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고종에게 귀국 보고를 마친 홍영식은 편전을 나서자 돈화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직 초겨울임에도 날씨가 차가웠다. 중천을 벗어난 햇빛이 밝게 비추고 있음에도 도포 자락을 날리는 북풍이 제법 매서웠다. 저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빈청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홍순목이 기다리고 있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었으나 홍영식은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그 날 오전부터 그가 왕을 독대하여 귀국 보고를 한다는 소식은 조정 내에 널리 퍼졌을 것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물러나 있는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빈청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으나, 반년이나 못 뵈었던 아버지에게 올리는 인사는 저녁으로 미루기로 했다.일인지하에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까지 지낸 아버지 홍순목과 18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30이 채 안 된 나이에 협판 자리에 오른 아들 홍영식은 뼈대 있는 집안과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물과 기름이었다. 두 사람은 만났다 하면 입씨름을 벌였다. 시국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요즘 말로 표현한다면 이념의 차이가 그만큼 심각했다. 아버지 홍순목은 대원군의 상표인 쇄국주의를 철저히 지지했던 수구사대파의 우두머리였음에 비해 아들 홍영식은 개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개화파의 선봉이었으니 그들 사이가 원만할 수 없었다.
홍영식이 빈청 인사를 건너뛰기로 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떫은 감정에서가 아니었다. 빈청에 들러 문안인사를 올리는 것은 간단히 끝낼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리고 몇 마디 인사말을 건넨 뒤 적당한 핑계를 대 빠져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청 인사를 거르기로 한 것은 그의 마음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었다. 일본과 태평양을 거쳐 미국의 풍물을 구경하는, 6개월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한 마디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 급한 일은 미국공사 푸트(Foote)를 만나는 것이었다. 푸트를 만나 김옥균이 안고 있는 차관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개화파 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한 시라도 바삐 개화파 동지들을 만나 앞으로 조선 사회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였다.
미국에 50여일 머무는 동안, 그가 서광범, 유길준 등 개화파 동지들과 애태우며 나눴던 말은 우리는 언제 그리 되며, 어떻게 해야 그리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만큼 개화된 미국 사회에서 받은 충격이 컸다. 오전 내내 고종과 문답을 나누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정리되긴 했으나, 앞으로 그와 개화파 동지들이 추진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미국처럼 개화된 세상을 만들려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뛰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전국 각 고을에 학교를 지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신식 교육을 시켜야만 한다. 전기를 일으켜 밤을 대낮같이 밝히고, 인구가 많은 서울에서는 전차도 다니게 해야 한다. 태평양처럼 넓은 바다를 건너는 기선과 한반도를 달리는 기차도 들여와야 한다. 우체국을 세우고 전신국을 세워 편지를 보내고 전보를 칠 수 있는 시설을 갖추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집에서 보낸 편지를 세 번이나 받았던 경험을 상기할 때 미국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무명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방직공장을 만드는 것도 백성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뉴욕헤럴드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신문을 만드는 것도 백성들을 개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서울 종로 같은 거리에 2~3층 집을 짓고 가로수를 심어 깨끗한 거리를 만들 때 제대로 개화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은 한낱 몽상에 불과했다. 조선의 나라 살림으로 볼 때 그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골라 실천에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학교를 예로 들면, 서울이나 평양에 한두 개 학교를 세우는 것은 가능하지만, 일시에 전국 각 고을마다 1개교씩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조선의 나라 살림이 궁핍했다. 한 마디로 조선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
김옥균의 미국행이 좌절되다
그처럼 복잡한 생각에 잠긴 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휘적휘적 걸어오는 관원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참의교섭통상사무라는 벼슬을 지낸 바 있는 이조연이었다. 한때는 수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이나 청나라를 다니며 개화파로 활동했으나, 요즘은 친청사대파로 변신하여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자였다.
“아이고, 홍 협판 아니십니까. 미국 사행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이조연은 고개를 숙이며 반갑게 인사했다.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소이다. 지금까지 편전에서 상께 복명문답을 드리고 나오는 길입니다.”
홍영식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원로에 피곤하실 텐데 복명문답까지 마치셨군요. 빨리 댁에 가서 쉬셔야겠습니다.”
“쉴 틈이 있나요. 지금 미국공사와 면담하기 위해 미국공사관에 가는 길인데요.”
“참으로 바쁘십니다. 빈청에는 다녀오셨겠죠?”
이조연은 가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아직 못 뵈었습니다. 국사가 다망하여 아무래도 댁에 가서 뵈어야 할 것 같네요. 자, 그럼!”
