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침 저녁으로는 날씨가 차다.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고 살갗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이 무렵 여행을 떠난다면 한옥에 하루쯤 묵어보는 것도 좋겠다. 처마에 반짝이는 영롱한 겨울 햇살을 눈에 담는 일, 밤이면 창호지로 스미는 달빛을 바라보는 일, 처마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소리를 들어보는 일, 이 모든 일이 한옥에서 가능하다. 아침이면 대빗자루로 마당도 쓸어볼 수도 있고 저녁이면 장작 타는 냄새가 마당을 가득 채운다. 이불을 깔아둔 아랫목은 손을 넣자마자 ‘앗 뜨거’ 소리가 절로 난다. 고풍스럽고 기품 있는 한옥은 오래된 친구처럼, 할머니의 품속처럼 정겹고 아늑하다.
돌담길 걸으며 느끼는 푸근한 정취
덕유산의 절경인 수승대를 끼고 자리잡은 황산마을에는 100~200년 전에 지어진 한옥 50여 채가 운치 있게 들어서 있다. 황산마을은 거창 신씨 집성촌으로 조선 연산군 시절이던 1501년 신(愼)씨 일가가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마을 주민 대부분은 신씨인데 마을을 거닐며 대문을 보면 대부분 신씨 문패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을회관 앞에 서 있는 건립 헌성기를 보면 주민의 70~80%가 신씨다.마을 입구에 서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여행객을 반긴다. 수령 600년을 훌쩍 넘긴 커다란 나무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느티나무 앞으로는 맑은 시내가 흘러간다는데, 마을은 이 시내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으로 나뉜다. 시내 동쪽은 ‘동녘’이라 부르고 서쪽은 ‘큰땀’이라 부르는데, 큰땀에 부드러운 처마의 한옥 기와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큰땀은 마을 입구에 들어가기만 해도 ‘양반마을’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마을 전체가 ‘고래등’같은 기와집들로 연이어 있기 때문이다. 황산마을의 한옥들은 대부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들이라고 한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부분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는데 이렇게 마을 전체가 모두 기와집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은 소작마을을 별도로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황산마을의 자랑은 한옥보다는 흙담길이다. 담장 위에 얹어놓은 여러 겹의 기와가 독특하고 이채롭다. 이끼가 돋은 기와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말해주는 것만 같다. 황산마을의 흙담은 물빠짐을 위해 아랫단에는 제법 커다란 자연석을 쌓았고, 윗단에는 황토와 돌을 섞어 토석담을 쌓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황산마을 흙담길은 2006년 등록문화재 259호로 지정되며 ‘전국의 아름다운 돌담길 10선’ 중 한 곳으로 뽑히기도 했다. 1~2km 길이의 토담이 600여 년 전에 이뤄진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됐다고 한다.
황산마을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그냥 발길 닿는 데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 이 골목, 저 골목 낮은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담장은 그다지 높지 않다. 까치발을 하면 담장 너머로 집과 마당이 훤히 바라보인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고택이 궁금하면 들어가 구경해도 좋다. 야박한 도시와 달리 낮에는 대문을 잠그지 않은 집들이 대부분이다. 문풍지를 발라 놓은 곁문들과 툇마루, 햇볕이 잘 드는 마당, 항아리 등 우리네 전통가옥에서 느낄 수 있는 비움과 열림의 미학, 넉넉한 인심의 향기가 배어 나온다. 그리고 푸근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황산마을에서는 민박이 가능하다. 현재 10여 가구가 민박손님을 받고 있다. 아직도 장작불을 들이는 방을 가진 집도 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하루쯤 묵어보자. 밤이면 은은한 문살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든다. 소쩍새 소리와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보자. 대숲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마당을 천천히 거니는 일은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아침도 좋다. 되도록 일찍 일어날 것을 권한다. 새벽 안개가 마을을 자욱하게 감싸 안고 있다. 밤새 눈이 내려앉은 한옥 기와의 선이 예쁘다. 자기도 모르게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뜨끈한 구들에 뉘었던 몸은 솜처럼 가볍다.
