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길이 시작되었다. 비탈길가에도 드문드문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불 밝힌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길 양편으 로 늘어서서 따라오던 건물들은 비탈 아래쪽에서 걸음을 멈춘 듯 끊어지고, 비탈이 시작되고부터는 나무들이었다. 비탈을 오르면서 나무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듯 가로등 불빛에 어슴프레 드러난 비탈 위쪽은 마치 깊은 숲처럼 울울해 보였고 비탈길은 깊은 숲속을 헤쳐가는 오솔길인 듯 휘휘하고 쓸쓸해 보였다.
문득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나는 낚아채듯 들여 마셨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지나가던 부스러기 향기가 아니었다. 비탈길 일 대의 대기에 가득 고여 있던 향기의 끝자락이었다. 향기는 내 폐부를 가득 채우고 다시 내 몸을 휘감았다. 아카시아꽃 향기였다. 비탈길을 오를수록 향기는 더욱 짙어져 중중하게 고인 향기의 한가운데로 헤쳐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었다. 초희의 숨결이었고, 방금 전 떠나온 집 젊은 여자의 숨결이었다.
“그분 뒤를 언제까지나 그렇게 입 다물고 따라갈 거예요? 그분은 당신이 바짝 뒤따라 가고 있다는 걸 지금쯤은 알아차리셨을 거예요 인사를 드리고 말을 터야 하잖아요?”
그것은 초희의 목소리인가 하면, 그 집 젊은 여자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러자 발소리가 귀에 들렸다. 앞서 가는 그분의 발소리와 뒤따르는 내 발소리였다. 그분의 발소리는 가죽구두의 딱딱한 밑창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운동화나 작업화의 부드러운 고무창에서 나는 소리였다. 바닥을 디딜 때 부딪는 소리가 아니라 끌릴 때 스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들리기도 했고 안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내 발소리는 투벅투벅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내 신발도 작업화이기는 했지만 고무창이 딱딱하고 두터웠다. 그러니까 그분 신의 밑창과 내 신의 밑창을 비교한다면 승용차 바퀴와 대형 트럭 바퀴의 차이였다.
어쩌다가 차가 지나갈 때면 발소리는 차소리 에 휘말려 지워져 버리지만, 차가 지나가고 나면 비탈길은 정막에 싸이면서 발소리가 살아나 자꾸만 커지곤 했다. 삼사미터 앞서 가는 그분의 귀에 뒤따르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돌아보는 일 없이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뒤는커녕 옆도 보지 않는 것 같았다. .
문득 그분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분과 내 허리를 둘러 매어 이어진 끈이 팽팽히 당겨지는 듯한 느낌에 나도 걸음을 빨리 했다. 빨라진 발소리가 길 위로 떽떼굴 굴렀다. 나는 그 소리를 줄여보려 했지만 마음뿐이었다. 이십미터쯤 그렇게 걸었을까. 그분의 걸음 속도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나는 그분과의 간격을 일미터쯤으로 줄여 놓은 뒤에야 걸음 속도를 늦출 수가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그분과의 간격이 삼사미터로 벌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는 느리게 울렸다.
이제 내 존재를 그분한테 정식으로 알려야 할 때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비탈길은 어느덧 중턱을 지나 마루터기의 모습을 저만치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나는 어험어험 헛기침을 했다. 그분의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나도 보조를 맞추어 걸음을 빨리했다.
이윽고 오르막길이 끝나고 고갯마루였다. 그 분의 발이 마루터기를 밟는가 하는데 그분은 걸음을 딱 멈췄다. 그 멈춤을 예상하지 못한 터여서 나는 급브레이크라도 밟듯 그분과 부딪 치기 직전에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분과 내가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멈춰 서 있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꽤 오랜 동안인 것 같기도 했고 한순간인 것 같기도 했다. 그 분이 몸을 돌려 나와 마주섰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별안간 멈춰 서는 바람에 놀라셨다면 미안합니다. 나는 잠시 여기 서서 숨을 가라앉힐 생각이니 걸음을 이어 가십시오.'
그분은 옆걸음으로 내 앞길을 터 주기까지 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허리를 깊숙하게 꺾어 절부터 했다.
“누구시오?”
그분이 물었다.
