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구경'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관광(觀光)'이라는 말이다. 구경이나 관광이라는 말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조선 시대는 물론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구경을 좋아했다. 지금이야 시간과 약간의 돈만 있으면 영화 구경도 있고 음악회 구경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집에 들어가 스위치만 누르면 켜지는 텔레비전이 있지만 예전이야 구경거리가 별로 많지 않았다. 물론 광대, 사당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늘 오는 것이 아니었다. 또 구경거리가 있다 해도 구경을 할 여건이 안되었다. 지금은 봄이면 진해 벚꽃놀이, 가을이면 내장산 단풍 구경이 전국적으로 열병처럼 번져 꽃 구경·단풍 구경이 아니라 사람 구경으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교통수단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그 먼 곳으로 지금처럼 구경을 떠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구경에 주릴 만도 했을 것이다. 결국 가까운 곳에서 구경할 수 있는 것이면 만사 제쳐놓고 구경을 나갔다.
구경에는 아름다운 풍경 구경을 빼놓을 수 없고 그 중에서도 봄의 꽃 구경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단풍구경도 있었지만 꽃 구경만큼 성했던 것 같지는 않다.
17세기 일본의 벚꽃 구경
신윤복의 청금상련(聽琴賞運): 연못가에서의 양반들의 놀이
꽃 구경 좋아했던 연산군
조선시대에는 주로 무슨 꽃을 구경했을까? 밤벚꽃놀이로 유명했던 창경원의 벚꽃이나 진해의 벚꽃은 누구나 짐작하듯이 일제시대부터 나타난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우이동 골짜기 벚나무는 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17세기 효종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설욕한다고 북벌(北伐)을 이루기 위해 화살대를 얻으려고 심어 놓은 것으로서, 꽃에 대한 감상은 심드렁했던 모양으로 이에 대해 남긴 기록이 거의 없다. 이 시기에 일본은 봄이 되면 벚꽃(사꾸라) 구경이 성해서 하나미(花見: 꽃구경) 하면 벚꽃 구경이었는데 그 열풍이 일제시대에 우리나라로 번진 것이다.
그러면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진달래·개나리를 보러 다니지 않았을까 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진달래 같은 꽃은 산에 그저 널려 있는 흔한 꽃이어서 그것을 보러 일부러 나들이를 하지는 않았다. 옛날 꽃 구경을 하러 나들이할 때에는 동요에도 나오듯이 복숭아꽃, 즉 복사꽃과 살구꽃이 으뜸이었고 다음으로 오얏꽃·배꽃·철쭉꽃이 뒤를 이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말도 있듯이 복사꽃은 아름다운 풍경의 대명사였으니 조선 전기 그림 가운데 백미(白眉)로 꼽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도 안평대군이 꿈에 본 복사꽃 마을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그 복사꽃으로 유명했던 곳이 지금의 성북동에 해당하는 성 밖 북둔(北屯)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복숭아나무를 심어 그 열매로 생계에 보탬이 되게 했는데 늦봄이 되면 복사꽃이 장관을 이루어 꽃 구경 나온 사람들과 말과 가마가 끊임없이 이어져 산골짜기를 메웠다 한다. 이밖에도 이름마저 복사꽃고을이었던 도화동(桃花洞)이 유명했지만 북둔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편, 살구꽃은 서울 안에 가장 많은 꽃이어서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시에도 '왕성(王城) 10만호가 봄이 오면 모두 행화촌(杏花村)이 된다'고 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인왕산 밑 필운대(弼雲臺)였고 그 다음으로 그 옆의 세심대(洗心臺)를 꼽았는데 음력 3월 한 달 내내 술병을 차고 밀려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했다고 한다. '필운'은 오성대감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호(號)인데 장인이었던 권율의 집이 여기 있어서 처가살이하던 이항복이 이곳 바위에 '필운대'라고 글자를 새겨놓아서 생긴 이름이다. 한편, 세심대가 유명해진 것은 1791년에 정조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찾아와 이곳에 올라서 활도 쏘고 시도 지으면서 신하들과 놀았는데 이것이 연례 행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이 되면 꽃 구경과 함께 왕의 행차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한편,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를 내려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하여 군자의 상징이 되었으므로 사대부들이 즐기던 꽃이다. 그러므로 강릉의 선교장처럼 사대부들의 커다란 집에는 꼭 연못을 두었다. 서울의 연못(蓮池)으로는 창경궁 동쪽 연동(蓮洞)의 동지(東池)와 남대문 밖 남지(南池), 그리고 서대문 밖 모화관 옆의 서지(西池)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서지의 규모가 가장 크고 그곳에 천연정(天然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연꽃이 피는 여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들었다.
