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서로 무게감이 다르고 전도 방법이 다르긴 했으나 개화의 전도사는 그들 3인 외에 또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개화승 이동인이었다. 이동인은 신분이 중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중국이 아닌 일본을 통해 개화사상을 수입했다는 점에서 박규수 등 3인의 전도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중은 도성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을 만큼 천대를 받았기에 중이 개화의 전도사로 활동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양산 통도사에서 출가했다는 사실뿐 이동인의 출신 성분이며 성장 과정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다만 1849년경 부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들과 접촉하며 자라다 승려가 된 점으로 볼 때 좋은 집안 출신이 아님은 분명했다. 부산이 개항되자 일본 교토에 있는 혼간지(本願寺)라는 절에서는 부산 초량에 분원을 차려 놓고 포교 활동을 했다. 이동인은 그 절을 드나들며 가에데 겐테츠(楓玄哲)이라는 일본인 중을 만나 일본말을 배우며 당시 일본에서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던 개화사상에 눈 뜨게 되었다. 그 절에서 개화와 관련된 일본의 신간 서적을 탐독하며 개화사상을 고취시켰다. 1878년 무렵의 일이었다.
개화승이동인이 또하나의 스승으로 등장하다
양산 통도사에 적을 두고 있던 이동인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서울 서대문 밖에 있는 봉원사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 무렵 일본은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초대 공사로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를 파견했는데, 그때 하나부사가 조선어 통역으로 발탁한 사람이 바로 혼간사 중 가에데였다. 당시 일본공사관은 서대문 밖의 천연정(현재의 서대문구 천연동)에 자리잡고 있어 봉원사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봉원사로 적을 옮긴 이동인은 일본공사관을 자주 드나들며 가에데와 만났고, 그러다 보니 공사 하나부사와도 친해질 수 있었다.서울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절 봉원사에서 이동인은 뜻밖에도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등과 만나게 되었다. 유대치는 독실한 불교 신도였고 김옥균과 박영효는 불교에 심취해 있어 절을 자주 찾아다녔다. 이동인은 유대치를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시며 개화사상의 전도에 앞장섰다.유대치와 김옥균을 만나면서 이동인은 개화파로서의 보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1879년 혼간지 부산분원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밀행했다. 얼마간의 자금을 마련해 주며 신간 서적 등 개화와 관련된 일본 물품을 구입해 달라는 김옥균의 부탁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본 혼간지에 10개월 머무르며 날로 변모하고 있는 일본 사회를 두루 살피는 한편, 일본 조야의 인사들과 접촉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일본의 계몽사상가로 유명한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이동인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 중인 김홍집을 만났다. 그는 김홍집에게 일본의 국내 정세는 물론 세계 각국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알려 주었다. 해외 사정에 대해 백지나 다름없는 김홍집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정보였다. 수신사 임무를 마치자 김홍집은 이동인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리고 권력의 실세인 민영익에게 그를 소개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개화 의지가 강했던 민영익은 이동인의 재기를 사랑하여 사랑방에 은밀한 거처를 마련해 주며 귀한 손님으로 대접했다. 뿐만 아니라 고종에게 소개했다. 이동인은 고종에게 일본 정세와 세계 각국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면서 고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게 되었다. 승복 차림으로는 궁중을 드나들 수 없던 시절인지라, 그는 고종을 만나러 갈 때마다 여인이 타는 가마를 타고 창덕궁을 드나들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이동인은 국정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1880년 10월 그는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을 만나라는 밀령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명을 마치고 귀국하자 미국과 체결할 수호통상조약문의 초안을 작성했는데, 이는 뒷날 김윤식이 청나라 이홍장을 만나 조약 내용을 검토할 때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이동인은 이듬해 2월 통리기무아문 참모관에 임명되어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는 일을 은밀히 추진했다.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을 국시로 삼고 있던 조선에서 중에게 벼슬이 내려진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해 3월 이동인은 이원회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총포와 군함 등 신식 무기를 구입하기로 했으나, 출발 직전에 갑자기 사라져 행방이 묘연했다. 바로 그 날 고종의 부름을 받아 창덕궁으로 입궁했는데, 문지기를 따라 들어간 뒤 소식이 끊어졌다. 누군가에 끌려가 암살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 암살 주체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중에게 벼슬을 내린데 대해 분노한 흥선대원군이 잡아다 죽였을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가 하면, 급진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한 데 대한 반감으로 온건개화파인 김홍집이 제거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민비 일파가 제거했다는 설도 있고 청나라 자객설도 있었다.
