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개화의 현장 일본을 시찰하고 그 나라 선각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개화파 사람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지구상에는 중국보다 더 크고 발달한 나라도 있으며, 강한 나라를 만드는 비결은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달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개화가 반드시 필요함도 깨달았다. 보다 중요한 성과는 개화파가 나아갈 진로를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개화파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나라를 개화하는 방안을 놓고 의견을 나누었을 뿐 뚜렷한 진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서양 각국의 움직임을 꿰뚫어보고 있는 일본 선각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개화파가 나아가야 할 진로를 설정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개화의 길로 치닫고 있는 일본을 본받고 조선의 개화에 호의적인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조국의 개화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일본 세력을 이용한 개화운동의 전개라는 큰 원칙은 그때 그곳에서 형성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뜻을 같이한 개화파 동지는 김옥균, 박영효, 민영익, 서광범 등 4인이었다. 또 하나의 중심인물인 홍영식은 참의교섭통상사무, 이조참의 등으로 국정 수행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다. 민씨 일파의 기대주인 민영익은 뒷날 사대파로 변신했으나, 그때까지는 개화파와 뜻을 같이하며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뒷날 ‘개화당’ 내지 ‘독립당’이라 불렸던 개화파는 사실상 그때 그곳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사절단으로서의 임무를 마치자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은 귀국했으나 김옥균은 홀로 남았다. 일본에 좀 더 머무르며 일본의 실상과 천하의 움직임을 두루 살피라는 고종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메이지(明治)유신을 조선 개혁의 모델로 삼으려 한다 해서 한때 기피인물로 찍히기도 했으나, 개화파의 우두머리인 김옥균에 대한 고종의 신임은 그만큼 두터웠다. 아니, 개화에 대한 고종의 열망이 그만큼 강렬했다 하겠다. 그때 일본 정부는 주세(酒稅)와 연초세(煙草稅)를 올리며 육군과 해군의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군대를 늘리려면 국가 재정을 그만큼 더 확충해야 했던 것이다. 조선에 비해 군사력이 월등한 일본이 그처럼 새로운 세금을 받으며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보며, 김옥균은 한층 더 개화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하루는 김옥균이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노우에가 묘한 말을 했다.
“지금 일본이 군세를 확장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근본을 튼튼히 하자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귀국의 독립을 돕자는 뜻도 내포하고 있소.”
생각하면 할수록 아리송한 말이었다. 화제가 조선의 재정 문제로 옮겨지자,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에서 발행한 국채위임장이 있다면 차관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 말을 듣자 김옥균은 서둘러 귀국하여 고종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고, 고종이 국채위임장을 작성해 주었음에도 묄렌도르프의 훼방으로 휴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암흑의 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의 세계를 다녀오다
김옥균이 곤경에 빠지면서 다른 동지들도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개화파의 또 하나의 핵심인물인 박영효는 벼슬자리를 잃고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었다. 박영효가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한성판윤 자리에 오른 것은 1882년 12월이었다. 수도 행정의 책임자인 한성판윤이 되어 서울의 도로를 정비하고 경찰 제도를 실시하고 신식 교육을 실시하는 등 개혁정치를 펴려 하자 민비의 사사로운 청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과 4개월 만에 광주유수로 좌천되었다. 마침 광주유수라는 자리가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고 있어 군사를 거느릴 수 있었다. 정변을 모색하고 있는 개화파로서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 판단한 박영효는 500여 명의 군사를 모아 일본식 훈련을 시켰으나 그 자리도 오래 보전할 수 없었다. 또다시 민비의 말 한마디에 그 자리에서마저 쫓겨났다. 광주유수가 된 지 불과 9개월 만이었다. 친청사대파가 개화파에게 군권을 쥐게 해서는 안 된다고 꼬드기자 절대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던 민비가 인사의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박영효가 애써 양성한 군대는 전영사와 후영사로 이송되어 친청사대파가 거느리게 되었다. 죽 쒀서 개 좋은 일을 한 셈이었다. 모처럼 시도했던 박영효의 개혁정치는 그처럼 민씨 일당의 고의적인 방해로 좌절되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좌절감을 억제하기 어려웠기에 박영효는 잠시 고국을 떠나 미국 유람을 떠나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가 아랫사람을 보내 말렸다.
