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김옥균과 박영효는 이미 포섭되어 있었다. 김옥균은 1872년 2월에 실시된 알성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당시의 시험관이 박규수여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맺게 되었다. 과거에 합격한 바로 그날 김옥균은 수석 합격자에게 내려지는 정6품 벼슬인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어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는 반남 박씨로 같은 집안이어서 그의 형 영교와 함께 자연스럽게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었다. 그를 철종의 딸 영혜 옹주와 혼인하도록 중매한 사람이 박규수였으니 가깝게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처럼 박규수의 집에 드나들면서 만난 사람이 김옥균, 서광범 등 북촌에 사는 젊은 선비들이었다.
묘하게도 개화파 사람들은 북촌에 모여 살았다. 김옥균의 집은 홍영식의 집에서 경사진 골목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는 홍현 고갯마루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대가 높아 북악산과 인왕산은 물론 멀리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그의 옆집에는 서재필이 살고 있었는데, 나이가 10여 살 이상 차이가 났음에도 형제처럼 지냈다. 과거에 합격한 서재필이 일본으로 건너가 사관생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김옥균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앞집에는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살고 있었다. 김홍집은 개화파이되 청나라와의 사대외교를 유지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 개화파였다.
서광범은 홍영식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은 오늘날의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던 안동별궁과 담을 맞대고 있었다. 박영효의 집은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교동에 있었는데, 오늘날의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자리한 곳이었다. 왕실 부마였기에 박영효는 대지가 2천 평이나 되는 대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1883년 말 그 집을 5천 원을 받고 일본공사관에 팔았다.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본다면 그들이 개화파가 된 것은 북촌 양반 자제들을 개화시켜야 나라가 제대로 개화된다는 오경석의 전략이 적중한 결과라 하겠다.
박영효는 그의 형 영교의 권유로 나이가 열 살이나 많은 김옥균과 사귀게 되었는데, 글 잘하고 말 잘하는 김옥균을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그를 매료시킨 것은 김옥균의 불교 담론이었다. 김옥균은 불교를 좋아해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는 재미에 김옥균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만큼 김옥균은 불교 이론에도 밝고 승려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박규수가 개화사상 전도사가 되다
개화사상 전도사로서의 중임은 처음에는 박규수가 맡았다. 1866년 평안도 관찰사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해결하고 박규수는 한성판윤, 형조판서, 대제학 등을 거친 뒤 우의정으로 승진하여 당시의 실권자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했다. 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874년 9월 사직하고 후학 양성으로 소일했다. 그때 그의 사랑방을 드나들었던 인재들이 김윤식,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박영효 등 북촌 동네의 양반 자제들이었다. 뒷날 개화파의 중심인물이 된 그들은 1870년대 중반 그렇게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만나게 되었다.
홍영식이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사가독서를 할 때였다. 그동안은 과거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어 실학(實學)이며 양무운동(洋務運動) 등 새로운 시대사상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어느 날 박규수가 옆집에 사는 홍영식을 불러 사랑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벽장에서 지구의(地球儀)를 꺼내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자네 이것이 뭔 줄 아는가?”
“모르겠는데요. 처음 보는 건데요. 이것이 뭐지요?”
홍영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자, 보게. 이것이 지구의라는 거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이렇게 생겼다는 거야. 자네는 아직도 중국이 지구의 중심이라 생각하나?”
박규수는 공처럼 둥글게 생긴 지구의를 돌리며 물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이것처럼 둥글게 생겼다는 말씀입니까?”
홍영식은 난생 처음 보는 지구의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 보게. 이렇게 돌려놓으면 중국이 분명히 지구의 중심이 되네. 그러나 이것을 조금만 더 돌리면 미국이 지구의 중심이 되고, 거기서 조금만 더 돌리면 영국이 지구의 중심이 되는 거야. 아니, 중국에서 조금만 더 돌려놓으면 조선이 지구의 중심이 되기도 하지. 그처럼 중국이 지구의 중심이라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야.”
