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에는 새벽에 그 집을 떠나올 때 젊은 여자가 전해 준 도시락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제법 묵직해서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여러 차례 옮겨 들고 했었다. '이거 점심 도시락이예요. 주인 어른과 함께 잡수세요.'도시락 꾸러미를 전해 주면서 젊은 여자가 한 말이었다. 그 집 주인아주머니와 젊은 여자는 길 떠나기 전에 먹은 새벽밥을 아침밥으로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기름진 음식을 양껏 먹기는 햇지만 두 시간을 줄곧 걸어온 터여서 뱃속을 비었고 새로운 음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두 시간을 줄곧 걸어 온 일을 머리 속에 각인하듯 다시 한번 생각 속에 담았다. 그분도 나와 똑같이 두 시간을 줄곧 걸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그분이라고 해서 새벽에 먹은 음식이 두 시간을 줄곧 걷고서도 소화되지 않고 그냥 뱃속에 남아있을까. 더구나 그분은 그만큼 오래 걷고도 여전히 꿋꿋한 걸음걸이를 이어갈 정도로 출중한 건강을 지니고 있다. 신진대사가 왕성하기까지는 않더라도 순조롭기는 할 것이다.
결국 나는 그분도 나처럼 배가 고프고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낄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생각의 징검다리를 놓고 있었던 셈이었다.
나는 그분의 뒷모습을 새삼스럽게 눈여겨 보았다. 그분은 이런저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나보다 이십년 이상 연상이었다. 평소에 비록 운동(등산 따위)으로 몸을 단련해 왔더라도 세월을 아주 아랑곳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고, 자세히 살펴보면 금가고 찌부러든 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분의 뒷모습이 아니라 걸음걸이를 눈여겨 보았다. 지금쯤이면 새벽 밥 먹은 기운도 어지간히 빠져 버리고 다리도 뻐끈해져 쉬어가고 싶은 생각이 고개를 쳐들만 하지 않을까.
그때였다. 그분의 다섯걸음쯤 앞 길가에 택시가 멈춰 서는가 하는데 그분의 걸음이 빨라지며 택시를 따라가 잡으려는 동작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분이 택시를 타고 달려간다면, 그래서 그분을 놓쳐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그렇게 앞뒤가 가지런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을 놓치면 안되고 놓치면 끝장이다. 그런 뜻을 담은 느낌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그분이 탄 택시를 뒤쫓아 갈 다른 택시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승객을 태운 택시가 지나갈 뿐이었다. 앞쪽에 멎은 택시에서는 승객이 내리고 있었고, 그분은 승객이 다 내리기를 기다리듯 옆에 비켜 서 있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저만치 달려오고 있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승객이 있건 없건 가릴 경황이 없었다. 그분 앞에 멈춰 섰던 택 시가 그분을 남겨 둔 채 출발한 것과 빈 택시가 내 앞에 와 멈춰 선 것은 거의 같은 시간이었다. 힐끗 바라보니 그분은 다시 뒷모습을 보이며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택시를 세웠으면 빨리 타요.” 택시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요. 택시 탈.일이 없어졌어요.”