“동양의 대세가 자못 다급한 이때 귀국을 혁신함이 목전의 과제로 다가오고 있거늘 어찌 한가로이 외유를 떠나려 하십니까. 일본 역시 임오년의 실패를 분개하게 여겨 장차 청국 군대를 반도에서 몰아내고 귀국 지사들을 도와 개혁의 열매를 얻게 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잠시 외유를 중지함이 어떠하오?”
그 말을 전해 듣자, 한편 놀랍고 한편 기뻤다. 박영효는 미국 유람을 중지하고 동지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김옥균은 아직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았고, 서광범은 보빙사절단으로 미국 시찰을 마치고 민영익과 함께 유럽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박영효는 자신의 집을 아지트로 삼아 다른 동지들을 끌어모으며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한편 개화파의 우두머리인 김옥균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 무엇보다 큰 손실이었다. 이제 귀국하면 민씨 일파를 비롯한 친청사대파로부터 임금을 기만했다며 맹공을 받을 것이 뻔했으나, 개화파 수장으로서 그 정도의 문제는 너끈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화파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인 일본이 말도 안 되는 오해로 자신을 불신하게 되었고, 그 결과 대사를 그르치게 되었음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기분파인 주한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변덕스러움에 기인한 것으로, 그로 인한 일본 내에서의 자신의 이미지 추락은 쉽게 회복하기 어려웠다. 그 이면에는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인들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묄렌도르프의 이간질이 주효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처럼 실의에 빠져 있는 김옥균에게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머지않아 귀국하게 될 민영익이었다. 미국에서 홍영식과 민영익이 개화냐 보수냐를 놓고 대판 싸웠다는 이야기는 이미 홍영식을 통해 전해 들었으나, 홍영식의 말대로 민영익이 개화파와 완전히 등을 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개화파에 대해 호의적인 자세를 보였고, 제대로 개화된 미국을 두루 시찰한 데다 영국과 불란서 등 구라파 여러 나라를 시찰한 사람의 입장에서 개화에 역행하는 자세를 취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그의 생각은 일본에서 서재필과 나눈 대화에서도 잘 나타났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민영익이 곧 돌아올 것이므로 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어요. 그는 왕후의 신임이 두터운 데다 1년 동안 미국을 비롯하여 구라파 각국을 여행하면서 개화의 견문을 넓혔을 것이고, 그 필요성도 절감했을 것이라고. 그를 통해 중전에게 사정을 여쭈어 모든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김옥균의 완전한 착각이었다. 1884년 6월 초에 귀국한 민영익은 미국으로 출국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 미국에서 돌아오자 미국공사 푸트를 만나 제일성으로 내뱉은 말이 재미있었다.
“나는 암흑의 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의 세계에 갔다 다시 암흑의 세계로 돌아왔다. 지금은 아직 내가 나갈 길이 똑똑히 보이지 않는다. 머지않아 그 길이 보이길 바란다.”
그렇게 외쳤던 민영익이 택한 세상은 광명의 세계가 아닌 암흑의 세계였다.
미국 시찰을 마친 전권대신 민영익은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와 함께 미국 해군이 내준 함정 트렌튼(Trenton)호를 타고 6개월 동안 세계 일주를 한 끝에 1884년 6월 2일 서울에 도착했다. 미국 해군은 대위 메이슨(Theodore B. Mason)과 소위 포크(George C. Foulk)를 접반사로 임명하여 그들과 동행시켰다. 그들은 뉴욕에서 대서양을 건너 40여 일 만에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배에서 내려 파리와 런던으로 이동하며 관광한 뒤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왔다. 런던에 있는 대영제국박물관을 구경하는 동안 아편전쟁 당시 영국군이 북경에서 약탈해 간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다시 트렌튼호를 타고 로마를 구경한 뒤 수에즈운하로 이동하여 이집트를 관광했다. 이어 예멘 수도 아덴과 인도 봄베이, 스리랑카, 싱가포르, 홍콩, 일본 나가사키 등지를 거쳐 인천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그 여행에 동행한 민영익, 서광범, 변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조선인이 되었다. 그처럼 미국 해군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조선인 최초의 세계 일주치고는 제 코스를 밟아 세계적으로 이름난 명소를 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 여행 도중 전권대신 민영익의 사람 됨됨이를 알려 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다. 1883년 12월 1일 뉴욕을 출발하여 대서양을 건너는 항해는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뉴욕을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트렌튼호는 심한 폭풍우를 만났다. 잔뜩 겁에 질린 민영익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드러누우려 하지도 않으며 뱃멀미에 시달렸다. 동행한 서광범과 변수는 폭풍우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데, 사절단장인 민영익은 어린애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음 항구에 도착하거든 다른 배로 갈아타고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 줘요. 제발 부탁해요.”