“유관중이라구 합니다. 어르신께서 잘 지도 편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얼결에 그렇게 대답해 놓고는 같잖은 소리를 했으면 어쩌나 싶어 주눅 드는 자신을 깨달았다.
“누군데 길 가다 말구 영문 모를 소릴 하는 거요? 나를 다른 사람으루 잘못 안 걸 테니 자세히 보시오.”
그분은 그 동안 들고만 걸었지 짚지 않던 지팡이를 앞으로 가져와 나의 접근을 저지하듯 하며 말했다.
“저…, 아까 어르신께서 집 대문을 나오시기 바루 전에 인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사모님께서 두 잠시 소개 말씀을 드렸구요.”
“그래요? 그렇다면 내게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치 않다구 그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두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따라왔오?”
그분의 말소리는 차고 무뚝뚝했지만, 나를 알 아보았다는 사실이 나를 어느만큼 안심하게 했다.
“저두 고행을 해보려던 차였습니다. 마침 어르신께서 고행을 떠나신다기에 저두 어르신을 따라가서 고행하는 법을 배우구 싶다구 사모님께 말씀 드렸더니… 그게 이렇게…”
내가 말을 우물우물 끝내고 났을 때인가, 아니면 말을 하는 도중이었던가, 나는 그분이 낸 어떤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흥, 하고 콧방귀 뀌는 소리인지, 어험, 하고 헛기침하는 소리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고행이란 게 몰려다니면서 하는 놀음이 아니예요 소풍이나 여행 떠나듯 길을 떠나온 모양인데 잘못 생각했으니 집으루 돌아가시오 집에 가서 고행이 어떤 건지 알아보두룩 하시오. 보아하니 젊은 사람인데 젊은 사람은 고행보다 세상 살아가는 법을 먼저 열심히 배워야 해요. 알아 들었거든 발걸음을 돌려요.”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 잘 알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경우는 좀 특이합니다. 제 아버님은 꽤 큰 사업을 하셨는데 평소에 이런저런 사람 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님 사업이 망해 버려 아버님이 곤란해지셨을 때 그 사람들은 아버님을 위로해 드리거나 도와드리기는커녕 비난하구 배신해 아버님을 더 궁지루 몰아 넣 었구, 그 때문에 아버님은 병을 얻어 돌아가셨습니다. 설상가상으루 어머님은 정신이 이상해지셔 가지구 집을 나가버리셨구, 우리 아이들 사남매는 나뭇가지 찢기듯 이 집 저 집으루 흩어져서 집안이 풍비박산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전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싫어졌구 맘을 다스 릴 수 없어 떠돌아 댕기던 중이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나는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분이 가로막지 않고 내 말을 들어 주었으니 나는 중요한 절차 하나를 무사히 치러낸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도의 숨을 내쉬기에는 넘어야 할 고개가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이제 겨우 첫번째 마루터기에 올라 섰을 뿐인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니.
“딱하게 됐구려. 그렇지만 그만큼 고통을 겪구 그만큼 방황을 했으면 젊은이가 감당할 몫은 충분히 해낸 것이니 이젠 걸음을 돌려 세상 으루 돌아가시오. 세상 속에서 제 자리를 찾는 일에 힘을 쏟두룩 하시오. 그것이 제대루 된 절차일 거요.”
옳은 말로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싶어지는 것을 참아냈다. 고행을 하겠다고 거짓말을 시켜 놓은 내 처지로는 그분의 그 옳은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일 수가 없었다.
“일년 동안만 더 세상을 등지구 살면 맘이 가라앉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어르신 뒤를 따라가두룩 해 주십시오 일년 뒤에는 어르신 가르치심 대루 세상 안으루 들어가서 제 자리 찾아 잡구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나는 문득 세상 법을 어기며 살아갈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만나는 사람을 상대로 거짓말하기를 일삼았고. 나중에는 거짓말 그 자 체를 즐기게 되었었다. 상대가 내 거짓말에 솔깃하게 넘어갈 때 나는 얼마나 만족해 했으며, 상대방이 내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을 때 나는 좌절을 느끼며 얼마나 깊은 절망에 빠져 들었었던가.
