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한 아들에게 매일 손편지를 쓴 엄마
소설가 엄마 김별아가 군인 아들에게 쓴 편지를 모아 펴낸 책 <스무 살 아들에게>는 볼수록 신기한 책이다. 글재주 풍부한 소설가 엄마라 해도 그 아들을 순간순간 떠올리며 글로 옮기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훈련소에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부칠 수 있었을까? 하루 이틀 지나 길어야 일주일 정도는 쓸 수 있다 해도 엄연히 자신만의 일상을 살아가며 한 달 넘게 꼬박 두세 장씩 편지를 썼다니, 그 정성과 내용이 궁금하여 책장을 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김별아처럼 아들을 키우고 있는 한 엄마로서 책의 프롤로그만 읽고서도 눈물이 터져버렸다. 동네 미용실에서 아들의 머리카락이 밀려나가는 동안 스무 해 전 배냇머리를 깎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또다시 울컥한 엄마의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제 자식 귀하고 소중하지 않은 부모는 없겠지만 저에게 아들은 좀 더 각별한 존재였어요. 저와 다른 성별의 한 생명이 제 몸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놀랍고 감동적이었죠. 옹알옹알 말문이 트일 무렵엔 이 아이가 얼른 말을 하게 되어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모두 공유하며 대화를 하고 싶어 안달하기도 했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겐 별달리 관심도 없고 오직 나만 알았던 제가 세상을 좀 더 크게 보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마음 그릇을 키워준 것도 제 아들입니다.” 구구절절 아들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이 배어 있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아들의 입대를 기점으로 삶이 달라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2016년 7월 5일 입소식을 마치고 돌아온 날 첫 편지를 썼던 이후 지금까지 아들 생각에 한시도 맘이 편치 않느냐 물었더니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어휴 그럴 리가요! 이땐 엄마도 훈련병이나 다름없었죠. 아들과 떨어져 있는 상황이 낯설고 두려워 이런 편지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등병 달고 일병, 상병 거쳐 이젠 병장이 된 아들은 많이 여유를 찾았고 저 또한 그렇게 됐답니다. 이제 79일 후면 전역하는데요 뭘.”
Profile
1990년 단편 <봄비>로 제1회 청년심산문학상 당선
1992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소설집 <신촌 블루스>
1993년 <실천문학>에 중편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 발표하며 정식 등단
1995년 장편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1999년 회고 자전적 소설 <개인적 체험>으로 대산창작기금 수여
2002년 장편 <축구전쟁>, 소설집 <꿈의 부족>
2005년 장편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 장편 <영영이별 영이별>
2007년 장편 <논개> 1~2
2008년 장편 <백범>
2009년 장편 <열애>
2010년 장편 <가미가제 독고다이>
2011~2014년 ‘조선 여성 3부작’ <채홍(彩虹: 무지개)>, <불의 꽃>,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
2016년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 일대기 소설 <탄실>
그 외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가족판타지> 외 다수
'트렌드를 너무 의식하면서 그것만 좇는 건 싫지만 독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최대한 들려주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소설가로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와 단단한 연결고리가 생긴 셈이니 ‘미실 작가, 김별아’로 불리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독자가 듣고픈 이야기를 써내는 소설가
그러고보니 <스무 살 아들에게>를 발표한 이후에도 김별아는 새로운 에세이집을 내놓으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필 활동 외에 인문학 강의도 하면서 활동 영역이 부쩍 넓어진 그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저는 예나 지금이나 주어지는 일은 마다 않고 거의 다 합니다. 얼마 전까지는 월간 <전원생활>에 ‘표석을 따라가며 읽는 옛이야기’를 연재했어요.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어떠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일정한 표시를 해놓은 걸 ‘표석(표지석)’ 이라고 하는데 표석만 잘 살펴봐도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가 많이 숨어 있지요. 2~3년 전부터는 육해공군 가리지 않고 군부대를 돌며 인문학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독서 인구, 특히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줄면서 우리 사회가작가들에게 다양한 역할을 바라는 추세예요. 처음엔 앞에 나서서 제가 강연을 한다는 게 좀 어색했는데 굳이 ‘책’이라는 채널을 통하지 않고서도 독서 효과를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제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역사 이야기를 주로 하는데 강의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부쩍 즐거워졌습니다.”
