있었다. 담배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이미 광해군 말년에 동래의 왜관(倭館)에서 일본인들이 피운 담뱃불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큰불이 나서 80여 칸을 잿더미로 만들기도 했다. 담배에 얽힌 비슷한 사건으로 김상용(金尙容)의 순절(殉節) 시비가 있었다. 병자호란 때 김상용이 빈궁·원손 등을 모시고 강화도에 피신했으나 강화도가 곧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남문 문루에 앉아 있다가 담배를 피운 다는 구실로 불을 얻어다가 화약더미에 불을 던져 자폭하여 순절하였다는 것이다. 아들들은 자신들의 아비가 나라를 위해 순국하였으니 충신으로 표창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실화사건으로 믿고 있었다. 혼자 죽은 것도 아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갑자기 죽었는데 자살을 하려면 다른 방법도 있는데 굳이 화약을 터뜨려 옆에 있는 사람까지 죽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들은 평소 김상용이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하면서 순국을 주장하였다. 사실 여부야 알 수 없지만 결국 김상용은 순절한 것으로 처리되어 현재도 고려궁지를 올라가는 길 오른편으로 김상용의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상용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아 그 9세손 때 고종 조에 이르러서야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담배를 금하려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담배가 비싸게 거래되자 백성들이 먹고 살 곡식을 심어야 할 밭에 담배를 심어 나라 경제를 망친다는 것이다. 본래 한 번 담배를 심어 놓으면 그 밭에는 지력이 소모되어 한동안 다른 작물을 심을 수 없으며, 또 노동력이 많이 들어 다른 일에 손을 쓸 겨를이 없어 담배농사를 전업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에서는 기름진 논밭이 담배 밭으로 바뀌고 있으니 큰일이라고 걱정하였다.
담배의 해악은 화재나 경제적인 이유뿐이 아니었다. 담배를 피우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이덕무가 「사소절(士小節)」에서 담배 피울 때 조심해야 할 사항을 열거한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지저분했다. 등불에다 불을 붙여서 재가 기름에 떨어져 그을음이 피어오르게 하고, 담배를 너무 많이 쟁여 넣어 화로에 떨어져 연기가 피어오르게 하고, 반쯤 피우다가 요강에 떨어버리고, 담뱃진을 벽틈이나 화로에 비벼대어 집안이 지저분해지고, 요 · 이불이나 서책에는 구멍이 숭숭 뚫리고 이것이 전부 담배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낙네는 담배를 피우면서 음식을 장만하다가 다 끓여 놓은 국에 담배가루를 떨어뜨려 음식을 모두 망치니 이른바 다된 밥에 재 뿌린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아낙네가 담배를 피우다가 질질 흐르는 침을 수습하지 못하니 이 보다 추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전 세계 각국에서 금연령이 반포되었다. 때로는 무시무시한 포고령을 내려 러시아에 서는 코를 베고, 오스만 제국의 경우 발각되는 즉시 그 자리에서 목을 베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런 법령이 담뱃값만 천정부지로 치솟게 하는 등 부작용이 심하여 결국은 모든 나라가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중국에 대한 담배 밀수출을 엄금한 일은 있지만 금연령을 내린 일은 없었다.
이미 중국에서 금연령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하늘에 제(祭)를 올리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재계(齋戒)할 때에는 술·담배를 금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꽤 융통성이 있어서 기우제를 행할 때 술은 금하되 담배는 금하지 말게 하였다. 제를 올릴 때에는 마음이 고요해야 하는데 담배를 금하면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에 도리어 정신이 산란해진다는 것이었다.
김홍도 풍속화집의 담배썰기
담배 1근이 은 1량
처음 담배는 1근을 은 1량과 맞바꿀 정도로 고가품이었다. 그러므로 병자호란 후에 청나라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을 몸값을 주고 데려올 때에도 담배와 담뱃대를 가지고 가서 팔아 비용을 마련하였고, 때로는 엽관운동의 뇌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비싼 담배가 점차 확산되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담배가 차나 술 대신에 손님 접대에 쓰이게 되면서 담배에 연다(煙茶), 연주(煙酒)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담배에 예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서 피우는 것은 버릇없는 행동으로 여겼다. 그래서 길을 갈 때에 높은 관리가 맞은편에서 오는데 담배를 피워 물고 있으면 개별적으로 잡아 가두고 혼을 내었다고 한다. 또 조심하고 경건해야 할 자리에서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대궐 뜰에서 담배를 피워 물다가 왕의 꾸중을 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과거 시험 보는 자리에서, 국장(國葬)에 곡하는 자리에서, 때로는 고위 관원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담배를 피워 비난을 받았고, 기록으로 확인되는 조선 최초의 골초 장유(張維)도 승정원(政院: 왕의 비서실)에서 담뱃대를 물고 있다가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담배에 까다로운 예절이 따라 붙은 것은 물론 담뱃대 때문이었다. 입에 기다란 것을 물고 있는 모양이 불손해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에는 코로 가루를 들이마시는 코담배는 없었고 오직 피우는 담배만이 통용되어 담뱃잎을 말아 대통에 끼워 피우는 잎담배(葉煙草)와 잘게 썬 담배를 대통에 쟁여 피우는 살담배(刻煙草)를 피웠다. 어쨌거나 담배를 피우려면 담뱃대가 필요했다. 담뱃대는 설대가 기다란 장죽(長竹)과 설대가 짧은 곰방대로 나뉘는데 장죽은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왜냐하면 담뱃불을 붙이려면 화로를 갖고 다니지 않으면 누군가 불을 붙여 주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동(煙童)이라 부르는 어린 종이 담뱃대(煙竹)와 담배합(煙盒)을 들고 따라다니면서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설대가 기다란 장죽으로 담배에 불을 붙일 때에는 힘이 들게 마련이다.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담배를 볼이 발심 발심하도록 빨지 말아야 진짜 양반이 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러지 않으면 장죽이 잘 빨리지 않았다. 사실 점잖은 양반이 개구리 우는 모양으로 볼따구니를 울룩불룩 하면서 장죽을 빠는 모양이 보기는 좋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린아이가 이러는 모양을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흡연은 식자들에게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그런데 어린이의 흡연은 세계 곳곳에서 유행하였다. 중국에서도 담배가 들어오자 곧 삼척동자까지 담배를 피워 세상 풍속이 조석변(朝夕變)이라는 탄식을 낳게 했는데, 19세기말까지도 그러해서 미국인 게일 목사가 만주에 가보니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하도 신기해서 20센트를 주고 담뱃대를 샀다고 한다.
조선은 어떠했냐 하면 거의 마찬가지였다. 본래 어린아이들이 하도 담배를 피워 대서 다음에 배우라는 뜻으로 담배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만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배를 피워댔다. 17세기 중엽 한국에서 13년간을 살다. 간 네덜란드인 하멜이 남긴 글에는 조선에서는 어린 아이들까지 네댓 살만 되면 담배를 피운다고 할 정도였고 이런 현상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심지어는 아이들에게 담배 피우는 법을 가르치는 부모도 있어 흡연 반대론자들로부터 무식한 부모라는 소리를 들었고, 19세기 순조 때에도 아이들이 젖만 떼고 나면 곧 바로 담뱃대를 문다고 왕까지 한탄하였다. 담배가 들어온 지 근 400년 만에 청소년보호법이 만들어졌으니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