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하고고)
홍영식이 사지나 다름없는 북묘행을 감행한 것은 그의 충직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는 명문세가의 자손답게 왕에게 충성함을 당연시했는데, 특히 고종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한때 글방 동무였기에 고종 역시 그를 믿고 아꼈다.
비록 개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변에 참여했으나, 홍영식은 한 번도 고종을 배신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정변의 목표가 개화된 세상을 만드는 것이요, 개화된 세상을 만들게 되면 사민(四民)이 평등한 민주주의 세상이 이루어지겠으나, 그렇다 해서 왕정을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한 적은 없었으나, 막연하나마 영국의 경우처럼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홍영식이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북묘행을 감행한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강한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충직하고 성실하면서도 매우 원만한 사람이었다. 특히 대인관계가 좋았다. 개화파와 친청사대파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홍영식은 친청사대파와도 두루 친하게 지냈다. 보빙사절단으로 미국에 갔을 때 민영익과 대판 입씨름을 벌인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개화라는 문제를 놓고 벌인 이념상의 논쟁일 뿐 그 때문에 둘 사이에 금이 갔던 것은 아니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자리에서 민영익이 심한 자상을 입었을 때도 그는 군사를 보내 민영익을 보호했고, 청나라 장수 원세개와의 교분이 두터워 친청사대파나 청병들로부터 해를 입을 가능성도 많지 않았다. 개화파 동지들이 홍영식을 사지나 다름없는 북묘로 안심하고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혁명의 주역들이 두 패로 나뉘어 가는 길을 달리하다
정변 셋째 날인 12월 6일 해질 무렵 김옥균, 박영효 등 정변의 주역들은 정변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공사관으로 퇴각하기로 했다. 퇴각하기에 앞서 오로지 황송스러울 뿐인 고종에게 작별을 고해야 했고, 정든 동지 홍영식 등과도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눠야 했다. 그들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고종과 석별의 인사를 나눈 곳은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이었다.
김옥균 등은 먼저 고종에게 다가가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고했다.
“전하, 신 등이 불민하여 전하를 끝까지 모시지 못하고 작별을 고하고자 하오니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나라가 이처럼 위난에 처해 있는데, 경들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려는가?”
고종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신 등이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사온데, 어찌 감히 그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지금 신 등이 전하를 따라가 죽지 못하는 것은 다음 날 나라와 전하를 위하여 다시 청천백일을 바라볼 때가 있겠기에 잠시 이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부디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김옥균 등은 어둠에 쌓인 창덕궁 연경당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고종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어 그들은 아끼는 동지 홍영식과도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공은 비록 대가를 따르더라도 다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공은 안에 있고 우리는 밖에 나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권토중래할 날이 올 것이오.”
김옥균은 홍영식의 손을 덥석 잡으며 불투명한 장래를 약속하고자 했다.
“주상 전하는 내가 모시고 갈 터이니 동지 여러분은 안심하시오. 어디로 가든 초심을 잃지 말고 건투하셔서 반드시 권토중래하기 바라오.”
홍영식은 일행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작별의 말을 주고받았다.