스스로를 ‘생계형 작가’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는 김별아에게서 강한 자신감을 발견할 수 있다. 1993년 <실천문학>에 중편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니 어느덧 25년차 중견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그는 2005년 역사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묵묵히 글만 썼던 무명 소설가였다. 작가들이 공모전에 도전할 때 흔히들 탈락이 두려워 본명을 놔두고 필명으로 출품한다지만 김별아는 제 이름 석 자를 내걸고 응모하여 당당히 수상했다, 그때부터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세상에 각인된 김별아지만 이후로도 스무 편 넘게 작품을 발표해온 그인데 여전히 ‘미실 작가, 김별아’로 소개된다. 꾸준히 다양한 소재로 독자와 만나고 있는 소설가로서 조금은 서운하지 않은지 묻자마자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며 입을 뗀다.
“제일 많이 팔린 책이 <미실>인데 당연한 거 아닐까요? 누구나 기억할 만한 대표작이 있다는 건 오히려 고맙고 좋은 일이죠. 세계문학상을 받기 전까지는 제발 내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갈구하면서도 숨기 바쁜 소설가였다면 <미실>로 알려지고서부터 독자와 소통하는 법을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트렌드를 너무 의식하면서 그것만 좇는 건 싫지만 독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최대한 들려주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소설가로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와 단단한 연결고리가 생긴 셈이니 ‘미실 작가, 김별아’로 불리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대표작만으로 기억되고 대표 캐릭터로 수식되어도 좋다는 김별아는 스스로를 종종 ‘문학엔 빚졌어도 문단엔 빚진 것 없는 작가’라고 규정한다. 주류 문단의 보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한 작가가 아니니 아직도 탈고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돌며 책을 내는 데 익숙하지만 그래서 더욱 자유롭고 떳떳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의 반응과 인정은 김별아가 생각하는 가장 큰 선물이자 글을 쓰는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뚜벅뚜벅, 오늘을 걸어 나가다
꾸준히 자신의 책을 내고 월간지에 연재를 하며 틈틈이 강연도 병행하고 있는 김별아. 군에 간 아들은 어느덧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년 병장이 되었지만 품 안의 자식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므로 엄마로서도 해줘야 할 일들이 여전하다. 소설가와 엄마라는 이름을 쥐고 있는 한 항상 바쁜 김별아에게 <우체국과 사람들>의 인터뷰 일정은 버거울 것 같기도 했는데 그는 참 반가웠단다.
“군대는 ‘우체국택배’만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원래도 자주 이용했던 우체국이지만 아들이 군에 있는 동안 정말 원 없이 우체국에 드나들고 있네요. 우리나라 우체국은 빨라서 좋고 정확해서 더 믿음직스러워요. 그런 곳의 사보에서 저를 초대해주신다니 기뻤습니다.”
기쁜 마음 가득 담아서 김별아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는 ‘그래도 뚜벅뚜벅 걸어 나갈 것’이다.
“단종과 혼인하여 조선의 국모가 되었다가 2년 만에 생이별을 겪고 노비로 살았던 ‘정순왕후’는 64년을 홀로 살았습니다. 남편 잃고 자식도 없이 살아간 그 여인을 두고 차라리 죽지 왜 사느냐는 조롱과 질시가 얼마나 이어졌을까요? 하지만 그런 삶도 결국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살기 좋아진 세상이지만 사는 건 더 힘들어졌어요. 그럼에도 살아내고 버텨야 하지요. 다시 오지 않을 오늘 하루를 공평하게 선물 받았으니 다들 좀 더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월간지에 연재했던 ‘표석 이야기’가 출간을 앞두고 있는 요즘, 김별아는 그 다음 작품으로 추리소설을 구상 중이다. ‘해가 중천에 뜬 대낮 종로 한복판에서 살인을 저지른 여자 이야기’라고만 전하는 그의 귀띔에 눈이 번쩍 뜨인다. 또 어떤 숨은 역사와 흥미로운 인물을 끌어다 우리 앞에 데려올까? 마음껏 기대하고 상상하며 김별아의 신작을 맞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