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미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보빙사절단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홍영식이 귀국한 날은 음력으로 10월 하순이었으나, 며칠 전까지 머물렀던 미국이나 일본에서 쓰는 양력으로 따지면 12월 하순이었으니 벌써 세모가 된 것이다.
조선사회는 전통적으로 느림을 미덕으로 삼았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선비는 양반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야 하고, 무슨 일을 하던 여유를 부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빙사절단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홍영식은 등청하기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곧장 창덕궁으로 향했다. 고종에게 귀국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평소 인후한 성품에 예절을 잘 지키던 홍영식이 인천에서 서울까지 밤 새워 달려오고, 서울에 도착하자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대궐로 향한 것은 마음이 몹시도 바쁜 탓이었다. 별천지나 다름없는 미국사회를 구경하는 동안 그의 마음은 몹시 초조했다. 우리는 언제 그렇게 되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느냐는 조바심에서였다.
그는 승정원으로 달려가 귀국 사실을 알리고, 고종과의 면담 신청을 했다.
영감이 통했던지 고종은 곧바로 홍영식을 접견했다. 올빼미족인 고종은 밤을 새워 일하거나 연회 따위를 즐기다 아침에는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는데, 그 날은 웬일인지 다른 일들을 제치고 홍영식을 불러들여 보고를 받았다.
고종을 독대하여 출장 보고를 하다
홍영식의 눈에 비친 고종은 대단히 인자한 군주였다. 고종은 두툼하게 살찐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고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반년 만에 만난 신하 홍영식을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와 앉으라고 손짓하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미국에 갈 적에는 더위가 한창이었는데 올 적에는 몹시 춥구나. 먼 여행길에 과연 무사히 돌아왔는가?”
“네. 왕령(王靈)의 도움을 받아 별 탈 없이 다녀왔습니다.”
“사절단 일행이 뱃멀미는 하지 않았던가?”
“다행스럽게도 저희 사절단 일행이 모두 잘 감내하였으며, 아직도 피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어찌 이를 감히 노고라 하겠습니까.”
“전권대신 민영익은 구라파를 돌아서 온다고?”
“네. 전권대신 민영익이 성지를 받들어 미국에 가 있을 때 미국 정부에서 민 대신에게 미국 군함을 타고 구라파로 돌아가라는 권고가 있었기에 종사관 서광범과 함께 군함의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 대신 일행의 출항 날짜가 신 일행이 미국을 떠나 귀국하는 날짜로부터 보름 뒤였기에 신 등이 먼저 출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권대신 일행은 언제쯤 돌아올 것인가?”
“신이 들은 바로는 섣달그믐이나 정초가 될 것 같습니다. 하오나 정확한 귀국 날짜는 산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동안 왕래했던 수로(水路)의 이수(里數)가 얼마나 되던가?”
“인천에서 화성돈1까지 수륙으로 계산하면 꼭 1만 8990영리나 된다고 합니다.”
“일본 횡빈(橫濱)에서 구금산2까지는 수로로 몇 리나 되던가?”
“미국에 갈 때는 북쪽으로 한대에 가까운 항로로 갔는데 그 거리가 4500영리이며, 귀국할 때는 남쪽으로 멀리 돌아왔기 때문에 5300영리나 되었습니다. 그 거리를 우리나라 이법(里法)으로 계산하려면 그 수에다 3배를 더해야 합니다.”
“참으로 멀고도 멀구나. 왕래하는 수로는 모두 새로 난 항로인가?”
“귀국할 때는 구금산에서 남쪽으로 열대 가까운 항로를 돌아 단향산3에서 머물렀다 횡빈과 향항(香港) 등지를 거쳐 왔는데, 현행 수로에 비하면 그 거리가 훨씬 멀다 합니다.”
‘단향산(檀香山)’은 ‘호놀룰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태평양 항로에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첫 번째 항로는 북위 50도까지 올라가 태평양을 건너는 항로인데 그 거리가 가장 짧아 4600마일이고, 두 번째 항로는 북위 35도를 건너는 것으로 그 길이가 4700마일이었다. 세 번째 항로는 북위 20도를 경유하는 것으로 하와이를 거치게 되는데, 그 길이가 5595마일이었다.
홍영식 등 우리 사절단은 미국에 갈 때는 북항로를 이용했는데, 귀국할 때는 남항로를 이용했다.
“미국 대통령은 만나 보았는가?”
