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배원들의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 현장 체험에 나선 날은 들어 가장 추운 날씨로 영하 11도를 기록한 1월 8일이었다. 춥거나 덥고, 비나 눈이 오는 설이 집배업무가 가장 힘들다는데, 넣은 제대로 잡은 것 같다.
집배실에 들어선 것은 아침 7시 30분, 먼저 우편물을 코스별로 분류 하고, 이를 다시 순서대로 나누는 일을 했다. 숙달된 집배원들의 그 손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놀라웠다. 나로서는 흉내도 못 내고 그저 감탄 하고 있는 사이에 벌써 구분이 끝났다.
'신고합니다. 일일 집배원 김정일, 우편물 배달을 위해 출국합니다.'
오전 10시 10분에 집배실장에게 신고를 하고 우체국을 나섰다. 여자 집배원 채효숙씨와 같이 조를 이뤘다. 우리가 맡은 지역인 가능3 동으로 향했다. 오늘 하루 동안에 배달해야 할 1,200여통의 우편물을 둘이서 나누었지만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처음 배달할 곳은 신도아파트단지였다. 아파트에는 다행히 출입구 마다 우편물 수취함이 갖춰져 있어 호수 별로 우편물을 꽂는 데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 코스인 일반 주택가였다. 문패가 없는 집이 많았고, 있어도 번지가 분명하지 못해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취함이 부서지고 녹슨 채를 내버려두어 제 구실을 못할 뿐 아니라 흉물스러웠고 그런 것조차 없는 집이 30%는 되었다. 수취함이 없으면 문 틈에 잘 꽂아 바에 살아가지 않도록 해야 하므로 매우 신경이 쓰였다. 채효숙 집배원에 따르면 이곳의 번지를 거의 외워 문패를 보지 않고도 배달할 수 있어야 하루 몫을 소화할 수 있다고 했다.
등기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5층 짜리 빌라의 계단을 올라갔다. 편지인 편지 여러 번 외쳤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다. 집이 비어 있는 모양이었다. 우편물 도착통지서를 문에 남기고 계단을 내려오려니 맥이 풀렸다. 요즘은 방학이라 아이들이라도 있어 빈 집이 적은 편이라고 했다. 맞벌이 부부들이 많은 탓에 평소에는 등기우편물을 한 번 찾아가 배달할 수 있으면 행운이란다. 어떤 때는 분명히 집 안에 사람 기척이 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기도 한다는 말에 무척 속상했다.
쏟아지는 온갖 광고지나 각종 고지서 따위 탓에 요즘 사람들은 우편물을 달가워하지 않는 경향이 많아 졌다는 것이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편지' 하면 맨 발로 대문까지 뛰어나왔던 우리 국민이 아니었던가? 특히 다세대 가구 세입자의 경우에는 받을 사람의 이름이 문패명과 다르면 일일이 살고 있는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데 여간 번거롭지 않다. 우편물 하나를 정확히 배달하기 위해 들인 정성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시민들에게 정확한 주소와 성명을 문패에 써달라고 거듭거듭 부탁하고 싶은 신정이 간절했다.
2년전, 뉴질랜드에서 본 우편물 수취함이 새삼 떠올랐다. 집집마다 대문 옆에 예쁜 수취함이 있었다. 집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수취함에 집배원들이 이륜차를 타고 가면서 물 흐르듯 배달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집배원들이 겪는 애로사항들에 대해 평소에 그러려니 했는데, “편지 있어!'를 외치며 직접 배달에 나서 보니 무엇이 개선되어야 할지 피부로 느껴졌다. 들쑥날쑥한 주소 체계에서부터 수취함이 없는 집이 갈수록 경계심이 높아만 가는 시민들의 몰인정 등이 안타까웠다.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고칠 수 없다. 하지만 세심한 행정적 배려, 이웃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의식 개혁이 이루어진다면 정보통신부의 얼굴인 집배원들이 한결 밝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과 같은 기회를 자주 가져 직접 몸으로 느낀 문제점들을 전진적으로 고쳐 나가도록 힘쓰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발이 얼얼하고 귀가 빨갛게 언 채로 우체국에 돌아온 시각은 오후 4시 20분, 집배실장에게 귀국 신고를 하는 내 가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보람으로 뿌듯했다.
나보다 몇 배나 고생한 채집배원이 활짝 웃으며 국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쉴 새도 없이 내일 배달할 우편물을 분류하기 위해 다시 구분 칸으로 길을 옮기는데, 그 뒷모습이 참으로 믿음직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