홍영식은 가볍게 목례를 보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친청사대파 일당은 주는 것 없이 미웠다. 빈청에 다녀왔느냐고 묻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여우같은 놈! 또 한 건 잡았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팔 불겠지. 개화파 놈들은 긴 여행을 다녀와서도 애비에게 문안 인사도 올릴 줄 모르는 불상놈들이라고…. 개화파 중에서도 이 홍영식이가 표본적인 인물로 꼽히겠지 아마. 까짓 놈들 찧고 까불면 어때. 지까짓 참새들이 대붕의 큰 뜻을 알겠어?
홍영식이 정동 미국공사관으로 들어서자 공사 통역인 윤치호가 반갑게 맞았다. 6개월 못 본 사이 윤치호는 더 성장하고 의젓해진 느낌이었다. 미국공사 푸트는 큰 손을 내밀어 홍영식의 손을 꼭 쥐며 반갑게 맞았다. 푸트에게 홍영식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초대 조선공사로 발탁된 푸트가 모노가시호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을 때 접빈사로 배에 올라가 영접한 사람이 바로 홍영식이었다. 그때부터 친해진 홍영식이 보빙사절단 부사로 그의 고국을 방문한 뒤 6개월 만에 돌아왔으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홍영식과 푸트는 공사관 응접세트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19세밖에 안 된 윤치호가 홍영식의 맞은편에 앉아 통역을 했다.
“귀공도 알다시피 김옥균 공은 현재 일본에 머무르고 있소.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 일본을 거쳐 왔는데, 그때 김 공을 만났소. 귀공도 알다시피 김 공이 일본에 가 있는 것은 차관을 얻기 위해서요. 국채위임장만 가져오면 틀림없이 차관을 주겠다던 일본인들이 배신하자, 김 공은 미국 상인 모스(Morse)씨에게 부탁하여 미국이나 구라파에서 차관을 얻어 달라고 했소. 그래서 모스씨가 미국을 거쳐 구라파까지 갔던 것이지요. 그런데 구라파에 가 있는 모스씨가 전보를 보내 오길, 현재 프랑스와 청국 두 나라가 안남 문제로 다투고 있는데, 청나라에 있어서의 조선은 청나라에 있어서의 안남과 같아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차관을 주선할 수 없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조선과 미국이 조약을 맺은 이상 독립국이냐 속국이냐 하는 문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소. 하물며 프랑스와 청국간의 일이 어찌 조선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소. 한 마디로 모스씨와 손잡기로 한 것은 지난 일이니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김 공은 왕명에 따라 중대한 일을 추진하는 것이니 중지할 수 없으며,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빙햄 공사는 김 공에게 미국으로 가서 차관을 얻도록 권하고 있소.
귀공을 방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오. 조선 신사로서 왕명을 받아 중대한 일을 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가려 함에 있어 귀공의 의견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소. 따라서 김 공의 진퇴는 귀공의 일언에 달려 있다 하겠소. 만약 김 공이 귀국하여 다시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면 김 공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요, 만약 바로 미국으로 가라 한다면 마땅히 미국으로 갈 것이요. 공은 모름지기 결단을 내려주기 바라오.”
수인사가 끝나자, 홍영식은 방문한 목적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미국인 모스는 아메리카무역상사 대표로 일본과 만주 등 극동지역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뒷날 운산금광의 채굴권과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따낸 인물이었다. 미국인 빙햄(Bingham)은 주일 미국공사였다.
“남의 돈을 꾸려면 반드시 먼저 사람들이 신용할 수 있게 해야 하오. 내가 비록 모스씨를 만나지는 못하였으나, 듣건대 그 사람의 기량이 좁고 얕아 족히 더불어 대사를 논할 수 없다 하더니, 이제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소. 폐일언하고 김 공은 결단코 미국으로 가서는 안 되오. 우선 귀국하여 하나의 방편을 정하여 외국인들의 신용을 얻은 뒤에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지 푸트는 서슴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겠소. 김 공에게 귀국하도록 연락하여 하나의 방편을 정하도록 하겠소.”
홍영식은 푸트의 의견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김옥균에게 보내는 편지는 윤치호가 대신 썼다. 윤치호는 홍영식과 미국공사가 나눈 대화 외에 푸트가 일전에 했던 말을 몇 마디 덧붙였다.
“조선의 재정은 통일성이 없고 왕명은 한결같지 않아 외국인들이 믿고 자금을 빌려 주려 하지 않는다. 재정이 산란하면 반드시 조약을 어기는 폐단이 생기게 되고, 조약을 어기는 폐단을 보고서야 어찌 자금을 빌려 주려 하겠는가. 이는 김 공이 왕명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요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님에도 자금을 빌리기 어려운 까닭이다. 우선 재정을 통일하는 조치를 취한 다음에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김옥균의 미국행을 반대한 푸트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말이었다.
