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홍영식과 김옥균은 일본 식당에 앉아 대화를 계속했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지난번에 우리가 논의했던 개화 일정을 서둘러야 할 것 같소. 미국처럼 개화된 세상을 만들기로 목표를 세운 이상 이젠 더 망설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나는 귀국하는 대로 상께 아뢰어 몇 가지 신식 제도를 실시할 생각이오.”
홍영식이 그처럼 말머리를 돌렸다.
“신식 제도라니, 무슨 제도부터 실시할 생각이오?”
김옥균이 반색하며 물었다.
“우선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함이 시급한 과제이나, 학교는 김 공이 일본에 청년들을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고, 또 동문학(同文學)이란 통변학교(通辯學校)에서도 외국어 교육을 시키고 있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소. 그래서 우선 우편과 전신부터 시작할 생각이오. 미국은 각 고을마다 우체국을 세워 편지를 보내고 있는데, 그 기민함이 참으로 놀라울 정도였소.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집에서 보낸 가서를 세 번이나 받지 않았소. 게다가 전신 역시 기민함이 번개처럼 빨라 부러울 뿐이었소. 그래서 이번에 귀국하면서 미국 상인에게 전신기를 보내 달라고 부탁해 놓고 왔소이다.”
미국을 시찰하는 동안 홍영식의 관심은 우편과 전신에 집중되었다. 그는 뉴욕우체국과 웨스턴유니온(Western Union) 전신회사를 찾아가 이것저것 물으며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미국 국무장관 프렐링휘젠(Frelinghuysen)이 주한미국공사 푸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홍영식은 우체국에 대해 특별한 흥미를 가졌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미국 우정성을 방문할 때는 우표 견본을 달라고 요청한 끝에 우표와 편지봉투, 안내 팸플릿 등을 국무성을 통해 기증받았고, 전신회사를 시찰한 뒤에는 미국인 상인 프레이저(Frazer)를 통해 전신기를 주문하기도 했다. 프레이저는 나중에 뉴욕 주재 조선총영사가 되었다.
“참말로 잘 생각했소. 이제 비로소 광명이 비치는 것 같소.”
김옥균이 감탄했다.
“마침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산업박람회라는 것이 열렸는데, 거기에는 없는 것이 없었소. 지금은 일본에서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성냥이나 비누는 물론 전깃불, 기차 등 별별 것이 다 있었소. 미국을 본받아 광명의 나라를 만들려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백성들이 다 잘 살 수 있게 해줘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소.”
“고마운 말씀이오. 이제야 우리가 나아갈 길이 명확해진 것 같소. 그런데 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걱정이오.”
김옥균은 말머리를 돌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왜요? 무슨 일이 있나요? 아참, 그 동안 추진했던 차관 문제는 어떻게 되었소?”
“그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 걱정이오. 목인덕이라는 자가 내가 가지고 있는 국채위임장이 위조된 것이라고 모함한 것을 다케조에가 일본 요로에 그대로 보고한 바람에 일본에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되었다는 것은 지난번에 이야기했는데, 그 뒤 빙함 공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인 모르스 씨를 만나 미국에서 차관을 얻는 방안을 추진했어요. 모르스 씨가 영국까지 건너가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주선한 결과 일이 거진 성사되는 듯 싶었는데, 안남 문제로 불란서와 청국 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안남이나 조선은 똑같은 중국의 속국인데 어떻게 조선을 믿고 차관을 제공할 수 있느냐 해서 일이 틀어져 버렸어요. 그러자 빙함 공사가 국채위임장만 있으면 미국에서 차관을 얻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며 나더러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교섭을 해보라 하는데 엄두가 나야지요. 미국을 가 본 적이 있어요, 영어를 할 줄 알아요. 그래서 홍공이 올 날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소.”
김옥균은 그 동안의 진행 과정을 털어놓았다.
“아, 그러셨군요.”
홍영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서양 물정에 어두운 우리들의 머리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소. 아무래도 이 문제는 그곳 사정에 밝은 푸트 공사와 상의해 보아야 할 것 같소. 내가 귀국하는 대로 푸트 공사를 만나 상의해 보겠소. 푸트 공사는 솔직한 사람이니 자기 생각을 숨김없이 이야기할 거요. 그분의 말을 들어보고 가부를 판단해서 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소.”
