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대로 보이는 의사는 몸에 푹신푹신 살이 붙었고, 허연멀건 얼굴에는 투턱이 져있었다. 표정과 동작에서 여유가 풍겨났다. 내 행색이 의사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염려스러워서 나는 또 슬그머니 돈다발을 꺼냈다가 집어넣었다.
돈을 본 의사의 표정이 변했다. 돈다발을 지닌 나를 높이 보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의사가 그분의 병세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다가 왕진가방을 챙겨 들고 나를 따라 나선 것도 어쩌면 그 의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라한 행색을 하고서 함부로 돈다발을 내보이는 일도 삼가야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분의 집을 떠나올 때도 옷은 깨끗했지만 점잖은 자리에서 입을 옷이 아니라 활동하기 편하도록 된 옷이었다. 그 동안 입은 채 농사일을 해서 구겨지고 때가 묻었다. 게다가 내 얼굴 모습도 깨끗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생의원 현관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수선했다. 잡초밭처럼 들쭉날쭉 더부룩한 머리칼, 까맣게 탄 살갗, 성기지만 억세게 자란 콧수염 턱수염, 그리고 불량스러워 보이지는 않지만 빛을 뿜어내는 눈빛…. 그 눈빛 때문에 아버지는 나에게 희망을 걸었다가 더 큰 실망을 맛보아야 했지만, 재생의원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그 눈빛은 어울리지 않게 강한 느낌을 끼얹는 것 같았다. 교도소에 드나들 때도 형사들에게 그런 말을 적지 않게 들었고, 눈빛을 죽여야지 생각하곤 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가 않았다. 마음 먹고 눈빛을 다스려 놓으면 한결 부드러워지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다시 날선 눈빛이 되곤 했다. 그분도 내 눈빛 때문에 나를 더 의심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내 행색과 어울리지 않는 돈다발이 의심스러워 의사가 왕진가방을 들고 나를 따라 나섰다고 하더라도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그분은 의사한테 진찰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난 의사선생님 뫼셔 오란 말 한 적이 없는데요.”
그분은 어리둥절해진 얼굴빛으로 말했다.
“환자가 불러야만 의사가 왕진을 오는 게 아니예요. 환자 가족이나 이웃 사람이 불러두 오는 거예요.”
의사가 대꾸했다.
“저 사람은 내 가족두 이웃 사람두 아니예요.”
그분이 나를 노려보았다. 열과 고통으로 퀭해 진 그분의 눈 속에 나에 대한 멸시와 적의가 고여 오르고 있었다. 나는 근심스러워졌다. 그 분의 나에 대한 멸시와 적의 때문이 아니었다. 그분이 진료를 거부하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가족이나 이웃이 아니라두 환자를 보면 의사한테 알리구 의논하는 게 올바른 태도지오. 자, 진찰을 해보실까요? 어떻게 아프시지오?“
그분이 의사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든 말든 의사는 아랑곳 않고 끈질기게 묻고 대답하곤 했다.
“잠시 현기증이 일어난 거 뿐이에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지만 그냥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겨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분은 상체를 온전하게 일으켜 세우지도 못한 채 다시 현기증에 휘말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거 보세요 몸에 고장이 난 게 분명한데 왜 쓸 데 없는 고집을 부리세요? 열이 이렇게 높은데 어지럽지 않을 수가 없지요 자, 체온부터 재 봅시다.”
의사는 그분의 이마에 얹었던 손으로 왕진가방을 열고 체온기를 꺼냈다.
“의사 선생님한테 내 입장을 말씀 드려야겠군요. 난 지금 하느님께 헌신수행을 하구 있는 중이에요. 이만큼 아픈 걸 가지구 의사 선생님의 힘을 빌려서야 되겠어요? 내 의지에 대한 시험이니 내 의지루 이겨내야 해요. 의사 선생님한테 그냥 돌아가시라구 말씀 드린 까닭을 이해하시겠지오? ”
그분은 그렇게 말했지만 말하기에도 힘에 겨운 듯 숨이 차서 헐덕거렸다.
