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남희
우정총국 청사는 새로 짓지 않고 기존 건물을 사용하기로 했다. 우정총국 청사로는 서울 전동에 있는 전의감(典醫監) 건물을, 우정총국 인천분국 청사로는 인천감리서 건물을 사용하기로 했다. 신식 우편과 같은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려면 새 건물을 지어 산뜻한 기분으로 출발함이 마땅했음에도 기존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 것은 나라 살림이 그만큼 팍팍하기 때문이었다. 우정총국 청사는 이전에 전의감으로 사용한 건물이었다. 전의감이란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의약(醫藥)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다. 선조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전의감 건물을 우정총국 청사로 사용하게 된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전의감이 공식으로 폐지된 것은 1894년이었는데, 이미 그 전에 제 기능을 상실하고 폐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개국 당시 그 건물이 비어 있어 우정총국 청사로 사용했을 것이다. 우정총국 인천분국은 인천감리서 건물을 감리서와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인천이 개항되어 바깥세상과 교통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1월이었다. 개항하기 전의 인천은 한적한 어촌으로 갈대가 무성한 황무지였다. 그 황량한 땅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영사관을 짓고 우체국이며 해운회사, 잡화상 등을 세우며 도시를 형성해 나갔다. 바로 그해에 조선 정부는 인천해관과 인천감리서를 설치하고 개항을 서둘렀다. 각국의 영사관과 외국인 거주지도 속속 조성되었다.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개설된 해인 1884년 당시 인천에 설치된 신식 행정기관은 인천해관과 인천감리서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 두 기관 중 하나의 건물에서 우편 업무를 개시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실제로 갑신정변 직후 우정총국이 문을 닫고 난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인천감리에게 인천분국의 우표와 기타 물품을 보내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보아 인천분국이 인천감리서 안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현재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는 인천감리서 터가 남아 있어 우정총국 인천분국의 위치가 그곳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홍영식이 태극기우표 발행을 주관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1884년 우편제도를 처음 실시할 당시에도 우편요금은 거리에 관계없이 동일한 요금을 받는 단일요금제를 원칙으로 했다. 다만 한성 내에서 오가는 우편물은 요금 감액제를 적용하여 반값을 받았다. 또한 우편물은 중량에 따라 요금을 달리했다. 우정총국에서 취급하는 우편물의 종류는 서간과 관보·서적 둘로 나누었는데, 그것은 형식에 불과했고 우편으로 보낼 수 있는 상품은 거의 모든 것을 취급했다. 다만 우편물의 크기와 무게에 제한을 두었다. 우편물의 크기는 길이 1척 5촌, 너비 1척, 두께 7촌 이내로 하고, 무게는 1개당 100냥쭝까지로 했다. 독약이나 발화물, 생물, 금은보옥류 등은 우송 금지품으로 정하여 접수하지 않았다. 경성내우정왕복개설규법은 서울 시내에서 실시하는 우편물의 수집 및 배달시간을 규정하고 있었다. 우편물 수집의 경우, 1호편이 오전 7시 30분에서 8시, 2호편이 오후 5시에서 5시 30분까지였고, 배달의 경우 1호편이 오전 8시 30분에서 9시 30분, 2호편이 오후 6시에서 7시까지였다. 그처럼 우정총국 개국 당시부터 1일 2회 우편물을 수집하고 배달했다. 오늘날의 우표판매소에 해당하는 우초매하소(郵鈔賣下所)는 주요 지점마다 분포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반드시 우편물 수취함인 우정괘함(郵征掛函)이 설치되어 있었다.
우편제도의 실시를 앞두고 우정총판 홍영식이 해결해야 할 가장 어려운 과제는 우표의 발행이었다. 근대 우편의 특징은 우편요금을 우표로 납부하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표를 발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는 우표를 인쇄할 수 있는 기술이 없는 데다 우표 도안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외국인 전문가의 자문이 필요한 이유였다. 홍영식이 우표 발행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외무아문 협판 겸 조선해관 총세무사 묄렌도르프가 소개한 사람이 서울총해관 세무사 하스(Joseph Haas)였다. 오스트리아인인 하스는 상해 주재 오스트리아 총영사를 지낸 자였는데, 1883년 4월 묄렌도르프가 조선해관 총세무사로 발탁되면서 해관 업무를 개시하기 위해 청국에서 데려왔다. 해관 업무가 개시되자 그는 서울총해관에 배치되어 묄렌도르프 밑에서 세무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해관(海關)이란 오늘날의 세관에 해당하는 기관이었다.
홍영식은 하스를 찾아가 우정총국을 개국할 때 사용할 우표의 조제 방안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금년 중으로 우정총국을 개국하여 우편을 개설하려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우초를 만드는 일이에요.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하려면 반드시 우초를 사용해야 한다는데, 우리 조선은 여태까지 우초를 만들어 본 적도 없고 또 그것을 인쇄할 시설도 없어요. 해서 어떻게 하면 우초를 만들 수 있고 그 비용이 얼마나 드는 것인지, 그런 점이 궁금해서 귀공을 찾아왔소이다.”