홍영식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개화파 스승 유대치에게 먼저 귀국 인사를 올리다
정동 미국공사관을 빠져나온 홍영식은 청계천을 따라 수표교로 향했다. 개화파의 스승 유홍기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양반집 자제로서 나랏일로 출타했다 반년 만에 귀국했으니 누구보다 먼저 아버지를 찾아가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이 도리였으나, 그는 귀가를 서두르지 않았다. 영의정까지 지낸 나라의 중신이긴 하지만 수구보수파의 영수격인 아버지 홍순목을 만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느니 개화파의 스승 유홍기를 만나 미국 방문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다 시급하고 값진 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가슴은 미국에서 받은 충격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유홍기의 약방은 수표교의 남쪽 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다. 두툼한 한복에 마고자를 입은 유홍기는 따뜻한 손을 내밀어 홍영식의 손을 잡으며 약방으로 끌고 갔다. 한약재 냄새가 짙게 풍기는 약방에는 마침 오세창, 박제형, 유혁로 등 개화파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홍영식은 그들과 일일이 손을 잡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만리타국에 다녀오시느라 여독이 심하실 터인데, 이 누추한 집까지 찾아 주셨네요. 한 여름에 떠나셔서 한 겨울에 돌아오셨으니 반년 만에 만나 뵙게 되었는데, 미국이라는 나라를 구경하신 소감이 어떠하였소이까?”
유홍기가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백이 넘은 나이임에도 중인 신분이기 때문인지 홍영식에게 깍듯이 존칭어를 썼다.
“한 마디로 별천지에 다녀온 기분입니다. 미국은 문자 그대로 광명의 세계였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라는 세상이 있다면 그런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좋은 나라라는 말씀입니까?”
20대 초반인 오세창이 감탄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세창은 작고한 개화파의 스승 오경석의 아들이었다.
“그럼. 땅 넓지, 집이 3층, 4층으로 높고도 널찍하지, 도로 시원하게 뚫려 있지, 기차 다니고 전차 다니지, 산물 풍부하지, 없는 것이 없어요. 게다가 우체국 있고 전신국 있고, 조보(朝報)와 같은 신문이라는 걸 내고 있어 나라 안팎의 소식을 바로 전해 주지, 각 고을마다 학교가 있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고. 우리는 언제 그렇게 되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미국에 있는 동안 내내 푸념처럼 이야기했다고. 이제 우리 개화파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국과 같은 개화된 세상을 만드는 것이에요.”
홍영식은 감격에 겨워 열변을 토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 동지들이 나아갈 길이 분명해졌네요. 지금부터 우리 동지들은 모두 힘을 합쳐 미국과 같은 개화된 세상을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이 일에는 자리로 보나 뭐로 보나 홍공이 앞장서야 해요. 아니, 이렇게 기쁜 날 술이 빠질 수 없지.”
유홍기는 하인을 불러 술상을 차리라고 했다.
당시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던 개화사상은 서울 북촌 재동에 있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움텄다. 1866년 평안도 관찰사로서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먼호를 격침시키고 서울로 올라온 박규수는 우의정까지 승진하여 정승 반열에 올랐다. 우의정 시절, 영의정 이유원과 뜻이 맞지 않아 사직하고 전도가 유망한 청년들을 끌어 모아 실학을 강의하며 청나라를 통해 들어오는 신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때 그의 사랑방에 자주 모인 사람이 김옥균, 서광범, 박영교, 박영효 등 북촌에 사는 젊은 양반 자제들이었다. 홍영식은 바로 이웃집에 살고 있어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박규수는 실학자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의 손자였다. 1861년에 이어 1872년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쇠퇴해 가는 청나라의 실상을 목격하는 한편, 서양의 과학기술과 신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현장도 살필 수 있었다. 은둔의 나라 조선에도 반드시 필요한 운동이었다. 그가 애써 홍영식, 김옥균 같은 젊은 인재들을 끌어 모아 교육시킨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박규수가 두 번째로 중국에 갔을 때 통역관으로 동행한 사람이 오경석이었다. 중인 출신인 오경석은 16세에 역과(譯科)에 합격하여 23세 때부터 북경행 사신의 역관으로 활약했다. 이후 십수 차례 중국을 드나들며 서양의 신식 무기에 맥없이 무너지는 청나라의 모습을 목격하며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조선이 그 같은 곤경에 처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판단했기에 그 대비책으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박물신편(博物新編)’ 등 다수의 신간 서적을 탐독하며 1860년대부터 일찍이 개화사상을 품게 되었다. 그는 그들 서적을 이웃에 사는 친구 유홍기와 나누며 보며 개화사상을 고취시켰다.
