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명령이나 지시보다 조화로운 설득이 중요해요
1996년 2월부터 APT 사무총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종순씨(전 정보통신부 정보통신협력국장)가 재당선되어 1999년 2월부터 3년 동안 APT 사무총장으로 계속 근무하게 되었다. 지난해 1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APT 연차총회 기간중 실시된 사무총장 선거에서 이종순 현 총장이 출마해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회원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재선되었던 것이다.
한국인 출신이 임명직이 아닌, 선거를 통해 국제기구의 대표가 된 것은 이종순 사무총장이 처음. 지난 3년 동안 이총장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전기통신 발전을 위해 APT의 활동 범위를 넓혔으며, 또 이 지역 전기통신 표준기구를 창설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회원국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얻었던 것이다.
태국 방콕에 소재한 APT(아시아·태평양전기통신협의체)는 아·태지역 정보통신산업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고 회원국간의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1979년에 설립된 국제기구. 회원국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프가니스탄·호주·중국·인도·뉴질랜드·북한 등 30개의 정회원국과 홍콩·마카오 등 4개의 준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가 아닌 통신사업자는 협찬회원 자격으로 참여하는데, 한국통신과 데이콤, SK텔레콤이 여기에 속한다.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65년 우정국에서 정보통신인 생활을 시작한 후 30년 동안 정보통신부 요직을 두루 거친 이종순 사무총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제통. 그의 화려한 해외 근무 경력이 이를 입증한다. 우정국 초년병 시절 콜롬보계획에 의해 9개월 동안 호주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71년부터 2년 동안 태국 아시아·대양주우정학교 과정을 마쳤고, 1974년에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우정교관과정을 이수했다. 그 후 1988년에는 주미대사관 통신협력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4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귀국 후의 경력도 통신 분야의 국제협력업무였다. 1992년부터 10개월 동안 체신부 통신협력단장으로 근무한 후 공보관을 거쳐 1994년부터 1년 7개월 동안 정보통신협력국장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 한국 대표로 십수 차례 크고 작은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국위를 선양했고,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11월에 실시된 APT 사무총장 선거에서 어렵지 않게 당선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APT란 어떤 조직이며, 사무총장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또 이종순 씨는 사무총장으로서 어디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사무총장으로서 안고 있는 실질적인 고충은 무엇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기자는 지난 12월 11일 업무 협의차 귀국중인 이종순 총장을 만나 망중한의 대화를 나눴다.
이종순 APT 사무총장
APT 사무총장으로 재선된 것을 축하합니다. 재선된 소감부터 말씀해 주시죠.
'우선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지역기구이긴 하지만 국제기구의 장이라는 자리는 비중이 있는 자리이고 하는 일 자체도 매우 보람있는 일입니다. 각국에서도 과분할 정도로 대접해 주기 때문에 막중한 사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번 사무총장 선거에서는 경쟁자가 없어서 비교적 편하게 당선되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그랬던 겁니까?
'투표에 의해 선출하는 자리지만 경쟁자가 없어 만장일치로 당선되긴 했습니다만, 나올 가능성이 있고 희망을 하는 국가들은 몇군데 있었습니다. 사전 교섭과 설득에 의해 출마를 포기시켰던 거죠. 구체적으로 지명하진 않겠습니다만, 오세아니아나 아시안, 서아시아 국가들에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출마하고자 했는데, 사전에 우리 정부에서 무마를 시켰던 거죠.'
아시아·태평양전기통신협의체의 약자인 APT는 어떤 역할을 하는 기구입니까?
'APT는 1979년에 설립된 국제기구입니다. 원래는 UN 기구의 하나인 ESCAP에서 아·태 지역내의 전기통신 개발 기능을 담당했는데, 통신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전문성이 강해지면서 전문기구가 필요하다고 해서 ESCAP에서 독립시켜 별도의 기구로 발족했던 겁니다. APT 설립의 주목적은 지역내의 통신망의 발전, 통신사업의 발전, 통신의 표준화를 통한 기술의 발전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한 마디로 회원간의 국제협력을 통해 아·태지역내의 통신을 발전시키고 진흥시키자는 거죠.”
그 동안 한국은 APT내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습니까?
“나라마다 통신기술의 발전 수준에 따라 통신 서비스나 정책 등 통신 수준에 격차가 많이 납니다. 한 마디로 통신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따라서 통신 선진국들이 APT 활동을 주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국은 일본 다음으로 통신이 발달된 나라로 평가되고 있으니까 APT 활동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하고 통신기술과 관련된 회의나 세미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죠. 개도국의 기술인력 양성 측면에서도 일본 다음으로 많은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사무총장 역할을 해왔습니까?
'APT라는 지역기구도 세계의 통신 발전 추세에 맞춰 나가야 합니다. 제가 사무총장으로 부임할 당시인 1996년도의 통신 분야의 가장 큰 현안 과제는 WTO와 관련된 통신 개방 내지 자유화 문제였어요. 그 문제가 가장 중요한 세계적 흐름이라 생각했고,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이 그러한 세계적인 흐름을 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WTO와 관련된 자유화·개방화에 관한 의견 교환의 장을 여러 차례 가졌습니다. 그 결과 APT 회원국들이 통신기술 수준에 있어서는 구미지역에 비해 뒤떨어지지만 통신 전략 측면에서는 상당히 앞서가고 있습니다. 현재 회원국 34개국 중에서 17개국이 WTO에 가입해 있고, 나머지 국가들도 가입 의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먼저 가입하느냐 뒤에 가입하느냐는 문제인데, 기왕이면 먼저 가입해서 자유화 추세에 편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표준화 문제죠. 한 마디로 통신이라면 기술이라 할 수 있고, 통신기술 발전이 통신서비스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기술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표준화입니다. 기술 발전이 기술의 표준화와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표준화 활동을 통해 후진된 기술의 발전을 도모할 수도 있고, 또 산업의 유치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통신기술의 표준화를 주요 이슈로 잡고 꾸준히 노력해 왔습니다.'