“젊은이 생각이 정 그렇다면 일년 더 세상을 등지구 살아보구려. 그렇지만 나를 따라오진 마시오. 젊은이의 길과 내 길은 서루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가 나와 함께 가면 서루가 해야 할 일에 어긋나구 방해가 돼요. 자, 그럼 젊은이가 앞서 가시오.”
그분의 말투는 여전히 차고 무뚝뚝했지만, 그래도 감정을 다독거려 가라앉혀 가지고 나를 타이르려는 속마음이 배어들어 있었다. 그렇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타이름을 따를 수가 없었다.
“어르신,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렇지만 제가 어르신을 따라 가더라두 걸리적거리지 않두룩 멀직하게 따라갈 테니까 제 모습이 눈에 띄더라두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나는 말을 마치고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였다.
“너 누구냐? 네 정체가 뭐야?”
내가 숙였던 머리를 쳐들기도 전에 내 정수리로 매질처럼 떨어져 내린 그분의 호통이었다. 호통 소리는 조금씩 희석되어 가는 어둠 속으로 또 내 내부로 울려 퍼지며 메아리졌다. 내 몸은 앞으로 굽은 채 굳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흩어졌던 정신을 추스려 가다듬느라고 잠시 우물거렸다.
“너, 내 집에서 며칠 묵었다구 했겠다. 난 너를 알지두 못하는데 어떻게 내 집에서 묵었지? 솔직하게 말해봐.”
의심과 분노를 품은 낱말들이 다시 내 정수리로 돌멩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나는 돌멩이에 맞아 흩어진 정신을 주먹을 움켜쥐며 추스렸다.
“세상 등지구 떠돌다 보면 문득 세상이 그리워질 때가 생깁니다. 그럴 땐 세상 울타리 안으루 들어와 얻어먹기두 하구 일거리 찾아 일을 하기두 하면서 외로움두 달래구 영양 보충두 하구 비상금두 벌군 합니다. 이번에두 그렇게 잠시 세상 울타리 안으루 들어와서 일거리 를 찾던 중 어르신댁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일을 마치구 세상 울타리 밖으루 떠날려던 차에 어르신께서 고행길에 오르신다는 소식 듣구 사모님께 부탁을 드려 어르신 뒤를 따르게 된 겁니다. 그뿐입니다.”
“미리 준비해 논 대답같이 술술 말을 잘하는군. 그 말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내 일과 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세상 울타리 안으루 들어가든 밖으루 나가든 맘대루 하되 나를 따라오진 말아. 잘 알아들었지? 나를 따라오면 안 돼!”
그분은 못을 박듯 하고는 몸을 돌려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눈으로 그분의 뒤를 쫓다가 십미터쯤 간격이 벌어지자 걸음을 옮겨 뒤따랐다. 그분의 어깨 너머로 한강 줄기가 내려다 보였다. 강변 가로등이 사월초파 일의 연등처럼 길게 늘어선 사이로 강물이 길게 펼쳐졌는데, 강물은 가로등과는 상관없이 형광 물질을 바른 듯 어둠 속에서 희멀건 색깔로 공중에 떠 있었다. 소음이 비탈길을 거슬러 올 라왔다. 새벽 빛, 새벽 소리였다.
첫번째 시도는 실패였다. 그분 댁에서 있었던 일을 첫번째 시도로 치면 두번째 시도에 실패 한 것이다. 꿈 속을 걷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혹은 영화 속을 걷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 꿈 속이고 영화 속이라면 부담없이, 호기심을 머리 속에 가슴 속에 가득 채워 넣고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그분 뒤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꿈 속의 상황이다. 영화 속의 한 장면 이다. 나는 입속으로 뇌었다. 그러자 정말 꿈 속이나 영화 속에서 새벽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에 감싸여 들어가고 있었다. 말없이 그분을 뒤따르고 있는 사실이, 따라오지 말라는 그분을 따라가는 사실이 어색하거나 거북스럽게 느껴 지지 않았고, 그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왜 따라오느냐, 정체가 무엇이냐, 하고 호통칠 일이 두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앞서서 걸음을 옮겨 가는 그분이, 그림을 바라볼 때처럼 내게 는 편안했다. 그분과 나 사이에는 연극 영화 속에서의 주어진 역할만 있을 뿐 현실에서는 아무런 이해 관계로도 얼키거나 매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느껴졌고. 그렇게 느껴야 한다며 어떤 힘이 나를 끌고 떠밀어 그 느낌 속에 쳐 넣었다.