홍영식은 하스에게 방문한 목적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아시다시피, 우초를 만들려면 먼저 도안을 작성해야 하고 그 다음에 인쇄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우초 도안은 발행 주체인 조선 정부에서 직접 작성해도 되지만, 일반적으로 전문가에게 맡깁니다. 우초 인쇄의 경우 조선에 마땅한 시설이 없으니 외국 정부나 인쇄회사에 맡겨야 합니다. 우초를 인쇄하는 나라로는 영국이나 미국, 일본 등 몇 개 나라가 있는데, 금년 중으로 사용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일본에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우초 원도를 도안하고 인쇄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실어 나르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정총국 개국 일정에 맞추려면 가까운 데 있는 나라에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질문인지라 하스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 우초 인쇄는 일본에 맡긴다 치고, 이 우초 도안이 어떤지 봐주시겠소?”
홍영식은 보자기를 풀어 책을 꺼내더니 책 속에 들어 있는 종이를 꺼냈다. 종이에는 태극기를 소재로 한 우표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이 정사각형 안에 들어 있는 그림이 뭐지요? 왜 이런 그림이 우표 도안에 들어가야 하지요?”
하스는 홍영식이 건넨 우표 원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홍영식이 제시한 우표 원도에는 정사각형의 검정 선 안에 태극기가 들어 있고, 태극기 상단에는 ‘大朝鮮國’이라는 국호가, 하단에는 ‘우표’를 가리키는 ‘郵鈔’가 가로쓰기로 적혀 있고, 태극기 좌우에는 우표의 액면을 나타내는 ‘50푼(五十分)’이 세로쓰기로 적혀 있었다. 그처럼 홍영식은 우리나라 국기로 삼은 지 2년밖에 안 된 태극기를 아무 손질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우표에 담고자 했던 것이다.
“네모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이고, 태극기 상단에는 우리나라 국호를, 좌우에는 우초의 값을 표시하는 ‘50푼’을 적었소이다. 아시다시피, 빨강과 파랑으로 이루어져 있는 태극 문양은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이고, 네 모퉁이에 있는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주만물이 음과 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하는 이치를 형상화한 것이오. 태극기가 그처럼 오묘한 뜻을 담고 있어 우초 속에 담아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이런 도안을 구상했던 것이오.”
“태극기 속에 그처럼 심오한 뜻이 담겨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스는 짐짓 감탄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하오나 우초 도안도 일반적으로 전문가에게 맡깁니다. 예를 들어, 딱지처럼 조그만 우초 속에 태극기를 집어넣는다 할 때 어떤 모양으로 집어넣어야 하겠습니까? 태극기를 생긴 모양 그대로 집어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밋밋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태극기의 특징을 형상화해서 집어넣는다면 보다 보기 좋은 우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판단은 아무래도 그 분야의 전문가가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우초의 도안 역시 앞으로 정하게 될 인쇄회사에 맡기기로 하고, 이 도안을 같이 보내 참고 자료로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홍영식은 하스의 의견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우정총판 홍영식으로부터 우편을 개설할 때 사용할 우표를 차질 없이 공급해 줄 수 있는 회사
를 선정해 달라는 부탁을 받자, 하스는 곧바로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 시나가와(品川)에게 연락했
다. 그는 상해영사로 근무할 때 가깝게 지냈던 시나가와에게 태극기우표 원도를 보내며 두 가지 질문을 했다. 하나는 조선 정부에서 동과 은 두 가지 동전을 주조할 것인데 조각자를 일본에서 고빙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조선 정부에서 우표를 발행하려 하는데 별지 모형의 우표를 일본에서 조제할 수 있으며 그 비용이 어느 정도 드느냐는 것이었다. 그처럼 조선 정부는 우표와 함께 새 동전의 발행도 추진하고 있었다.
하스로부터 그 같은 문의를 받자, 시나가와는 즉시 그 사실을 일본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이노우에는 그 문제를 조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나가와가 맡지 말고 하스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천영사 고바야시(小林)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또한 이노우에는 하스에게 보낼 회답 내용을 알려 주며 고바야시로 하여금 하스와 직접 교섭하도록 하는 한편, 하스로부터 주문이 올 경우 확실한 주문서를 받아 일본 정부에 통보하라고 지시했다.