사색이 된 민영익은 미 해군무관 포크를 붙잡고 사정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다 폭풍우를 만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 해서 이처럼 큰 군함이 침몰하진 않아요. 더구나 이번 여행은 미국 대통령의 호의로 이루어진 것인데, 일국 대통령의 호의를 무시하고 중도에 항해를 포기하는 것은 친구가 준 담배를 받아 던져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일국의 사절단장이 그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미국 해군 소위 포크는 그렇게 말하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사절단 일행이 긴 여행을 하는 동안 낯선 서구 문물을 접하면서 보인 반응을 가장 객관적으로 관찰한 사람은 바로 포크였다. 그는 뒷날 미국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보수파와 혁신파의 갈등이 이미 여행 중에 싹트고 있었다고 기술했다.
“6개월 동안 배를 타고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하는 동안 민영익은 시종일관 한문 서적을 탐독하며 유럽의 선진 문물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반면에 서광범과 변수는 서구 문물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내가 백과사전의 내용을 번역하여 일본어로 설명하면 그들은 열심히 노트에 적으며 개혁 의지를 불태우곤 했다. 조선에 도착하여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는 도중 서광범이 말하기를, 조선 보빙사 종사관으로 민영익을 보좌하면서 장차 귀국하면 개화운동을 벌여 조국 개화를 이룩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민영익은 오히려 수구사대주의로 선회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서구적인 개화운동에 역행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나는 이미 양자 간에 보수와 혁신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포크는 일본말을 잘하는 편이어서 일본어에 능숙한 변수와 일본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친청사대파가 개화파에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다
조선 정계의 실세인 민영익이 1년 만에 귀국하자 김옥균은 윤치호와 함께 제물포까지 마중 나갔다. 당시 20세에 불과한 윤치호는 주한미국공사 푸트의 통역으로 활동하는 한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고종과 푸트, 개화파 간의 교량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개화파와 사대파 간의 충돌을 막아야 한다는 충정에서였을까, 그는 민영익을 만나자 개화파와 합심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공에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이롭게 할 뜻이 있다면 모름지기 힘을 합쳐야 할 것이오. 저 작은 시냇물이 합쳐 바다를 이루고 모래알이 쌓여 산이 되듯 천하만사는 마음을 합치면 이루기 쉬우나 마음을 둘이나 셋으로 나누게 되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것이오.”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를 일주하며 구미 각국의 선진 문물을 두루 구경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는 민영익에게 그 같은 애송이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개화파로 급선회할 것이냐 아니면 민 씨 일가의 대변자로서 친청사대파의 입장을 고수할 것이냐는 뭇 사람의 궁금증에 답하듯, 민영익은 고종에게 올린 건백서(建白書)를 통해 전혀 엉뚱한 방향을 제시했다.
“산업과 문물은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이다. 미국은 무진장한 국토와 자원을 가지고 있다. 미국 백성은 평화를 사랑한다. 그러나 미국 군대는 장난감과 같아 유민(遊民)이나 다를 바 없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의 강대함에 놀랐다. 유럽 각국은 모두 러시아를 두려워한다. 조만간에 러시아가 아시아로 침략의 손을 뻗쳐 우리나라에도 그 영향이 미칠 것이다. 우리나라 입국(立國)의 근본 정책은 청국이나 일본만 상대할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보호를 받도록 함이 상책이다.”
건의서의 요지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나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여서 군대는 보잘것없는데, 러시아는 가장 강대한 나라여서 우리나라도 조만간에 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므로 러시아와 손잡고 그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미국의 군사력이 약함을 들어 미국을 과소평가하려 했고, 러시아의 군사력이 강함을 강조하여 새로운 국제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유럽을 외유하는 동안 러시아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사람이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던지 그처럼 엉뚱한 보고서를 올렸다. 어떻게 보면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그대로 베끼되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대책으로 중국, 일본, 미국 등과 손잡는 대신 러시아와 손잡고 그 나라의 보호국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선진 문물을 구경하는 동안 동료들은 어떻게 하면 약소국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느냐며 노심초사하는 동안, 그는 어떻게 하면 힘센 나라에 빌붙어 보신할 수 있느냐며 잔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건백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누구보다 분노한 사람은 김옥균이었다. 개화파 대열에 앞장서 주기를 바랐던 열망이 무너진 아쉬움에서일까, 건백서를 읽자 그는 단박 날카롭게 비판했다.
