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이 동대문에서 10여 리 떨어져 있는 별장에 은거하자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 동지들이 매일같이 찾아왔다. 주로 밤에 찾아와 시국을 논하고 대책을 협의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반가운 소식이 날아 왔다. 그 해 6월 오늘날의 베트남에 해당되는 안남(安南)의 영유권을 놓고 청나라와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켰는데 청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2만 명이나 되는 청군이 3천 명에 불과한 프랑스군에 패했으니 대국이라 자부하던 중국의 체면이 완전히 땅에 떨어졌던 것이다. 개화파에게 그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 수 없었다. 당시 개화파가 품고 있던 복안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을 몰아내고 친청사대파를 타도하여 정권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그 같은 기본 구상하에 학도들을 일본에 유학 보내 신식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힘깨나 쓰는 장사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핵심 과제인, 청군을 축출하는 문제는 고종의 신임이 두터운 홍영식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청불전쟁이 일어나 청이 패했으니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이 물러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과연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은 물러날 것인가? 완전히 코너에 몰려 쥐구멍에 햇볕 들 날만 기다리고 있는 개화파에게 정녕 기회는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개화파의 예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할 수 있었다. 청군이 조선에서 철수하긴 했으나 3,000명 중 절반인 1,500명만이 철수했다. 나머지 1,500명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러스트 김남희
청나라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폭발 직전이었다
그 무렵 청나라 병사들에 대한 조선 백성들의 반감이 폭발 직전이었다.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과 일본은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동시에 군대를 파견했다. 1882년 7월 오장경(吳長慶)이 이끄는 청군이 서울로 들어와 훈련도감 자리인 동별영에 주둔하고 원세개(袁世凱)가 이끄는 청군은 창덕궁을 호위했다. 그러자 일본은 일본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300여 명의 군대를 보내 서울에 주둔시켰다. 남의 나라 땅에 주둔한 두 나라 군사들은 당연하다는 듯 구호를 외치고 거리를 활보하며 위세를 과시했다.
한편 청군 장수 오장경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중국으로 끌고 갔다. 청의 실권자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파견하여 그때까지 조선에서 제대로 취급한 적이 없는 외교 및 세관 업무를 청의 입맛에 맞게 처리하도록 했다. 그때부터 청은 조선을 속국으로 간주하며 종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병사들에 대한 조선인의 감정이 나빠진 것은 그들의 행패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병들은 어쭙잖은 대국인 행세를 하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그들이 조선 백성에게 부린 행패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1884년 1월 청병들이 광통교에 있는 한약방에 들어가 인삼을 사겠다며 흥정하는 척했다. 주인이 그 동안 밀린 외상값부터 갚으라고 하자, 그들은 주인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아들을 사살했다. 한성순보가 ‘화병(華兵) 범죄’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하면서 그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청군 부대는 사과하기는커녕 한성순보에 병정을 보내 항의했고, 청국 정부는 북양대신 이홍장의 이름으로 엄중한 항의서를 보내 왔다. 엉뚱하게도 신문 발간 업무를 맡고 있던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가 일체의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그처럼 조선 상인이 청병에게 물건을 팔고 값을 받지 못한 일이 비일비재했고 길에서 무단히 구타당한 백성도 수두룩했으나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청병에게 수모를 당한 여인들은 오히려 그 사실을 숨기기에 바빴다. 종주국 군대인 청병에게 속국 백성인 조선인은 멋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에 불과했다.청병들의 행패가 극치를 이룬 것은 이범진의 집을 강탈한 사건이었다. 그 해 6월 청나라 상무총판 진수당(陳樹堂)이 정6품인 정언(正言) 이범진의 집을 강제로 사려다 시비가 벌어졌다. 진수당이 이범진을 흠씬 두들겨 패 초죽음을 만들었다. 이범진은 대원군 시절 포도대장을 지낸 이경하의 아들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벼슬아치였다. 그처럼 조선 관원의 집까지 마음대로 빼앗을 정도였으니 청병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빼앗긴 이범진의 집은 나중에 청나라 영사관 건물이 되었다. 그 소문이 삽시간에 장안에 쫙 퍼졌다. 그처럼 명망 있는 벼슬아치가 속절없이 얻어맞으며 집을 빼앗겼음에도 조선 정부는 청군에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했다. 화가 치민 윤치호가 친청사대파의 영수격인 민영익을 찾아가 항의했으나, 민영익은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며 발뺌을 했다.
