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홍영식이 서양의 신식 통신제도인 우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조선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만 살았던 홍영식은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의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었다.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발달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있었다. 옛날의 돛단배는 기선으로 바뀌었고, 옛날의 마차는 기차로 바뀌었고, 옛날의 역전제(驛傳制)는 우편과 전보로 바뀌었다. 불과 몇 십 년밖에 안 된 사이에 세상은 놀랍도록 달라지고 있었다.
그 같은 상전벽해의 변화에 대응하는 조선, 청, 일본 등 동양 3국의 전략은 판이하게 달랐다. 가장 빠르게 적응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서양의 선진화된 과학기술의 위력을 실감한 일본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빠르게 개화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수수방관하는 자세를 취했다.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자기도취에서 헤어나지 못한 탓인지 서양의 새로운 문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처럼 방관하는 동안 대포와 화약으로 중무장한 서양 제국이 쳐들어와 시비를 걸자 맥을 못 추고 무너졌다. 그때에야 비로소 서양을 배우고 따르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가장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나라는 조선이었다. 3국 중에서도 가장 약한 나라인 조선은 처음부터 쇄국주의를 내세워 외세를 철저히 배척하는 자세를 취했다. 못 들어오게 하고 안 만남으로써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전략을 취했다. 그리하여 통상을 요구하러 찾아온 외국 상선을 불태우며 쫓아냈다. 그러다 중무장한 외국 군대가 쳐들어와 총포로 위협하자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처럼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될 무렵 조선 내부에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1873년 10여 년에 걸친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아들 고종이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정책 방향이 개화로 선회했다.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나자, 그 해 4월 고종은 예조참의 김기수를 수신사로 삼아 일본에 파견했다. 은둔의 나라 조선을 개화하겠다는 첫 번째 신호였다.
70여 명이나 되는 수신사 일행은 2개월간 일본에 머물며 정부 각 기관과 전신, 철도 등 각종 개화의 시설을 두루 구경했다. 수신사 김기수는 시찰 결과를 고종에게 보고하는 한편, ‘일동기유(日東記游)’, ‘수신사일기’ 등을 집필하여 일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함은 물론 대일관계, 나아가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조야에 지대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다
1880년 6월 조선 정부는 2차 수신사로 예조참의 김홍집을 일본에 파견했다. 수신사를 보낸 목적은 인천의 개항, 미곡 금수의 해제 등 일본과의 제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는데, 일본이 협의를 회피하는 바람에 사행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대신 김홍집은 그곳에서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과 참찬관 황준헌(黃遵憲)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 중국인은 김홍집에게 세계 정세와 서양 문물을 소개하며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일본처럼 개화를 단행하여 부국강병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황준헌이 집필한 ‘조선책략’을 선사했다. 그들은 중국인 치고는 드물게도 개화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열강에 둘러싸여 있는 약소국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일종의 정책연구서였다. 저자 황준헌은 청의 실권자인 북양대신 이홍장의 측근이었기에 그의 개인적인 의견이라기보다 청의 입장에서 본, 조선이 취해야 할 정책 방안을 제시한 글이라 할 수 있었다.
사행을 마치고 귀국하자 김홍집은 고종을 알현하고 황준헌에게 받은 책 ‘조선책략’을 올렸다. 고종은 책을 받아 표지부터 들여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조선 책략이라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 조선이 무슨 책략을 꾸미고 있단 말인가?”
“우리 조선이 무슨 책략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 아니옵고, 요즘처럼 어려운 국제정세 하에서 우리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책은 우리 조선이 중국과 일본, 아라사 등 열강의 틈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들 열강 중에서도 특히 남하정책을 펼치고 있는 아라사를 가장 위험한 나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남하정책을 펼치고 있는 아라사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중국, 일본,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입니다.”
김홍집은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한 자세로 아뢰었다. ‘아라사(俄羅斯)’는 ‘러시아’의 한자식 표기였다.