한편, 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버들 구경도 봄놀이의 한 몫을 단단히 했다. 무슨 별것도 아닌 버들을 보러 다녔을까 의아하겠지만 요즘의 '화류계'란 말을 생각해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화류(花柳)'란 문자 그대로 꽃과 버들이란 뜻이다. 새 생명이 움트는 따뜻함과 긴장이 풀린 나른한 정취를 맛보려면 버들이 제격이었다. 옛 사람들은 버드나무 가지의 휘휘 늘어진 모양을 보면서 봄의 흥취를 만끽하였고 그래서 한국이나 중국의 옛 그림에서도 버들은 봄의 흥취를 상징하는 것으로 자주 등장하곤 했다. 봄버들로 유명한 곳은 동대문 밖이었다. 본래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의 좌청룡은 타락산(駞駱山)이었는데 이 산이 높지 않고 밋밋하여 지세가 약하다 하여 버들을 심어 지세를 돋구었다 하는데 이곳도 봄이면 필운대나 북둔만은 못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던 곳이었다.
꽃 구경 좋아하는 것으로 으뜸간 왕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미치광이에다가 잔인하기로 이름났던 연산군이었다. 궁중의 풀·꽃·나무를 공급하는 장원서(掌苑署)가 경복궁 옆 지금의 화동에 있었는데 연산군은 이곳에 동백·장미 등 온갖 꽃을 모아 놓았고 특히 왜철쭉을 좋아했다. 지금은 봄이면 진달래·철쭉 못지않게 왜철쭉을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몇 그루 보내온 귀한 것이어서 화분에 심어놓고 애지중지했다. 연산군이 이 꽃을 좋아해서 지방에 왜철쭉이 있는 곳에 명을 내려, 캐어서 말라 죽지 않게 흙을 그대로 뿌리에 달은 채 급히 서울로 운반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법석을 피우다가 오래지 않아 중종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중국에도 있었으니 양귀비와 여지에 얽힌 일화이다. 여지란 진홍색의 얇은 껍질을 벗기면 말간 과육이 나오는데 먹어보면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과일로 과일의 왕이라 하였다. 그런데 양귀비의 고향이 지금의 사천성 쪽이었는데 장안(長安)의 궁궐에 들어온 이후로 고향에서 먹던 여지 맛을 잊지 못해 했다. 양귀비에 푹 빠져 있던 당나라 현종은 특명을 내려 사천성 부주에서 딴 여지를 7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같이 역마를 달려 장안 궁궐로 가져오게 하였다. 이 때문에 원성이 자자했고 결국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현종은 궁궐을 버리고 험하기로 이름난 촉(蜀) 땅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피난 도중에 성난 군사들의 위협을 견디다 못해 양귀비는 목을 매어 자결해야 했다.