그 같은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청군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한 노인이 광통교에서 대중을 모아 놓고 나라의 자주를 외치는 연설을 하자 백성들이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처럼 반청 감정이 표면화되자 청군 장수들이 조선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조선 정부는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을 처벌하는 대신 한성순보에 보도 자제를 요청함으로써 사건을 종결지으려 했다.
묄렌도르프가 쓴 글 ‘조선약기(朝鮮略記)’에 “조선 왕은 청 황제의 유명무실한 노복이다”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논란을 일으켰다. 그 대목을 읽고 화가 치민 윤치호가 고종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목 참판이 간행한 ‘조선약기’에 ‘조선 왕은 청 황제의 유명무실한 노복이다’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민망하기 그지없었나이다.”
“정녕 그런 구절이 들어 있더란 말이냐?”
고종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고종 옆에 앉아 있던 민비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윤치호를 보며 물었다.
“그 아랫 구절에는 무슨 말이 들어 있더냐?”
“네. 그 아랫 구절에는 ‘그러나 중국인은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윗 구절은 아랫 구절을 이끌어내려고 한 말이다.”
민비는 그처럼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그 말을 듣자 고종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군주 고종의 나약한 모습을 보며 윤치호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에 비친, 민비 앞의 고종은 엄처에게 주눅 든 불쌍한 남편에 불과했다. 나라의 장래가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처럼 청병에 대한 국민 감정이 악화되고 있을 때 청불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에서 청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개화파로서는 민씨 중심의 친청사대파를 타도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개화파는 그처럼 무기력한 청나라를 부모처럼 섬기고 있는 조정과 민씨 일당을 향해 대오각성하라고 소리 높이 외칠 수 있었다.
“구미 각국에서는 청국인을 마치 종복처럼 취급하고 있다. 심지어 마음이 너그럽고 착한 미국인도 이제는 청국인을 축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구사대파들은 빈껍데기에 불과한 청국을 상전처럼 모시고 있다. 조선이 독립할 때는 바로 이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개화파의 우두머리 김옥균은 그렇게 외치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이상재를 우정총국 인천분국장에 앉히다
1884년 4월 고종이 우정총국을 개설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홍영식을 우정총판에 임명한 뒤 우정총국 개설 작업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신식 우편의 개설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실시하는 제도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준비 과정이 더딜 수밖에 없었으나, 오비 스케아키(小尾輔明)와 미야자키 겐세이(宮崎言成) 등 일본인 전문가를 고용하여 준비 작업을 서두른 결과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정총판 홍영식이 우편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준비해야 할 사항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서둘러 준비해야 할 것은 관계 법령의 제정, 우정총국 청사의 건립, 전문요원의 선정 및 양성이었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우표의 발행이었다.
그 중에서 우편 관계 법령의 제정은 일본인 전문가를 고용한 덕분에 비교적 쉽게 진행되었다. 일본인 중에서도 오비는 일본 우편사업의 창업에 관여한 경험이 있어 일본 우편법령을 참고하여 제정 작업을 이끌어 나갔다. 그리하여 우정총국직제장정, 우정국사무장정, 우정규칙, 경성내우정왕복개설규법 및 경성·인천간왕복우정규법 등의 법령을 입안했다. 우정총판 홍영식은 그 해 10월 이들 법령을 고종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얻었는데,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우편 관계 법령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외국인 전문가의 채용에 비해 내국인 직원의 선발은 뒤늦게 이루어졌다. 홍영식은 그 해 10월 고종에게 주청하여 이상만, 김낙집, 안종수, 박영호, 심상기, 서재창, 홍병후, 서광용, 이상재, 신낙균, 남궁억, 조창교, 안욱상, 조한상 등 14명을 우정총국 사사(司事)로 임명했다. 10일 뒤에는 성익영을 추가로 임명했다. 사사는 오늘날의 직원에 해당하는 낮은 직급의 벼슬이었다.
사사로 임명된 자들은 대부분 외국 물을 먹은 경력이 있는 인재들이었다. 이상재와 안종수는 신사유람단에서 수행원으로 활동했고, 안욱상은 영선사 김윤식을 따라 중국 천진에 유학하여 제도학을 공부했다. 조창교는 일본 유학 중에 우편업무를 습득했다. 신낙균, 남궁억, 성익영은 동문학에서 영어를 배웠는데, 그 중에서 남궁억은 묄렌도르프 밑에서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신낙균은 영어를 잘해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통역으로 참석했다. 김낙집은 수학자였고 서재필의 아우인 서재창은 일본 하사관학교 출신이었다.
그처럼 우정총국 사사들은 개화에 눈뜬 젊은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온건개화파로서 급진개화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김윤식은 그들을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했다.