국채위임장이가짜라고 헛소문을 퍼뜨리다
홍영식은 미국에 갈 때도 김옥균을 만났지만 미국에서 돌아올 때도 만났다. 보빙사 일행이 출발하기 한 달 전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김옥균은 그때까지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옥균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그것이 세 번째였다. 1881년 12월 처음으로 일본에 건너가 6개월 머무르고, 다시 이듬해 8월 일본을 찾아간 것은 개화된 일본의 신식 문물을 두루 살피고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등 일본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독립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883년 6월에 방문한 목적은 전혀 달랐다. 이번에는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에 갔다.
그 무렵 조선 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옥균은 일본에서 차관을 얻기로 했다. 허황된 꿈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일본의 대표적인 정객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을 만나 동양 정세를 논하던 중 조선의 재정난 문제를 화제로 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조선 정부에서 국채위임장을 발행해 준다면 차관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가 일본 체재 일정을 앞당겨 귀국한 것은 고종에게서 국채위임장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때 민태호, 윤태준 등 친청사대파가 재정난 타개책으로 내놓은 방안이 당오전·당십전의 발행이었다. 묄렌도르프가 외무아문 참의로 임명되기 직전 국고에 해당하는 선혜청(宣惠廳)에 불이 나 당오전 2만 냥이 타 버린 사건이 있었다. 이듬해로 접어들어 당오전이 고갈되면서 각 병영과 관아에 봉급을 지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당오전·당십전을 발행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대원군 시절 당백전을 발행하여 나라 경제를 파탄에 빠뜨린 끝에 주조를 중단했던 것이 불과 6년밖에 안 되었음에도 또다시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오전 발행에 앞장서 반대한 사람은 김옥균이었다. 그는 고종이 보는 앞에서 친청사대파들과 몇 차례 입씨름을 벌였다. 고종에게 반대하는 건의서를 올리기도 했다. 김옥균의 반대로 당오전의 발행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민영익이 그 문제에 대해 묄렌도르프의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고종은 민영익, 민영목, 김옥균, 묄렌도르프 네 사람이 모여 그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민영익이 나머지 세 사람을 자기 집으로 불러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새로운 화폐를 만들려면 금화, 은화를 고루 주조하는 것이 좋으나 우선 시급한 경비에 충당하기 위해서는 당오전, 당십전 내지 당백전을 주조하여 목전의 시급함을 해결하는 것이 최선책인 바, 그 같은 동전을 발행함에는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민씨 일파의 사주를 받은 묄렌도르프가 먼저 당오전과 당십전 발행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대원위대감 시절 당백전을 발행했다가 실패했음은 그대도 들어서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다 함은 무슨 이치요?”
김옥균이 즉각 반격에 나섰다.
“당백전 발행이 실패로 끝난 이유는 오래 전의 일이라 자세히 알지 못하나, 화폐 단위가 너무 높은 때문으로 들었소. 따라서 당백전이 아닌 당오전이나 당십전을 발행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오.”
묄렌도르프가 한 발 물러섰다.
“화폐제도가 발달한 서양에서는 동전이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제도가 발달하지 못한 조선에서는 동전의 가치가 실제 가치와 같지 않은 한 유통되기 어렵소. 새로운 동전의 발행은 물가 앙등을 초래하여 실패로 끝나게 되오. 만일 그대가 이 같은 화폐 발행이 나라의 해독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불학무식의 소치요, 만일 그것이 폐해가 됨을 알면서도 구차스럽게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대의 심술이 바르지 못한 때문이라 하겠소.”
김옥균이 목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 당오전 발행의 폐해에 대한 소신이 너무나도 강했던지, 그의 반대 논리는 어느덧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변하고 있었다. 당오전·당십전 발행 문제를 놓고 두 사람은 한나절 논쟁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화가 치민 김옥균은 그 길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논쟁의 쟁점을 낱낱이 아뢰었다. 그러자 고종은 그 자리에서 300만 원의 국채위임장을 작성해 주며 부디 차관을 성사시켜 재정자금을 확보하고 포경(捕鯨) 자금으로도 활용하라고 당부했다. 바라고 바라던 국채위임장을 손에 넣자 김옥균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옥균의 입장에서 300만 원이라는 거액의 돈을 확보해야 할 이유는 또 있었다. 얼마 전 개화파 동지인 광주유수 박영효에게 군사 양성 자금으로 몇 만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다른 약속은 뒤로 미루더라도 그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언젠가 개화파가 친청사대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군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두루뭉술한 성격의 소유자인 고종은 이해가 빠르고 판단력도 정확한 편이었으나 우유부단하다는 약점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김옥균이 일본으로 건너간 뒤 민씨 일파가 다시 당오전을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마저도 허용했다.
