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위기와 위기의 문학
1980년대말부터 우리 사회는 또 다른 측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처한 것이 사실이다. 멀리는 東歐와 소련의 붕괴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와해로부터 가까이는 문민정부의 출범 및 선진국과 정보사회로의 진입, 그리고 대중문화의 급격한 확산과 함께 영화 - 비디오 · 컴퓨터 (PC통신 포함) 등의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일대 변혁의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 문학 현실 역시 전통적인 토대가 무너지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특히 문학의 테두리를 형성하는 문화의 磁場은 문학에까지 거대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두고 한 평론가는 글쓰기에서 1970년대가 사회의식이 강박관념이었다면 1980년대는 정치의식이 강박관념이 되었고. 1990년대는 문화의식이 강박관념으로 대두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말하자면, 오락성이 강한 영화 · 비디오 · TV · 광고 등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전통적인 문학의 위상이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즉시적이고 동적인 오락물에 빠져 있는 기존의 독자들에게 다소 정적이고 심오한 순수문학은 독자들의 구미를 충족시키기에는 힘겨운 듯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우선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이제 문학은 과거의 榮華를 누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없이 재미 있으면서도 별 수고로움 없이 즐길 수 있는 영상매체가 득세하여 책을 읽던 독자들을 거의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이고있는 판국에 창작에 버금가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는 그 진정한 의미를 읽거나 감동을 받을 수 없는 딱딱한 문자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쪽에서 문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하는 목소리가 높아 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과연 우리 문학이 위기에 처해 있는가. 이 물음을 되짚어 본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시대가 변모하더라도 문학은 문학이고 다른 장르들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을 문학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사색의 밭을 갈게 하여 자신을 성찰하게 하고 정서를 순화하여 참된 존재로 거듭날 수 있게 하며, 나아가서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꿈과 이상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문자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을 대신할 만한 것이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일부에서 문학의 위기를 입에 담는 것은 문학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결과에서 나온 허구일 수도 있다.
물론 문학이 영상매체가 엉성하던 과거와 같은 위상을 지닐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런 만큼 새로운 시대에 부응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문학도 변해야 한다는 것은 작가들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즉,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 나감으로써 표면적으로나마 위기에 처한 문학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가령, 과연 어느 기법을 동원할 것인가, 어떤 독자들을 겨냥할 것인가. 또는 문학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 등등 작가들이 전에 없는 고민에 힙싸여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반 증한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독자층이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거만을 반추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대중화시대, 정보화시대의 시
연예인들이 새로운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시대. 그러니까 대중문화가 문화의 중심에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시라고 그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특히 독자층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젊은이들이 대중문화에 경도하고 있는 마당에 그들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시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일부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그와 같은 인식에서 나온 작품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이른바 시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재시 · 광고 시 · 해체시 같은 것들에는 그러한 인식이 적극적으로 반영 되어 있다. 이들 시의 특징은 시적 대상의 일상화라 할 수 있는데, 그런 만큼 거기에는 영화 · 대중가요 · 광고물 · 시사 만화 등이 미화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채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기존의 형식으로 보면 엄청난 일탈을 스스럼없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를 쓰는 시인들은 일단 기존의 틀에 도전하고 저항한다는 특징을 지니면서, 그런 의식을 가진 젊은층에 영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시의식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새로운 것을 주구하는 독자들의 구미를 자극하고 그들을 작품으로 끌어 들여 독자층을 확장한다는 점 이나 시의 영역을 넓힌다는 점에서는 일단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런 반면에 독자를 지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한다는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특히 후자가 전통적으로 시의 고유한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감안 하면 부정적인 반응의 폭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첨단문명의 시대, 또는 정보화시대에도 여전히 의미있는 시의 유형은 서정성을 토대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첨단기술이고 또 앞으로의 시대가 기계기술(하드웨어)적 차원보다는 정신기술(소프트웨어)에 의해 지배되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서정시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 예상된다. 왜냐하면 서정시는 단절로부터 화해를, 즉물적인 반응보다는 상상력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이 중심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인간들에게 속물 근성을 갖도록 만들고, 그에 따라 인간들은 단절과 소외의 그늘에서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그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자연과 인간의 화해만이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부르짖고 있는 것은 바로 물질문명의 발달만이 인간을 유토피아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인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정시야말로 인간들을 단절이 아닌 화해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또한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가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에는 물질적 자원보다는 정신적 자원, 즉, 상상력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물질적 자원은 유한한 것이지만 상상력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 것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서정시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폭을 넓힐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 역시 서정시의 가치는 더 높아질지언정 감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90년대에 들어와서 그 동안 서정시를 비판하던 시인들까지 다시 서정시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는 바로 시에서 서정성의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인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시의 형태가 서정시라는 점을 확인 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언하건대, 항상 그랬듯이 앞으로도 결국 시의 주류는 서정시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소설적 미학에 대한 향수
시단의 변화에 못지않게 소설단도 변화의 와중에 있다. 특히 신예 작가들의 득세와 함께 여류 소설가들이 전면에 부각되는 점을 1990년대 소설단의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점은 주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 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이것은 그간의 사정으로 본다면 매우 새로운 현상으로 지적된다.