“의사가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구 생각하시나요? 하느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좁은 소견을 가져서는 안되지요. 세상을 하느님이 만드시구 세상 일을 하느님이 주관하시는데 어째서 세상과 세상 일을 하느님한테서 떼어 놀라구 하나요? 하느님 뜻에 따르는 태도가 아니라 하느님 뜻에 거역하는 태도예요. 의사두 의술두 약두 하느님이 만드셨어요. 이 만큼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지 무슨 쓸 데 없는 고집인 가요? 체온기 넣게 아- 입 벌리세요.”
의사는 체온기를 그분의 입술에 갖다댔고, 그 분은 마지 못한 듯 입술을 열었다. 의사는 체온기를 입안에 넣고 그분의 입을 다물게 한 다음 왕진가방 속에서 혈압측정기를 꺼냈다.
“당신이 이 집 쥔이시우?”의사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아닙니다.”
“환자양반은 촌사람 같지가 않은데…, 그래두 환자양반이 이 집 쥔이시우? ”“아닙니다. 고…”내가 고행길을 떠나 오신 어른이라고 설명하려는데 의사가 가로채고 나섰다.
“그렇겠구만. 이 집은 빈 집이로군. 그럼 두 사람이 우연히 이 빈 집을 찾아 들었다가 이 양반이 아픈 걸 알구서 나를 찾아온 거유?”
“서울에서 길을 떠날 때부터 제가 이 어른을 뫼시구 왔습니다. 이 어른…”
“어이구야. 열이 사십도나 되네. 어디 혈압좀 재 봅시다.”
의사는 체온기를 허공에서 몇 차례 뿌려 통 속에 넣어 가방 안에 챙기고는 혈압측정기를 꺼내 풀었다.
“팔소매 걷어 올리시우.”
내가 다가가 그분의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투실투실 살이 붙은 허여멀건한 팔이었다. 의사는 그 팔 위쪽에 넙적한 고무튜브를 밀착시켜 감고는펌프질을해 튜브 속에 바람을 채워 넣으며 다른 손으로는 청진기로 팔오금에 가져다 대며 또 눈으로는 계기판을 살피느라 삼역 사역을 한꺼번에 해냈다.
“혈압두 상당하게 높아요. 열을 감안한다구 해두 높아요. 당분간 안정과 치료를 하는 게 좋겠어요. 그런데 무슨 일루 길을 떠나 오셨지오? 혈압을 그런 식으루 치료할 생각이었대면 집으루 돌아가 안정하구 치료 받으라구 권해 드리구 싶어요.”
의사가 혈압측정기를 거두어 추스르며 말했다.
“아니에요. 이대루 집에 돌아갈 순 없어요. 하루 이틀 쉬면 나을 감기 몸살일 뿐이에요. 혈압두 조금 높았지 그렇게 많이 높지는 않았어요. 집으루 돌아가란 말은 하지 마세요 하기야 저자가 불쑥 의사를 데리구 온 것부터 심상 치 않기는 했어. 지금 집에 돌아갈 입장이 아니라는 걸 훤히 알면서 의사의 입을 빌어 집에 돌아가두룩 권하는 속셈이 뭐야, 응?”
그분의 나중 말은 열 때문에 하는 헛소리 같기도 했다.
“집에 돌아가기가 꽤나 싫은 모양이구만요. 부인하구 심하게 싸우구서 집을 뛰쳐나오기라두 한 건가요? 이렇게 빈 집이 있겠다, 맘 풀릴 때까지 며칠 동안 여기서 안정을 취해두 괜찮지요. 단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이 뜨뜻해야 하구, 밥하구 밥반찬을 만들어 줄 사람이 있어야 하구, 또 치료를 받을 때라야 그럴 수 있어요. 주사 맞구 약 지어다 드세요.”
의사는 주사기 속에 주사약을 넣고. 그분을 모로 눕게 해 엉덩이에 주사를 놓았다.
“어떻게 편찮으십니까?”내가 의사에게 물었다.