나는 택시기사한테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그분 뒤를 따라갔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별 미친놈이…’’
택시기사의 욕지거리가 따라와 뒤통수를 툭 툭 쳤다. 가슴 속에서 짜증이 불끈 치밀어 오르는 것을 눌러 참았다. 택시가 옆을 지나가며 클랙슨 소리를 뿡빵 울렸다. 욕지거리를 하고도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속알머리가 밴댕이 콧구멍 만한 녀석같으니라구. 미친놈이라구 욕 한번 했으면 됐지 뭘…” 매연을 흘리며 달려가는 택시 뒤꽁무니를 눈으로 쫓으며 투덜거리다가 눈길을 다시 그분 쪽으로 옮겨 놓던 나는 그분이 멈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급하게 걸음 속도를 한껏 줄였다. 그분을 지나쳐 갈 수는 없었다. 나의 첫번째 대장인 주인아주머니가 원하는 나의 위치는 그분 곁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곁을 주려고 하지 않으니 나의 위치는 그분의 좀 떨어진 뒤일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내 쪽을 힐끗 보더니 인도의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은 초록색으로 짙어지지 않은 연두색 여린 빛이었지만 기름기가 자르르 돌기 시작하는 잎들을 거느린 나무 몇 그루가 선 공터였다. 거기 긴 나무의자가 둘 놓여 있었다. 그분은 두 의자 중 하나에 가 앉았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 새벽 고갯마루에서의 마주침이 되풀이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아니, 다시 마주친다면 새벽의 마주침 정도로 끝나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의자에 앉아서 엉거주춤 멈춰 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쉬어 가려고만 앉은 것이 아니었다. 그 눈빛과 얼굴 전체의 표정에 심상치 않은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결판을 내려고 단단히 마음을 다져 먹은 듯했다. 나는 몸과 마음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도 마음을 다져 먹으며 닥쳐올 일에 대비했다. 나로서도 이런 모습으로 그분 뒤를 따라 다닐 수만은 없었다.
“자네 이리 좀 오게.”
그분이 말했다. 나는 그분한테로 걸어가 2미터쯤 앞에 멈춰 섰다. 내 두 손이 어느 틈에 배꼽께에 모아졌고, 고개가 공손하게 숙여져 있었다.
'내 옆에 와 앉게.”
그분이 다시 말했다. 말소리는 조용했지만 둥글둥글한 데는 없이 모가 져 있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숙인 머리를 좀더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분과 함께 앉는 일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을 만큼 그분을 존경한다는 사실을 표시해 보이고 싶었다.
“자네만 괜찮으면 고만인가? 자네가 그렇게 서 있으면 내가 불편하네. 내가 편하구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구 해서 다른 사람한테야 피해를 주든 말든 끈덕지게 고집을 부리겠다는 태도는 잘못이네. 자네한테 물어볼 일두 있구 하니 내 옆에 와 앉게.’’
이쯤 되면 대장의 지시나 다름 없었다. 나는 그분이 앉아 있는 의자로 다가가 그분과는 사이를 두고 몸을 의자 위에 내려 놓았다.
“우리, 사나이와 사나이 사이의 신의와 솔직 함을 가지구 서루 묻구 대답하도록 하세. 괜찮은가? ”
“예, 좋습니다.”
“그럼 내가 먼저 물을 테니까 대답하게. 자네가 나를 계속해서 뒤쫓아 오는 까닭이 뭔가? 솔직하게 대답해 주게나.’’
그분은 마치 의논이라도 하듯 말했다. 순간 내 가슴 속에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르신 동네에 있는 물력가게 주인 정씨가 어느날 말했어요. 일년 동안 집을 떠나 여행하실 분이 계신데 같이 여행하며 시중 들 사람을 찾으신다네, 자네가 그 일을 맡아 해 볼래나? 품삯은 후하게 받을 걸세, 라구요. 제가 하겠다구 대답했구, 물력가게 정씨가 저를 데리구 어르신 댁으루 가서 사모님께 인사를 시켜 줬어요. 그리구는 사모님과 물력가게 정씨 앞에서 약조를 맺었어요. 품삯을 받구 일년 동 안 어르신 뒤를 따라 다니며 시중 들어 드리기루요.' 대강 그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 말을 그대로 털어 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그 솔직한 사정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 말이었다.
“지가 어르신을 해코지할 사람이 절대루 아니라는 걸 믿어 주시구, 지가 어르신 따라가는 걸 받아 들여 주십시오. 그리구 어르신 편에서 두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일년 동안을 혼자서 다니실 수가 있겠습니까? 위험한 일.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으신다는 보장두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어르신께서는 저한테 때때루 가르침을 주시구. 저는 어르신 시중을 들어 드리구,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싫다는데두 자네가 자꾸 나를 뒤쫓아 오는 까닭이 무어냐구 물었네. 자네가 나를 따라오는 까닭을 알아야 함께 가두 안심이 될 것 아닌가?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게. 자네가 어디를 가는데 누가 까닭두 말하지 않구서 자네 뒤를 자꾸 쫓아온다면 마음이 편하겠나? 지금 내가 한 말이 옳은가? 그른가? 이것부터 대답해 보게나.”
