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댁을 쫓아내려는 동네 사람들의 생각이 아무래도 내 마음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대신 끄덕거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내게 뜨악하게 대하던 동네 사람들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 동네 사람들은 내게 일을 해달라고 부탁했고, 또 일꾼 구하는 집을 알려 주었다. 나는 금세 사흘치의 일을 맡았다.
나는 밤이 이슥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분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였다. 경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조용 흘려내는 소리였다. 그분은 요즘 와서 자정 이전에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 경을 읽거나 기도를 드리거나 했다. 기도는 묵상을 겸했을지도 모른다. 책상다리를 하고, 허리와 등뼈를 꼿꼿하게 펴고, 두 손은 가볍게 주먹을 쥐듯해 가지고 무릎께에 얹고, 눈을 지긋이 감은 모습이었다. 경을 읽을 때도 자세는 비슷했는데, 빈 밥상을 앞에 놓고, 그 위에 책을 얹어 놓고, 눈을 뜨고 경 읽는 소리를 내는 것이 달랐다. 나는 그분이 밤중이나 새벽에 마실 자리끼를 떠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갈 때 몇차례 그런 모습과 맞닥 뜨렸었다. 그럴 때면 나는 옷깃을 여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니, 그분 뒤에 경건하게 끊어 앉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 나는 얼마나 훌륭한 주인을 모시고 있는가. 그분은 내가 그 동안 섬긴 우상 가운데 으뜸이었다. 아니, 내 가슴 속에 길이길이 모시고 받들고 싶어했던 이상적인 지도자상 그 자체였다. 나는 그분을 시중드는 역할에 커다랗게 보람을 느꼈고 그 보람의 부피가 가슴 속을 흡족하게 메꾸었다.
나는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내 방으로 들어 가려다가 그분의 자리끼를 문득 생각해냈다. 경 읽기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 읽기는 기도와 묵상으로 이어질 것이고, 기도와 묵상은 다시 잠자리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그릇에 물을 떠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마루를 밟는 발길을 조심했고 방문지방을 넘는 발길도 조심했다. 방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방바닥을 조심조심 밟고가 그분이 잠자리에 누우면 머리맡이 될 만한 곳에 물그릇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경 읽는 소리는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내가 굽혔던 허리를 펴고 뒤돌아 방을 나가려는데 경 읽는 소리가 자자들듯 그치고 그분의 말소리가 들렸다.
“거기 좀 잠깐 앉게나.'
나는 바로 들었나 해서 그분을 돌아보았다. 그분은 내 눈길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거려 내가 바로 알아들었음을 알려 주었다. 나는 무릎을 꺾으며 엉거주춤 앉았다.
'편히 앉게나.”
그분은 펼쳐 놓았던 책을 접었다. 나는 조금 더 편안한 자세로 고치며 그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낼부터는 자리끼 떠다 놓는 수고를 덜게.'
그분이 말했다.
'조금두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르신.”
'자네, 말 바로 했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내가 자네 손을 빌려야 하나? 다시 말하네만, 나는 고행을 하고 있는 중이네. 알겠나?'
“제가 하구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아주 하찮은 일이지만 어르신의 수족이 돼 어르신께서 고행에 전념하시도록 힘이 돼 드렸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또 어르신께서 기도하시구 묵상하 시구 성경 읽으시는 모습을 잠시라두 뵙구 싶기두 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살펴보자는 속셈은 아닌가? 기도하고 책 읽는 모습을 날마다 보고 싶어하지는 않겠지? 날마다 보고도 또 보고 싶은 모습이 결코 아닐 테니까 말이네.'
“그렇지 않습니다. 어르신께서 기도하시구 북상하시구 성경 읽으시는 모습은 제 마음 속에 늘 감동과 존경심을 일으켜 줍니다. 저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구 마음 속 깊이 바라면서두 저로서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네한테 그렇게 대답하라고 가르쳐 준 자가 있겠지? 이름을 대지 않아도 좋으니 솔직하게 있다고만 말하게. 자네가 사탄의 괴수일지라도 나는 자네와 함께 지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분의 말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부드럽기까지 했지만, 그 속에 나를 의심하는 마음의 뿌리는 그냥 남아 있는 듯했다.
“어르신께 여러번 말씀 드린 것처럼...”
'변명하지 말게. 내 고행길에 사탄이 동행하는 것이 하느님 뜻인 것 같다는 말을 자네한테도 이미 했을 텐데? 하느님은 내 고행길에 천사를 딸려 보내주시지 않고 사탄을 딸려 보내 주셨다는 말일세. 나는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네. 그러니까 자네도 구태여 감출라고 애쓸 필요가 없네.”