“환자양반이 말하는 거처럼 감기 몸살이긴 한데 심해요. 가볍게 알구 치료를 소홀히 하다 가는 폐렴이 될 수두 있어요. 젊은양반 나 따라 병원에 가서 약 지어 오구. 방 뜨뜻하게 하구, 소화 잘되구 영양분 풍부하게 지닌 음식 만들어 대접해야 해요. 아까 보니까 돈은 많더구만.” ·
의사가 몸을 일으켰고 나는 왕진가방을 집어 들고 의사의 뒤를 따랐다. 그분에게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두 양반은 어떤 사이시우?”재생의원을 향해 들길을 걸어가며 의사가 내게 물었다.
“그 어른은 대천교의 교주가 되실 분입니다. 교주 자리에 오르시기 전에 고행길을 떠나셨는 데 제가 시중 들어 드릴라구 따라왔습니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대천교라는 교두 있우?”“있구말구요. 그 어른이 대천교의 교주가 되실 분이시라니까요.”
“고행길을 떠났다면서 웬 시중 들 사람까지 데리구 댕긴다는 거유?”의사의 물음에 나는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분이 자꾸 나를 따돌리려고 한 것이 그 때문이었나 싶었다.
“실상은 저두 고행길을 떠나왔습니다. 그 어른을 따라 고행길을 떠난 김에 이번처럼 어려움이 생길 때는 거들어 드리는 겁니다. 제가 병들어 쓰러졌다면 그 어른이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셨겠지오. 그런데 그 어른 감기 몸살은 곧 나으실 수 있겠습니까?” 내 물음에 의사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대꾸를 않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 물었우? ”“그 어른 감기 몸살이 곧 나으실 수 있겠느냐구 물었습니다.”
“정말루 고행길을 떠났다면 몸이 지쳐 있을 거요. 집에서 떠난 지 며칠이나 됐우?”“한 달 됐습니다.”
“서울서 여기까지 한 달이 걸렸으면 하루에 십여리길밖에 걷지 않았을 테니 그걸루 지치진 않았을 거구, 음식을 제대루 먹지 못했우?”
“길가 농가에서 농사일을 해주며 왔습니다. 농사일이라곤 해보시지 않은 어른이 날마다 고된 농사일을 하셨으니 지치시기두 했겠지오.”
“못해두 일주일은 푹 쉬어야 해요. 그리구 내가 아까 일러 준 거 잊어버리지 말아요. 방이 춥지 않아야 하구, 영양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구. 약을 제대루 먹어야 해요. 그러자면 노자돈이라두 넉넉해야 하는데…”
“이집 저집 농사일을 해주면서 남들 받는 품값의 반은 받아 모았습니다. 돈은 넉넉하게 있으니까 좋은 약으루 지어 주십시오.”
“교주가 될라구 고행길을 떠나다니. 참 옛날 얘기 속에 나오는 종교 같구만…” 그렇게 말하면서 의사는 나를 힐긋 돌아보았는데 그 눈빛 속에는 나에 대한 의심이 가셔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분의 병은 의사의 말대로 일주일 뒤에야 나았다. 의사가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했다. 의사가 날마다 와서 진찰을 하고 주사를 놓아 주고 또 나를 의원으로 데려가 약을 지어 보냈으니 말이다.
일주일 뒤에 병의 사슬에서 벗어난 그분의 모습은 감기 몸살이 그분의 몸을 얼마나 휘저어 놓고 짓마 놓았는지 대뜸 알아 차릴 수가 있도록 해주었다. 움푹 들어간 눈, 훌쭉해진 볼, 창백해진 얼굴빛, 거기다가 걸음걸이는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그분의 입에서는 길을 떠나자는 말도 나오지 않았고, 더군다나 농사일을 하겠다는 말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 큰 변화가 느껴졌다. 그분의 고집이 꺾인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냄새처럼 열처럼 전해져 오던 그분의 나에 대한 멸시와 적의가 완연하게 가셔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여보게. 세상사 참으루 알 수 없는 노릇이네.”