그분은 나를 타이르고 가르치듯 말했다. 작전을 바꾼 모양이었다.
“어르신 말씀 옳으십니다.”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내 말이 옳거든 좀 전에 물은 말에두 대답을 하게. 나를 따라오는 까닭이 뭔가? ”
“어르신. 지가 길을 가다 말구 어르신 뒤를 따라온 건 아니잖습니까? 어르신 댁에서 지가 사흘을 묵었구, 사모님께서 저를 어르신께 인사 시켜 드렸습니다 사모님께서 지가 못된 놈이 아니라구 믿으셨으니까 그렇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어르신,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렇다면 내 집사람이 자네를 채용한 건가? 나를 따라 다니면서 시중을 들어주면 품삯을 얼마 주겠다구 말일세. 그렇게 된 일이지? 어떤가? 내 말이 옳은가? 그른가? ”
'어르신, 지가 품삯 준다면 무슨 일이나 가리지 않구 다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전 늘 훌륭한 분 밑에서 그분을 섬기면서 살기를 원한 사람입니다. 어르신 댁에 묵을 때 사모님한테서 어르신 말씀을 듣구는 어르신을 밑에서 섬기며 살구 싶다구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 지 뜻을 말씀 드렸더니 마침 잘 됐다구 하시면서 어르신을 따라가구 싶으면 따라가서 어르신의 높으신 뜻 받들구 시중 들어 드리구 해두 좋다구 말씀하시기에 얼씨구나 하구 어르신을 따라 나서게 된 겁니다.”
“아까보다는 많이 솔직해졌구만 자네가 나를 따라 다니면서 고행을 하겠다느니 하구 말할 때 난 참 어처구니 없었다네. 그래서 자네는 내 집에서 며칠 묵기 전에는 어디서 무슨 일을 했었나? 함께 다니자면 서루 그런 일은 알구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해. 말해 보게나.”
나는 다시 마음과 몸이 움즈러드는 것을 느 꼈다 그분은 내 정체가 무엇인지 탐색하려 하고 있었다. 잘못 대답하다가는 감옥에 들락거린 내 전력마저 들통이 날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구 싶었는데 집안이 망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단념하구 군에 입대했습니다. 제대하구 돌아오자 직장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졸업만으루는 사무직을 얻기가 쉽지 않아 직장 나서기를 기다리는 동안 미장일하는 사람을 따라 다니며 거들다가 미장일을 배우게 됐습니다. 결국 미장일이 직업이 돼버렸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이에는 아직두 대학 진학 못 한 한이 남아, 많이 배우구 사회에서 존경받는 분들을 대하면 존경심과 섬기구 싶은 마음이 우러나군 합니다. 어르신을 따라 나선 까닭 중에 그런 마음두 한몫 했을 것입니다.”
한참 거짓말을 밥먹듯하던 때의 실력이 되살 아나는가 싶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거짓말에 악의는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네. 그러니까 그 동안 자네는 세상 일과 세상 사람이 싫어 세상을 등지구 산 게 아니라 세상안에서 미장일을 하며 살아 왔다는 얘기렸다. 그렇다면 방이래두 하나 얻어가지구 있었을 텐데, 왜 내 집에는 와서 묵었는가? ”
나는 뒷잔등에 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가 내가 한 말이 서로 어긋나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어르신 댁에서 묵은 건 어르신께서 고행 떠나시는 길에 따라 가두룩 해 주십사는 지 청을 사모님께서 들어 주신 뒤부터였습니다. 어르신께서 언제 출발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어르신을 따라 가려면 언제라두 어르신을 따라 나설 수 있두룩 가깝게 자리잡구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고행길 떠난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됐 나? ”
“첨에는 좀 길긴 하지만 보통 여행을 떠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르신 댁 일을 맡아 하면서 고행길 떠나신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결국 내 집사람이 길 떠나는 나를 따라 다 닐 사람을 구한 끝에 자네를 찾아내 채용했다는 결론이 나오는구만. 이럴수가 있는가? ”
그분의 말끝이 떨려 나왔다.