“어찌하여 아라사가 가장 위험한 나라라는 말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서 제일 큰 나라가 아라사라 하옵니다. 아라사 땅은 3개 대륙에 걸쳐 있는데, 육군 정예병이 100만 명이고 해군 거함이 200여 척이나 된다 하옵니다. 다만 나라가 북쪽에 치우쳐 있어 기후가 차고 땅이 척박한데, 그래서 따뜻한 지역을 찾아 계속 영토를 넓히고 있다 하옵니다. 아라사가 이리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나선 지 300년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구라파를 침공했고 다음에는 중앙아세아를 침공했는데, 오늘날에는 동쪽으로 손을 뻗쳐 우리 조선까지 오려 한다 하옵니다. 우리 조선으로서는 머지않아 아라사의 침략을 막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 될 것이라 하옵니다.”
“아라사가 그처럼 위험한 나라라면 어떻게 막아야 한단 말인가?”
고종이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아라사를 막기 위해서는 친중국(親中國) 하고 결일본(結日本) 하고 연미국(聯美國) 함으로써 자강(自强)을 도모하는 길밖에 없다 하옵니다.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 일본과 연결하고 미국과 연합하여 힘을 기르면 아라사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 하옵니다.”
“어찌하여 중국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인가?”
“동서북으로 아라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나라는 오로지 중국입니다. 중국의 땅은 넓고 물산은 많으며 아세아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라사를 제압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중국 외에 조선과 가장 밀접한 나라는 일본입니다. 일본과는 옛날부터 사신을 보내 왕래하며 우방으로 지냈습니다. 만약 일본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땅을 잃어버리면 조선 팔도는 스스로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요, 또 조선에 어떤 큰 변고가 생기면 일본 또한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처럼 조선과 일본은 실로 수레와 수레살이 서로 의지하는 형세라 하겠습니다.”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할 까닭은 또 무엇인가?”
“미국은 본디 영국에 속했는데 구라파인들의 가혹한 정치를 받기를 원치 않아 100년 전에 ‘화성돈’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하나의 나라로 독립하였다 하옵니다. 이후 그들은 남의 토지를 탐하지 아니하고 남의 인민을 탐하지 아니하며 남의 나라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옵니다. 무릇 백성이 주인인 나라로 공화(共和)로 정치를 하기 때문에 남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아니하고 항상 약소한 나라를 돕는다 하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성돈(華盛頓)’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 일본, 미국과 손을 잡으면 아라사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하옵니다. 중국과 일본은 예부터 가깝게 지내온 데다 미국은 남의 나라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나라여서 그들 세 나라와 손을 잡으면 아라사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 하옵니다.”
“음, 미국이 남의 땅을 탐하지 않고 약소한 나라를 돕는 나라라고?”
“네, 그렇다 하옵니다. 미국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한 일이 없다 하옵니다.”
“음, 그렇구나. 그런 내용이 담긴 책이라면 짐도 읽어야겠지만, 조정 대신 모두에게 읽도록 해야겠구나.”
고종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빈 말이 아니었다. 그 책을 읽고 난 고종은 중신들에게 돌려가며 읽도록 하는 한편, 그 책의 내용을 베껴 관원과 유생들에게 널리 배포했다. 열강의 틈새에 끼여 있는 조선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 글이어서 널리 읽히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튼 ‘조선책략’은 고종은 물론 조야에 지대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은 그 책이 제시한 방향에 따르기로 하고 개방정책을 추진하여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한편, 청나라에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수교할 뜻이 있음을 알렸다. 이듬해에는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여 개화의 현장을 두루 살피는 한편, 1882년에는 구미 여러 나라 중 미국과 최초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처럼 그 책은 고종을 위시한 조선 정부가 앞장서 개화정책을 추구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일본 우편업무에 관한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다
1881년 4월 고종은 세 번째 시찰단으로 젊은 관원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파견했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개화의 길로 치닫고 있는 일본의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때 조사(朝士)라는 이름의 전문위원으로 선정된 사람이 홍영식을 비롯한 조준영, 박정양, 어윤중, 엄세영 등 장래가 촉망되는 실력있는 관원 12명이었다.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일본 정부 내의 각 기관이 맡고 있는 업무를 조사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각자 업무를 분담하여 담당 분야에 대해 책임지고 조사하여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그들로 하여금 보다 심도 있는 조사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수행원 2명, 통역 1명, 하인 1명씩을 붙여 주었다. 그러다 보니 시찰단원이 60여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당시 수행원으로 선발된 사람 중에는 이상재,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인재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 시찰단을 파견하면서 그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 시찰단의 핵심 멤버인 조사에게 암행어사라는 직함을 주어 개별적으로 출발하게 한 뒤 동래에 모이도록 했다. 그리하여 부산에서 일본 배를 나누어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개화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선발한, 장래가 촉망되는 관원들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비밀리에 파견한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일본에 대한 성난 민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의 내용이 알려지자 전국의 여론이 물 끓듯 들끓었다. 백성들은 이제 조선이 오랑캐 나라가 되었다며 울분을 토로하곤 했다.