그분은 세상을 살 만큼 살아본 노인처럼, 또는 세상 일을 도무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말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오? ” “난 자네를 사탄의 졸개라구 믿어 왔거든.”
“제가 못난 인물이기는 하지만. 또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한테 사탄 노릇을 했을지두 모르지만 이번에 어르신 뒤를 따라온 건 사탄의 졸개로서가 절대루 아닙니다.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알구보니 자네가 사탄의 졸개가 아니었구나, 그런 얘기가 아니네. 어떻게 하다가 사탄한테서 도움을 받게 됐나. 하는 얘길세. 세상사 참으루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분의 말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속에 퍼렇게 섰던 날이 한결 무디어져 있었다.
“어르신께서 정 저를 사탄으루 생각하셔야겠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지만 지금 어르신 옆에 있는 사탄은 어르신을 해치는 사탄이 아닙니다.”
“허, 허, 이상한 사탄두 있구만 그렇다면 사탄의 성질이 변했단 말인가. 본질이 변할 리는 없구 방법이 변했겠지.”
“제 속에 사탄의 마음이 들어 있는 건 틀림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쪽에는 착한 마음두 들어 있습니다. 사탄의 마음이 기승을 부릴 적에는 사탄의 짓을 하지만 착한 마음이 앞설 적에는 착한 행실을 합니다.”
“그럼 지금 자네 속에는 착한 마음이 앞서 있다는 얘기렷다.”
“착한 마음이라구는 할 수 없지만 악한 마음두 아니라구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제 지금 처지는 어르신을 해쳐서 이득을 보두룩 돼 있지 않구 어르신을 도와 드릴 적에 이득을 보두룩 돼 있습니다. 사탄두 이득을 외면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이라는 건 인정하는구만. 병을 앓구 나서 내 몸의 힘이 쭈욱 빠져 나간 것 같네. 얼마 동안 사탄의 시중을 받으며 지내보라는 하느님의 뜻이라구 생각해야 할래나? 허, 허” 그 날 이후로 그분의 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분의 말대로 당분간 사탄과 동거하기로 마음 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모처럼 우체국에 가서 서울로 전화를 했다. 사모님이 직접 받았다.
“저 유관중입니다. 사모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 유씨! 왜 인제 전화를 하우?” 사모님은 가슴이 벅찬 듯 소리를 질렀다.
“전화 없는 동네루만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유씨두 건강하구 그 어른두 건강하시우?”
“어르신께선 감기 몸살루 며칠 동안 앓으셨는데 이제 다 나셨습니다.”
“조심하시지 않구. 어떻게 하다가 감기 몸살에 다 걸리셨우? 그래서 치료는 제대루 받으셨우?” “예, 의사 선생님이 매일같이 왕진 오셔서 진찰해 주시구, 주사 놔주시구. 약 지어 주시구 했습니다. 한때는 열이 심하셔서 걱정했지만 치료 받구 회복되셔서 지금은 병후조리중이십니다.”
“지금 거기는 어디쯤이요?” “강원도 홍천군 내면 00리인데 꽤 깊은 산골입니다.” “잠자리는 어떻수?” “주인이 버리구 떠난 빈 집에서 묵구 있습니다.”
“아직두 밤에는 써늘한데 이부자리두 부실하잖우?”
“부엌이 불 때는 아궁이루 돼 있어서 지가 뒷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땝니다. 불을 때면 방은 따뜻합니다.”
“다행이로구만 음식은 어떠우?” “제가 밥을 합니다. 국두 끓이구 찌개두 끓입니다. 동네에서 김치랑 콩자반두 얻어 왔습니다.”
“어이구. 유씨가 고생을 많이 하네. 그래 그 어른이 유씨가 해 드리는 진지를 고분고분 받아 잡수시우?” “앓구 나신 뒤부터 한결 부드러워지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르신께서는 저를 아직두 사탄의 졸개라구 여기십니다.” “사탄의 졸개?” “사탄이 어르신의 고행을 훼방놀구 감시하라구 저를 보내서 어르신을 따라다니게 했다구 말씀하십니다.”