“그렇진 않습니다. 지가 그 사실을 먼저 알구 사모님께 청을 넣은 겁니다. 물력가게 정씨와 지가 이렇게 저렇게 사모님을 설득해 허락을 얻어 냈습니다.”
“물력가게 정씨는 내가 고행길 떠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결국 내 집사람한테서 들었을 것 아닌가? ”
'물력가게 정씨는 어르신께서 여행을 떠나신 다구만 알구 있었지 고행길 떠나신다는 사실은 모르구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라구. 물력가게 하는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하다니. 물력가게 정씨라는 사람. 어떤 사람인지 아는가? ”
· “지가 듣기에는 물력가게 정씨는 십년 전에는 복덕방을 했구. 그때 정씨가 소개를 해 지금 어르신이 사시는 집을 장만하시게 됐답니다.”
“내 집 깊숙이 침투해 들오올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로구만 그건 그렇구…. 이번엔 내 얘기 좀 듣게. 자네두 알구 있을지 모르네 만 내가 이번에 대천교 교주루 추대가 됐다네. 한 종교의 교주라면 막중한 책임을 지는 자리 아닌가? 그래서 우리 대천교에서는 교주루 주대받으면 일년 동안 고행을 하구 나서 교주에 취임하두룩 돼 있다네. 그런데 고행을 하는 동 안 심부름하는 사람이나 시중 들 사람을 데리구 가서는 안되두룩 돼 있네. 만일에 그 규정을 어기면 불성실 판정을 받게 되구 일년간 고행기간을 연장하는 조치를 당하게 된다네. 이만 하면 자네가 나를 따라오면 안될 까닭을 알겠나? 알았거든 나를 내버려두구 고만 돌아가 주게나.”
그분의 말은 사뭇 사정하는 투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분의 말에 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막일을 하는 것보다 별나게 몸이 편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다가 마음은 훨씬 더 고되지 않은가? 무슨 큰 덕볼 게 있다구…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느라고 우물쭈물 시간을 흘려보낸 모양이었다.
“자네가 나한테서 색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구 싶다거나, 나한테서 무얼 배우구 싶다 거나. 나를 도와 주구 싶다구 생각할지 모르네만. 어느 쪽이든지 자네가 이렇게 나를 따라 다니면 자네의 뜻과는 달리 내 일을 방해하게 되네. 내 처지를 헤아려 주게나.”
나는 ‘잘 알겠습니다. 저는 고만 물러날 테니 건강하게 안녕히 다녀 오십시오' 하는 말이 목 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 말을 찍어누르며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유씨는 내말만 들어야 해요. 유씨와 계약을 맺은 사람은 나지 그 어른이 아니예요. 그 어른이 무슨 말루 유씨를 꾀더라두 흔들리지 말구 그 분을 따라가두룩 해요. 알겠우? ’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그래요. 주인아주머니 말씀 마음 속에 깊이 새겨두구 정성껏 받드세요. 잘 아셨지요? ’ 그 집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르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르신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제 처지두 이해해 주십시오. 어르신을 따라가되 그 대신 어르신이 수행하실 고행에 방해가 되지 않두룩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라가겠습니다. 어르신, 너그럽게 살펴 주십시오.”
나는 최종 결정을 통고하듯 말하고 그분의 반응을 다소곳 기다렸다. 한참 동안 그분은 잠 자코 있었다. 한참 뒤에야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네가 나를 따라올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왜 나를 따라올 수 밖에 없다는 건지 말해주게나.”
그분은 애써 부드럽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와 계약을 맺어 주인아주머니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주인아주머니와 나 사이에 약속된 사항이었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한 말이 어떤 뜻을 지녔느 냐는 그분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어르신께서 교회의 지시를 받으시구 고행을 떠나시는 것처럼 저두 지시를 받구 어르신을 따라가구 있는 겁니다.”