새 절 봉원사가 개화파의 온상이 되다
이동인이 개화파 학도들에게 정신적인 자양분이 된 것은 봉원사에 머무르던 시절이었다. 서재필 등 개화파 양반 자제들이 김옥균을 따라 봉원사를 처음 방문하던 날 그들을 맞이한 스님이 바로 이동인이었다. 그는 그들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여 일본에서 건너온 신기한 물건들을 보여 주었다. 먼저 서양 각국의 풍물을 담은 사진을 요지경으로 보여 주었다. 그가 틀어 준 사진 속에는 각국의 군병들이 군복을 입고 총칼을 메고 있는 모습도 있고, 런던이나 파리 등 주요 도시의 시가지 풍경도 있었다. 개화파 학도들은 낯선 외국인들의 모습과 신기한 시가지 풍경을 보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어 보여 준 것이 ‘만국사기(萬國史記)’라는 제목의 일본 책이었다. 그 책에는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가 담겨 있었다. 학도들은 눈을 반짝이며 책을 돌려 보았다. 일본어로 쓴 책이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한문 글자가 많아 대강의 뜻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책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김옥균이 물었다.
“저는 부산에 사는데, 그 동안 일본말도 배웠고 일본에도 몇 차례 왕래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인들은 서양인들과 사귀면서 각종 문물과 제도를 배워 서양 여러 나라와 다를 바 없이 날로 발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렇듯 잠만 자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본은 부국강병책을 써서 힘을 기른 뒤 우리 조선을 넘보고 있는데, 우리 조정은 무너져 가는 청국만을 믿고 파벌싸움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위태롭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서양의 신식 문물을 받아들여 내치와 외교를 개혁하지 않으면 참으로 후회막급이 될 것입니다.”
이동인은 굵직한 목소리로 웅변하듯 말했다. 개화파 학도들은 그의 말에 심취되어 감격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님, 이처럼 우리 머리를 깨우쳐 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제가 가진 돈을 드릴 테니 혹시 일본에 갈 기회가 있거든 이런 책과 물건들을 사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김옥균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돈을 죄다 털어 놓았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이 하루 바삐 새로운 제도를 배우고 새로운 문물을 익히는 것만이 우리 조선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 정도의 심부름이야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이동인은 쾌히 승낙했다. 서재필 등 개화파 젊은 학도들은 처음 만난 중 이동인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확 뚫리는 시원함을 느꼈다. 이동인은 대단한 웅변가여서 국제정세 등을 논할 때면 상대방의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두 달 뒤 이동인은 김옥균이 부탁한 책과 상품들을 가져 왔다. 그가 사온 서양 물건은 석유램프나 성냥, 면직물 등으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희귀한 것이었다. 성냥을 난생 처음 보는 개화파 학도들은 성냥갑에 성냥개비를 그어 불이 이는 모습을 보며, 성냥을 만든 사람은 귀신을 부리는 재주를 가졌나 보다며 감탄했다. 이동인이 사온 책은 만국사기 외에 지리, 물리, 화학 등 여러 종류였다. 일행은 그들 책을 돌려가면서 읽었다. 집으로 가져 갈 수 없어 절에서만 읽었다. 그런 책을 가지고 다니다 관원에게 발각되면 사학(邪學)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중벌을 받을 수 있어 조심해야만 했다. 개화파 학도들은 그들 책을 읽기 위해 몇 달 동안 봉원사에 출근했다. 계속 같은 절에 다니다 보면 주위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어 다른 절로 옮기기도 했다. 그렇게 절을 옮겨 다니며 책 읽기를 1년 남짓 하다 보니 그들 책을 모조리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개화파 학도들은 어느덧 세상 물정을 터득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봉원사, 개운사, 화계사 등 서울 주변에 있는 절은 개화사상을 키우는 온상이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나서게 된 첫 번째 동기라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이동인이라는 중이 우리를 인도해 주었고, 우리는 그러한 책을 읽고 그러한 사상을 갖게 된 것이니 새 절(봉원사)은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 할 수 있지요.”