“저런! 까짓거 자초지종을 말씀 드려요. 아직 두 같이 다닐 날이 아득하게 많은데 못 믿구 나를 해칠 사람이라구 생각해서야 먹은 음식이 제대루 소화가 될 것이며 잠자리인들 편하겠우?” “참다 못해 슬그머니 말씀을 드려봤습니다. 그렇지만 어르신께서는 의심을 풀지 않으십니다.”
“유씨가 고생이 많수. 꾸욱 참구 정성스럽게 시중 들어 드려요.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두 감동한다는 말이 있잖우? 그 어른두 오라잖아 유씨 정성에 감동하시게 될 거예요. 유씨가 시중을 잘 들어 그 어른이 고행을 무사히 끝내시구 돌아오는 날 내가 유씨한테 정해 놓은 품삯만 달랑 내 주지는 않을 거유. 유씨 마음에 들 처녀를 물색해 장가 들여 주구 직장두 구해 주겠우. 참 돈 모자라지 않수? 모자라거든 돈 받을 주소를 알려 줘요. 돈 아끼느라구 지나치게 고생하진 않두룩 해요. 고행은 하느님 도를 살아서 깨닫구 살아서 도를 세상에 전할려는 거지 병들거나 죽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예요. 병들면 도를 깨우칠 수두 없구, 죽으면 도를 깨달 아두 전할 수가 없으니 무슨 소용이우? 돈 아끼지 말아요.”
“제가 농사일에 품을 팔아 돈을 만들어 쓰구 있습니다. 사모님께서 주신 돈을 쓰려구 하니까 어르신께서 사탄의 돈이라며 거부하십니다.”
“그 어른 고집두 참…. 유씨가 따라가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했구만. 그나저나 유씨 고생이 너무 심하지 않수? 그 어른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품을 파는 거처럼 꾸미되 과로하질랑 마시우. 유씨마저 몸살이 나면 큰일 아니우? 돈을 보내 줄 테니 품삯 받은 거라구 말하면서 쓰두룩 해요.”
“꼭 필요하면 돈을 보내 주십사구 연락 드리 겠습니다. 제 몸은 쇠처럼 단단하구 지금은 돈두 넉넉하게 있습니다.”
'유씨는 내가 생각한 대루 믿구두 남을 사람 이우. 가끔 소식 전해 주구, 필요한 게 있으면 지체 없이 알려요.”
“네, 잘 알겠습니다. 사모님.”
며칠 뒤 정복을 한 순경과 사복을 한 형사가 찾아왔다.
“가택조사를 나왔습니다.”
정복 순경이 말했다.
“이 집에서 언제부터 살았지오?“ “한 보름 됩니다.““
내가 대답했다.
“이 마을에 정착하실 건가요?”“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어떤 목적이나 용무로 오게 됐나요?” 어떻게 대답해야 되나, 생각하며 나는 그분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 동안 외모를 가꾸고 다듬지 않은데다가 병색으로 노인처럼 보이는 그분은 나에게 처리를 맡겨버린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행을 하구 있는 중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신분증 좀 봅시다. 두 사람 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꺼내 내밀었다. 그 어른도 뒤적뒤적 주민등록증을 찾아 내밀었다. 순경이 두 장의 주민등록증을 양손에 나누어 들고는 번갈아 살펴보았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예요?”순경은 눈길을 들어 올려 나와 그분의 얼굴을 새롭게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 야 하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분은 입을 다 물고 있었다.
“이 어르신과 저는 대천교라는 종교의 신잡니다. 이 어르신은 대천교의 다음번 교주가 되실 분으루 교주가 되시기 전에 고행여행을 떠 나신 처지이구, 저는 이 어르신을 따라 다니며 고행을 배우구 있는 처집니다.”
“몸에 지니고 있는 물건과 짐 속에 있는 물 건을 모두 꺼내 노세요. 이 부근에서 강력사건이 발생해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니 협조해 주기 바래요.”