강둑에 이르렀을 때에야 나는 현실로 다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대기 속에서 밤의 색깔, 밤의 흔적은 다 바래 고 지워지고 없었다. 새벽 어둠 속에 갇혔으면 서도 형광 물질처럼 빛을 내던 강이 제 모습 제 색깔을 찾은 것이 현실감을 일깨워 주었을까. 어둠의 막이 걷히고 시야 가득 드러난 도시의 모습이 나를 꿈 속에서 영화 속에서 끌어 내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차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다녔다. 뒤쪽에서 달려와 앞질러가는 차들, 앞쪽에서 다가와 엇갈리며 뒤로 사라져가는 차들, 차들은 옆을 지나면서 바람과 굉음을 일으키고 매연과 냄새를 뿌려 놓곤 했다. 행인들도 차츰 늘어갔다. 마주 오는 행인, 같은 방향으로 가는 행인. 대기에는 소음이 먼지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밤의 어둠이 가시면서 수런수런 일어나는 아침의 소음, 복잡한 도시뿐만 아니라 고요한 산중이나 한적한 들판에서도 느껴지는 아침의 소음, 그것은 소리가 빚어내는 소음이 아니라 광선이 빚어내는 소음인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분은 주저않고 다리의 인도로 걸음을 옮겨 갔다. 현실감을 되찾았지만 그분을 뒤따르는 내 마음은 고갯길에서보다 한결 편해졌다. 복잡해지는 주변 풍경과 소음이 그분과 나 사이에 끼어 들어와 가림막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분의 뒷모습을 새삼스럽게 살펴보았다. 희끗희끗한 뒷머리, 꽤 넓고 탄탄해 보이는 어깨, 그 어깨 양쪽에 멜빵이 걸쳐지고 두툼하 게 부푼 륙색이 매달려 등을 가리고 있었다. 오십대에 접어든 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곧고 탄력있는 몸매와 유연한 걸음걸이였다. 왼손에 든 지팡이는 짚으려고 가지고 온 것이 아 니라 장식이나 어떤 상징물로 가지고 온 것인 양 그냥 들고만 있었다.
문득 저런 분을 대장으로 섬길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가슴 안 벽에 서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내 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부모 슬하를 박차고 나와 제멋대로 세상을 굴러다니며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섬길 대장을 은근히 찾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기 쉽지 않을테니 말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 자신이 대장이 되고- 우두머리가 되는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멋있는 우두머리의 인정받는 부하가 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곤 했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동네 골목대장의 충실하고 인정받는 졸개가 된 자신을 무척 뽐내며 든든해 했고, 골목대장의 권위가 사라지게 되자 재주가 비상한 먼 친척 아저씨를 내 마음 속에 영웅으로 맞아 들여 섬기며 자랑하고 다녔었다. 그 아저씨가 영웅의 날개를 잃고 땅에 떨어져 버린 뒤에도 나는 이런저런 인물들을 대장과 영웅과 우상으로 삼아 의지하며 마음을 채우곤 해왔다. 그래서 기껏 감옥 출입을 일삼다가 요모양 요꼴로 구겨졌지만, 그것은 운수가 나빠 대장을 잘못 만난 탓이었을 뿐이었다. 대장을 잘 만나기만 했다면 내 처지가 정반대로 활짝 펴져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훌륭한 대장을 찾아 만나 섬기고 싶은 바람이 씨앗으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노릇이기도 했다.
초희는 나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초희도 하나의 대장이고 영웅이고 우상이었을까. 일곱번째 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을 때 나는 속이 텅 비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내 중심을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육개월짜리 징역 세번, 일년짜리 징역 세번, 일곱번째는 일년 반 짜리 징역이었다. 서른살 문턱 앞에 와 있었다. 이러면 안된다. 이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마음 속으로 뼈저리게 외쳤지만,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 줄 대장를 찾고 기다리는 자신을 깨 달았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시구 아들루 받아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 앞에 꿇어앉아서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말했다. 비스듬히 돌아앉은 아버지는 담배 연기만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가 하면서 한동안 대꾸가 없더니 불쑥 내뱉듯 말했다.
