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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에 이어 좌영과 우영 소속의 조선 군대가 뒤따라왔다. 그러다 보니 조선 군대는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다. 좌영사 이조연과 우영사 민영익이 거느리고 있던 좌영 및 우영 군사들은 청군과 합세하여 창덕궁으로 쳐들어갔고, 신복모가 거느리고 있던 전영사 소속의 군사들은 일본군과 함께 궁궐을 수비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처럼 창덕궁을 기습 공격한 청군 장수는 원세개였다. 노장 오조유(吳兆有)가 청의 실권자 이홍장의 지시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며 미적거리고 있을 때 25세에 불과한 원세개는 군사행동을 함에 있어서는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며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자 청불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며 큰소리치던 42세의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선인문을 지키고 있는 조선 군대는 전영사 소속의 일개 중대에 불과했다. 그 부대는 전투 경험이 없는 데다 분해한 총기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상황에서청나라 군사와 맞붙게 되었다. 그처럼 전열을 갖추지 못한 조선군은 우왕좌왕하다 제대로 싸움 한 번 하지도 못한 채 패주했다. 그러자 중대장 무라카미가 이끄는 일본군이 청병을 향해 총격을 가하면서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의 총격으로 다수의 병사가 쓰러지자 청병들은 겁을 집어먹고 퇴각하거나 숲속으로 도주했다. 조선군 중에서 비교적 훈련이 잘된 군사는 서재필이 이끄는 부대였다. 청군이 관물헌까지 쳐들어오자 왕궁을 지키고 있던 서재필이 부하들에게 전투 명령을 내렸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병사는 수십 명에 불과했으나, 기량이나 기개로 볼 때 어느 군대에 못지않게 용감했다. 그는 나라의 독립과 개화를 위해 무도한 청나라 군사를 섬멸하려면 일당백의 정신으로 싸워야 한다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들은 탄환을 아끼기 위하여 기왓장을 던지며 맨주먹으로 싸우기도 했다.
총탄전이 벌어지고 싸움이 치열해짐에 따라 청나라 군대의 대오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탄환을 맞아 쓰러지는 병사 수가 늘어나자 청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그들은 무기도 구식인 데다 기강 역시 해이해 공중을 향해 공포를 쏠 뿐 적극적인 전투를 벌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는 수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중과부적은 피할 수 없었다. 개화파에 합세했던 전영사 병사들은 총을 분해하고 있던 터라 청병의 공격이 시작되자 맥없이 무너지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들 부대가 흩어지면서 개화파가 이끄는 군사는 일본군을 합쳐 150명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원세개가 이끌고 있는 청병은 수백 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평소 청병의 훈련을 받은 좌영과 우영 병사와 백성까지 합세하자 그 숫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박영효가 양성한 전영사 군대는 분전했으나, 구식 군대가 주축인 후영사 군대는 오래지 않아 청군에 투항했다.
민비는 재빨리 세자를 데리고 북묘로 피신하다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궁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민비는 재빨리 세자와 세자빈을 데리고 후원 뒷산으로 피신했다. 왕대비, 대왕대비도 뒤따라 궁궐을 빠져나갔다. 평소 왕가 사람들과 궁인들로 법석이던 궁궐이 어느덧 쥐죽은 듯 조용했다. 영리한 민비가 거듭 환궁을 주장했던 까닭은 그처럼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기 위해서였다.총소리는 요란한데 민비마저 모습을 감추자 고종은 홀로 행궁을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고종은 무감을 불러 북산으로 갈 채비를 하라고 일렀다.
홍영식과 김옥균이 고종을 찾아 황급히 행궁으로 달려갔다.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궁궐은 어느덧 적막에 싸여 있었다. 급한 마음에 뒷문으로 나가 보니 무감과 병정 몇몇이 어가를 모시고 북쪽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김옥균 등이 달려가 어가를 이끌고 연경당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변수를 보내 다케조에를 불러오라고 했다.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어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다. 체구가 작은 변수가 용케도 관물헌까지 뚫고 가 다케조에를 만날 수 있었다. 관물헌에서 청병과 일전을 벌이고 있던 다케조에와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가 변수의 말을 듣고 연경당으로 달려갔다. 다케조에는 그때에야 비로소 청장 원세개 등이 보낸 편지를 펼쳐 볼 수 있었다.