그때부터 혁명의 주역들은 두 패로 나뉘어 가는 길을 달리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사관생도 출신의 행동대원 7명과 함께 어가를 모시고 북쪽 산으로 올라가 북묘로 향했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일본군과 함께 창덕궁 후원을 빠져나가 일본공사관으로 가기로 했다. 고종 일행은 청군과 합류하기 위해 가는 길이니 불의의 사고가 없는 한 별다른 위험이 없겠으나, 김옥균 일행은 청군과의 충돌이 불가피했기에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고종과 홍영식을 먼저 떠나보낸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사람들은 중대장 무라카미가 거느린 일본군을 따라 북쪽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창덕궁 후원을 빠져나가 교동에 있는 일본공사관으로 가는 것이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일본군과 개화파가 아무렇게나 이동할 수 없어, 일본군 일개 소대를 앞세우고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김옥균 등 개화파를 중앙에 세우고 다시 일본군 소대를 뒤따르게 했다. 그들은 어두컴컴한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다케조에의 뜻에 따라 일본공사관과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한다는 구상하에 움직이고 있었으나,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개화파들의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청나라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고,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한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일본공사관을 거쳐 인천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개화파 사람들과 일본군이 섞여 단체로 움직일 경우 자칫 적군의 공격을 받아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산등성이에 다다르자 김옥균이 개화파 동지들을 모아 놓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일본군을 믿고 죽첨 공사를 따라가고 있는데, 우리들의 생사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소. 이처럼 여러 사람이 단체로 몰려다니느니 차라리 각자 분산하여 혹은 인천으로, 혹은 원산이나 부산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되면 우리 일행 중 몇 사람은 목숨을 보전할 수도 있을 것이오. 만일 우리 모두가 죽첨 공사를 따라가다 한꺼번에 변을 당하게 되면 재기란 바랄 수도 없게 될 것이오.”
김옥균이 분산 행동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그 말이 옳으냐 그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러자 다케조에가 그들을 불러 설득했다.
“지금 우리는 잠시도 지체할 수 없소. 우리는 곧 인천으로 떠날 것이니 여러분은 의심하지 말고 속히 따라오기 바라오.”
다케조에가 그처럼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자, 의견이 분분하던 개화파들은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파 패잔병들은 일본군과 함께 창덕궁 북문을 빠져나가 일본공사관이 있는 교동 쪽으로 향했다. 백록동 정자를 지나자 내리막길인 골목길이 시작되었다.
“왜놈들을 죽여라!”
“역적놈들을 잡아라!”
개화파 패잔병들이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골목길을 내려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횃불을 들고 곳곳에 모여 소리치며 돌멩이와 기왓장을 던졌다. 총을 쏘는 자도 있었다. 일본군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성난 군중들의 시위와 공격은 그들이 일본공사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공사관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공사관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 병사들이 일행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개화파사람들을 호위하며 앞장서 공사관으로 들어간 일본군 네댓 명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왕궁을 호위하기 위해 나간 일본군이 전멸한 데다 청군과 조선군이 합동으로 내습한다는 소문에 놀란 공사관 수비병들이 적군이 침입한 것으로 오인하고 총격을 가했던 것이다. 수비병들의 오해를 풀고 일행이 공사관으로 들어간 것은 저녁 8시가 지난 뒤였다.
일본군이 창덕궁에서 물러나는 순간 개화파는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지고 말았다. 청군이 침입하기 전까지 박영효가 거느렸던 4영의 조선군이 청군과 합세하여 개화파에게 총부리를 겨누었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백성들도 하나같이 개화파를 매도했다. 정변이 일어나기 전부터 백성들은 친청사대파를 편들고 청군을 편들었다. 왕과 왕비를 협박하고 대신들을 살해하며 정권을 잡으려던 개화파가 청군에 의해 일망타진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은 완전히 개화파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성난 군중들의 틈을 뚫고 일본공사관까지 피해 갈 수 있었으나, 그곳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안위부터 걱정해야 하는 일본군에게 개화파는 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어떤 자는 “이제 조선 정부에서 김옥균을 체포하려고 사자를 보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걱정하는 척했고, 어떤 자는 “우리 공관 내에 물이 없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속에 숨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며 빈정대기도 했다. 정권 장악에 실패한 개화파는 그처럼 한때의 동지였던 일본군에게도 귀찮은 애물단지일 뿐이었다.
“공관 우물 속에 숨느니 차라리 서대문형장으로 가겠다.”
김옥균이 화난 얼굴로 내뱉자 일본군은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패잔병으로 전락한 개화파 사람들은 일본공사관에서 불안과 초조 속에 하룻밤을 보냈다. 참으로 암담한 밤이었다. 어떻게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인지, 답답할 뿐이었다.