“너 할 탓이다. 난 앞으루 이삼년 동안 니가 하는 일을 지켜보는 것밖에 해줄 게 없다. 어 험, 어험.”
'아버지, 다시는 감옥에 들어가기 싫습니다.”
“감옥에를 들어가구 싶어서 들어가는 사람두 있다더냐?”
“아버지가 보호해 주십시오”
“내가 보호해 주지 않아서 감옥에 들락거린 것처럼 말하는구나.”
서로의 말이 겉돌고 어긋나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의 대장이 돼 주십시오. 아버지 가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 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습니다. 제가 잘못되고 비뚤어진 길루 가려구 하거든 가둬 놓구 때려서라두 붙잡아 주십시오. 그런 아버지의 감금과 매를 달 게 받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습니다.’
이런 말을 아버지한테 하고 싶었지만 입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아버지, 저를 용서하시구 받아 들여 주십시오”
나는 처음 한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내가 언제 너를 내 집에서 나가라구 내쫓더냐? 여기서 어떻게 더 받아 들이래는 게냐?”
아버지의 말대로 가족이 나를 내쫓지는 않았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오히려 나에게 잘 대해 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이 내 가슴에 소외감을 안겨 주었다. 나를 진정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로구나. 그런 생각은 나를 다시 가정 밖으로 밀어냈다. 어디를 나가 돌아다니느냐, 당분간 집안에 틀어박혀 있 거라. 아버지가 그렇게 야단을 치며 내 뒷덜미라도 잡아 눌러 앉혔다면 나는 눈물 날 듯 고마워하며 아버지 옆에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포기한 자식인 양 나를 내버려 두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먼 친척 아저씨를 찾아가 보았다. 재주가 비상한 아저씨, 한때 유씨 가문의 자랑이었고, 유씨 가문 청소년들의 영웅 이며 나의 우상이었던 유지한씨. 동사무소 옆, 뒤주 속 만한 사무실에 갇히듯 쪼그리고 앉아 남의 서류를 대신 써 주는 아저씨의 초라한 모습 앞에 우상을 잃고는 좌절의 허망함을 안고 발걸음을 끊었었다. 그렇지만 그 아저씨는 불현 듯 향수로 살아나 내 발걸음을 그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 아저씨가 지닌 어떤 훌륭하고 빼어난 면이 남아서 아버지 대신 나를 붙잡아 앉히고 다스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 아저씨를 찾아서 만나기는 했지만 그 아저씨는 대서방을 집어치우고 복덕방에 가서 앉아 있었다.
“요즘엔 사람들이 유식해져서 웬만한 민원서류쯤 자기 손으루 꾸며 제출하니 대서방에 일 거리가 있어야 말이지.”
그 아저씨는 묻지도 않은 말을 꿍얼꿍얼 대꾸했다.
“아무 일이면 어떻습니까? 아저씨, 가슴 펴구 떳떳하게 사십시오”
이 아저씨가 전 같으면 감옥에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나를 호통으로 꾸짖고 나서, 술집으로 데려가 좋은 안주 시켜 놓고 술 권하며 다독거려 주었을 텐데, 생각하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나 내가 한참 동안 꾸물거리고 앉아 있었지만 꾸짖거나 타이르지도 않았고, 술 한잔 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영웅이나 우상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내 마음을 붙잡아 줄 영웅이나 우상이 필요했다. 밝은 길로 이끌어 줄 우상을 구할 수가 없다면 어두운 길로 이끌어 갈 우상이라도 구해야 했다. 나는 어두운 뒷골목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초희를 만난 것은 그 뒷골목 어귀의 어느 술집에서였다. 그 날은 술손님이 좀 뜸했고, 곱상 해 보이고 착해 보이는 젊은 여자가 오랜 시간 내 곁에 붙어 앉아 술시중 말시중을 들어 주었다.
“술 고만 마셔요. 술 고만 시키구 얘기만 해두 괜찮아요.”
그 여자가 말했다.
“흥, 사정 봐주는구만 아니, 술값 못받을까봐 겁나나? 내가 감옥에 일곱번 들어갔다 나온 전과자지만 절대루 술값 떼먹지 않아. 외상 긋지두 않구 현금으루 술값 치를 테니까 걱정 말구 술 가지구 와.”