결국 통신시장의 개방화와 통신기술의 표준화가 양대 과제가 된다는 말씀인데, 그러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출장을 어느 정도나 다녔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복에 겨운 사람이라 하겠습니다만, 근무기간 중 절반 정도는 출장을 다녔습니다. 태국 생활 3년에서 태국에 머무는 시간은 1년 반 정도이고 나머지 1년 반은 출장을 다녔습니다. 전부 회원국을 돌아다니며 회의를 하는 것인데, 회의를 통해 지역간 협력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먼저 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솔선수범해서 다니고 있습니다. 당초에는 3년 동안에 34개국을 다 돌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3분의 2 정도밖에 못다녔어요.”
상당히 피곤한 작업이겠네요.
'출장을 다닌다는 것이 피곤하기도 하지만, 특히 어려운 게 음식입니다. 아시아 국가는 역사도 깊고 전통도 다양하기 때문에 음식도 매우 다양합니다. 사무총장이 찾아가면 귀한 손님이라 해서 표준화된 서양 음식 대신 자기네의 전통 음식을 대접하려 하고, 저는 그러한 호의를 흔연히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음식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앞으로 3년 동안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춰 사무총장 역할을 해나갈 생각입니까?
'방금 얘기했듯이 가장 중요한 것이 통신시장의 자유화와 개방인데, 그 문제는 아·태지역에 서는 하나의 흐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져 나갈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표준화 문제인 데, 이것을 정착시켜 아·태지역 전기통신 발전의 토대를 확고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후진국에 해당되는 나라는 가지고 있는 기술이 없기 때문에 표준화에 대한 관심이 더 부족합니다. 그러나 기술 표준화를 도모하는 것이 산업을 유치하는 길이고, 산업을 유치하면서 기술을 정착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기술 표준화에 중점을 둘 생각입니다.”
아까 말씀하셨듯이 아·태지역 전기통신 산업의 실상을 비교해 보면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현격한 격차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겁니까?
'비교 방법으로 우리가 가장 손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100인당 전화가입자 수인데, 아·태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홍콩의 경우 58명입니다. 그런가 하면 라오스나 방글라데시 같은 곳은 아직도 1%가 채 안됩니다. 엄청난 수준의 차이가 나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볼 때 APT가 아·태지역 후진국의 전기통신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기통신 네트워크의 개발은 각 국가에서 해야 할 입니다. APT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APT가 할 수 있는 일은 통신기술인력을 개발하는 것, 새로운 서비스제도를 권장하는 것, 그리고 세계적인 추세에 따른 새로운 통신정책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 등이죠.
그런데 통신시장의 개방을 통해 통신서비스사업을 외국의 민간기업에 맡김으로써 발전 속도가 빨라진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로 스리랑카를 들 수 있죠. 그 나라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스리랑카텔레콤이 통신서비스사업을 독점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전화 적체기간이 6개월 정도 됐어요. 그런데 통신시장을 개방하고 일본의 NTT와 스웨덴의 통신회사가 그곳 전화회사의 경영에 참여하면서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이제는 전화회사에서 가입할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기구를 맡더라도 애로사항은 한두가지 있게 마련인데, 사무총장으로서의 실질적인 애로는 뭡니까?
“가장 어려운 일은 개 도국과 선진국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겁니다. 그런데 통신 마인드나 통신 기술의 격차를 해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생각 방식을 바꾸는 겁니다. 서로 만나 열심히 얘기해도 말이 잘 통하질 않아요.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는 것이 하나의 큰 과제죠.
태국이라는 근무 환경도 개인적으로 볼 때 상당한 문제가 됩니다. 아시다시피 태국은 너무 덥습니다. 4~5월이면 섭씨 45도까지 올라갑니다. 사무실이나 집은 냉방이 되지만, 냉방된 공간에서 오래 있으면 냉방병에 걸립니다. 또 땀을 많이 흘리면 수분결핍증이 생겨 손발이 저린다든가 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또 국제기구에는 다양한 민족이 모여 일을 하다 보니까 생각하는 것이 조금씩 다릅니다. APT만 해도 태국·미얀마·호주·네팔·인도 등 10여개 민족이 모여 근무하는데, 나라마다 생각하는 것이 조금씩 다릅니다. 나라마다 풍습이 다르고 사고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조화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일방적인 명령이나 지시보다 조화로운 설득이 가장 중요한데, 말은 쉽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어 소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었습니까?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만, 아직까지는 크게 문제가 되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같은 영어를 사용하더라도 발음이나 억양이 나라마다 다르지 않습니까?
“처음 1년 동안은 매우 긴장을 했습니다. 일본 사람은 일본식 영어를 하고 싱가포르 사람은 싱글리시라 해서 싱가포르 영어를, 필리핀 사람은 필리핀 잉글리시를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공통된 점은 말을 굉장히 빨리 하는 겁니다. 그래야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봐요. 그러니까 서로 알아듣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처음 1년간은 '천천히 얘기해라, 다시 한번 얘기 해라' 하는 말을 자주 했어요.”
끝으로 국제기구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 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시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고를 긍정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국제사회에서 활동할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듣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어떤 일이든 나 혼자 잘한다기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며, 실제로 그러한 것이 습관화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남을 인정하는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해요.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외국어를 할 때 통역을 해서도 안되고 머리에서 번역을 해서도 안됩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이 바로 영어로 나올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해요. 그러한 실력을 갖춘 다음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때는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