“미국에 대한 것은 대부분 옳게 관찰했다. 그러나 노서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제 나라의 독립과 자주책을 버리고 노서아의 강대함에 복종하려는 사대사상이야말로 조국의 혁신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한때 동지였던 두 사람의 의견이 달라진 것은 시국관의 차이라기보다 이념의 차이였다. 김옥균은 청나라의 세력을 꺾고 그에 추종하는 친청사대파를 축출한 뒤 자주독립 국가를 이룩함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의 나라가 되려면 반드시 정치와 외교를 자수자강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한 자주독립국은 단순히 조선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청나라로부터 벗어난다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강대국의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그야말로 온전한 독립을 이룩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에 비해 민영익이 추구하는 것은 국익과는 거리가 먼, 개인 내지 집단의 이익이었다. 그처럼 이념과 사상이 달랐기에 김옥균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것이 상책이라 한 민영익의 건의를 국적(國賊)의 소론이라 혹평했다. 고종에게도 그 같은 소신을 밝히며 건백서를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어느덧 민 씨 천하가 되다
김옥균의 혹평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세계를 일주하며 선진 문물을 두루 구경하고 돌아온 민영익의 득의양양한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조선 천하를 자기 손안에 쥐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자부심이 강한 민영익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민 씨 중심의 친청사대파와 손잡고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에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조선 정치는 민비를 등에 업은 민 씨 일파와 그들에게 빌붙어 사는 친청사대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민 씨 중에서도 민태호, 민영목, 민영익, 민응식 등이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우두머리는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었다. 민영익은 고모 민비와 고모부 고종으로부터 듬뿍 신임을 받고 있어 민 씨 중에서도 실세로 통했다.
민태호의 아들인 민영익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났는데, 16세에 민비의 오빠 민승호의 양자가 되었다. 민승호도 민비의 친오빠가 아니었다. 민비는 형제자매가 모두 죽어 외톨이였기에 민승호를 양자로 들여왔다. 그 뒤 민승호가 폭발 사고로 죽자 민영익이 양자로 입양되면서 죽동궁의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민영익은 18세에 과거에 합격했다. 벼슬길에 오르자 민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승진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정3품인 이조참의에 올라 조정의 인사권을 거머쥐었다. 그때부터 개화파 인사들이 그의 사랑방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이어 이조참판과 외아문협판으로 승승장구했다. ‘죽동궁 영감’이라 불릴 만큼 위세가 당당해 그의 집에는 출세를 노리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드나들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소위 ‘8학사’라 불렸던 젊은 인재들이었다. 김옥균, 어윤중, 홍영식도 8학사의 하나였다.
보빙사 전권대신으로 미국에 다녀온 지 몇 개월 안 돼 친군영제(親軍營制)가 실시되었는데, 그때 민영익이 우영사로 임명되었다. 정계의 실세인 데다 군사권까지 거머쥐자 민영익은 세인의 눈에 왕에 버금가는 인물로 비쳐졌다. 미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은 고종을 설득하여 우정총국을 개설하고 개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당시의 조선은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가 끝나고 중전 민비가 나라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은 기울기 시작했다. 중전 민비가 이끄는 민 씨 일당이 지배하면서 조선은 또다시 썩은 나라가 되었다. 농사 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던 시절인지라 집권층이나 벼슬아치들이 돈을 버는 방법은 벼슬을 팔거나 백성을 수탈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요직을 독점하고 있는 민 씨 일당과 그 추종자들이 매일같이 하는 일이 벼슬을 팔아 돈을 긁어모으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우두머리인 민비는 인사 책임자인 이조판서에게 전국 수령의 자릿값을 매기게 하여 발령을 낼 때마다 돈을 챙겼다. 애초보다 자릿값을 두 배로 올렸음에도 벼슬을 사려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거금을 바쳐 벼슬을 산 지방관은 본전을 뽑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그처럼 조정은 물론 지방의 방백수령까지 모두 민 씨 일당이 차지하다 보니 조선은 어느덧 민 씨 천하가 되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