청군의 본대인 오조유 부대가 북문으로 들어와 창덕궁 후원을 포위하려 했다. 일본군 소대가 후원 방향으로 진출하여 청군과 맞붙었다. 창덕궁 동북쪽은 구릉의 기복이 심한 데다 송림이 널리 퍼져 있어 공격하기도 어렵거니와 지키기도 어려웠다. 덕분에 숫자가 적은 일본군이 숫자가 많은 청군과 대적할 수 있었으나, 오래 끌기는 어려웠다.
고종이 머물고 있는 연경당 주위에도 탄환이 비 오듯 쏟아졌다. 고종 주변에 있는 사람은 개화파 아니면 일본군이어서 적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경당을 지키고 있는 일본군은 수십 명에 불과하여 그곳 역시 안전지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자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머리를 맞대고 선후책을 강구한 끝에 다케조에를 불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도리가 없소. 어가를 모시고 급히 인천으로 가서 다음 계책을 도모해야겠소.”
김옥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자 다케조에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고종이 반대했다.
“나는 결단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 나는 죽더라도 대왕대비가 계신 곳에 가서 한 곳에서 죽겠다.” “대군주께서 이처럼 동의하지 않으시니 어찌하면 좋겠소?”
다케조에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김옥균을 보았다.
“…….”
김옥균은 대꾸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제 개화파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고종을 납치하여 인천으로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싫다는 고종을 달래 어가에 태우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창덕궁을 에워싸고 있는 청병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성난 백성들을 만나게 되면 자칫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다케조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본군이 고종을 납치하여 인천으로 끌고 간다는 것은 자칫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다. 외교관의 입장에서는 누구도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카드였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황혼빛이 깔리고 있었다. 총소리는 사방에서 연이어 들려 왔다. 누구보다 충성심이 강한 홍영식은 고종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젊고 패기가 만만한 서재필은 청군이 연경당까지 쳐들어오며 총을 쏘아대자 무도한 적군에게 보국의 피를 뿌릴 때라 외치며 총칼을 들고 전진하려 했다. 그러자 김옥균이 후일을 도모해야지 개죽음을 할 필요가 없다며 말렸다. 민비는 세자와 세자빈을 거느리고 북묘로 피신한 지 오래였다. ‘북관왕묘’라 불리기도 한 북묘는 삼국지 속의 명장 관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었다.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난했던 민비가 환궁할 날짜를 맞춘 무녀를 총애하여 궁궐로 데려왔는데, 무녀가 자신이 관우의 영을 받은 딸이니 마땅히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지어야 한다고 하자, 민비는 바로 사당을 짓고 그녀를 ‘진령군’에 봉하며 그곳에 거처케 했다.
북묘는 이미 청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민비는 고종에게 사람을 보내 빨리 그곳으로 오라고 재촉했다. 고종 역시 마음은 콩밭에 있는지라 북묘로 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북묘에 도착한 민비는 고종에게 북묘로 오라는 전갈을 보내고,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 동대문 밖 노원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개화파의 입장에서는 권력의 원천인 고종을 청국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북묘로 보낼 수 없었다. 그들이 정권을 움켜쥐려면 무슨 수를 쓰든 어가를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고종을 놓치는 순간 그들은 꿩 떨어진 매나 다를 바 없었다.
“주상 전화, 전하께서 신 등이 우국충정으로 이룩한 새 조선을 위하여 조금만 참아 주시면 조선의 장래는 매일 새로워지고 해마다 융성할 것입니다. 새 조선의 천년대계를 위하여 북묘로 향하려는 어가를 멈추시고 신 등의 인천 천가안(遷駕案)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김옥균 등은 고종 앞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아니 되네. 나는 대왕대비가 계신 곳으로 가야 하네. 나는 죽더라도 대왕대비가 계신 곳으로 가서 대왕대비와 한 곳에서 죽겠네.”