개화파의 막내인 서재필은 뒷날 봉원사와 이동인에 얽힌 추억을 그렇게 회상했다.
개화운동에 기여한 또 하나의 중이 ‘무불(無不)’이라는 희한한 법명을 가진 탁정식이었다. 설악산 백담사 출신의 승려인 탁정식은 개화사상의 전도사 유대치에게 감명을 받아 개화운동에 투신했다.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절 화계사에 머무르며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탁정식은 1880년 5월 김옥균의 도움으로 일본에 밀항하여 도쿄에 있는 절 혼간지에 기숙하며 일본의 발전상을 살피고 한 달 만에 귀국했다. 그 해 11월 고종의 밀명을 받아 개화승 이동인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을 만나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듬해에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만큼 일본어에 능숙했다. 그는 그처럼 개화승 이동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본을 드나들며 일본의 정세와 새로운 문물을 개화파에 전달하며 개화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이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안내자로서의 역할도 했다.이동인이 실종되자 탁정식은 1883년 신사유람단 선발대 13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3월 김옥균의 부탁으로 울릉도 목재를 운반할 배를 구입하기 위해 고베에 갔다 병을 얻어 급사했다. 개화의 꽃봉오리를 채 피우기도 전에 또 하나의 개화 전도사는 그처럼 낯선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와아들은 물과 기름이었다
홍영식은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재동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 홍순목은 사랑방에 누워 있었다. 홍영식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이불을 걷어 젖히고 요 위에 앉았다. 그 동안 병을 앓았던지 홍순목의 볼이 움푹 패어 있었다. 홍영식은 윗목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몸도 편치 않으신데 너무 오랫동안 혼자 계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제 외유도 다 마쳤으니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수척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던지 홍영식은 다짐하듯 말했다.
“네가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는 것은 빈청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상께 귀국 복명을 올린 게 언제인데 인제서야 오는 거냐? 낮엔 빈청에도 들르지 않고….”
홍순목은 뚱한 표정으로 지청구하듯 말했다.
“상께 귀국 복명을 올린 뒤 곧바로 빈청으로 찾아뵈려 했는데, 복명문답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져 곧바로 미국 공사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미국 공사하고 급히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빈청에 들르지 못하고 곧바로 미국 공사관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럼 미국 공사하고 이야기가 끝났으면 곧바로 집으로 왔어야지.”
홍순목은 여전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미국 공사관에서 푸트 공사하고 나눈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미국 방문할 때 신세진 것도 있고 앞으로 할 일도 많아 부탁할 일이 많았거든요. 이번에 미국에 가 보니 미국은 참으로 땅도 넓고 물자도 풍부한, 정말로 개화된 나라였습니다. 앞으로 미국 공사와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을 것 같습니다.”
홍영식은 미국 방문에 대한 소감으로 화제를 돌렸다.
