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직업인지라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만큼 헤어진다. 그러면서 그냥 그렇게 잊혀지기도 하지만, 기억 속에 오롯이 남는 이도 있다.
유재형(38세) 사장은 그런 사람이다. 그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시간을 6년 전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당시 유 사장은 이노마켓이라는 유망 벤처기업의 재무이사(CFO)였다. 처음 본‘유 이사’의 얼굴은 찌들어 있었다. 펀딩 잘 받아내기로 소문난 CFO 치고는 자신감도 패기도 읽혀지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기자의 호기심은 시
작됐고, 몇 차례의 취재 끝에 이 회사가 뚜렷한 수익모델도 없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는 대다수 벤처가 IT 버블의 끝물 속에서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던때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거쳐 재경부 관세청에서 촉망받는 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 국비 연수로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까지 취득한 전직 엘리트 공무원의 모습 치고는 초라했다.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가난이 어떤 건지, 얼마나 사람을 초라하게 하는지 잘 알거든요. 대박 낼 자신이 있었어요.”
중∙고교 시절 대부분을 가족들과 여관에서 보낼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는 유 사장은 부침이 심한 사업가 아버지와 달리, 자신만은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 공무원을 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이는지 막상 비즈니스에 대한 욕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는 게 유 사장의 설명이다.
그런 그를 다시 만난 건 작년 이즈음이다. 결국 이노마켓을 정리하고 몇 군데의 회사를 전전한 끝에 알에프캠프라는 전자태그(RFID) 전문생산업체를 차려놓고 있었다. 그의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유 사장은 이 업체를 창업 2년여 만에 연매출 100억원의 알짜 회사로 만들어 놨다. 국내 태그 생산업체로는 최초로 대미 수출도 성사시켰다. 전형적인 워커홀릭형 CEO인 유 사장은 수년간의 시련을 비싼 수업료로 삼아 RFID 시장의 부상을 차분히 준비해온 것이다.
“돈 많이 벌면 뭐 할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유 사장은 벤처캐피탈업체를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또 장학사업도 하고 싶단다. 사업을 하면서 겪었던 자금 확보 고충과 유년기의 아픔이 그대로 묻어나는 답이다. 그러면서 유 사장은“잘하면 은퇴 후 제주지방 관세청장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며 웃는다. 유 사장은 관세청 퇴직 직전 관세자유지역 특별법 제정 TF팀장으로 1년여 간 법안 작업에 관여했다. 자신 때문에 관세자유지역 추진이 지금껏 공회전을 하는 것 같아 빚진 듯 짐스럽다는 그다. 유 사장의 세 번째 도전이 어떻게 이뤄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