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말꾼
172개국 대표 2,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에서 열렸던 제21차 만국우편연합 (UPU) 총회에는 세계적으로 내노라 하는 국제회의 통역사 61명도 자리를 함께 했다.
우리 나라는 이번 서울총회에서의 동시통역을 위한 동시통역사 10명과, 안내 및 고위 인사들간의 협의시에 필요한 순차통역사 13명을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대학원 통역 • 번역센터를 통해 채용했다. 이때 팀장으로서 23명 국내 통역사들올 관리하고, 직접 동시통역도 했으며, UPU 사무총장 일행의 청와대 방문시에 통역을 담당하는 등 그 활약이 눈부셨던 사람이 崔植禾씨(39세)이다.
꼴찌에서 박사에 이르는 길
서울 토박이인 최정화씨가 처음으로 불어를 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이다. 그때 처음 인연이 닿은 불어는 지금까지 그녀의 곁을 떠난 적이 없다.
“방송국에 다니던 언니를 만나러 가던 중이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두 명의 외국인이 알아듣지는 못하겠으나 왠지 멜로디가 마음에 드는 말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 날까지만 해도 외국인이면 모두 영어로 얘기를 하는 줄로 알고 있었죠. 중학교 일학년생의 짧은 영어 실력으로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냐고 물었어요. 그때 그들의 대답이 나의 일생을 좌우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그저 이 야릇한 음률의 언어를 배워보겠다고 결심했죠. 어떻게 보면 첫눈에 불어에 반해버린 셈이에요”
그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최정화씨는 제2외국어로 당연히 불어를 택했다. 뒷날 자신의 전공이 된 불어에 그녀는 일찌감치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여고 시절부터, 프랑스 유학을 앞둔 대학생들이나 다니던 어학연수기관인「앙리앙스 프랑세즈」에 드나들 정도였다.
당시 명문이던 경기여고를 수석 졸업한 최정화씨는 외국어대 불어과에 전액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때 불어과의 프랑스 여교수와는 매일 같은 차로 통학을 하고, 심지어 미장원에 갈 때도 동행했다. 순전히 불어와 프랑스 문화를 배우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프랑스인 교수와 함께 생활을 했던 것이다.
외국어대 역시 수석으로 졸업하던 해, 그녀에게는 프랑스 정부 장학금이 기다리고 있었다.
“혼기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훌쩍 파리로 날아가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리제3대학 통역 • 번역대학원에 입학 했죠. 그런데 첫 수업시간에 연설문을 두 번 듣고 분석해서 요약을 하는 시험을 치렀는데,20점 만점에 2점을 맞고 꼴찌를 했어요.”
이 엄청난 충격은 그녀를 하루에 15시간씩 책에 매달리게 했다. 과로로 졸도하기도 하고, 운동 부족으로 몸무게가 이상하게 늘어나기도 했다. 그녀는 불어에 반쯤 미쳐서 공부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아는 분이 오시면 파리 구경을 시켜 드리는 일이 난감했어요. 사실 학교와 집만을 왔다갔다 했으니 파리의 명소를 알리가 없었죠. 때로는 관광을 오신 분들이 현지에 있던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시더군요. 또 운동이라고는 글씨 쓰는 손가락 운동이 고작이었으니, 서울에 서보다 몸무게가 8kg이나 불어난 것도 일면 당연 한 귀결이었구요.”
최정화씨는 유학을 온 지 3년만인 1981년에 한국인 최초로 국제회의 통역사 자격증을 습득했다. 그리고 5년 뒤에는「교육학적 관점에서의 한 • 불 순차통역」이라는 논문으로 통역학박사 학위를 땄다. 이 박사 학위에는 아시아 최초라는, 또 국내 유일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다. 파리 제3대학 통역 • 번역대학원 교수를 지내다가 1987년 12월에 귀국한 그녀는 이듬해부터 모교인 외국어대 통역대학원 교수로 근무하면서 지금은 교학과장도 맡고 있다.
국제화시대에 각광받는 전문직
국제회의 통역사가 되는 길은 고되고도 힘겹다. 의사 • 변호사 • 회계사 등의 전문직에는 세계 적으로 몇만명 단위로 동업자가 있다. 그러나 국제회의 통역사라는 자격을 갖춘 전문직업인은 현재 65개국에 2,500명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들은 1953년에 발족한 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의 회원이 되어 서로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친목을 다진다.
국내인 중 국제회의 통역사로서 활동하는 사람은 50~60명이 되는데, 특히 세계적 수준에 들만한 이는 20여명에 불과하다. 국내 통역사들은 대부분 외국어대 통역대학원 통역 • 번역센터의 회원으로 가입돼 있으며, 최정화 교수를 비롯한 세 명은 AIIC의 회원이기도 하다.
“외국어대의 통역대학원은 아시아에서는 하나 뿐인 전문 어학연수기관이조 세계적으로도 통역 대학원은 30여 군데밖에 안돼요. 유럽 쪽에 많고, 미국에는 한 곳뿐이구요.
우리 통역대학원의 경우 영어과는 30명을 뽑는 데 무려 1,200여명이나 몰려와요. 8개 언어권에 따른 8개 학과를 통틀어 80명을 선발하면 2년 후의 졸업를은 50%도 채 안되고, 그나마 거의가 번역 전공이지, 통역 전공자는 극소수죠.”
