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그처럼 벼락출세한 이방인 묄렌도르프에게 괘씸죄로 몰렸으니 아무리 머리 회전이 빠른 김옥균이라 해도 무사할 리 없었다. 묄렌도르프가 김옥균의 차관사업을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의 대상으로 선정한 사람이 다름아닌 주한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였다. 그는 다케조에에게 가깝게 접근하며 김 모가 소지한 위임장은 가짜이니 믿을 것이 못된다며 모함했다. 귀가 얇은 다케조에는 김옥균과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묄렌도르프의 말에 빠져들었다. 1883년 3월 두 번째 일본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김옥균은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 겸 포경사(捕鯨使)라는 묘한 이름의 벼슬을 얻게 되었다. 동남제도개척사는 울릉도를 개척하는 벼슬로서 1880년 원산항을 개항한 이후 본격화되고 있는 일본인의 울릉도 침탈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자리였고, 포경사는 고래잡이사업을 관장하는 벼슬이었다. 정부 요직을 독점하게 된 사대파가 별 영양가 없는 벼슬자리를 만들어 정적인 김옥균에게 선심 쓰듯 던져 주었던 것이다. 개화파의 우두머리인 자신을 물 먹이기 위해 민씨 일파가 급조한 자리였기에 찜찜한 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김옥균은 개의치 않았다. 나라 살림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울릉도의 산림을 개발하고 동해에서 고래잡이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김옥균 자신이었기에 그 같은 새로운 사업을 시범적으로 해보고 싶기도 했다.
300만 원짜리 국채위임장을 품에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다
전에 없는 벼슬을 맡게 되었기에 전에 없는 방법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울릉도의 울창한 산림을 개발하고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한데, 그 자금은 일본 차관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 같은 개발자금뿐만 아니라 개화파의 개혁 과제들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자금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차관을 얻으려면 정부의 지급보증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고종이 작성해 준 국채위임장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 해 4월 초대 미국공사 푸트가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오면서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윤치호를 통역으로 데리고 왔다. 19세에 불과한 윤치호는 일본에서 영어를 배운 지 몇 달밖에 안 돼 통역 일을 맡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어 꿩 대신 닭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귀국하게 된 윤치호가 도쿄를 떠날 때 일본 외무대신 요시다 기요시게(吉田淸成)를 만나게 되었다. 요시다가 그를 붙잡고 단단히 부탁했다.
“모름지기 내 말을 김 모에게 전하되, 만일 국채위임장만 얻어 오면 대사를 이룰 수 있다고 하시오.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오.”
그 말을 전해 들은 김옥균은 곧바로 고종에게 달려가 보고했고, 그 말을 듣자 고종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처럼 김옥균은 이미 일본에서 차관을 얻는다는 계획을 고종에게 보고하여 내락을 얻어 놓고 있었다.아무튼 권모술수에 능한 묄렌도르프의 방해 공작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리 없는 김옥균은 1883년 6월 고종이 써준 국채위임장을 품에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세 번째 가는 일본 방문 길에도 혼자 가지 않았다. 300만 원의 차관을 얻게 되면 큰 포부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부산에 있는 일본인에게 귀중품을 맡기고 돈 2만 5000원을 빌렸다. 그 돈으로 서재필, 이복모 등 학생 61명을 이끌고 갔다. 그 중에서 서재필 등 9명은 일본 육군소년학교인 도야마(戶山)학교에 입학시켜 신식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나머지 청년들은 각자 원하는 학교에 입학시켜 전문지식을 쌓게 했다. 인재를 키워야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신념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김옥균은 도쿄에 도착하자 친분이 두터운 일본 정객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부터 찾아갔다. 이노우에의 표정과 언사가 전과 같지 않았다. 