1990년대 초반「소설 토정비결」이 장안의 지가를 올리게 된 것을 계기로 그 아류들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이른바 추리기법을 도입한 역사소설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와 많이 팔리는가 하면 밀란 쿤델라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베스트 셀러 목록을 장식하고 있을 무렵에 신경숙의「풍금이 있던 자리」가 갑자기 부상할 때만 해도 하나의 우연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어쩌면 상업주의에 편승한 역사소설의 횡행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와 연관되어 미학적으로 잘 다듬어진 본격소설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 결과일 수도 있다.「풍금이 있던 자리」에 이어 발표된「깊은 슬픔」과「외딴 방」에 드러나는 섬세하게 조직된 그의 문체는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가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것이 바로 그녀를 1990년대의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신경숙에 대한 주목은 중견 여류작가는 물론이거니와 신인들에게까지도 자연스럽게 파급 되었다.「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박완서,「불꽃놀이」의 오정희,「천년의 사랑」의 양귀자 등을 비롯하여 공지영(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김형경(세월) · 이혜경(길 위의 집) 등의 작품들이 전에 없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중이다. 이들 여류 작가들의 작품은 주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주제의 큰 맥락을 이 루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미래로 나가기보다는 지난 시절을 되돌아봄으로써 자신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그 正體性을 짚어보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90년대에 들어 또 하나 주목거리는 신예 작가들의 급부상이다. 그 중에도 윤대녕은 선두주자로서 남다른 주목을 받고 있다. 도시적 감수성이 짙게 깔려 있으면서도 환상의 세계가 섬세하게 깔려 있기도 한 그의 작품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미명 아래 거칠게 만들어진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소설적 미학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미학적으로 탄탄한 작품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독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 외에도 1990년대에 주목을 받는 작품으로서 조정래의「아리랑」, 김성동의「국수」 등이 있다. 이들 작가가 중견으로서, 그리고 이들 작품이 역사적 소재로서 민족사적인 것을 소설로 형상화한 것이라면, 가장 최근에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작품으로 구효서의「비밀의 문」과 김정현의「아버지」를 들 수 있다. 「비밀의 문」은 추리적 기법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이인화의「영원한 제국」(이것도 에코의「장미의 이름으로」를 떠올리게 한다)과 같은 유형이라 할 수 있는 반면에,「아버지」는 이 시대에 그 위상이 한없이 흔들리고 있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하여 새삼 되돌아보게 하면서 깊은 감동을 자아내게 하여, 다소 감상적인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장안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야말로 사막처럼 메말라가는 현대인들의 가슴에 물기가 배이게 하는 요즘 보기 드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위기의 문학
우리는 이제 21세기를 불과 4년여를 앞두고 있다. 이 시점에서 현실을 냉철히 생각할 때 우리는 그야말로 위기에 처해 있는 듯이 보인다. 이기주의와 속물 근성이 인간들의 마음 속에 들끓고 그에 따라 사회는 날이 갈수록 무잡스러워지고 있는 중이다. 환경의 파괴와 공해의 점증, 그리고 점점 차겁고 거칠어지는 인간들의 심성 등에 의해 모든 부분에서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의 불안감과 위기의식도 높아만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의 위기까지 낳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학은 어쩌면 그러한 위기 속에서 더욱 찬연히 꽃 피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인들에게는 근원적으로 현실과 존재에 대한 비극적 성찰이 토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말 속에 이미 그 의미가 전제되어 있듯이 이 세계에 완전한 유토피아가 실현된다면 문학인도 문학 작품도 존재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위기의 시대에는 문학의 역할과 가치가 더욱 절실해지게 된다. 문학은 인간들에게 언제나 현실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이상을 바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기에 처한 현대인들 일수록 더욱 문학을 가까이 접하고 거기서 자기 삶의 많은 糧食을 얻어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