나는 어깃장 놓고 떼쓰듯 대꾸했다. 그 여자가 만만하게 느껴지고 푸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술에 취해 그 여자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 놓으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문득문득 정신 차리듯 내가 왜 이러나, 술집 여자한테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다는 건가, 하며 자신을 비웃어보곤 했지만, 다시 정신 잃어버리듯 지껄여대곤 했다. 함부로 지껄여 여자가 비웃겠구나, 하는 생각을 얼핏얼핏 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난 외로운 사람이야 누구한테 좀 기대구 싶어. 나 안아 줄 사람 좀 구해줘. 너, 아니 당신이나 좀 안아 주지 않을래? 나랑 결혼하자. 결혼해서 둘이 의지하구 살자. 누가 뭐랠 거야? 쓰러지지 않게 서루 기대가지구 아름답구 슬프게, 아니 슬프게는 빼야지. 아름답구 행복하게 살아 가겠대는데 누가 뭐랠 거냐구? 안 그래?”
그렇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주절거리던 기억도 났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내가 낯선 방에서 그 여자와 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 여자가 초희였다.
“내가 어떻게 여기 와 있수?”
“여기가 어디라구 생각하세요?”
나는 윗몸을 일으켜 앉아 방안을 둘러 보았 다. 세로 5미터 가로 6미터 정도의 제법 넓은 방 한쪽 벽에 크지는 않지만 장롱이 놓였고, 또 다른쪽 분홍색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밑에 는 갖가지 모양의 화장품병이 올라앉은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여관방은 아닌 거 같은데…”
“내 방이에요 후회 되세요?”
여자도 윗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자는 잠옷을 입었고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흩으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벌써 잠에서 깨어나 몸매를 추스린 뒤에 다시 자리에 누운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겉옷은 벗었지만 속옷은 입은 채였다.
“후회할 까닭이 있수? 이렇게 안방까지 데려다가 편히 재워 줘서 고맙지. 술을 마시다가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됐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물은 거요”
“갈 데 없는 사람이니 재워 달라구 떼를 쓰데요. 결혼하자구두 했어요. 결혼해서 서루 기대구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아가자구두 말했어요
“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구 생각했수?”
“결혼하자는 말보다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누구한테 기대구 싶다는 말이 더 살뜰하게 내 가슴에 와 닿데요. 술 취해서 한 말이지만 마음이 외로운 사람 같아 보였어요. 택시를 태워 보낼까 하다가 내 방으루 함께 왔어요. 취한 사람 혼자 보냈다가 사고 나면 어떻게 해요?”
“고맙구만 그런데 내가 감옥에 일곱번이나 들락거린 전과자라는 말두 했수?”
“예, 했어요.'
“전과자를, 그것두 생판 처음 본 전과자를 안방에 데려다가 같은 이불 속에서 재워 주기까지 한 당신은 누구요?”
“술을 같이 마시면서 오랫동안 얘기를 했잖아요? 나두 외롭구 누구한테 기대구 싶다는 말을 할 사람을 맘속으루 기다리구 있었는데, 당신이 내가 하구 싶은 말을 대신 해주더라구요.”
“당신도 감옥에 들어가 본 일 있수?”
“없어요. 한번쯤 들어가 봤더라면 당신을 더 잘 알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당신은 근본이 착한 사람으루 보였어요. 겉으룬 우락부락한 척 해두 맘은 여린 사람으루 보였어요.'
“나 여기서 지내구 싶은데, 되우? 부모 형제 가 사는 집은 있는데 난 자꾸만 객식구 같은 생각이 들거든. 막일을 해서라두 내 밥벌이는 할 거요. 감옥에 있을 적에 미장일을 웬만큼 배워 뒀거든.”
“당신이 있구 싶은 만큼 얼마든지 있어두 좋아요. 평생이래두요. 찾아올 사람은 아무두 없으니까...”
“어젯밤에 혹시 내가 무슨 일 저질르지 않았수?”
나는 여자의 잠옷과 내 속옷을 번갈아 살펴 보며 물었다.