세계는 갈수록 접촉이 심해져 국제기구도 많아 졌고, 국제회의 또한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각 분야, 각 지역이 국제 규모의 조직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시대여서 통역사는 필수 인력이 되었으며, 통역사들에 대한 기대 수준 역시 점점 높아지고 있다. 뛰어난 언어 구사력은 물론 고도의 집중력 • 분석력 • 순발력 등에다가 탁월한 용모 • 음성 • 체력까지를 겸비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천성이 그런지, 직업의식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과 말을 나누기가 즐거워요. 그게 통역사의 중요한 자질이라고 봅니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통할지도 모르겠군요. 통역사는 시대적으로 앞서 다가오는 어떤 현상과 마주치게 되는 수가 많죠. 이를 자발적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통역사로서 적격입니다.”
최정화 교수는 지난 15년 동안 수백여 차례의 국제회의에 통역사로서 참가해 왔다. 그런 회의 들을 앞두고 최교수는 밤잠을 거른 채 관련 자료나 서적들을 뒤적이는데, 통역 현장에서 필요한 적정 실력보다 300~400%를 더 무장하고 나가야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역사에게는 전문 분야가 따로 없다. 빵 • 과자 제조기술로부터 환경 • 통상 • 국제정세 • 항공우주산업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들을 손짓하고 있다.
“4년 전에는 통역 요청을 받고 회의장에 가보면 대개 주제가 시장 개방 문제였어요. 그 쪽이 잠잠해진 뒤로는 각종 국제환경회의에서의 요청이 쇄도했죠. 세월이 좀 흐르니까 결국 온 세상이 환경 문제로 시끄러워지더군요.”
최교수는 근래 활발해지기 시작한 한 • 불 정상회담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과 미테랑, 1989년 노태우 대통령과 미테랑, 그리고 1993년 김영삼 대통령과 미테랑간의 회담 자리에 그녀는 빠지지 않고 배석해 있었다. 최교수를 한 • 불 정상회담의 통역으로 발탁한 쪽은 한국이 아니라 엘리제궁이었다고 한다. 물론 10년간 파리 유학생활을 한 연고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철저한 프로정신으로 국제 통역 무대에 우뚝 섰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대목이다.
“말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날마다 연습하지 않으면 감각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통역사는 나이나 신분, 경력으로 말히는 게 아니라 느슨해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트레이닝하는 데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죠. 또 통역은 연사의 말을 다른 말로 옮겨 그대로 전달하는 반복행위가 아니라 재창조의 작업입니다.”
세계 일류급, 국내 정상급의 통역사이면서 박사와 교수 신분인 그녀지만, 아침마다 위성방송을 통해 불어 화면을 보면서 동시통역 연습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오랜 습관으로 불어판 • 영어판 일간지 4개, 주간지 2개, 월간지 3개를 정독하고 있다.
통역사들은 국제적인 고위 인사나 저명 인사들을 접하게 되면 까다로운 의전 절차 때문에 신경이 송곳처럼 날서기가 일쑤이다. 또 중요한 회의 일수록 통역 과정에서의 실수란 용납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최첨단 과학기술 분야라면 국내에는 없는 새로운 용어까지 궁리해야 한다.
“통역사라는 직업이 작업 강도로 봐선 피를 말릴 정도지만, 지적 호기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일거리이기도 하죠. 수입도 꽤 높은 편이구요. 우리 나라에서는 하루에 6시간 일하고 통역비로 45만원을 받는데, 봄 • 가을 같은 성수기 때는 한 달 평균 20여일을 일하고 800 내지 1,000만원의 소득은 거뜬히 올릴 수 있어요. 물론 오버타임료나 교통비 • 숙박비는 별도로 추가 됩니다. 통역사들은 기질에 따라 고정적인 직업을 선호하거나 프리랜서로 뛰거나 하는데, 안정적인 직업을 택하면 수입면에서 떨어지고, 프리랜서에게는 한여름이나 한겨울 같은 비수기가 닥 치기도 하죠. 그런 때는 실력이나 체력을 재충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해요.”
세계적으로 통역사들의 남녀 비율은 2대 8 정도로 여성의 우세가 두드러지며, 우리 나라의 경우는 보다 심해 1대 9 가량이나 된다.
“통역이 특히 여성에게 적합한 분야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회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라도 여성 통역사를 더 찾을 법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오히려 관공서에서나 고위층 인사들은 해외출장에 여성 통역사와 동반하기를 거북스러워하는 경향마저 있죠. 통역은 일종의 서비스업종인데, 유교문화 사회에서는 그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 군림하기를 좋아하는 남자들의 속성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 국제 무대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남자 통역사들이 있는데, 우리의 유능한 젊은 남성들이 도전해볼 만한 분야가 바로 통역이죠. 사회에서는 취업난이 문제가 되고 있다지만, 통역 인력에 대한 수요는 아주 넘치고 있어요.”
제21차 UPU 서울총회는 우리 나라가 개최한,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국제회의였다. 이에 따라 세계의 일류 통역사들도 총집합하여 이 역사적인 ‘우편올림픽’의 현장에 배석했다.
“이번 서울총회의 성공적인 운영을 지켜보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한껏 느낄 수 있었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유연성이 다소 부족한 반면, 조직과 준비면에서는 매우 치밀하여 손색이 없는 것 같았어요. 국내 통역사들에게도 체신부에서 회의 3개월 전부터 관련 자료를 보내줬는데, 그 분량이 라면박스로 두 상자씩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책임감을 갖고 충분히 대비한 뒤에 회의에 임했으므로 별 무리가 없었던 거죠. 아무튼 국제회의에서 이때처럼 한국의 위상이 높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에서 우수한 통역사들이 많이 배출돼 국력을 신장시키는 데 큰 일꾼으로 쓰이게 되기를 빌겠어요. 또 그런 분들에게는 외국어 공부에 못지않게 모국어를 잘 갈고 닦으려는 노력이 일류 통역사가 되는 지름길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