고종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북묘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주상 전하, 전하께서 청군이 있는 북묘로 가시게 되면 신 등이 애써 이룩하고자 하는 개화 세상은 물거품이 됩니다. 신 등이 애써 개화 세상을 만들고자 함은 청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립자강함으로써 부국강병의 나라를 이룩하여 백성들의 삶을 편안케 하고자 함이오니, 잠시 불편함이 있더라도 신 등의 뜻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홍영식이 다시 한 번 고종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로 호소했다.
“아니 될 말이야. 나는 죽더라도 대왕대비와 한 곳에서 죽겠다.”
고종은 끝내 북묘로 가겠다는 뜻을 꺾지 않았다.
그러자 박영효가 다케조에를 향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되겠소. 이러다간 우리의 거사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겠소. 주상 전하를 모시고 바로 인천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도록 합시다.”
“…….”
다케조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묵묵부답으로 응수했다.
고종이 북묘행을 고집하다
관물헌을 빠져나와 북묘로 가려던 고종이 개화파에게 붙잡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이었다. 그곳에서 북묘로 도피하려는 고종과 붙잡아두려는 개화파가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다섯 손가락에 불과한 개화파 지도자 중 청군과의 교전에 적극적인 사람은 박영효와 서재필이었다. 그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젊은 서재필은 행동대장 신복모와 함께 일개 부대를 거느리고 일본 병사들과 합세하여 옥류천으로 쳐들어오는 청병들과 백병전을 벌였다. 그때 북쪽 산에 있던 별초군 100여 명이 고종을 호위하고 있는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임금이 거둥할 때 어가를 호위하는 것이 임무인 별초군은 청나라 군사에게 근대식 훈련을 받은 조선군이었는데, 청군과 합세하다 보니 오히려 임금을 향해 사격을 가하는, 묘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어가 바로 옆에 있는 신하가 유탄을 맞아 피를 튕기면서 하마터면 어의를 더럽힐 뻔했다. 홍영식이 크게 화를 내며 무감을 시켜 어가가 여기 있다고 소리치게 하자 사격이 멎었다.
“내 비록 죽더라도 대왕대비가 계신 곳으로 가겠다.”
고종이 또다시 북묘행을 고집했다. 대왕대비를 모셔야 한다기보다 중전이 있고 청국 군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안전을 도모하겠다는 뜻이었다. 다케조에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개화파의 거사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가급적 빨리 고종을 북묘로 보내고, 자신은 공사관으로 돌아가 자구책을 강구하고 싶었다. 조선왕의 호위를 맡고 있다 불상사가 생기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군 사령관격인 자신이 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한 나라의 공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대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이미 날이 저물어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옥류천 부근에서 청병들과 백병전을 벌이던 일본군이 전투를 중단하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그들이 전한 바에 의하면, 청병들은 창덕궁 내의 각 전각을 점거하고 방화를 할 뿐 도전할 태세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때 김옥균과 박영효가 다케조에에게 다가가 고종을 모시고 인천으로 가자고 또다시 설득했다.
“일본 군사로 국왕을 호위하여 인천으로 갔다가 일이 뜻대로 안 되거든 일본까지라도 가서 뒷날의 재거를 도모해야 하오.”
누구보다 혁명 정신이 투철한 박영효가 목소리를 높여 주장했다.
그 말을 듣자 다케조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대했다.
“지금은 청국 군사뿐만 아니라 조선 군사까지 합세하여 공격해 오고 있소. 조선 군사가 대군주에게까지 포를 쏘는 것은 일본 군사가 호위하고 있기 때문이오. 이러다 위험이 옥체에 미치게 되면 그 책임은 우리 일본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소. 이제는 잠시 퇴병했다 선후책을 강구함이 상책이오.”
그 말을 듣자 김옥균이 버럭 화를 냈다. 그는 성난 얼굴로 다케조에를 노려보며 일본말로 맞받아쳤다.
“귀하는 옥체 손상을 이유로 퇴거를 주장하나, 원래 귀하가 군사를 거느리고 여기까지 온 것은 첫째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둘째 우리 개화파를 원조하려 함이 아니었소? 이제 귀하가 우리를 보호할 책임을 내던지고 물러간다면, 우리는 그만 청병의 칼날에 원혼이 되고 말 것이오. 그리 되면 우리의 재기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오.”