일차적인 목표는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피하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도 없었다. 차라리 원산이나 금강산으로 도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일본보다 미국으로 도피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선택일 것 같기도 했다. 또한 9명이나 되는 일행이 단체로 이동하느니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선택일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은 공상에 불과할 뿐 실천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당장 급한 것은 일본공사관을 빠져 나가는 일이었다. 그 곳을 벗어나는 것도 그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만큼 그들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튿날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했다. 수많은 군중이 일본공사관으로 몰려와 돌을 던지며 공사관 수비병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오전 10시, 외무독판 김홍집이 일본공사 다케조에에게 조회를 보냈다. 정변 당시 일본군이 취한 행동에 대해 항의하고 문책하는 내용이었다. 다케조에는 조회에 대한 회답을 보내고 나서, 선후책을 강구하기 위해 서울에 주재하는 외국 공사, 영사들과 연락을 취하려 했으나 거리가 혼잡한 탓에 연락이 닿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었다. 공사관에는 거류민 등 300여명의 일본인이 모여 있었는데, 다케조에마저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만큼 식량이 부족했다. 식량을 구입하려 해도 반일 감정이 팽배한 상인들이 일본인에게 식량을 팔지 않았다. 더 이상 서울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한 다케조에는 본국으로 퇴각하기로 하고, 일본 군대와 거류민들을 이끌고 인천을 향해 출발했다. 개화파 사람들은 일본인으로 변장하기 위해 상투를 자르고 헌 양복으로 갈아입고 일본인들 틈에 끼였다. 얼굴이 널리 알려진 김옥균, 박영효 등은 커다란 나무궤짝 안에 숨어야만 했다.
광화문네거리와 서대문을 거쳐 마포로 가는 동안 일본군은 때로는 청군이나 조선군과 시가전을 벌이고, 때로는 민간인의 공격을 받으며 간신히 한강을 건넜다.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너자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으나 먹을 것이 없었다. 허기에 지친 정변 주동자들과 일본군이 지친 다리를 이끌고 인천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 등은 인천영사관으로 들어가고, 개화파 사람들은 인천 주재 일본영사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인천지점장의 집에 은신했다.
그처럼 간신히 사지를 벗어나 인천까지 피신한 정변 주동자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등 9명이었다.
일본 군함 니즈호(日進號)와 일본우편회사 선박 치도세마루(千歲丸)는 이미 인천항에 정박해 있었다.
치도세마루를 통해 일본 정부가 다케조에에게 내린 훈령은 조선의 내정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본인 선장이 개화파를 살리다
아직도 쫓기는 신세인 개화파 사람들에게 인천은 결코 안전지대가 될 수 없었다. 친청사대파가 다시 집권한 조선 정부는 외무협판 묄렌도르프에게 인천으로 도주한 정변 주동자들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묄렌도르프는 추격 부대를 이끌고 인천으로 달려가 일본공사 다케조에에게 정변 주모자인 국적(國賊) 김옥균, 박영효 일당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일본 우편선 치도세마루에 숨어 있던 김옥균 등은 배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품속에 숨겨둔 비상약을 만지작거렸다. 그들은 사태가 악화될 경우 자살할 결심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옥균 등을 인도하라는 묄렌도르프의 요구는 강경했다. 정적 김옥균을 처치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기에 그는 외무독판 조병세, 인천감리 홍순학 등을 거느리고 찾아가 강경한 어조로 김옥균 등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 순간 변덕이 심한 다케조에의 마음을 부채질한 일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조선의 내정에 관여하지 말라는 일본 정부의 훈령이었다. 그는 개화파를 더 이상 보호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우편선 치도세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김옥균 등에게 묄렌도르프의 요구가 워낙 강경하니 다른 방도가 없지 않느냐며 하선을 권유했다.
그것은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지난 며칠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사선을 넘어온 조선인 동지들을 굶주린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우리에 던져 버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자 배 안에 있는 일본인 승객들이 다케조에를 배신자라며 비난했다. 그들은 다케조에의 행동이 너무 유약하여 일본인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며 궁지에 몰린 개화파 사람들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고 열을 올렸다.