고종이 화제를 돌려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뉴욕에 있는 호텔로 찾아가 국서(國書)를 제정했고, 귀국할 때는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관을 예방하여 귀국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들의 접대는 과연 융숭하던가?”
“신 등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저희 보빙사 일행의 도착 예정일을 전보로 미리 알렸기 때문에 뉴욕에 도착하자 미국 국무성 관리들이 직접 정거장까지 마중 나와 영접하였는데, 이는 흔히 볼 수 없는 일이라 합니다. 그밖에 숙소와 음식 범절 또한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민 전권대신의 치사에 대한 대통령의 답사는 간결하면서도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가는 곳마다 그 나라 백성들은 지극히 환대하였습니다. 뉴욕에 체류할 때의 비용도 모두 그곳 상인들이 부담하였으니 더욱 보기 드문 일이라 합니다.”
“미국에는 처음 간 것인데, 마땅히 취할 만한 점이 있던가?”
“신 등이 그곳에 도착한 이래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자가 달라 눈과 귀로 보고 들어 파악할 수는 있어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기(機器)의 제조나 배, 차, 우편, 전신 등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급선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가장 중요시할 것은 교육인데, 만약 미국의 교육 방식을 본받아 인재를 양성한다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의 국력은 일본과 비교하여 어떠하던가?”
“미국은 토지가 비옥하고 자연자원이 풍부하며 산업시설은 물론 제도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어져 있어 일본은 미칠 바가 못 됩니다. 일본 같은 나라는 서양 법을 채택한 지 일천하여 약간은 모방한다 하더라도 진실로 미국의 예에 견주어 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 나라가 그처럼 부강하다면 그 나라의 병제는 어떠하든가?”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 아니었던지 고종은 꼬리를 이어 질문을 던졌다. 미국의 병사제도와 군사력에 이어 정치제도와 관제까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물었다. 미국과 유럽은 얼마나 떨어져 있으며, 러시아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물었고, 태평양과 대서양의 파도는 어느 쪽이 더 센지도 물었다. 미국의 가옥은 어떤 형태이며 농사는 어떻게 짓는지도 물었다. 개화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던지 평소 궁금하게 생각했던 사항을 빠뜨리지 않고 질문했다. 그렇게 질문한 사항이 60여 가지나 되었다. 미국에 대한 고종의 궁금증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고종이 짝사랑이라 할 만큼 미국을 좋아했던 것은 유독 미국이라는 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략한 사실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부터였다. 그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라면 조선과 같은 약소국을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미국과 친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청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고종의 열망이 그만큼 강렬했던 것이다.
홍영식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집에서 보낸 편지를 세 번 받아 보았고, 미국의 신문기사를 번역해 고국 소식을 한두 가지 들었다고 보고했다. 홍영식에게 보낸 편지는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 우편선을 타고 미국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아서 대통령에게 넙죽 엎드려큰절을 하다
29세의 나이로 앞날이 창창한 청년 홍영식이 보빙사 전권부대신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방문 길에 오른 것은 1883년 7월이었다. 그때 그와 함께 보빙사 사절단으로 선발된 사람은 전권대신 민영익을 비롯하여 서기관 서광범,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무관 최경석, 현흥택 등 8명이었다. 통역으로 중국인 오례당(吳禮堂)이 동행했고, 일본에서 통역으로 일본인 미야오카 츠네지로(宮岡恒次郞)가 합류했다.
사절단 가운데 한 마디라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고영철 하나였다. 중국어 역관인 고영철은 1881년 영선사 김윤식을 따라 중국에 유학했는데, 그때 중서학당(中西學堂)에서 8개월 동안 영어를 배웠다. 덕분에 영어를 몇 마디 할 줄 알았으나 통역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본인 미야오카가 통역으로 동행하게 된 배경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사절단 가운데 미국 사정에 밝은 사람이 없자, 주일미국공사 빙햄(Bingham)이 미국인 로웰(Lowell)이라는 청년을 안내자로 추천하여 동행케 했는데, 로웰이 영어에 능통한 미야오카를 개인 비서로 채용한 덕분에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버드대학 출신인 로웰은 당시 극동지역을 여행하는 중이어서 자유로운 입장에서 빙햄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절단과 미국인이 대화함에 있어서는 일본어를 중간언어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조선어를 일본어로 통역하면 다시 일본어를 영어로 통역하는 식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당시 조선어의 일본어 통역은 일본어에 능통한 수행원 변수가 맡고, 일본어의 영어 통역은 일본인 미야오카가 맡았다.