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연이어 일어났다. 일본과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조약을 파기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는 자도 있었다. 그 중에서 누구보다 강경한 주장을 내세운 사람은 유생 최익현이었다. 그는 도끼를 메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문을 올리며, 금수와 같은 일본인과 함께 살 수 없다며 화친을 논함은 나라를 파는 행위라 매도했다. 박규수가 살던 동네인 서울 북촌 사람들은 강화도 조약의 체결을 주도한 박규수를 부관참시 해야 한다는 극언을 하기도 했다.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이 그처럼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기에 고종은 대규모 사절단을 공개적으로 파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해서 맹렬한 기세로 개화의 길로 치닫고 있는 일본을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일본이 할 수 있다면 조선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고종은 은밀히 사절단을 보내 그 비법을 캐내려 했던 것이다. 사절단은 각자 맡기로 한 전문 분야가 있어 그 분야를 집중적으로 시찰했다. 박정양은 일본 내무성과 농상무성을 맡고, 어윤중은 대장성, 강문형은 공부성, 홍영식은 육군성을 맡았다. 홍영식은 일본 육군성과 군사시설을 시찰하고, 일본 군대에 대한 보고서인 일본육군총제(日本陸軍總制),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 등을 작성했다.
그때 조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따라간 사람이 뒷날 사회운동가로 이름을 떨친 월남 이상재였다. 박정양의 담당 기관은 일본 내무성과 농상무성이었는데, 이상재는 농상무성이 관장하고 있는 우편사업에 대해 조사하여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중에는 ‘역체국 각 규칙(驛遞局各規則)’이라는 제목 하에 역체국의 직제, 사무장정, 우편규칙, 만국우편연합조약 등을 번역했는데, 그들 법령은 뒷날 우정총국을 개국하는데 유용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
한편 공부성 시찰이 임무인 조사 강문형의 수행원 강진형도 일본 우편제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역체국을 설치하여 관리와 우졸(郵卒)을 두어 공사(公私)의 통보(通報)를 편리하게 한다. 그 법은 각 네거리마다 우체통을 세워 두었는데, 그것은 구리로 주조한 것도 있고 돌로 만든 것도 있다. 서신을 부치고자 하는 자는 원근을 가릴 것 없이, 오직 그가 보내는 지명과 성명을 봉투 겉에 쓰고 전표(錢票)를 붙인 다음 이를 우체통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우졸들이 때때로 와서 이를 모아 각기 지방에 따라 다음 우체통에 분치하고, 다음 우체통 소재의 우졸이 또한 찾아 다음으로 전한다. 이렇게 준칙을 세워 하루 동안에 100리에 달하고 외국의 요원한 지역에까지 송달되지 않는 곳이 없다. 만일 바다를 건너게 되면, 이를 실은 선주가 또한 가져가 신실하게 전한다.
생각하건대 이 법은 정부에서 먼저 고저액(高低額)의 각종 전표를 만들고, 서신을 부치는 사람은 그 서신의 경중에 맞추어 그에 합당한 전표를 사서 붙인다. 예컨대, 서신의 무게가 1돈금(1전)이면 10전표, 2돈금이면 20전표를 붙이고, 무게가 3돈금 이상이면 그 값을 배로 한다. 이리하여 일본 역체국에서 파는 우표 대금이 지세(地稅) 수입과 비등하다고 한다. 이는 한 가지 일을 통지하기 위해 한 사람을 일부러 수고시키는 괴로움을 덜고 통신할 수 있으니 과연 좋은 법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한 조각 종이로써 거만금을 거둬들여도 사람들이 원망하지 않는다.”