당오전 발행이라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청나라 장수 오장경(吳長慶)이었으나, 실제로 주조 업무를 맡은 사람은 민씨 일파였다. 그들은 전환국(典局)을 설치하고 당오전과 당십전을 발행하여 통용시켰다. 민씨 일파 중에서도 가장 재미를 본 사람은 민영익의 친부인 민태호였다. 민태호는 주전사업을 주도하여 서울, 강화도, 평양 등지에 주전소를 설치하고 동전을 찍어냈다. 민영목, 민응식, 민영익 등도 저마다 주전소를 차려놓고 당오전과 당십전을 찍어내며 막대를 부를 쌓았다. 묄렌도르프가 당오전과 당십전을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국가 재정을 확충해야 한다는 순수한 생각에서일 수 있었으나, 민씨 일파가 그 같은 주장을 한 배경은 전혀 달랐다. 새로운 돈을 찍어냄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일확천금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처럼 그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할 뿐 나라 이익은 뒷전이었다.
김옥균이 고종으로부터 300만 원짜리 국채위임장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차관을 얻으려 하자 친청사대파가 방해공작을 펼쳤다. 그 중에서도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방해공작에 앞장선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아닌 묄렌도르프였다. 당오전 발행 문제를 놓고 김옥균과 몇 차례 입씨름을 벌인 묄렌도르프는 그때부터 김옥균을 철저히 미워했다. 아니, 반드시 쳐부숴야 할 적으로 생각했다. 외무아문 참의를 거쳐 참판으로 승진하는 동안 모든 관원이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며 자신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데, 유독 김옥균만은 자신의 뜻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대로 방치할 경우, 낯선 땅 조선에서 굳건히 쌓아올리고 있는 자신의 아성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도 있었다.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 정부 관료로 채용된 묄렌도르프는 독일인이었다. 1847년생으로 김옥균보다 네 살 위인 그는 독일 할레대학에서 법학과 언어학 등을 전공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독일영사관에서 근무했다. 그 뒤 천진(天津)대리영사로 근무하던 중 중국 정계의 실권자인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을 알게 되었다.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고종이 조영하를 청나라에 보내 외교와 관세 분야의 전문가인 외국인 고문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홍장이 보낸 사람이 바로 묄렌도르프였다. 독일어는 물론 영어와 중국어를 해독하고 국제관계에 밝다는 것이 추천 이유였다.
1882년 12월 조선으로 건너와 고종을 알현한 묄렌도르프는 그 날로 신설된통리아문사무 참의로 임명되어 외교통상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조선의 외교통상 업무를 담당한 기관인 통리아문의 대신은 조영하였고, 차관급인 협판은 민영익이었다. 조선에 오자마자 미개척 분야인 외교통상 업무를 전담하며 전권을 휘두르게 된 묄렌도르프와 조선 정계의 실력자인 민영익은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묄렌도르프는 이듬해 4월 해관총세무사로 임명되어 세관업무마저 관장하게 되었다. 고종은 그에게 참의 벼슬과 함께 ‘목인덕(穆麟德)’이라는 조선식 이름을 하사했고, 이윽고 참판으로 승진시키며 ‘목 참판’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 관복을 입고 조선의 풍습을 따르며 철저히 조선 관원으로 행세했다. 우리말도 열심히 배웠다.
그때부터 묄렌도르프는 민씨 일파와 손잡고 외교통상 업무를 오로지했다.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과 통상조약을 맺고 세관 업무를 전담했다. 그의 휘하에는 조선인 관원도 있었으나 외교통상 업무를 아는 사람이 없어 모든 업무를 그에게 맡겼다.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은 모두 그의 휘하에 모였다. 외국 관원이나 상인들도 그를 찾아가 상의하고 그의 지시에 따랐다. 어느덧 조선의 외교통상 업무는 그의 손에서 요리되고 있었다. 전문 지식이 없기는 왕이나 민씨 일파도 마찬가지여서 모두 그의 뜻에 따라 그의 비위를 맞추며 이익을 공유하고자 했다. 그처럼 조선 천지는 어느덧 목씨 천하가 되고 있었다.
천하의 재사 김옥균과 목씨 천하의 주인공 묄렌도르프가 300만 원짜리 국채위임장 문제를 놓고 맞붙게 되었으니, 귀추가 주목될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