문위우표 5종을일본 대장성에서 조제하다
그 같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는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조제하기로 했다. 우표의 제작을 일본에서 맡다 보니 우표의 도안도 달라졌다. 도안자는 홍영식이 제안한 태극기 대신 중국의 성리학자 주돈이(朱敦頤)가 고안한 음양태극장(陰陽太極章)을 주 도안으로 앉히고 그 주위를 당초(唐草) 문양으로 장식하는 한편, 우표의 가장자리에 국호와 액면 등을 안배했다. 그러다 보니 태극기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우표가 되었으나, 음양태극장과 당초 문양, 글자 등을 조화롭게 배치해 놓고 보니 꽤 품위 있는 우표가 되었다. 태극기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했으나, 1882년 8월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배 안에서 고안해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 조선 정부가 그 태극기를 국기로 공식 발표한 것은 1883년 1월이었다. 재미있게도 홍영식이 제공한 우표 원도 속의 태극기의 모양이 현재의 태극기와 똑같았다. 빨강과 파랑으로 나뉘어 있는 태극의 문양이 오늘날의 그것과 같고, 건·곤·감·리로 나뉘어 있는 4괘의 모양도 같았다. 표준 규격이 없던 시절인지라 당시에 만들어진 태극기는 태극 문양이나 4괘의 모양이 각양각색이었는데, 묘하게도 원도 속의 태극기는 오늘날의 그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홍영식이 제공한 우표 원도는 누가 작성했을까? 고종이 직접 도안했다는 설이 있고 고종과 홍영식이 합작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것은 1884년 고종이 은화의 도본을 직접 그렸다는 사실에 근거한 추측일 뿐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문제의 원도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그럴듯한 기록이 남아 있어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미국인 우표수집가 커(J. W. Kerr)는 1965년에 발간한 ‘조선 왕국의 우취 카탈로그와 핸드북’이라는 책자에서 이 원도는 “홍영식이 1883년 상해(上海) 방문 중에 허친슨(Hutchinson)이라는 미국인과 상의하여 디자인한 것인데, 홍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나 인쇄하기 전에 일본인에 의해 수정되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위의 설명문과 함께 우표의 원도를 게재했을 뿐 그밖에 어떤 설명도 붙이지 않았고, 그 자료의 신빙성을 입증할 만한 출처도 밝히지 않았다. 커의 글에는 오류가 있었다. 미국인 허친슨은 영국인 허치슨(Hutchison)의 오기였다. 영국인 허치슨은 홍콩우체국에서 부국장까지 지낸 자로 묄렌도르프와도 친분이 있어 우정총국을 개국할 때 고문 자리를 맡기로 약속한 바 있었으나, 우정총국이 문을 닫은 뒤에 입국했기 때문에 실제로 우정총국에 근무하지는 않았다.
홍영식이 그런 사연이 있는 허치슨과 1883년 상해에서 만났다는 점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1883년은 보빙사절단이 미국에 간 해로 홍영식은 그해에 미국과 일본 외에는 외국에 나간 적이 없었다. 다만 미국에서 정기여객선을 타고 귀국할 때 요코하마와 홍콩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그때 여객선회사의 사정에 의해 상해에 들렀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아니면, 홍콩에 기착했을 때 그곳에서 허치슨을 만나 우표 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저런 사정을 감안할 때, 홍영식이 우정총국 개국을 앞두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행하게 될 우표의 도안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당시에 발행한 우표는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 등 5종이었다. 이 우표는 액면 금액이 당시에 통용된 화폐 단위인 ‘문(文)’으로 표시되어 있어 ‘문위우표(文位郵票)’라 불렀다. 1문은 당시의 화폐 가치로 1푼에 해당되었다.
문위우표의 발행일은 우정총국이 우편 업무를 개시한 날인 1884년 11월 18일이었다. 음력으로 10월 1일이었다. 그러나 5종의 우표가 모두 그 날 발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5문과 10문 2종의 우표는 미리 인쇄되어 발행일 이전에 도착했기에 우정총국 개국일에 맞추어 발매할 수 있었으나, 25문, 50문, 100문 3종은 우정총국이 문을 닫은 뒤인 이듬해 4월에 도착했기에 쓸모가 없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이 문을 닫은 뒤여서 그들 우표는 전량 폐기처분되었다.