언제나 정중하고 따뜻한 자세로 맞이하던 이노우에가 표정을 달리하며 경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김옥균은 그때 비로소 다케조에가 묄렌도르프의 농간에 놀아나 엉뚱한 보고를 했음을 눈치챘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일본 정계의 요인들이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한 일본에서 차관을 얻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난 몇 달 사이에 일본 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이전의 자세에서 벗어나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 같은 상황 변화가 있었기에 일본과의 차관 교섭은 당분간 물 건너간 일이 되고 말았다. 일본 차관에 목을 매달고 있던 김옥균으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자칫 군주 기망의 죄를 뒤집어쓰고 중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 같은 사정을 알 리 없는 고종은 그 해 10월 그를 종2품인 호조참판에 임명함과 동시에 외아문 협판으로 승진시켰다. 상식 밖의 오해를 받아 곤경에 처하게 되었음에도 김옥균은 좌절하지 않았다.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두루 능한 김옥균의 또 하나의 장기는 사람 사귐이었다. 그는 계급이나 나이를 가리지 않고 나라를 개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두루 친하게 지냈다. 일본인은 물론 서양인과도 친교를 맺었다. 주일미국공사 빙햄도 예외일 수 없었다. 묄렌도르프의 모략으로 일본과의 차관 교섭이 난관에 부딪히자 그는 주일미국공사 빙햄을 찾아가 그 동안의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으며 도움을 청했다. 그때 빙햄이 소개한 사람이 미국인 모스였다. 모스는 아메리카무역상사 대표로 일본과 중국 등지를 드나들며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빙햄이 그를 불러 고종이 써준 국채위임장을 보이며 차관을 얻어 달라고 부탁했다. 모스는 국채위임장을 들고 미국을 거쳐 영국까지 건너갔으나,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아는 사람이 없던 시절인지라 차관 교섭이 성사될 수 없었다. 그러자 빙햄은 김옥균에게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차관 교섭을 하도록 권했다. 그럴 듯한 말이었으나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사교에 능하고 언변이 좋은 김옥균이라 해도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땅 미국에 가서 전주를 찾는다는 것은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그때 마침 홍영식이 미국에서 돌아왔고, 그 전말을 전해 들은 홍영식이 그것은 우리 조선인의 단순한 머리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니 미국공사 푸트의 조언을 들어야 한다며, 그 과제를 안고 귀국했던 것이다.
거사 시기를 5년 후로 잡다
홍영식은 보빙사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에 갈 때도 도쿄에서 김옥균을 만났다. 김옥균은 차관을 교섭하기 위해 이미 달포 전에 일본에 와 있었다. 보빙사 수행원 유길준이 자리를 같이했다. 그들은 식당에서 따끈하게 데운 정종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 민 군이 전권대신으로 가게 돼서 정말 다행이오. 민 군이 제대로 개화된 미국을 구석구석 구경하고 나면 완전히 달라지겠지.”
‘민 군’이란 보빙사절단 전권대신 민영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김옥균이 그처럼 민영익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렇게 되어야지요. 민 공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잖아요.”
홍영식이 맞장구쳤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사행에서 홍 공이 중요한 역할을 해 주셔야겠소. 아무쪼록 민 군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잘 구슬려 주세요.”
“민 공이 남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지만, 아무래도 미국의 개화된 문물을 보고 나면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지난번에 박 군이 한성판윤 자리에서 맥없이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소. 박 군이 모처럼 한성판윤이 되어 치도국(治道局), 경순국(警巡局), 박문국(博文局) 등을 설치하여 서울의 도로를 닦고 치안을 확보하고 신문을 발행하는 등 개화된 세상을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민비의 청탁 하나 들어 주지 않았다 해서 하루아침에 광주유수로 밀려나지 않았소. 이대로 가다가는 광주유수 자리도 오래 보존하기 어려울 거요. 폐일언하고 우리 개화파 사람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란 말이오.”
김옥균이 말머리를 돌려 마음속에 응어리진 한을 토로했다. 그가 지칭하는 ‘박 군’은 박영효였다.
박영효가 한성판윤으로 임명된 것은 1882년 12월이었다. 조선 정부는 그 해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피해를 보상하기로 했다.
그 조약에 따라 사과 사절을 일본에 파견했는데,
그때 박영효가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선발되었다.