나는 특별한 생각없이 이 말을 했다. 그분의 고행길이 막중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그분 뒤를 따르는 나의 행위도 그 나름으로 막중한의 미를 지녔음을 그분이 알아줬으면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분에게서는 깜짝 놀랄 만한 반 응이 일어났다.
“자네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 지시를 받은 행위라구? 누구한테서 지시를 받았다는 건가? ”
우선 그분은 격앙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해야만 했다.
“신한테서 지시를 받았습니다.”
“신한테서 지시를 받았다구 말했나? 신이 뭐라구 지시를 했지?”
“이렇게 저렇게 연줄이 닿아 지금 지가 어르신 뒤를 따라가구 있두룩 된 것이 신의 지시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
'잘 둘러대는구만 나를 따라 다니며 감시하라구 자네한테 지시한 자가 누군가? ”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결에 불어버리구는 시치미 떼지 말게나. 지시를 받구 자네가 나를 따라 다니면서 할 일이 무어지? 내가 잘못하는 일을 찾아내 어디다 보고하는 것이 자네 임무인가? ”
“어르신. 당치두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저는 생각지두 못한 일을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구 기십니다.’’
‘내가 교주루 추대된 일을 몹시 시기하는 사람이 몇 있었지. 그 가운데 누가 자네한테 지시를 내리는 건가? 무서운 세상이구 비겁한 짓 거리로구만. 그 자들이 믿는 건 하늘이 아니라 이 세상 권세와 자기 개인의 영달일 뿐이지. 대세에 눌려 겉으루는 내가 교주루 추대받는 일에 앞장 서서 훼방 놓치는 않았지만 뒷구멍으루는 나를 무너뜨릴 공작을 꾸미구 있었구만. 하수인들을 내 집안에 침투시키는 방법두 기기 묘묘해. 오래 전부터 거래가 있는 물력가게 주인을 포섭해 그를 통해 하수인을 내 집안에 침투시키구 내 고행길을 따라오며 훼방하구 감시 하두룩 일을 꾸몄지 않은가? 자네 이름이 뭐라구 했지?'
독백하듯 혼자 말을 이어가던 그분이 내게로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유관중이라구 합니다.”
나는 그분을 마주보며 대답하다가 가슴에 와 닿는 냉기로 섬뜩함을 느꼈다. 나를 쏘아보는 그분의 눈빛에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다.
“자네 본명인가? 호적부에 오른 이름이냐구? ” “그렇습니다. 주민등록증두 그 이름으루 발부 됐습니다.”
“자네두 대천교 신잔가? ”
'아닙니다. 대천교라는 종교가 있다는 사실두 모르구 있었습니다.”
· · 자네가 이 일을 해 주는 조건으루 받는 게 무엇인가? 돈인가? 이권인가?”
“아닙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가슴 한 쪽에 무엇이 걸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품값 이외에 주인아주머니가 장가 들여 주겠다고 한 말을 약속으로 치부해 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골수분자로구만.”
“예? 어르신 하시는 말씀의 뜻을 잘 알지 못 하겠습니다만, 전 지금 어르신한테 엄청난 오해를 받아 억울한 처지에 놓였다는 생각을 하구 있습니다.'
“알구보니 자네와 나는 오월동주의 입장에 놓여 함께 다녀야 할 처지로구만 이왕 그렇게 일이 벌어졌으니 자네 알아 듣기 쉽게 털어 놓구 얘기하겠네. 자네는 나를 모함하구 제거하려구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보낸 첩자야. 내 말이 틀렸나?'
“아一, 어르신. 결단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르신께서 그토록 오해를 하시니 숨기지 않구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어르신께서 아까 짐 작하신 대루 전 사모님께 일년 동안 채용된 사람입니다.'