그 때 사지에 몰린 개화파 사람들을 구한 용감한 사나이가 나타났으니, 그는 다름아닌 그 배의 선장 츠지가츠 사부로(辻勝三郞)였다. 츠지가츠는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등이 배에서 내리게 되면 곧바로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며 다케조에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 배에 조선 독립당 사람들을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사의 말을 믿고 모종의 일을 도모하다 잘못되어 쫓기고 있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배에서 내리라 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공사가 그렇게 요구한다 하더라도 이 배에 오른 이상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선언하고 개화파 사람들을 석탄 창고에 숨긴 뒤 권총을 빼들고 뱃머리에 섰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만일 나의 허락 없이 이 배에 오르는 조선 병사가 있다면 가차없이 사격하겠다.”
이어 그는 개화파의 인도를 요구하는 묄렌도르프에게 치도세마루에는 그런 사람들이 탄 적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평소 김옥균을 증오해 마지않던 묄렌도르프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은익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임을 지적하며 치도세마루를 수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권총을 빼들고 버티는 선장의 완력에 눌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케조에의 배신으로 하마터면 사지로 내몰릴 뻔한 정변의 주역들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며칠 뒤 그 배가 출항함에 따라 일본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일본인 선장 츠지가츠 사부로가 생면부지의 개화파 인사들을 구출할 수 있었던 것은 한성순보를 발간하기 위해 김옥균 등이 일본에서 데리고 왔던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열성적으로 변호해 준 덕분이었다.
북문을 지나 북묘로 향하다
한편 김옥균 등 개화파 동지들과 헤어진 홍영식은 박영교와 함께 어가를 따라 북쪽 산으로 올라갔다. 중전 민비가 기다리고 있는 북묘로 가기 위해서였다. 연경당에서 옥류천(玉流川)을 거쳐 북문으로 가는 길은 산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길이었으나, 옥류천까지는 꽤 넓은 길이 다듬어져 있어 고종이 탄 사인교를 메고 가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홍영식은 도승지 박영교와 함께 묵묵히 어가를 따라갔다. 박영교는 박영효의 맏형으로 일찍이 일가인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개화파로 성장했다. 왕의 비서실장에 해당되는 도승지였기에 위기에 처한 고종을 호위함이 마땅하다 하겠으나, 죽음을 겁내지 않을 만큼 충직한 성품이기에 당연히 어가를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고종이 타고 있는 어가의 호위는 신중모 등 일본 하사관학교 출신의 용사 7명이 맡았다.
고종을 모신 어가는 어느덧 옥류천에 당도했다.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뒷산에 있는 실개천인데, 소요암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의 홈을 파 물이 흐르게 만든 인공적인 개울이었다. 인조 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 개울에서 임금은 신하들과 함께 술잔을 띄워 놓고 시를 읊곤 했다. 지금도 소요암에는 인조가 쓴 ‘玉流川’이라는 한문 글씨와 숙종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옥류천 주위에는 태극정, 소요정, 취한정 등 네댓 개의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홍영식 등이 옥류천에 다다르자, 옥류천 주변에는 총상을 입고 쓰러진 병사들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불과 두 시간 전만 해도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던 청나라 병사들은 어디로 퇴각했는지 종적이 묘연했다.
고종을 태운 어가는 옥류천을 지나 북문으로 향했다. 동쪽 하늘에 위쪽이 약간 일그러진, 둥근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누구냐?”
어가가 북문으로 다가가자 대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청병과 함께 옥류천 백병전에 참여했던 무예청 무감과 별초군이 몇 명 남아 북문을 지키고 있었다.
“상감마마를 모시고 가는 어가요.”
신중모가 소리쳤다.
“아, 그렇습니까?”
무감은 황급히 다가와 사인교의 주인이 고종임을 확인하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동조마마가 계시는 북묘로 가는 길이다.”
홍영식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조(東朝)’란 대비가 거처하는 궁궐을 가리키는 말이니 ‘동조마마’란 대비를 지칭하는 호칭이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