“홍영식은 우편국을 설치할 것을 처음으로 제기하여 스스로 총판이 되었다. 부박하고 젊은 사람들을 요속(僚屬)으로 삼았으니, 일세의 영준이라 자칭하는 자들이 모두 거기에 모였다.”
과연 그들은 나라를 이끌어 갈 영재였을까, 시세를 좇는 부박한 무리에 불과했을까?
사사로 임명된 자들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우정국사무장정에 의하면, 우정총국은 총판 밑에 방반(幫辦)을 두고 그 밑에 규획과(規畫課), 발착과(發着課), 계산과(計算課) 등 3과 15부와 분국을 두었다. 총판에는 홍영식을 임명했으나 방판은 임명하지 않았고, 개설 당시 인천 한 곳에만 설치했던 분국 책임자에는 사사 이상재를 앉혔다. 규획과는 기획에 관한 사무, 즉, 뒷날의 체신부와 체신청에서 관장하는 관리사무를 맡았다. 발착과는 우편물을 보내고 받는 일반 우체국의 우편 업무를 맡았다. 계산과는 경리 사무를 맡았다. 과는 과장을 장으로 하고 그 밑에 여러 개의 부를 두었다. 지방에는 오늘날의 우체국에 해당하는 우정분국이나 우정수납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총국 인천분국을 개설한 사람은 뒷날 사회운동가로 유명세를 치른 월남 이상재였다. 우정총국 사사라는 낮은 벼슬로 그 임무를 맡았다. 신사유람단 시절 조사로 활동한 박정양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했을 뿐 벼슬자리에 오른 적이 없는 이상재가 우정총국 사사로 발탁된 것은 홍영식과의 개인적인 친분에서였다.우정총국을 개설하게 되자 홍영식은 아직도 식객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이상재를 불러 우정총국 사사로 임명하고 인천분국장 자리에 앉히며, 장차 우정총국에 관한 일은 그에게 일임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 공, 아무래도 인천분국장 자리는 이 공이 맡아 주셔야겠소. 인천은 서울의 인후(咽喉)와 같은 곳 아니오. 외국인이 서울에 들어오려면 누구든 인천을 거쳐야 하니 인천보다 더 중요한 곳이 어디 있겠소. 그래서 서울과 인천 두 곳에서 먼저 우편을 개시하기로 한 것인데, 앞으로 우정총국이 제 역할을 하려면 인천분국이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천분국장 자리가 매우 중요하다 하겠는데, 아무래도 그 자리는 이 공이 맡아 주셔야겠어요.”
“저처럼 관원 경력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인천분국장 자리를 맡습니까. 다른 좋은 분을 골라 보세요.”
관원 경력이 없기에 이상재는 진심으로 사양했다.
“아닙니다. 관원이란 무릇 사심이 없고 성실하면서도 사물을 넓게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녀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 공을 따를 사람이 없어요.”
“그렇게 과찬의 말씀을 하시니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못한 듯 이상재는 홍영식의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앞으로 인천분국 일만 잘 맡아 주신다면 장차 우정총국에 관한 일은 모두 이 공에게 일임할 생각입니다. 할 일이 산적해 있는 사람이 언제까지나 우정총국 일에만 매달릴 수야 없지 않습니까.”