그분과 나는 순경이 하라는 대로 했다 내 몸과 짐 속에서는 꽤 많은 액수의 돈이 나왔고, 그분의 짐 속에서도 돈다발이 하나 나왔다.
“아니, 이게 웬 돈이지?” 이렇게 말한 사람은 경찰이 아니라 그분이었다.
“말 잘하셨어요. 웬 돈이 이렇게 많지오? 종교상의 목적으로 고행을 하고, 또 고행을 배운 다는 사람들이 웬 돈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웬 돈인지 말해봐요.”
사복 형사가 바톤을 인계받은 듯 다그쳐 물었다.
“이런 철딱서니 없는 여자 같으니라구! 쯧, X.
그분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고행길을 떠날 때 이 어르신 사모님께서 비상금으루 넣어 주신 돈과 여기까지 오는 동안 농가에서 모심기를 해주구 받은 품삯 모은 돈 입니다.”
“지서까지 잠시 다녀와야겠어요. 짐 챙겨 들고 따라 나서요.”
형사가 말하고 앞서서 방 밖으로 나갔다. 정복 순경은 재촉하듯 방안에 머물러 있었다.
'저만 갖다 오면 안되겠습니까? 이 어르신은 심한 감기 몸살을 앓구 나신 지 얼마 안돼 기진한 상태신데요?”
나는 그분과 나의 짐을 챙기며 순경한테 청해 보았다.
“내가 부축할 테니 걱정 말고 어서 짐이나 챙겨요.”
순경의 무뚝뚝한 대꾸였다.
챙긴 짐을 양어깨에 걸치려니까 그분이 당신의 짐을 나꿔 채 등에 졌다. 집을 나서서 두 경찰 앞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분의 걸음걸 이는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내가 부축하려고 다가서니까 뿌리치듯 비켜섰다.
“철딱서니 없는 여편네 같으니라구!” 그분이 입속말처럼 중얼거렸다.
지서에 도착하자 그분은 어쩔 수 없는 듯 서울집에 전화를 했다. 담당형사와 지서장이 사모님과 통화를 했다.
“최근에 이 부근에서 강력사건이 발생해 부득이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머물더라도 해당 마을 리장을 찾아가 신원사항을 알려 두시는 배려를 하시면 오해의 소지가 줄어들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돌아가십시오.”
지서장이 말했다.
“여보게, 자네 짐과 내 짐 속에 들어 있는 돈 모두 꺼내 놓게. 내 집사람이 비상금으루 쓰라구 준 돈이면 짐 속에 들어 있건 짐 밖에 있건 모조리 꺼내 놓게.”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그분이 불쑥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진 채 짐 속에 들어 있는 돈과 내 몸에 지니고 있던 돈 모두를 꺼내 형사의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경찰관 여러분두 아시다시피 고행하는 사람 한테 돈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제 집사람이 철이 덜 들어 나두 모르게 한 짓입니다. 이 돈을 여기 맡기구 가겠으니 지서 관내의 어려운 사람들한테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돌 아가겠습니다.”
그분은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켜 지서문을 나섰다. 그분의 뒤를 따라 지서 밖으로 나온 내 눈에 저만치 재생의원이란 간판이 보였다. 일주일 동안 꼬박꼬박 왕진을 와 주었던 오십 대의 푹신푹신 살이 오르고 살갗이 허여멀건한 의사의 모습이 떠올라 보였다. 우리를 지서에 신고한 사람이 바로 그 의사일 것이라는 생각 이 문득 머리속에 잡혔다.
“어르신 편찮으실 적에 치료해 준 의사 선생 님이 저기 재생의원 원장님이십니다. 인사하실 생각이 기시면 잠시 들르십시오”
나는 그분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허, 자네가 인제는 나한테 해라, 말아라두 하네 그래. 고행하는 사람이 무슨 세상 인사까지 일일이 차리겠나? 정 마음에 걸리거들랑 자네나 잠시 들어가 내 인사말까지 얹어서 전하구 오게나.”
그분의 대꾸였다.
“네 그럼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잰걸음질쳐 가 재생의원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혼자 기세요. 들어가세요.”