나는 감옥에 들락거렸던 일과 그 이전 일을 빼 놓고는. 감옥에서 나온 뒤에 살아온 일들을 되도록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그분은 내 말이 끝나자 시 답잖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는 이 시간 뒤루 어떻게 할 작 정인가? 나를 끝끝내 따라 다니며 내 고행을 방해할 텐가, 아니면 마음을 고쳐 먹구는 내 갈길 가두룩 내버려 두구 자네 갈길 찾아 갈 텐가? ”
그분의 말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르신. 용서해 주십시오. 전 앞으루 일년 동안 어르신께서 고행을 무사히, 보람있게 마치 시기까지 어르신 근처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일년 동안은 사모님께 속한 사람이며. 저를 지켜 주는 영혼두 그 사실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어르신의 고행을 절대루 방해하지 않겠다구 약속 드릴 테니까 어르신 따라가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 일만은 지가 뒤루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어허, 하느님의 뜻인가부로구나. 석가두 예수 두 도를 얻기 전에 귀신과 사탄한테 시험을 받아야 했었지. 하느님게서는 나한테두 예외를 두 시지 않으시는구나. 유관중. 네 정체는 하느님께서 내 고행길을 빛내시려구 준비하신 악마의 사신이었구나. 그래, 너두 그 나름의 사명을 가지구 내 앞에 나타났으니 임무를 완성하지 못 한 채 떠나갈 수는 없을 테지. 좋아. 함께 가자 꾸나.”
이윽고 그분에게서 동행 허락이 내렸다. 그러나 나는 그 대가로 어처구니 없는 누명을 뒤집 어 썼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졸지에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있었다.
어느덧 해가 높다랗게 떠올라 대지 위로 녹 작지근한 기운을 퍼뜨려 놓았다. 길에는 반소매 옷차림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양복 저고리를 벗어 팔에 걸치고 다니는 사람에 스웨터를 벗어 허리에 동여매고 다니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그들에 비하면 그분과 나의 옷차림은 투박했다. 낮보다도 밤을 생각한 옷차림이었다. 한데서 자게 될 경우. 불 안땐 방에서 자게 될 경우가 녹작지근한 낮시간보다 더 배려가 되었다. 정말이지 어디 가서 자리를 잡기 전에는 날마다 잠자리를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을 터였다. 민박을 하든 여관방에 들든 그럴 경우에 방 둘을 구해야 할지 어떨지도 문제가 될 것이다.
그분과 나는 다시 길을 걷고 있었다. 사탄의 앞잡이로 낙인이 찍혔건 말건 그분과의 동행이 인정되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나는 여전히 그분 뒤를 따라서 걸었지만 그분과의 거리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자꾸만 말을 걸고 싶어지는 것이 걱정이었다. 말을 주고 받으면서 걸으면 힘이 한결 덜 들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나의 동행을 인정했을 뿐 먼저 말을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어르신.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
나는 그렇게 말을 걸어보았다.
“어르신이라구 부르지 말게. 내가 어째서 자네 어르신인가? 자네 어르신은 사탄의 괴수잖은가? ”
그분의 대꾸였다.
“그럼 뭐라구 불러 올리면 되겠습니까? ”
“꼭 뭐라구 불러야 할 이유가 없잖은가? 내 이름은 박도상일세.’’
“그럼 선생님이라구 불러 올릴까요? ’,
'나는 사탄의 졸개한테 선생님 소리 듣기 싫 네.”
'그럼 대천교 교주님이라구 불러 올리면 되겠습니까?'
'자네가 나를 그렇게 부르면 자네 괴수한테 혼날 텐데? 자네 괴수는 내가 대천교 교주라구 불리는 걸 아주 싫어할 것일세.”
'대천교 교주님이라구 불러 올리기가 너무 길다구 여겨질 적에는 그냥 교주님이라구 불러 올리겠습니다.”
“나는 사탄교 교주가 아닐세. 자네한테 대천교 교주라구 불리기두 싫네. 이제 말 시키지 말게.’’
그분과 나는 입을 다물고 투벅투벅 걸음을 옮겼다. 도시락 꾸러미가 자구 허벅다리에 부딪혔다.
“어르신. 시장하시지오? 벌써 점심 때가 다 됐는데요? 새벽에 집 떠날 때 사모님께서 싸 주신 도시락이 있습니다. 어디 길가에라두 앉아서 드시구 가시지오.'
내가 다시 말을 부쳤다.