박규수는 지구의를 돌려 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둥그렇게 생긴 지도 위에 세계 지도를 그려 놓은 지구의는 학구심이 강한 홍영식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산과 들이 있고 강이 있어 평평하게 생긴 것으로만 알고 있는 지구가 공처럼 생겼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고, 또 일본처럼 섬으로 되어 있는 나라가 지구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믿기지 않았으나, 그렇다 해서 전 세계를 여러 나라와 바다로 세밀하게 구분해 놓은 지구의를 엉터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의 모습을 각 나라와 바다로 구분해 하나의 둥근 공으로 만들어 놓은 지구의가 신기하기만 했다. 이 넓은 세상을 찾아다니며 누가 어떤 방법으로 그처럼 세밀한 지도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에 부딪히자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그 날 이후 홍영식은 박규수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며 존경하게 되었다.
그 무렵 박규수는 벼슬을 버리고 재동 집에 후학들을 모아 놓고 개화사상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는 조부 박지원이 저술한 ‘연암집’을 강의하고 그때 마침 청나라에서 일기 시작한 양무운동을 소개하며 개화사상을 전파하는 일에 주력했다. 나라의 장래가 연부역강한 선비들의 머리에 달려 있다고 판단했기에 그들을 일깨우는 데 여생을 바치기로 했던 것이다. 젊은 선비 중의 하나인 홍영식도 그렇게 개화사상의 창시자나 다를 바 없는 박규수의 교화를 받으며 개화파의 중심인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처럼 수구사대파의 영수격인 아버지와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아들이 한 집에 살고 있었으니 그 집안이 평안할 리 없었다. 홍영식은 가급적 아버지와의 대화를 피하려 했고, 홍순목은 아들이 장차 집안을 망칠 위인이 될 것이라며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그들 사이에 장남 만식이 끼여 부자간을 화해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속을 썩여야만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두 파벌 간의 이념의 차이는 나이와 상관관계가 있었다. 수구사대파는 대부분 5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노년층으로 권력의 핵심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대국인 중국을 우러러 받들고 공자의 도를 받들며 과거 지향적인 정치를 고집했다. 대원군을 비롯한 영의정 홍순목, 좌의정 김병국, 우의정 송근수, 보국대부 민태호와 민겸호, 참판 이재완 등 권력의 상층부는 모두 50세를 넘긴 노년 세대였다.
이에 비해 개화파는 젊었다. 무관 중 유일하게 개화파로 꼽힌 윤웅렬이 40대였을 뿐 김홍집, 김옥균, 어윤중, 홍영식, 민영익, 신기선, 서광범 등은 20대 아니면 30대였다. 그 중에서도 홍영식, 민영익, 어윤중이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기대주로 손꼽혔다. 그들 개화파 몇몇을 제외하면 나머지 관원들은 대부분 수구사대파에 속했다.
고종은 한때 홍영식의 글방 동무였다
1884년 갑신년이 열렸다. 대원군의 쇄국정치가 풀리고 외세가 침범하기 시작한 이래 조용하지 않은 해가 없었으나 그 해는 유난히도 다사다난했다. 갑신년 새해가 열리자 미국 사행에서 돌아온 홍영식은 고종을 알현하고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할 기관으로 우체국을 설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미국 시찰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개화의 첫 작품으로 어떤 제도를 도입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 우편제도의 도입이었다.
“전하, 지난날의 통신이 역참제(驛站制)였다면 오늘날의 통신은 우편과 전신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조선이 미국, 영국 등 서양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인천, 부산 등 항구를 개항한 이상 그들 나라와 우편을 개설함은 급선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실시하고 있는 역참제를 폐지하고 고을마다 우체국을 세워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시급한 일인 줄로 아옵니다.”
개화의 첫 작품으로 국내는 물론 일본이나 미국 같은 외국에도 힘들이지 않고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우편제도부터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홍영식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 복명 때는 학교를 세우는 것이 시급한 일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종은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묻는 고종의 목소리가 따뜻했기에 홍영식은 우편제도의 실시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홍영식은 어린 시절부터 고종과 남다른 사이였다. 고종이 등극하기 전 그는 흥선군의 아들 이명복과 그의 집에서 같이 공부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홍순목이 훈장 노릇을 했다. 고종이 세 살 위인 데다 왕손이기에 그는 ‘명복이 형’이라 부르며 깍듯이 형으로 모셨다. 고종의 어린 시절의 이름이 ‘명복’이었다.