그 동안 낯이 익은 간호원이 즉시 통과시켜 주었다.
“어서 오시우. 근데 그 양반 감기 몸살이 더 쳤우? 인제 조리만 잘하면 괜찮을 텐데?” 의사는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아니구, 다른 일루 이 근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선생님께 인사나 드릴라구 들렀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래요? 무슨 일루 왔는데? 도시 사람들 같으면 이런 물음 안하겠지만 나두 시골 사람이래서 호기심이 많아요? 이웃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을 다 알구 싶어지거던?” “지서에서 경찰이 찾아와 조사할 게 있다면 서 지서루 가자구 해서 왔습니다.” “당신 혼자? ”
“지가 뫼시는 어르신두 함께 왔습니다.”
“그래서? 그 양반은 지서에 남구, 당신은 풀려 나왔우? 뭘 조사 받았는데?” “그 어른두 풀려 나셨습니다. 서울에서두 행세하는 분이시니까 지서장과 그 어른 사모님이 전화루 몇마디 하신 담에 곧 돌아가시라구 미안하다구 지서장이 말하더군요. 아마두 그 어른과 제가 머물러 있는 동네 사람들이 지서에 신 고를 한 모양이에요. 아마 우리가 금세 풀려나 돌아온 걸 보면 신고한 사람이 머쓱해지겠지오?” 나는 그렇게 물으며 의사의 안색을 슬쩍 살펴보았다. 의사는 갑자기 하품을 하고는 두 손 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댔다 그 서슬에 의사의 얼굴에 피가 몰려 붉어졌다. 나는 의사의 표정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모내기가 끝나자 농촌에서는 밭매기가 일거리였다. 콩밭, 고추밭, 오이밭. 옥수수 밭…. 김을 매 줘야 할 밭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지만, 밭매기는 모내기만큼 서두르지는 않았다. 하기야 나도 전에 농사일을 해보았지만 모내기만큼 때를 잘 맞춰야 하는 일이 드물었다. 모내기는 철을 놓쳐 버리면 아주 망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내기는 온 동네 사람이 동원되어 이루어졌다.
거기 대면 밭에 김매 주는 일은 느긋했다. 동네 사람들이 서로 품앗이를 하기도 했지만, 식구끼리만, 내외간 둘이서만, 더 나아가 혼자서 몇 며칠을 두고 긴 밭고랑을 타고 앉아 호미질을 이어 나가기도 했다.
따라서 모내기에는 많은 일꾼을 품삯 주고 사서 쓰지만 밭매기에는 특별한 경우 아니면 일꾼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특별한 경우란 아주 큰 평수의 밭을 가진 집이거나, 도시 사람의 밭을 관리해 주는 집이거나. 노인들만 사는 집이거나. 과부 혼자 농사를 짓는 집 따위가 그 범위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래도 내가 줄창 일하는 자리에 불려 나가게 된 까닭은 첫째 떠돌이 일꾼들이 모내기철이 끝나자 모두 빠져 나가 일꾼을 따로 구하기가 힘든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내 품삯이 싸 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변함없이 공정가격의 반을 받았고, 그 가격에 해당하는 농산물로도 받았으며, 돈도 농산물도 당장 없는 집에서는 외상 일을 해주거나 경우에 따라 공짜로 해 주기도 했다. 의지할 자손이 없는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매달린 과부가 그런 경우였다.
지서에서 가진 돈을 몽땅 털어 내놓고 돌아 오면서 나는 막막한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며칠 전에 그런 통화를 한 터여서 사모님한테 전화를 또 하기도 뭣했다. 견딜 때까지 견디고, 해 볼 때까지 해보다가 막다른 골목에 갇히게 되면 그때 전화를 하자고 생각하며 동네 집을 기웃거렸다. 그런 처지의 내게 밭매 달라는 일 부탁이 연달아 들어온다는 것은 행운이랄 수가 있었다.
정선댁이라고 불리우는 어린 남매 데린 젊은 과부댁과 내가 가까워진 것도 그런 어간에서였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