1795 년 정조와 함께 수원에서 돌아오는 혜경궁 홍씨의 행차를 구경하는 사람들
인기 끌었던 화려하고 장대한 행차
아름다운 꽃이나 버들 외에도 볼 만한 것으로는 화려하고 장대한 행차를 놓칠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구경거리는 왕의 거둥(擧動)이었다. 왕이 거둥을 시작할 때쯤에는 지나는 길가의 고을은 난리 법석이 일어났다. 돌을 치우고 바닥을 고르게 하여 길을 닦고, 개울에 다리를 놓고, 어두울 때에 대비해서 길가 양쪽에는 홰를 꽂고, 길 한가운데에는 붉은 흙을 뿌리는 등 괴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곧 좋은 구경거리가 시작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수한 형형색색의 깃발과 악대 소리와 너울 쓰고 가는 궁녀와 수천명의 군사들이 늘어서 가는 행렬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나서 수원으로 행차할 때의 광경을 그린 8폭 병풍 그림에도 수많은 구경꾼들이 등장한다. 선비, 아주머니,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길가에 죽 늘어앉아 이 장관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김없이 엿장수가 등장하고 술장수도 등장하여 한 밑천 벌어보려 하고 있었다. 이 구경꾼들은 자리를 지키고 앉아 구경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렬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저녁 늦게까지 따라와 구경하는 사람을 위해 종을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을 금하는 일을 늦추라는 특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왕이 흥인문 밖 선농단(先農壇)에 제를 지내러 갈 때나 경기도 일대의 왕릉에 행차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왕을 호위하는 군사들은 경호에 문제가 있으니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왕은 번번이 이를 물리치곤 했다. 백성들이 어쩌다 한 번 즐겁게 구경하는 것을 막는 것은 좀 야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거둥 때에 왕 주위에 사각으로 에워싼 호위 행렬은 궁궐의 담과 똑같이 간주해서 이곳 가까이 얼씬거린다거나 이 호위 행렬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궁궐 주위를 배회하거나 궁궐 담을 넘는 것과 똑같이 엄하게 처벌했지만 그렇지 않고 멀리서 구경하는 것은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과거 합격자의 遊街행렬
왕의 거둥 다음으로 인기를 끌었던 것은 중국 사신의 행차였다. 양반집 부녀자들은 아예 요즘의 텐트에 해당하는 막차(幕次)를 치고 온갖 먹을 것을 장만하여 막차 앞의 트여진 부분에는 발을 늘어뜨리고 안에 들어앉아 구경을 하였다. 자리가 좋지 않아 잘 보이지 않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장에도 올라가고 나무에도 올라앉았고, 때로는 여자들이 나무 위에 발을 치고 앉아 진풍경을 연출해서 식자들의 혀를 차게 했다. 그러다가 비라도 쏟아지면 근처 인가의 문을 두드리며 비를 피하기 위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멀리서 몰려온 사람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남의 집 문을 두드려 하루 묵어가자고 사정을 하는 수도 있었다. 때로는 인파가 밀려들어 혼잡한 가운데 가마가 뒤바뀌어 가마꾼들이 자기 집 아씨가 탄 줄 알고 가마를 메고 갔다가 안에 엉뚱한 사람이 앉아 있어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때는 중국 사신이 웬 여자들이 이렇게 많이 나왔냐고 물어서 사대부집 아낙네들이 아니라 기생들이라고 얼버무리기도 했다. 이러니 조정에서는 나라 망신일 뿐더러 풍기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여 부녀자들의 사신 행차 구경을 금해야 한다는 논의가 심심찮게 일었고, 또 이 때문에 처자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죄로 집안 가장이 처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풍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 합격자의 유가 행렬도 구경거리였다.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이나 문과 시험 합격자들은 마을 행렬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이때가 되면 앞에 선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광대가 앞에서 재주를 부리고 급제자는 어사화가 꽂힌 복두(僕頭)를 쓰고 말을 타고 사흘 동안 마을을 으스대며 돌았다. 특히 동네 여자들은 담 너머로 목을 내밀고 급제자의 모습을 구경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똑똑한 젊은 도련님에 대한 연모의 뜻을 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춘향전의 이도령은 어린 나이에 춘당대시(春塘臺試)라는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그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좀처럼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하려면 대개 20대 중반은 되어야 했으니 이미 장가 든 몸이었고, 대과 합격자는 평균 나이가 30대 중후반으로 이미 자식을 몇 씩 둔 중늙은이였던 것이다. 그럼 왜 그렇게 담 너머로 목을 빼고 구경했을까? 그저 구경이 즐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