고종이 홍순목에게 글을 배우게 된 배경에는 아버지 흥선군의 남다른 집념이 도사리고 있었다. 흥선군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상갓집 개 노릇을 하면서 파락호 생활을 한 것은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연극이었다. 안동 김씨에게 밉보이면 자칫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에 일부러 미치광이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만큼은 왕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이 씨 왕실의 자손이 끊기고 있는 상황이어서 결코 허황한 꿈이 아니었다.
흥선군은 서자인 셋째 재선을 포함하여 아들 셋을 두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귀여워한 아들이 둘째 재황이었다. 그는 재황에게 복을 많이 받으라는 뜻에서 ‘명복(命福)’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천한 이름을 붙여 주면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개똥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아들만큼은 공부를 시키고 싶었다. 흥선군은 안동 김씨들을 비롯한 세도가를 찾아다니며 명복을 그들 자제와 함께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파락호로 소문난 흥선군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서슴지 않고 그의 청을 받아들인 벼슬아치가 있었으니, 뒷날 영의정까지 오른 홍순목이었다. 홍순목은 명복을 그의 집으로 불러 아들 영식과 같이 앉혀 놓고 글을 가르쳤다. 홍영식은 그렇게 고종과 글방 동무로서 형제처럼 지낸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함이 가장 시급한 과제임은 분명하오나, 그 일은 신이 아니어도 될 것 같습니다. 신식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각급 학교를 세우는 문제는 이미 검토한 바 있고, 외국어를 가르치는 통변학교(通辯學校)는 세워져 있습니다. 해서 신은 학교 다음 시급한 일로 서신을 보내고 서적 등을 보낼 수 있는 우체국부터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홍영식은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체국이 아니어도 전기나 전차, 전보 같은 것도 시급한 일이 아닌가?”
고종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
“옳은 말씀이옵니다. 전기나 전차, 전보 같은 것도 하나같이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이옵니다. 그러나 전기나 전차, 전보 같은 것을 실시하려면 먼저 필요한 기계를 들여와야 합니다. 기계를 들여오려면 돈도 많이 들지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오나 우편제도를 실시하려면 우체국 건물만 있으면 됩니다. 건물도 새로 지을 필요가 없고 기존 건물을 사용해도 됩니다. 우편제도를 실시하려면 우체통과 우표를 새로 만들어야 하지만, 우체통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는 역전제(驛傳制)를 폐지하고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함이 타당한 줄로 아옵니다.”
“응, 그렇겠구먼.”
고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듯한 자세를 보였다.
“미국 행정부 관제도 6조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체신부(遞信部)가 따로 있어 우편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우편을 그만큼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6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다고 했던가?'
“미국 행정부는 우리나라처럼 6조로 되어 있는데, 관장 업무는 조금씩 다릅니다. 외부(外部)는 다른 나라와의 외교 업무를 관장하고, 내부(內部)는 미국 국내 업무를 관장하고, 해륙부(海陸部)는 해군과 육군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고, 호부(戶部)는 조세 업무를 관장하고, 체신부는 우편 업무를 관장하고, 형부(刑部)는 사법 관련 업무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체신부가 있어 우편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점이 특별히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어. 그런데 각 고을마다 우체국을 세우려면 그 비용도 수월찮을 텐데,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각 고을마다 우체국을 설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한성과 제물포 두 군데만 설치하여 일단 운영하고 나서 부산, 평양 등지로 해마다 몇 군데씩 늘려나가면 됩니다.”
“응, 그렇겠구나. 그렇게 늘려나가면 되겠어.”
옳은 말이라는 듯 고종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처럼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고종은 가타부타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인자함이 고종의 장점이라면 그의 단점은 우유부단함이었다. 신하가 옳은 건의를 하면 옳다고 말할 뿐 실천에 옮길 줄 몰랐다. 그처럼 맺고 끊는 것이 없는 임금을 움직여 일을 성사시키려면 실천에 옮길 때까지 귀찮도록 몇 번이고 건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종의 성격을 잘 알기에 홍영식은 역전제를 폐지하고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건의했다. 일본과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와 왕래가 빈번해지고 있어 서신과 물품의 왕래는 갈수록 늘어날 것이어서 신식 우편제도의 도입은 불가피하다고 되풀이하여 주장했다. 미국 정부가 보빙 사절단에게 “귀국하면 미국의 우편제도를 본받아 조선에서도 우편제도를 실시할 것을 권고하였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자 그해 4월 고종이 우정총국(郵征總局)을 개설하라는 뜻밖의 전교를 내렸다.