이 글은 신식 우편제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글 속의 ‘전표(錢票)’란 ’우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일본 역체국을 찾아가 우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다
우리나라 우편 창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리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우편 창업자 홍영식이 역적으로 몰리자 그의 관한 일체의 기록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영식이 어떻게 해서 우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우정총국을 개설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신사유람단의 행적에 얽힌 일화를 담고 있는 글로 일본인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가 기술한 ‘우편창업담’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부분적이나마 짐작케 한다.
일본 우편사업의 총본산인 농상무성 역체국 총관을 지낸 바 있는 마에지마가 1936년에 기술한 회고담에 의하면, 신사유람단으로 방일할 당시 홍영식이 역체국(驛遞局)을 찾아가 우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한다. 당시 홍영식이 시찰하기로 한 기관은 육군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상무성 산하인 역체국을 찾아가 우편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는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우역(郵驛)에 관한 업무를 병조에서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우편에 대한 홍영식의 개인적인 관심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일본에 출장 중인 조선인 관원이 불쑥 찾아와 우편에 대해 이것저것 묻자, 마에지마는 드디어 조선에서도 우편제도를 도입하려는 것 아니냐는 기대에서 친절히 안내했다. 그는 우편 관련 서류를 꺼내 놓고 우편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하며, 조선에서도 하루 빨리 우편이 개설되기 바란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중국에서 아직까지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하지 않고 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오. 귀국은 중국을 스승으로 섬겨 만사를 중국의 예에 따르기 때문에 우편도 언제 개설될지 알 수 없다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오늘 귀공이 찾아와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것은 귀국에서도 곧 우편을 개설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싶어 진실로 경하하는 바이오.”
마에지마는 처음 만난 홍영식에게 자신의 느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처럼 좋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홍영식은 흥분된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정색을 하며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일본이 조선에 송달하는 우편물에 부과하는 우편세를 내국세와 동액으로 한 까닭이 무엇이오?”
홍영식이 지칭한 우편세란 우편요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왜 일본에서 조선으로 보내는 우편물에 국제 우편요금을 받지 않고 국내 우편요금을 받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다 같은 일본 한 나라의 사업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지요. 앞으로 조선에서 우편을 개설하여 일본과 교환조약을 맺게 되면 각각 그 나라에서 내국세를 받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양국의 요금액에 그 금액을 합산하여 새로이 세액을 정하게 될 것이오.”
예상 밖의 질문에 당황한 마에지마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아, 그렇습니까?”
홍영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뒷날 우리나라 우편의 아버지라 일컫게 된 홍영식과 일본 우편의 창시자로서 역시 일본 우편의 아버지라 불렸던 마에지마 히소카는 그렇게 첫 대면을 했다. 마에지마와 대화한 내용으로 볼 때, 홍영식은 일본 역체국을 찾아가기 전에 우편사업에 대해 상당히 연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이 조선으로 보내는 우편물에 대한 요금을 일본 국내 우편요금과 같게 책정한 점을 따진 것은 국제 우편요금이 국내 우편요금보다 비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일본은 이미 1871년 1월 도쿄와 오사카 간에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했고, 그 해 7월 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1876년 부산이 개항되자 일본은 그 해 11월 부산영사관 내에 우편국을 설치하고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본국 간의 우편물 교환을 취급했다. 물론 조선에서 우편제도를 실시하기 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이 조선으로 보내는 우편물에 부과하는 우편요금을 국내 우편요금과 같은 금액으로 받고 있으며, 그것이 국제 관례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홍영식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에 합류했던 이상재가 일본 우편제도에 관한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했고, 뒷날 우정총국을 개국하게 되자 홍영식이 그를 우정총국 인천분국장에 앉히며 장차 우정총국에 관한 일을 그에게 맡기겠다는 뜻을 내비쳤다는 점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이상재를 통해 알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