“아니오. 착한 아이처럼 얌전하게 잘 잤어요. 여자는 수줍어하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그 날 아침부터였다. 여자는 어리둥절해질 만큼 정성 스럽게 대해 주었다.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내 겉옷을 내려 주었고, 세숫물을 떠 주었고, 내가 세수를 하는 동안 이부자리를 개켜 올렸고, 세수를 마치자 깨끗하게 빨아 말린 수건을 내 손 바닥 위에 올려 놓아 주었고, 얼굴과 손의 물기를 다 닦자 수건을 받으며 “방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침밥 지어 올 테니까요. 속 쓰리지 않아요? 북어국 끓일께요. 그리구 낼부터는 좀더 일찍 밥을 지을 께요.” 하고 말했다. 여자는 쌀을 일어 안치고는 밖에 나가 북어를 사가 지고 돌아왔다. 삼십분쯤 지났을까. 여자는 밥상을 차려 들여 왔다.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흰 쌀밥에 북어국에 김치에 계란프라이에 콩자반에…. 아주 얌전한 밥상이었다. “어서 드세요. 천천히 꼭꼭 씹어 드세요 낼 아침에는 고기국을 끓일께요, 오늘 아침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소홀했어요.'
여자는 국을 숟가락에 떠서 내 입안에 넣어 주기도 했고, 김치나 콩자반을 내 밥숟가락 위에 얹어 주기도 했다. 나는 꿈을 꾸는 기분이 되었다가 문득문득 의심을 품었다가 했다. 객지에 돈 벌러 가서 오랫동안 머무르다가 돌아온 남편 대하듯 나를 대하는 이 여자의 정체는 무 엇일까. 실연을 당했거나, 금슬 좋던 남편이 죽어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미쳤지만 곱게 미쳐 나를 헤어진 애인이나 죽은 남편의 대리인쯤으로 여겨 애인이나 남편에게 쏟아 붓고 싶었던 정성을 엉뚱한 사람한테 쏟아 붓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여자의 이런 짓 거리는 오래 가지 못하기 쉽다. 내가 자기 애 인이나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순간 태도가 돌변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공상이 아니었다.
“나 같은 사람한테 대접이 너무 융숭해서 어리둥절하구 미안하구 또 불안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리둥절하구 미안하다는 건 그렇다 치구 불안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여자는 내 얼굴 표정에서 무엇을 읽으려는 듯 살피는 눈으로 물었다.
“난 지금 꿈을 꾸는 거 같구 그 꿈에서 금세 라두 깨어날 거 같거든. 왕이 된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나니 거지루 돌아와 있더란 얘기 아시우? 끔찍하게 아끼구 좋아하던 애인이나 남편이 있었수?”
“있었던 게 아니구 있으면 하면서 살아왔어요.”
“당신은 외모가 못나지두 않았구, 나이두 스물대여섯은 돼 보이구, 또…”
“또 술집 접대부인 처지에 남자 관계가 없었겠느냐는 말이지오? 변명하구 싶진 않아요. 그렇지만 당신하구 관계가 깊어진다면 그때 가서 얘기해 줄께요”
여자는 설거지를 하고, 방청소를 하고, 내 양말을 빨고 잠시 밖으로 나가는가 했더니 방문 열쇠를 복사해 가지고 와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열쇠고리에는 금색 은색 두개의 열쇠가 끼워져 있었다.
“금색은 첨부터 돼 있는 문열쇠구, 은색은 내가 와서 붙인 보조키 열쇠예요 낮에 혹시 밖에 나갈 일 있으믄 자물쇠 잘 잠그구 나가세요, 너무 늦두룩 나가 댕기지 말구 일찍일찍 들어 와요. 그리구 며칠 동안은 이것저것 잊어 버리구 푹 쉬어요. 저녁밥 만들어 놓구 나갈 테니까 석유풍로에 북어국 데워서 들어요. 찬장에 계란두 있구 김치두 있구 콩자반두 있어요 그럼 나 다녀올께요.'
저녁 나절, 여자는 술집에 일하러 나가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여자와 하룻밤이 아니라 몇년을 함께 살아온 듯한 느낌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다리를 건너고 나서도 그분은 꼿꼿하고 탄력 있고 유연한 자세를 흩으리지 않고 걸음을 옮겨갔다. 나는 문득 시장기를 느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