보빙사라는 이름의 친선사절단을 미국에 보낸 사람은 물론 고종이었다. 미국이 서양 여러 나라 가운데 처음으로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푸트(Foote)를 공사로 파견해 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사절단을 보냈다.
조선이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고종의 개인적인 희망사항이기도 했으나, 그 이면에는 청나라의 실권자인 이홍장의 간계가 숨어 있었다.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단정하고 있던 이홍장은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마저 한반도 진출을 꾀하고 있어 불안은 가중되었다. 그러자 그들 나라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청의 종주권을 지키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이었다. 한반도에 구미 제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어느 한 나라의 독주를 막고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청의 기득권을 확보한다는 계산에서 조선에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도록 권유했고, 그 첫 대상으로 선택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
실질적으로 청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이홍장의 권유가 있자 고종은 별 의심 없이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미국은 당연한 순서로 서울에 공사를 파견했다. 조선도 미국에 공사를 파견함이 마땅하나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미국과 같은 개화된 나라에 공사를 파견하고 싶어도 미국이 어디쯤 붙어 있는 나라인지, 미국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국말인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설사 공사를 파견한다 해도 공사관을 짓고 공사를 보낼 노자를 걱정해야 할 만큼 나라 살림이 팍팍했다. 그러자 미국공사 푸트가 공사를 파견하는 일은 뒷날로 미루더라도, 우선 사절단을 보내 답례함이 관례라며 고종을 설득했다.
민영익과 홍영식 등 보빙사 일행은 양력 7월 16일 인천을 출발하여 일본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에서 며칠 묵은 뒤 북쪽 항로를 따라 알류샨열도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는 기나긴 여행길에 올랐다. 4500마일이나 되는 긴 항로를 때로는 거친 파도와 싸우며 건넌 끝에 9월 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시카고와 워싱턴을 거쳐 뉴욕으로 가며 갖가지 신기한 미국 풍물을 구경했다.
보빙사 일행은 한복을 입고 갓을 쓴 모습으로 미국의 주요 도시를 돌며 백악관, 국무성, 교육성, 육군성, 철도회사 등 주요 공공기관을 두루 방문했다. 뉴욕우체국과 전신국도 구경했다. 은행, 신문사, 방직공장, 시범농장 등도 둘러보았다. 보스턴에서 개최되고 있는 세계박람회도 구경했다. 그들은 눈부시게 발달한 미국의 과학기술 문명만 구경한 것이 아니었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나뉘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국민이 직접 뽑는 미국의 민주주의도 공부했다.
9월 18일 뉴욕 피프스애비뉴호텔에서 미국 대통령 아서(Arthur)를 알현하고 고종이 보낸 국서를 증정했다. 그때 민영익과 홍영식 등 사절단 대표 3인이 아서 대통령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는 모습이 미국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절단의 눈에 비친 미국의 모습은 한 마디로 놀라움 그것이었다. 가로수가 가지런히 서 있는 넓은 거리, 높고 깨끗한 주택, 10층이 넘는 고층건물, 거리를 오가는 전차, 대낮같이 밝은 전깃불.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들이 그처럼 별천지와 같은 미국 풍물을 보고 감탄하는 동안, 미국 언론은 은둔국 조선 사절단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미지의 나라 조선이 왕자와 총리의 아들을 파견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왕비의 친정 조카 민영익이 왕자로 둔갑했고,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홍순목의 아들 홍영식이 총리의 아들로 대접받았던 것이다. 국내에는 그들의 미국 방문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뉴욕헤럴드, 워싱턴포스트 같은 미국 신문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히 보도했다.
