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어느 날 아침, 평소 같으면 출근했을 언니가 내 방을 노크했다. 열 시 이전에는 절대 나를 건드리지 않는 우리 집 불문율을 깨는 일이었다.
“나 너무 아파. 병원에 좀 데려다 줘.”
‘아프다’는 말을 엄살 9단인 나는 입에 달고 살지만 언니한테서는 50 평생 거의 나온 적이 없는 말이었고, 또 전날 쌩쌩하게 야근까지 한 터라 조금 낯설었다. 과로려니 싶어 링거나 맞고 있으라고 입원시켜 놓고 집에 와서 급한 원고를 썼다. 다음 날 담당의사는 골수검사를 하자고 했다.
‘골수검사라면, 백혈병?’그 순간 나는 농담 아니냐는 듯 웃었다. 내가 아는 한 백혈병은 아주 예쁜 꼬마들이나 드라마 주인공이 걸리는 감상적인 병이지, 나보다 체중이 10㎏이나 더 나가고 붐비는 지하철 속에서도 절대 자리를 놓치지 않을 만큼 억센 우리 언니 같은 사람이 걸릴 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니의 상태는 웃을 일이 아니었다. 열은 40도가 넘었고, 혈소판 수치가 떨어져 골수를 검사한 등뼈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항암제를 놓자마자 혈압이 급속도로 떨어졌고, 수많은 기계들을 주렁주렁 언니 몸에 단 의사는 서둘러 혈소판 헌혈자를 구하라고 했다. 혈액 응고 작용을 한다는 혈소판은 5일 이상 보
관이 안되니 헌혈자가 직접 병원에 와서 헌혈해야 하고, 혈관이 튼튼한 20대 남자가 적당하다고 했다. 다른 백혈병 환자들은 1회차 치료 동안 3~4명의 헌혈자면 족했지만, 언니는 상태가 심각해 하루에 2~3명씩 수십 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급한 마음에 경찰서에 전화했지만 설상가상,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처형당해 온 국민이 파병 반대에 나섰고, 시위 진압 때문에 헌혈이 어렵다고 했다. 당장 언니 목숨이 걸린지라 나는 명함철을 꺼내놓고 경찰청에 인맥이 닿을 만한 모든 사람에게 연락했고, 한 친구가 다행히 그 쪽에 인맥이 닿았다.(그것이 인연이 되어 난 그 친구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때 헌혈을 와준 전경들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렇게 가까스로 1회차 치료가 끝났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3주 무균실 입원과 2주 집에서의 요양을 1회차 치료라 했는데, 백혈병의 경우 최소 3~4회차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불행히도 나와 언니는 골수가 맞지 않았고, 같이 입원했던 다른 환자들은 3회차에 완치됐지만 언니는 5회차가 되도록 암세포가 죽질 않았다. 언니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하루 종일 울며 병실에서 뛰어내리겠다며 버텼고, 치료를 거부했다. 의사마저 모든 약을 다 써봤다며 포기를 내비쳤다.
하지만 나는 언니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7남매 중 유독 정이 많고 마음이 약해 이리저리 치여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 이혼의 상처를 겪으면서도 나를 딸처럼 챙겨준, 엄마 같은 언니였기 때문이다.
이틀, 삼일… 언니는 병원 예약 날짜를 넘기며 입원을 거부했고, 마치 내가 원수라도 되는 듯 눈도 마주치려하지 않으며 버텼다.
그런 언니를 부둥켜안고, 나는 수 없이 설득하고 애원했다. 결국 언니는 죽음을 향한 마지막 도전을 선택했고,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판매되지 않는 신약을 미국에 직접 주문해서 투약하게 되었다.
6회차 치료가 끝날 즈음, 나는 담당 의사를 찾아가“이번 치료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언니에겐 그냥 암 세포가 다 죽고 완치됐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더 이상 치료 받지 않을 언니에게 희망이라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의사도 나에게만 진짜 결과를 알려주고, 환자에겐 그렇게 말하겠다고 했다. 치료가 끝나고 결과
를 기다리는 10일은 지난 7개월보다 훨씬 초조했다. 결과가 나오는 날, 나는 언니 몰래 의사에게 전화했다.
결과는… 완치! 나는 울며 웃으며 결과를 말했지만 언니는 믿지 않았다. 의사가 확인해 주어도 그저 고개만 저었다. 골리앗을 맞서 이긴 다비드처럼, 거대한 죽음과 맞서 싸워 이긴 자신의 승리가 쉽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완치된 지 1년 반. 평생 가족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살아온 언니는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던 일에 도전중이다. 오로지 자신만을위한, 그녀의아름다운도전은?‘ 노래교실’이다. 지독한음치 집안인 우리 집 식구 중에서도 가장 음치인 언니는 그 동안 직장에서 노래방 갈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었다나. 조만간 멋진 노래 솜씨를 보이겠다지만 글쎄, 죽음은 이겼어도 그건 좀… 장마가 활짝 걷힌 8월이다. 심심한데, 다들 저승보다 노래방을 더 무서워하는 우리 식구들 모아서 노래방이나 한 번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