북촌 양반 자제들을 먼저 개화시켜야 한다
중인 출신인 유홍기 역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약방보다 학문이나 시대 변화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오경석이 사 온 서적을 탐독하며 쇄국주의에 빠져 있던 나라를 개화하는 방안을 깊이 생각했다. 게다가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 사상을 깊이 연구했고, 사학에도 조예가 깊어 역사에 통달했다. 체구가 건장한 데다 말을 잘한 덕분에 사람을 휘어잡는 매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본명보다 호를 붙인 유대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느 날 유대치가 친구인 오경석에게 물었다.
“이 나라를 개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이 나라를 개화시키려면 먼저 북촌 양반 자제들을 개화시켜야 하오. 그들이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주인공이 될 테니 그들을 개화시켜야만 나라가 제대로 개화될 거요.”
북촌이란 종로를 경계로 하여 서울을 남북으로 나눌 때 북쪽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 것인데, 주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마을을 지칭했다. 그 지역은 풍수지리상 길지라 하여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았는데,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북촌에는 주로 노론이 거주하고, 종로에서 남산 사이에 있는 남촌에는 소론, 남인, 북인 등이 모여 살았다 한다. 하급관리나 벼슬이 없는 양반 자제들도 남촌에 모여 살았다.
1869년 박규수가 한성판윤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오경석과 유대치는 박규수를 찾아가 나라를 개화시킬 방안을 논의했다. 개화사상에 먼저 눈뜬 그들 세 사람은 그렇게 개화사상의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기로 했다. 병인양요와 셔먼호사건을 겪으면서 조선도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인재 양성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북촌에 사는 영민한 양반 자제들을 골라 중국에서 들여온 새로운 서적을 읽히며 개화사상을 고취시키기로 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다음해인 1877년에 박규수가 별세한 데 이어 1879년 오경석도 병사했다. 개화사상의 전도사 중 두 거두가 사망하자 학도들은 자연히 유대치 휘하에 모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기존 학도는 물론 박제형, 이동인, 탁정식 등 새로운 인물들이 합류했다. 풍채 좋고 말 잘하고 지도력이 있는 데다 역사는 물론 불교 교리에도 밝아 유대치의 이야기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출신 성분은 중인이었으나 당대의 뛰어난 청년들을 제자로 두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백의정승’이라 불렀다.
유대치의 약방에는 어느덧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유대치는 술 단지에 들어 있는 동동주를 뚝배기 잔에 따르고 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홍공께서 참으로 좋은 세상을 보고 오셨고 참으로 귀중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개화파 동지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국처럼 개화된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늘 꿈꿔 왔던 새로운 조선 건설이 되는 것이지요. 신조선 건설이라는 대사업이 어찌 그리 용이할 수 있겠소만, 뜻이 있고 심지가 굳다면 못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누구보다 시무에 밝고 견식이 풍부한 홍공께서 앞장서 주셔야겠습니다. 여러분, 나파륜을 아시죠? 불란서 혁명을 일으켜 불란서를 통일하고, 독일을 정복하고 이태리를 정복하고 노서아까지 원정했던 나파륜 말입니다. 지금 조선에도 나파륜과 같은 인물이 날 때가 되었습니다. 조선을 독립시켜 정치를 개혁하고 군사를 육성함으로써 한 번 호령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두 번 호령하여 만주 땅을 찾고, 세 번 호령하여 동양 전체를 무릎 꿇게 할 수 있으니 그만한 기개를 가진 인물이 나와야 합니다. 홍공께서 미국처럼 개화된 세상을 만드는 것을 신조선 건설의 목표로 삼으셨고, 그것을 이룰 만한 포부와 경륜을 가지셨으니 나파륜처럼 큰일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유대치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홍영식을 치켜세웠다. ‘나파륜(拿破崙)’은 ‘나폴레옹(Napoleon)’의 한자 음역어였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먼저 백성이 깨어 있어야 한다
“저 같은 용렬한 위인이 어찌 감히 나파륜 같은 큰 인물이 되겠습니까. 과분한 말씀입니다.”