그는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등 수행원 14명과 비공식 사절인 김옥균, 민영익 등으로 사절단을 구성했다. 고종은 일본에서 갓 돌아온 김옥균에게 특명전권대신 자리를 맡기려 했으나 김옥균이 굳이 사양하며 박영효를 천거하자, 박영효에게 그 임무를 맡기며 김옥균으로 하여금 고문으로 동행하게 했던 것이다. 박영효 일행은 부산에서 일본 군함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배를 타고 가던 중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태극(太極)과 사괘(四卦)를 배치하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사용한 최초의 국기였다. 특명전권대신으로서의 사명을 마치고 귀국하자 고종은 박영효를 한성판윤으로 임명했다. 모처럼 벼슬다운 벼슬 자리에 앉자 박영효는 두 차례의 일본 방문에서 보고 배운 바를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그리하여 경순국을 신설하여 경찰제도를 실시하고, 치도국을 설치하여 도로의 확장과 정비, 토목사업 등을 벌이고, 박문국을 신설하여 신문 발행을 추진했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은 물론 전국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반대하며 그를 탄핵했다. 그러던 중 민비의 사사로운 청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여 광주유수로 좌천되었다. 행정의 일대 개혁을 꿈꾸었던 개화파로서는 낙심천만이 아닐 수 없었다. 광주유수는 한성판윤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자리였으나 다행히도 그 자리에는 수어사(守禦使)라는 벼슬이 붙어 있었다. 수어사는 오늘날의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남한산성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벼슬이어서 병권을 쥐고 있었다. 개화파의 입장에서 볼 때,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뒷날을 도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업이었다.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자리를 옮겼을 때 김옥균이 동남제도개척사로 임명되었다. 때마침 김옥균은 고종으로부터 300만 원짜리 국채위임장을 받았기에 가슴 속에 큰 뜻을 품을 수 있었다. 그는 박영효에게 예정대로 국채를 얻게 되면 그 중에서 몇 만금을 군자금으로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며 가급적 많은 병사를 훈련시키라고 당부했다. 그처럼 단단히 약속했기에 박영효는 500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여 신식 훈련을 시키고 있었으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군자금은 오지 않았다. 그때 일본 도야마사관학교 출신인 신복모와 나팔수 이은돌이 교관 자리를 맡아 박영효의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내 그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민씨 일당을 몰아내려면 거사를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
김옥균이 정종 한 잔을 들이켜고 나서 뜻밖의 말을 꺼냈다.
“거사를 하다니요?”
홍영식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거사라 해서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민씨 일당과 그 추종자 중 몇몇을 제거하고 나서 상을 구슬려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려면 아무래도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그처럼 극단적인 방법도 있겠지만, 일본이나 서양의 개화된 제도를 하나하나 받아들여 실시하게 되면 개화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요?”
예상 밖의 개혁 방안에 당황했던지 홍영식이 슬며시 이의를 제기했다.
“어림없는 말이오. 중전이 그대로 앉아 정사에 일일이 간섭하고 민씨들이 파당을 이루어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개화는 바랄 수 없소.”
김옥균은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박 군이 당하고 내가 당한 꼴을 보라고. 중전이나 민씨 일당,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에겐 사리사욕이 있을 뿐 나라는 없소. 그런 인간들이 계속해서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 나라는 불원간에 거덜나고 말 것이오.”
그때까지 홍영식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개화 방안은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었다. 절대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고종을 설득하여 낡은 제도를 뜯어고치고 서양의 신식 제도를 도입하여 새로운 정치를 펼친다면 개화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순리요, 개화를 추진하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김옥균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상하가 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노력하면 중흥의 기회가 도래할 것이라며 개화 가능성에 대해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와 박영효 등의 개화 노력이 민씨 일파의 반대로 벽에 부딪히면서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민비를 위시하여 민씨 일파가 집권하는 한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짜낸 방안이 정변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거사를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겐 힘이 없잖아요?”
정변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에 찬성할 수 없기에 홍영식은 다시 우회적으로 반대의 뜻을 표명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라 밖은 내가 맡을 테니 나라 안은 홍 공이 맡으시오. 나라 밖에서는 내가 군대를 양성할 테니 나라 안에서는 홍 공이 상을 잘 구슬려서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청ㆍ일 양국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하시오. 지금처럼 청·일 양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 우리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지금 조정에서 상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홍 공밖에 없잖소.”
“나라 밖에서 군대를 양성한다 함은 호산(戶山)학교에 입교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양성하겠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몇 명이나 가능하겠어요?”