황산마을의 멋스런 담장길만큼 예쁜 곳이 또 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황산2구마을. 이 마을 담장에는 예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거창의 특산물인 사과와 명승지인 수승대의 수려한 경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발길 가는 대로 벽화를 따라 이 골목 저 골목을 걷다 보면 벽에 붙어 있는 나비와 잠자리, 주인 대신 집을 지키고 있는 강아지, 담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온 황소, 고구려 고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만날 수 있다. 또 마을 담장 위에는 손짓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황산마을은 고즈넉한 시골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수승대, 거창이 숨겨놓은 비경
거창하면 수승대를 빼놓을 수 없다. 거창 제일의 명소이자 덕유산이 간직한 절경이다. 황산마을 앞에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을 지나면 제일 먼저 구연서원 관수루(觀水樓)가 눈에 들어온다. 관수루는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영조 16년(1740)에 건립했다. 관수란 <맹자>에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관수루를 지나면 거북모양의 특이한 바위가 나타난다. 수승대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만들면서 빚어 놓은 거북모양의 커다란 천연 바위 대(臺). 대의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m2에 이르는데, 생긴 모습이 꼭 거북과 닮았다.
수승대라는 이름에 얽힌 내력이 재미있다. 거창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였다. 국력이 쇠약해진 백제가 신라로 가던 사신을 전별하던 곳이었는데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고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했다. 조선 중종 때는 요수 신권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구연서당 짓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신권은 바위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 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했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이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아름다운 경치에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로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 선생이 이를 따르면서 지어졌다.
수승대의 명물은 계곡 한 가운데에 자리한 거북바위다. 머리와 등짝이 꼭 거북을 닮았다. 바위에는 요수와 갈천의 후손들이 서로 제 조상을 높이려 경쟁적으로 시구를 파놓았다. 바위표면을 평면으로 다듬어서 이름을 새겨 빈틈이 없다. 바위둘레에는 이황 선생의 옛 글도 새겨져 있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 하노니/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먼 산의 꽃들은 방긋거리고/응달진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나의 눈 수승대로 자꾸만 쏠려/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언젠가 한 두루미 술을 가지고/수승의 절경을 만끽 하리라”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룩을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이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이다. 바위 한쪽에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가 있는데 이곳에 한 말의 막걸리를 넣었다가 스승에게서 합격을 받으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먹었다는 장주갑(藏酒岬)이다. 구연교 다리를 지나면 요수 신권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친 곳인 요수정(樂水停)이라는 정자가 눈앞에 들어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자연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이용했다. 정자의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고 사방에 계자 난간을 둘렀다.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는 정연한 부채살 형식의 서까래를 배치해 격조 높은 정자건물의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금원산 자연휴양림도 찾을 만하다. 금원산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옛날 금원숭이가 하도 날뛰는 바람에 한 도승이 그를 바위 속에 가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금원산에는 크게 이름난 두 골짜기가 있다. 유안청 계곡과 지재미골이다. 유안청 계곡은 조선 중기 이 고장 선비들이 지방 향시를 목표로 공부하던 유안청이 자리한 골짜기. 유안청폭포를 비롯한 자운폭포와 소· 담이 주변 숲과 어우러져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유안청폭포는 소설가 이태가 쓴 <남부군>에 빨치산 남녀 오백여 명이 목욕하던 곳으로 나오기도 했다. 거창을 찾았다면 금원산산책을 꼭 즐겨보시라고 권해드린다. 소나무, 편백나무, 은행나무로 가득한 겨울숲은 청량하기만 하다. 도심에 찌든 가슴이 깨끗해지는 것만 같다. 콘도식 산막과 통나무집, 야영장 등을 갖추고 있어 하룻밤 묵기에도 좋다.
여행코스
황산마을 ⇢ 수승대 ⇢ 금원산 자연휴양림
여행정보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함양IC에서 88고속도로를 이용해 거창IC로 나오면 된다. 대전~진주간 고속도로 지곡IC로 나와도 된다. 동서울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거창시외버스터미널까지 1일 8회 고속버스가 운행한다. 약 4시간 소요. 황산마을 전을주가옥(055-943-0141), 신순범가옥(055-943-0648), 신용원가옥(055-942-5804), 신외범가옥(055-943-0003), 신종범가옥(055-943-0160)에서 한옥민박을 체험할 수 있다. 금원산자연휴양림(http://www.greencamp.go.kr, 055-940-8700)에서도 숙박이 가능하다. 거창한우가 유명하다. 거창읍내에 원동갈비찜(055-942-1850), 감악산한우촌(055-942-6870) 등의 식당이 있다. 추어탕이나 어탕국수는 거창추어탕(055-943-0302),구구식당(055-942-7496)에서 맛볼 수 있다. 수승대 근처 수승대관광식당(055-941-1120)에서는 촌닭백숙, 국밥, 비빔밥 등을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