“그러다 만약 위험이 대군주의 옥체에 미친다면 어떻게 하겠소?”
다케조에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며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가 끼어들었다.
“오늘의 전과는 반드시 우리에게 불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싸운다면 하나가 열은 넉넉히 당할 것이니, 이제 청병이 흩어진 틈을 타서 싸운다면 우리 군사가 반드시 이길 겁니다. 우리가 수적으로 적다 할지라도 맹세코 물리칠 것이니, 대군주를 모시고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는 패기가 넘치는 말로 청병을 물리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그러자 다케조에가 무라카미의 어깨를 다독이며 나직이 명령했다.
“현 상황에서 귀관은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일본 군인이기에 무라카미는 다케조에의 말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전의가 식지 않은 일본군이 전의를 상실한 청국군과 맞붙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다케조에의 말 한마디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본군의 힘을 빌려 청국군을 제압하려 했던 개화파로서는 정말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마땅히 대가를 따르겠소
그러자 고종이 또다시 북묘로 가자며 애꿎은 무감을 들볶았다. 난처한 사람은 김옥균 등 혁명의 주역들이었다. 고종을 붙잡고 있자니 고종 자신이 반대하는 데다 다케조에 역시 응하지 않았다.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가자니 청군에게 붙잡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개화파의 운명은 한 마디로 바람에 나풀거리는 촛불이었다.
“우리는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사리로 따진다면 마땅히 주상을 따라가야 하나, 공사가 퇴거한 뒤에는 무슨 수로 훗날을 도모하겠소?”
김옥균이 비통한 심정으로 다케조에에게 물었다.
“청병이 먼저 무례하고 무리한 방법으로 우리 양국의 체면을 욕보였으니 일본 또한 병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소. 공들은 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오.”
다케조에는 작전상 후퇴해야 한다며 함께 퇴각하자고 했다.
청의 군사 동원에 대해 반드시 군사력으로 대응할 것이니 일본과 행동을 같이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궁지에 몰려 있는 개화파에게 그 길밖에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김옥균이 다케조에와 행동을 같이하기로 하자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그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개화파의 또 하나의 중심인물인 홍영식이 선택한 길은 달랐다.
“나는 마땅히 대가를 따르겠소.”
홍영식은 나직이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 ‘대가(大駕)’란 임금이 타는 수레이니, 북묘로 가는 고종을 호종하겠다는 뜻이었다.
“아니 될 말이오. 현 상황에서 대가를 따르겠다 함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인데, 그래도 대가를 따르겠소?”
누구보다 홍영식을 아끼는 박영효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렸다.
“그럼 어찌해야겠소? 주상 전하 혼자서 가시게 할 수야 없지 않소?”
홍영식이 정색하며 물었다.
“우리가 임금을 버리고 불충의 길을 택하려 함은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큰 뜻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오. 공은 정녕 그 뜻을 저버릴 생각이오?”
“물론 그 뜻을 저버릴 수야 없소. 하지만 반드시 남의 나라로 도피해야만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소. 내 나라에서 일을 도모하다 실패했다면 벌을 받든 용서를 받든 내 나라에서 받아야지, 구차스럽게 남의 나라에까지 가고 싶진 않소. 공도 알다시피,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일을 했던 것은 아니지 않소. 우리가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소?”
홍영식이 엄숙한 표정으로 결연히 말했다. 그러자 김옥균이 웃는 얼굴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홍 공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니 이렇게 합시다. 홍 공은 대가를 따른다 해서 다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안팎으로 신망이 두텁기 때문에 아무도 해치지 못할 것이오. 따라서 홍 공은 나라 안에 있고 우리는 나라 밖에 있으면서 후일을 도모하도록 합시다. 그리 하면 후일에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것이오.”
언변이 좋은 김옥균의 말에 개화파 동지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홍영식이 어가를 따르겠다고 하자, 도승지 박영교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왕명을 하달하거나 신하들이 올리는 글을 왕에게 올리는 것이 임무인 도승지는 승정원의 우두머리로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되는 자리여서 왕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었다. 개화파의 행동대장 역할을 자임했던 신복모 역시 사관생도 출신의 군사 6명과 함께 고종을 호위하기로 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