보빙사 일행의 미국 여행은 단순한 시찰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주요 공공기관과 산업시설을 시찰할 때 그들은 조를 짜서 질서 있게 움직였다. 각자가 맡은 분야에 대해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상대를 놀라게 했다. 또한 낮에 취득한 정보를 모아 놓고 밤마다 모여 분석하기도 했다. 그들의 안내역을 맡았던 미국 해군대위 메이슨은 “나는 그들의 빡빡한 시찰 일정에 너무 힘들고 지쳤다. 그러나 그들은 매일의 일정을 강행하면서도 지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불평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미국 시찰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에서 얻은 새로운 문물의 견본품을 200여 개 궤짝에 싣고 왔다. 벼 베는 기계, 타작기, 저울 등 미국 농기구를 들여온 것도 그때였다. 무관으로 사절단에 참여했던 최경석은 미국의 발달한 농축산업에 관심을 가져 미국 농무성으로부터 각종 농작물 종자를 얻어 온 뒤, 서울 망우리 부근에 시범 농장을 설립하여 각종 농작물과 과수를 재배하기도 했다.그들이 가져온 것은 서양의 발달한 과학기술 제품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을 개화하여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벅찬 포부도 안고 돌아왔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 사절단은 두 패로 나뉘어 귀국했다. 부대신 홍영식은 무관 최경석, 안내자로 동행했던 미국인 청년 로웰 등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항하여 태평양을 거쳐 먼저 귀국하고, 전권대신 민영익은 서광범, 변수, 미국 해군무관 포크 등과 대서양을 횡단하여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본 뒤 수에즈운하를 거쳐 이듬해 6월 초에 귀국했다. 그들이 귀국할 때 미국 대통령 아서는 귀국하는 조선 사절단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는 특명을 내렸고, 미국 해군은 트렌턴호를 내주어 그들을 조선까지 호송케 했다. 덕분에 민영익, 서광범 등은 세계를 최초로 일주한 조선인이 될 수 있었다.
개화 의지가 강한 유길준은 미국에 혼자 남아 공부하기로 했다. 일찍이 박규수의 제자가 된 덕분에 실학에 눈뜬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데 이어 1882년에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한 바 있다.
8명의 사절단이 하나가 되어 미국을 방문했다 둘로 쪼개져 돌아온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귀국하기 직전 정사 민영익과 부사 홍영식은 이념 문제로 한 바탕 격렬한 입씨름을 벌였다. 너무나도 개화된 미국 문물에 취한 홍영식이 이제부터 조선은 개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민영익은 실질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은 사대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말싸움이 길게 이어졌다. 그들은 그처럼 개화냐 사대냐는 이념 문제를 놓고 뜨겁게 갑론을박했다. 그 일로 틀어진 두 사람은 귀국의 길을 달리하여 홍영식은 곧바로 태평양을 건너 귀국했고, 민영익은 미국 해군이 내준 군함을 타고 유럽 유람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민영익이 전권대사가 된 이면에는김옥균의 계략이 숨어 있다
민영익이 보빙사절단 대표가 되어 미국을 방문하게 된 배경에는 김옥균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보빙사 전권대신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민영익은 개화파로 알려져 있었다. 속은 알 수 없으나 겉으로는 개화파처럼 행동했다. 개화파인 김옥균이나 홍영식, 서광범 등과 가깝게 지냈고 개화파의 일에 적극 협조했다. 심지어 개화파 중인 이동인을 자기 집에 숨겨두고 고종에게 인사시키기도 했다. 왕비 민씨의 친정 조카인 민영익은 민씨 일파의 중심인물이기에 반드시 개화파로 끌어들여야 할 대상으로 점찍었던 바, 제대로 개화된 미국을 시찰하고 나면 틀림없이 개화파로 굳어질 것이라 판단했기에 김옥균은 민비를 찾아가 전권대신으로 장래가 창창한 젊은 인재 민영익을 보내야 한다고 설득했다. 김옥균의 속셈을 알 리 없는 민비는 그 말을 곧이듣고 고종을 꼬드겨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보내게 했던 것이다.
홍영식을 전권부대신으로 천거한 사람은 민영익이었다. 보빙사 전권대신이 되자 민영익은 홍영식을 부대신으로 추천하여 미국에 같이 가기로 했다. 그럴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웠다. 그들은 시국을 보는 눈이 같은 개화파였고, 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으로 같이 근무하고 있는 동료 관료였다. 게다가 홍영식은 총명하면서도 온화하고 모나지 않은 성격이어서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인 민영익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그처럼 앞으로 조선을 이끌어 나갈 두 청년 엘리트가 조선사회를 둘로 가르고 있는 이념 문제로 한판 붙었으니, 그 여파가 한 가닥 소나기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전국을 강타할 태풍으로 변모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 화성돈(華盛頓) - ‘워싱턴’, ‘영리(英里)’는 영국식 거리의 단위인 ‘마일(mile)’을 가리키는 한자어
2 구금산(舊金山) -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식 표기
3 단향산(檀香山) - ‘호놀룰루’를 가리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