국내에서 불법으로 운영하던 일본우편국을 접수하기로 하다
우정총국을 설치하고 우편사업을 처음 실시할 당시에는 ‘우표’를 ‘우초(郵鈔)’라 했다. 또한 ‘우편’은 ‘우정(郵征)’, ‘우체국’ 내지 ‘우편국’은 ‘우정국(郵征局)’, ‘서류(書留)’는 ‘등기’, ‘특사배달’은 ‘별분전(別分傳)’, ‘우편함’은 ‘우정괘함(郵征掛凾)’이라 했다. 그밖에도 ‘집신(集信)’, ‘분전(分傳)’, ‘우낭(郵囊)’ 등 독창적인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을 뿐 일본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았다. 우정총국을 개설할 당시에는 일본인 전문가를 고용하며 일본 우편제도를 모방했기에 일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에도 그처럼 독창성을 발휘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명칭을 개발하여 사용했다. 홍영식을 비롯한 개화파들의 주체 의식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사례는 또 있었다. 우정총국을 개국하자 홍영식은 곧바로 인천 일본영사관 내에 설치되어 있는 우편국에서 운영하고 있는 우편 업무를 인수할 계획을 세웠다. 남의 나라에서 우편사업을 운영하는 것이 국제관례에 어긋난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영식은 이미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할 때, 조선 내에서 일본이 우편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국제관례에 어긋난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1884년 4월 22일 고종이 우정총국의 설치를 명령한 전교에서 ‘우정총국을 설립하여 연해의 각 항구를 왕래하는 서신을 관장하고…’라고 표현한 것도 부산과 인천에서 불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일본 우편국을 염두에 둔 조치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편에 대한 주권 의식이 투철했던 홍영식은 우정총국을 설치하면서 일본이 국내에서 불법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우편 업무를 접수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84년 10월 1일(음력) 우정총국과 인천분국이 동시에 개국하여 우편업무를 개시했다. 그때 우정총국에 고용되어 있던 일본인 스가노(菅野宏一)가 갑신정변을 맞아 인천 거류지까지 피난한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었다. ‘한력(韓曆) 1884년 10월 1일 경성에서 인천 사이의 선로를 개통하고, 나아가 신년 1월 2일까지 경성에서 부산까지의 선로를 설치하려고 오비(小尾輔明)는 이달 중순부터 그 지리를 답사하기 위하여 우정총국 사사 신낙균과 함께 부산으로 험로를 무릅쓰고 출발할 터였다. 그러나 당시까지 인천의 일본영사관에서 취급하던 우편 사무를 이번 우정총국에서 인수 취급하는 수속을 먼저 매듭짓기 위하여 이달 1일 우선 인천항으로 떠났다.’
‘이달’이란 양력 12월을 가리켰다. 위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우정총국은 이미 인천 일본영사관 내에 설치되어 있는 불법적인 일본우편국의 업무를 인수하는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3년에 발행된 인천부사는 ‘1885년 1월(양력) 일시 본방(本邦) 이외의 인민 앞 우편물은 조선 우정국(郵征局)에 교부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일본우편국에서도 일본 이외의 지역으로 가는 우편물은 우정총국으로 이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우정총국은 1885년 1월 2일부터 서울과 부산 간에도 우편을 개설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 준비 작업을 하기 위해 부산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인천영사관 내에서 실시되고 있는 우편 업무의 인수 문제를 먼저 매듭지으려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부산영사관 내에서 운영되고 있는 일본우편국의 우편 업무도 서울·부산 간의 우편 개통과 함께 인수할 계획이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정총국에서 취급하는 우편 업무는 우편물의 접수와 배달이었다. 우편물의 접수는 우체국 창구와 우체통을 통해 이루어졌고, 우편물의 배달은 오늘날의 집배원에 해당하는 체전부(遞傳夫)가 맡아 처리했다. 또 하나의 업무는 우편물의 교환으로, 상대 지역으로 가는 우편물을 중간 지점에서 만나 교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거나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우편물을 교환하기 위해 두 지역 체전부는 매일 아침 무거운 집배가방을 메고 우체국을 출발하여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그들이 매일 만나는 중간 지점은 지금의 서울 오류동이었다. 당시 서울과 인천 사이에는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었다. 바로 전해에 우정사(郵程司)라는 신식 교통통신기관을 설치한 덕분이었다. 홍영식이 협판으로 활동했던 우정사는 역전(驛傳)과 전보 등 통신 업무 외에 교통 업무도 담당했는데, 1883년 봄 서울과 인천 간의 도로를 차마가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연도의 지방관에게 명하여 크게 수리한 일이 있었다. 덕분에 도로 정리가 미흡했던 서울과 인천 간에 체전부가 힘들이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이 뚫렸던 것이다.
1884년 11월 18일 우정총국을 개국하여 신식 우편제도를 실시하게 되자, 이제 남은 과제는 전국 각 고을에 우체국을 설치하여 백성들이 보내는 편지가 전국 각지로 원활하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우정총국 책임자인 홍영식 자신이 맡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이 집에 편안히 앉아 소식을 주고받게 함으로써 개화의 참맛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개화의 첫 작품인 우편사업이 제대로 정착되면 전보나 전기, 철도와 같은 또 다른 개화의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온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해야 하며, 그렇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홍영식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소설 소개
우리나라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개화파였던 금석 홍영식 선생의 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의 바람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의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저자 이기열
30년 가까이 월간 ‘정보와 통신’(現 디지털포스트)지편집장으로 일하며 도약 연대의 정보통신 발전상을 지켜보았다. 1980년대 정보통신 발전 비사인 ‘소리 없는 혁명’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