“지난번에는 일본인에게 빌린 돈으로 유학생을 데려왔기 때문에 9명밖에 안 됐지만, 차관을 얻어 거금을 확보하게 되면 그 숫자를 수백 명으로 늘릴 수 있을 것이오. 그처럼 매년 수백 명씩 늘리게 되면 몇 년 후에는 수천 명이 될 것이오. 2~3천 명의 군사만 확보한다 해도 거사를 성사시키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거요.”
김옥균의 장기는 능란한 말솜씨였다. 그는 2~3천 명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일이라는 듯 자신있게 말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다면 거사 시기를 언제로 잡아야 하지요?”
홍영식이 물었다.
“아무래도 그 정도의 군대를 양성하려면 5년은 걸려야겠지요.”
“그렇겠네요. 아무래도 거사 시기는 5년 후쯤으로 잡아야겠네요.”
홍영식은 거사 시기를 넉넉히 잡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때까지는 반드시 거사를 성사시켜야 하오. 시기가 너무 지연되면 엉뚱한 데서 일이 틀어져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니까. 자, 그런 의미에서 한 잔씩 합시다.”
그 대목에서 김옥균은 술잔을 들어올리며 건배를 청했다. 홍영식과 유길준도 술잔을 들어올렸다 입으로 가져갔다.그처럼 좌중의 이야기는 김옥균과 홍영식이 주고받았다. 일개 서생에 불과한 유길준은 듣고만 있을 뿐 거사계획과 같은 중대사에 끼어들 수 없었다.
미국 시찰 중인 정사와 부사가 대판 싸우다
보빙사 사행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자 홍영식은 일본에서 또다시 김옥균을 만났다. 유길준은 유학생으로 미국에 남아 있어 그 자리에 끼일 수 없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둘러본 소감이 어떻소?”
식당에 마주앉자 김옥균이 미국 방문 소감부터 물었다.
“한 마디로 별천지에 살다 온 기분이오. 우리 인간이 사는 세상에 그 같은 별천지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요. 미국에 있는 동안 내내 꿈을 꾸는 기분이었소.”
속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 기쁘다는 듯 홍영식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미국이 그렇게 좋았소?”
“좋다마다요. 넓고 광활한 땅, 가로수가 즐비한 넓은 도로, 도로 좌우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고층 건물, 대낮같이 밝은 전깃불, 곳곳에 세워져 있는 학교, 편지를 보내고 전보를 보내는 우체국과 전신국, 기계로 옷감을 짜내는 방직공장,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은 것이 없었소. 우리는 언제 그리 되며 어떻게 해야 그리 될 수 있는 것인지, 정말 답답할 뿐이오.”
“그렇다면 민 군도 이번에 대오각성했겠네요? 역시 개화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겠어요?”
김옥균은 또다시 민영익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닙니다. 민 공은 미국의 개화된 문물을 보면서도 시종 무덤덤한 얼굴이었어요. 민 공은 미국에 갈 때 한문책을 잔뜩 싸 짊어지고 갔는데, 미국 풍물을 구경할 때도 한문책만 들고 다녔어요. 다른 사람들은 한 가지라도 더 보고 배우고 싶어 열심히 찾아다니며 적고 토론하고 했는데, 민 공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는 자세로 먼 산 바라보듯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하고 대판 싸웠어요. 우리가 나아갈 길은 일본, 미국 등과 손잡고 개화의 길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했더니, 민 공은 우리가 의지할 나라는 청국밖에 없다며 딴청을 피웠어요. 조선 같은 뱁새가 미국 같은 황새를 따라가다간 가랑이가 찢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미국처럼 제대로 개화된 현장을 실제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그처럼 엉뚱한 말을 하니 얼마나 열이 뻗칩니까. 그래서 당신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된 거냐 하고 대판 붙었어요. 별천지 같은 미국의 발전상을 보면서도 사서삼경이 눈에 들어오느냐고 했더니 오히려 우리더러 현혹되지 말라는 거였어요. 우리 조선처럼 작고 약한 나라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청국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아니, 민 군처럼 다재다능하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그처럼 엉뚱한 반응을 보였단 말이오? 정말 믿을 수가 없네.”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 김옥균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