“각국과 더불어 통상한 이래 안팎의 관계와 교섭이 날로 늘어나고, 따라서 관청이나 상인들이 주고받는 통신이 많아지게 되었다. 진실로 그 통신을 적절하게 체전(遞傳) 하지 않으면 소식과 기맥을 잇대어서 멀고 가까움이 일체로 될 수가 없다. 이에 명하노니, 우정총국을 설립하여 연해의 각 항구에서 왕래하는 서신을 관장하고, 내지의 우편도 마땅히 점차 확장하여 공사(公私)의 이익을 거두도록 하라.”
이튿날 고종은 홍영식을 우정총국 총판에 임명하고 통리군국사무아문 협판을 겸임케 함으로써 우정총국을 나라 살림을 맡아보는 기관인 통리국군사무아문에 소속시켰다. 이에 앞서 홍영식은 함경북도 병마 수군절도사(북병사) 겸 함경도안무사로 임명되었으나 그날로 사임했다. 그리고 곧바로 내직으로 돌아와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고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일본인 전문가를 고문으로 채용하다
개화의 첫 번째 산물인 우정총국을 설치하라는 전교와 함께 총판 자리에 임명되자 홍영식은 곧바로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한성순보에 고종의 전교를 실어 우정총국을 설치하게 된 사실을 널리 알렸다. 또한, 서울에 주재하는 일본공사, 미국공사, 영국영사에게 우정총국의 설치 사실을 통보했다. 외무독판 김병시는 일본공사와 영국영사에게 일본 및 홍콩 우정청과 협정을 맺고 그들의 중개로 외국과의 우편물 교환을 개시하며, 만국우편연합(UPU)에도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우정총국 총판에 임명한 지 며칠 안 되어 고종은 홍영식에게 통리군국사무아문 소속의 이용사(利用司)를 관장하는 협판을 겸하도록 명했다. 덕분에 홍영식은 병조참판, 우정총국 총판, 통리군국사무아문 협판으로서 이용사 업무까지 겸하여 관장하게 되었다. 홍영식에 대한 고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실시되고 있는 신식 우편제도는 우표의 인쇄 등 기술적인 요소가 많은 데다 국제성을 띠고 있어 외국 전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초창기의 우편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우편물을 주고받는 국제우편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외국 전문가의 자문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인 전문가 중에서 홍영식이 맨 먼저 고른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우정총국 총판으로 임명된 지 12일이 지나 홍영식은 일본공사관을 방문하고 대리공사 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를 만나 일본인 우편관리 1명을 3년 기한으로 고빙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고래로 우역제도(郵驛制度)를 실시해 왔는데, 이 제도는 오늘날의 시세에는 맞지 않다. 이 제도를 개혁하여 현재 일본에서 행하고 있는 신식 우편제도를 도입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맞도록 시행하고자 한다. 그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서는 구래의 풍습을 살려 가면서 점진적으로 불편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구미인보다 일본인의 자문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본인 가운데 신식 우편제도의 실시와 개선에 참여한 경험자로서 영어에 능통한 사람을 추천해 주기 바란다.”
그처럼 홍영식은 서구식인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하되, 구체적인 추진 방법으로 우리와 풍습이 다른 구미식보다 우리와 풍습이 비슷한 일본식을 채택하기로 했던 것이다.
홍영식의 요청을 받자 시마무라는 그 사실을 본국 외무성에 보고하며, 우편사업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어서 청국의 간섭도 없을 터인즉 시급히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뒤이어 홍영식은 초청 대상자 부부의 여비 등으로 일화로 550원에 해당하는 조선 돈을 시마무라에게 맡기며 조속히 주선해 달라고 재촉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초청 대상자가 1명 늘어났다. 그리하여 1884년 7월 우정총판 홍영식은 일본 5등 역체관(五等驛遞官) 오비 스케아키(小尾輔明), 전 외무성 직원 미야자키 겐세이(宮崎言成)와 고용계약을 체결하고 그들을 우정총국 고문으로 채용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