“미국이 아무리 개화된 나라라 할지라도 우리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수만 리나 떨어져 있는 먼 나라 아니냐. 우리 조선은 뭐니뭐니 해도 우리나라와 바로 붙어 있는 청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청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개화의 나라 미국을 자랑하는 아들이 못마땅했던지 홍순목은 그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 말을 듣자, 홍영식은 미국 시찰 소감을 꺼내려던 마음을 접고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 홍순목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홍영식은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곤 했다. 미국은 조선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여서 젖혀놓는다 하더라도, 바로 이웃나라인 일본에 대해서도 아버지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이 명치유신을 단행한 지 15년 남짓밖에 안 되었음에도 매년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데, 아버지를 비롯한 사대파들은 그런 사실을 외면한 채 아직도 일본을 오랑캐 나라로 깔아뭉개는가 하면 망해 가고 있는 청나라를 하늘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일인지하(一人之下)에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높은 벼슬을 한 아버지의 편견이 그럴 정도이니 나머지 사대파들의 답답함은 굳이 들출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처럼 물과 기름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은 만났다 하면 입씨름을 벌였다. 그들을 물과 기름으로 서로 화합하지 못하도록 갈라놓은 것은 시대사상의 차이였다. 요즘 말로 말하면 이념의 차이였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아들 홍영식은 개화파인데, 아버지 홍순묵은 철저한 수구보수파였다. 그처럼 정치 철학이 극과 극으로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홍순목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철학인 쇄국주의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는 흥선대원군 밑에서 벼슬살이를 하며 쇄국정책을 고수하다 임오군란 당시 영의정까지 지낸 수구보수파의 우두머리였다. 1871년 5월 미국 아시아함대의 제독 로저스(Rodgers)가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쳐들어와 개항을 요구했는데, 대원군이 이를 거부하자 서양 국가와의 최초의 전쟁인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신미양요 직후 홍순목은 고종에게 경연을 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일종의 음사지기가 사방으로 그 독을 퍼뜨리고 있지만, 오로지 우리 청구만이 이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예의를 닦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인년 이래로 서양 오랑캐를 단호히 물리치고 있습니다.”
‘음사지기(陰邪之氣)’란 백성들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기운을 말하는 것이니 서양의 종교, 다시 말해, 천주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 홍순목은 다른 나라와의 수교를 거부하고 개항을 반대하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영수로 활약했다. 한 마디로 주자학에 위배되는 서학(西學)과 실학(實學)을 배척하고 유교를 수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수구보수파의 우두머리였기에 그는 1876년 일본과 수교하는 강화도조약에 반대했고, 인천과 부산, 원산 등지에 항구를 개설하는 개항을 반대했고, 1882년 미국과 수교하는 조미수호통상조약에도 반대했다.
이에 비해 그의 아들 홍영식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개화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그는 개화를 당연시하여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왔고, 다시 보빙사 부사로 미국을 다녀왔다. 1882년 4월 신헌과 김홍집이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는 대표단에게 왕명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1883년 1월에는 협판 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서 독판 교섭통상사무아문 민영목과 함께 일본 대표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교섭하여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리고 보빙사 부대표로 미국을 다녀온 뒤에는 보다 철저한 개화파가 되어 우정총국 개설에 앞장섰다.
홍순목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아들마다 어머니가 달랐다. 양주 조씨 소생인 첫째 아들 만식은 뒷날 이조참판까지 지냈는데, 큰아버지 순경이 아들 없이 죽자 양자로 입적하여 큰아버지의 가계를 이었다. 전주 이씨 소생인 둘째 아들 영식은 나이 40세에 얻은 늦둥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심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생모를 사별하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그러한 가정환경 탓인지 홍순목은 둘째 아들 영식에게 가정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며 탄식하곤 했다. 아무튼 영식은 13세 때 양주 조씨와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셋째 아들 정표는 60세가 지나 얻은, 문자 그대로 만득자(晩得子)였다. 6세에 갑신정변을 당했는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숨어 살았기에 불행한 일생을 보내야만 했다.
홍영식은 18세 때인 1872년 7월 7일에 실시하는 과거인 칠석제에 급제했다.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어 이듬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합격했다. 그는 섣달 그믐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요즘 나이로 치면 16세에 합격한 셈이어서 온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홍순목의 눈에 비친 아들 영식은 철부지에 불과했다. 관직을 맡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판단했기에 홍순목은 고종에게 건의하여 2년 동안의 사가독서를 허락받았다. ‘사가독서(賜暇讀書)’란 과거에 급제한 자가 바로 관직에 오르지 않고 독서당에서 공부하는 제도인데, 덕분에 영식은 훌륭한 관원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인격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수구보수파 영수의 아들이 개화파로 변신한 배경에는 개화파의 시조 박규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서울 북촌 중에서도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재동에 자리잡고 있는 홍순목의 집 바로 옆집에는 개화파의 창시자인 박규수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개화파 제자로 끌어들이기로 작정한 사람이 바로 홍영식이었다. 은둔의 나라 조선을 개화하는 방법은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주입하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북촌 양반 자제들을 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그 대상으로 몇몇 청년을 손꼽았던 것인데, 홍영식이 그 중의 하나였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