홍영식은 손사래를 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언젠가 김공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군사 10만 명만 양성할 수 있다면 고구려의 옛 땅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망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가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만, 한 나라가 발전하려면 먼저 백성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을 백성이 직접 뽑는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은 백성이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혁명은 일신을 희생할 각오를 한다면 개화파 몇 명만으로도 능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이 깨어 있지 않는 한 그 혁명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조선 백성은 우매하여 전신불수의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 백성을 이끌고 미국과 같은 개화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그 점이 심히 걱정되는 바입니다.”
홍영식이 지칭하는 ‘김공’이란 김옥균을 가리켰다.
“옳은 말씀입니다. 한 나라가 발전하려면 먼저 백성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세상 이치를 정확히 깨달은 말씀입니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인지라 백성이 으뜸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비록 군주라 할지라도 백성의 뜻을 거스르며 통치하는 것은 천륜을 어기는 일이라 해서 고래로 기피해 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군주는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만백성을 다스리기 때문에 모든 일은 군주가 하기에 달렸다고 할 수도 있어요. 군주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백성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인데, 백성의 의식주가 풍족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그 치적이 판가름 나게 되지요. 군주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해지면 그 나라는 흥하게 되고, 반대로 악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해지면 나라가 쇠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 해서 군주 혼자서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어요. 군주가 잘하려면 주변에 훌륭한 신하가 많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홍공께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개화의 중책을 맡게 될 분이 홍공이시니 우리 조선의 명운이 홍공께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다 같이 박수 한번 칩시다.”
유대치는 또다시 홍영식을 치켜세우며 박수를 쳤다. 술상에 둘러앉은 동지들이 다 같이 박수를 쳤다.
유대치의 말은 단순한 인사치례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어느 누구보다 홍영식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때까지 개화파의 중심인물은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김옥균으로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한 데다 말 잘하고 글 잘하고 재기가 넘쳐 어느 자리에서든 주목을 끌었다. 그에 비해 홍영식은 보빙사 부사로 미국에 다녀오기 전까지만 해도 개화파의 동조자였을 뿐 적극적인 참여자는 아니었다. 그때까지 그는 국정의 핵심 과제를 맡고 있는 관원으로서 국정 수행에 전념했기에 개화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성품이어서 주어진 업무에 충실할 뿐 곁눈질할 줄을 몰랐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정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유망주 관료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민씨 일파는 청국에 머무르고 있던 김윤식에게 전보를 쳐 청국에 군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도록 했다. 김윤식이 청국 북양대신서리 장수성(張樹聲)을 만나 그 문제를 상의하자, 장수성은 조선의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인재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때 김윤식이 지목한 사람은 홍영식, 민영익, 김홍집 3인이었다. 그러자 장수성은 당사자인 김윤식과 어윤중을 지목하며 두 사람도 그 중에 포함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당시에 거론된 5인이 사실상 조선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젊은 인재였던 것이다.
그들 5인의 벼슬은 참의에서 협판에 이르기까지 엇비슷했으나 동년배는 아니었다. 5살이나 아래인 민영익을 제외하면 나머지 3인은 홍영식에 비해 나이가 많았다. 어윤중은 7살, 김홍집은 13살, 김윤식은 20살이나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젊은 민영익은 일찍 출세하여 홍영식과 같은 협판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초고속 승진이 고모 민비의 총애에 힘입은 것임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에 비해 홍영식은 18세에 과거에 등과하여 2년의 사가독서 기간을 보낸 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승진하여 30세가 되기도 전에 협판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뭇 사람의 부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개화파는 물론 세인들로부터 남다른 기대를 모으고 있는 이유였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