‘사탄의 졸개야. 어느새 시험을 시작했는가? 사탄은 고행을 하면서두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찾아 먹는지 몰라두 우리 하느님의 아들 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느니라.”
그분의 대답이었다.
'날이 더워서 종일 햇볕 속에 들구 다니면 음식이 쉴지두 모르겠습니다. 사모님께서 도시락을 전해 주시면서 점심 때 어르신과 함께 먹으라구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의 졸개야. 나를 유혹하지 말아. 나를 배부르게 해가지구 타락으루 지옥으루 끌구 가려느냐? 고행은 육신의 욕망을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우주의 근원인 하느님과 그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정신이다. 식욕을 참을 수 없어 안달이 나거든 너 혼자 먹어라.'
나는 다시 입을 다물고 그분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걷는 것이 지루했다. 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렇게 걸어가야 되는 걸까. 그분은 여러가지 고행방법 가운데서 걷는 고행을 택한 것일 까. 아니면 목적지를 정해 놓고 그곳에 이르기까지만 걷는 것일까. 나는 그분의 걸음걸이를 눈여겨 보며 생각했다. 그분의 걸음걸이는 새벽이나 아침보다 무거워 보였다. 걸음을 옮겨 놓을 때 신발 들어 올리는 높이가 낮아졌고 허리께의 유연성이 무디어져 있었다.
“어르신, 어디까지 걸어 가십니까? 걸음걸이와 몸놀림이 무거워 보이십니다.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고행기간은 일년입니다. 체력이나 고행 강도를 안배하셔야 합니다.,’
“선량한 사탄의 제자로구만 자네는 쉬어가구 싶으면 쉬어 가게나.'
'어르신, 보시다시피 지 몸은 무쇠같이 튼튼 합니다. 그리구 중노동으루 생계를. 삼아 왔습니다. 그렇게 단련된 몸인데두 걸음걸이가 무거워 졌는데 어르신께서는 저보다 더 힘드시지 않겠나 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고행을 하는 건 무사하게 마치기 위함이 아니야. 경력을 쌓기 위해서 고행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고행을 하는 중에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면 죽든 살든 그것으루 고행의 목적을 이룬 것이야. 어허, 내가 왜 사탄의 졸개한테 이런 얘기를 하구 있지? ’’
'그렇지만 어르신께서 일년 동안의 고행을 무사히 마치시구 돌아와 중책을 맡아 주시기를 기다리는 대천교 교인들과 사모님과 자제분이 기시잖습니까? 사모님께서는 어르신이 병에 걸리실까봐 제일 크게 걱정을 하십니다. 병이 들어 중간에 고행을 그치시기라두 하시는 날에는 죽두 밥두 안되구 쌀만 버리는 꼴이 된다구 말 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건가? ”
“제 의견을 말해보라구 하신다면, 오늘 하루는 걷는 고행을 하시구 낼 부터는 한 군데를 정하시구 정신적 고행을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고행두 각기 자기 소질에 맞두룩 해야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잖습니까? 어르신께서는 정신적 고행이 맞으실 테구、저같은 것 한테는 육체적 고행이 맞을 것입니다.’’
'사탄의 제자한테서 고행 강의를 듣게 될 줄은 몰랐군. 정신적 고행은 어떻게 하는 거구, 육체적 고행은 어떻게 하는건가? ”
“어르신께서는 조용한 산속 마을 같은데 자리를 잡으시구는 기도나 묵상이나 성경 연구 같은 걸 하시는 게 알맞구. 저는 어르신께서 잡수실 음식을 장만하거나 다른 여러가지 뒷바라지를 해 드리는 게 알맞을 거 같습니다.”
'고행이 그렇게 하는 건가? 하인 데리구 조용하구 공기 맑구 경치 좋은 산골 마을에 수양 하러 가자는 거 같구만. 사탄의 졸개야. 온갖 달콤한 유혹으루 나를 넘어뜨리려 하는구나. 이제 고만 입다물거라! ’’
그분과 나는 말없이 걸음을 옮겨갔다. 도시락 꾸러미가 내 허벅다리에 부딪히곤 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