홍영식은 다섯 살이나 위인 이상재에게 깍듯한 자세로 말했다. 그는 우정총판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후임으로 이상재를 점찍었던 것이다. 홍영식이 이상재를 처음 만난 것은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로 일본을 방문할 때였다. 그때 이상재는 조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사절단에 합류했다. 박정양의 담당 기관은 일본 내무성과 농상무성이었는데, 이상재는 농상무성이 관장하고 있는 우편사업에 대해 조사하여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홍영식은 이상재의 총명한 머리와 성실한 자세에 호감을 갖게 되었고, 우정총국을 개설하게 되자 그를 발탁하여 인천분국장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우정총국을 개국하고 우편사업을 시작하다
우편 관련 법령이 제정되고 우정총국의 창립 요원이 선정되자, 홍영식은 우정총국의 업무 개시일을 10월 1일로 정했다. 양력으로 따지면 11월 18일이었다. 그는 우편 업무를 개시함을 알리는 통지문을 작성하여 조선에 주재하는 청, 일본, 미국, 영국 및 독일의 공사 내지 영사에게 보냈다. 그때 우정규칙, 경성내우정왕복개설규법, 경성·인천간왕복우정규법의 사본도 같이 보냈다. 그러자 일본과 미국 공사는 바로 그 날로 우정총국의 업무 개시를 축하하는 인사말을 보내 왔다. 우정총국의 업무 개시를 하루 앞두고 홍영식은 고종을 알현하고 우정총국과 인천분국의 설치 장소를 보고하여 확정짓고, 이튿날부터 우편사업이 개시됨을 알렸다. 우편사업은 한성에 우정총국, 인천에 분국을 설치하고 두 지역 간에 먼저 실시하기로 했다. 전국 각지에 우체국을 짓고 일시에 우편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중앙정부가 있는 한성과 서울의 관문인 인천지역에서 먼저 실시한 뒤, 실시 지역을 점진적으로 넓혀 나가기로 했다. 1884년 10월 1일, 드디어 우정총국 개국일이 밝아 왔다. 홍영식은 아침 일찍 관복으로 갈아입고 전동에 있는 우정총국으로 등청했다. 대문 옆에 붙어 있는, ‘郵征總局’이라 한자로 쓰인 현판이 유난히도 눈길을 끌었다. 사사와 체전부 등 우정총국 관원들도 일찍 출근하여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정총국이라? 오늘부터 문을 여는 모양인데, 무얼 하는 관아인지 모르겠네. 무얼 하는 관아인데, 관아 명칭에 ‘칠 정(征)’자가 들어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네.”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쓴, 점잖게 생긴 노인이 길가에 서서 郵征總局이라는 현판을 바라보며 혼잣
말처럼 중얼거렸다.
“ ‘칠 정’자에는 ‘세받을 정’이라 해서 ‘세금을 받는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정총국이란 우체 사무를 맡아 보는 관아로서 백성들이 보내고자 하는 서간을 접수하여 보내 주는 일을 하게 되는데, 오늘 서울에서 접수한 서간을 인천으로 보내면 늦어도 이틀 후에는 배달이 됩니다. 서울에서 서울로 보낸다면 빠르면 당일, 늦어도 다음날까지는 배달이 되고요. 우정국에 직접 찾아오셔서 서간을 부치려면 먼저 ‘우초’라는 전표(錢票)를 사서 서간 봉투에 붙여야 하는데, 전표를 사는 값이 바로 세금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처럼 우초를 팔아 세금을 받기 때문에 ‘세받을 정’ 자를 붙여 우정총국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지요.”
꽤나 유식해 보이는 노인이었기에 홍영식은 직접 다가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우초(郵鈔)’란 오늘날의 ‘우표’를 가리키는 신조어였다.
“아, 그렇습니까? 우정총국이라는 명칭에 그런 깊은 뜻이 들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그런데 우정총국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부치는 서간도 배달해 준다고 하셨죠?”
“물론입니다. 지금까지 운영해 온 역참제는 관청에서 보내는 공문서나 물건을 보내는 것이었는데, 오늘부터 개설하는 우정국은 일반 백성이 부치는 서간이나 물건을 접수하여 보내게 됩니다. 우편이라는 제도는 미국, 영국 등 개화된 나라에서만 실시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 백성을 이롭게 하자는 뜻에서 대군주 전하께서 특별히 전교를 내리셔서 이번에 이 제도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홍영식은 공손한 자세로 친절하게 설명했다.
“아, 그렇군요.”
노인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정총국이 문을 열고 공식적인 업무를 개시하기에 앞서 우정총판 홍영식은 사사와 체전부 등 관원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오늘부터 우리 우정총국 관원들은 개화의 첫 번째 작품인 우편을 개설하여 조선 팔도는 물론 전 세계 만민과 서간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공문서를 보내던 역참제를 버리고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하게 된 것은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서울에 계신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함을 전주에 있는 아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칩시다. 전주까지 천 리 길에 하인을 보내 알리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릴 것이며, 얼마나 많은 노자가 필요하겠습니까? 우편이 개설되면 그런 문제가 말끔히 해결됩니다. 우편이 개설되어 서간 한 통을 띄우게 되면 불과 며칠 사이에 전달되고, 비용도 단돈 5문이면 충분합니다. 이 얼마나 편리한 제도입니까?
우리가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하려는 것은 개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개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도입해야 할 제도나 문물은 쌔고 쌨습니다. 앞으로 신식 제도나 문물을 도입하여 제대로 개화된 세상을 만들려면 첫 번째 작품인 우편제도부터 성공적으로 정착시켜야 합니다. 첫 번째 단추를 잘 끼워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바 크다는 점을 명심하시고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영식은 그처럼 개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 (現 《우체국과 사람들》)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