나는 그분의 말을 강하게 부인하려다가 멈칫 했다. 어떤 생각이 머리 속에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내가 사탄이나 사탄의 졸개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그분과 함께 지내려면 내가 사탄이나 사탄의 편이라고 인정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갑 자기 떠올랐을까. 그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분은 어째서 내가 사탄의 편이기를 바라는 것일까. 내가 사탄의 편일 때 오히려 그분과 함께 지낼 수가 있다는 생각의 근거는 무엇일까. 아리송했다. 짙은 안개 속이나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듯 그 까닭의 정체를 가려낼 수가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분의 말에 대꾸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등을 떠밀었다.
“어르신. 사탄이 어떻게 정직해지구 솔직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정직하구 솔직하다면 이미 사탄이 아니잖습니까?'
내 입 속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자네 말에 담긴 뜻 알겠네.'
그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는데, 얼굴에는 틀림없이 흡족해 하는 표정이 떠올라 꽤 오래 머물러 있었다.
“어르신. 앞으루두 자리끼를 제가 떠 오겠습니다.”
나는 그분의 표정에 고양되어 청을 넣듯 말 했다.
“자네가 꼭 감당해야 하도록 정해진 일이라면 맡아 해야지 어쩌겠나? 또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자네의 그런 역할을 극복해 내도록 예정해 놓으신 일이라면 나 역시 겪어 내야지 어쩌겠나?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자네를 통해서 귀신 들린 여자를 내가 나가는 길 앞에 배치해 두셨네. 사탄의 심부름꾼과 귀신 들린 여자의 상봉도 우연한 일만은 아닐 것일세.'
그분의 말이 환상적으로 들렸다. 그분이 꾸민 이야기 속으로 내가 끌려 들어가 어떤 역할을 맡은 느낌이기도 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분이 정선댁을 입에 올렸을 때 나는 그분의 이야기 속에서 빠져 나와 현실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러잖아도 정선댁에 관해서 어르신께 의논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씁쓸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환상 속에서 빠져 나와 현실을 확인하는 느낌이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분과 나와의 관계가 안겨주는 느낌이 그런 것일까.
“왜? 그 여자가 이상한 짓을 하던가? 그 여자의 집안에 들어가 살펴봤는가?'
그분은 예사롭지 않은 관심을 나타내 보이며 물었다. 그분의 표정은 환상 속에서 빠져 나와 현실에 선 듯하기도 했고, 환상 속의 길을 그대로 이어 걷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정선댁의 집안에 들어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들어가 살펴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구.... 어르신께 의논 드리려던 일은 정선댁 일로 해서 제가 동네 사람들한테서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자네와 그 여자가 같은 종자라고 몰아붙이던가?'
“동네 사람들이 정선댁을 동네에서 쫓아낼 작정을 하구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더러 정선댁네 농사일을 해주지 말라는 겁니다. 정선댁네 농사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이 없어야만 정선댁이 빨리 이 동네를 떠날 결심을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만약에 동네 사람들의 그런 부탁을 무시하구 정선댁네 농사일을 거들어 준다면 앞으로는 저한테 동네일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종을 하지두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분은 내 말끝을 이어서 금세 대꾸를 하지 않고 음미하듯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여자한테 정말로 귀신이 들렸다면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지. 자네는 뭐라고 대답을 했나?'
“거기 대해서는 잠자코 듣구만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제 태도를 자기들 좋을대로 생각했는지 낼부터 사흘 동안 계속해서 할일거리두 주선해 줬습니다. 그렇지만 전 마음 속으로는 정선댁이 귀신 들린 여자라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옳다구 여기지 않았습니다. 왼종일 함께 밭을 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봤지만 정선댁 언행에서 미쳤거나 귀신 들렸다구 여길 만한 구석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정선댁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었을 뿐이구, 억울하게 귀신 들린 여자로 몰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팔자 사납구, 가난하구, 외롭구, 힘없는 불쌍한 여자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걸루 보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뜻에 따라 정선댁이 도와 달래도 못들은 척 등을 돌려버려야 할지, 아니면 동네 사람들이 뭐라든 정선댁을 도와줘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제가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말을 마치면서, 그분 앞에서 뜻밖에 내 의견과 주장을 거침없이 털어 놓았다는 생각에 어리둥절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곧 두려움과 불안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분이 내 그런 태도를 너그럽게 받아 들여 준다면 두려움과 불안감은 안도와 흡족감으로 바뀔 것이고, 그분이 내 태도를 잘못이라고 내치는 날이면 그 동안 정성 들여 매듭을 풀어 온 그분과의 관계가 처음처럼 다시 영하의 기후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자네한테 묻겠네. 자네는 혼자 동네 사람들 모두와 맞서서 싸울 만한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있다구 확신하는가? 대답해보게나.”
그분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내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할 말을 얼른 찾지 못해 우물쭈물했다. 그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한테 배짱과 끈기가 있느냐구 물은 내가 우습게 여겨지네. 그 동안 나를 따라 다니면서 드러내 보여 준 자네의 배짱과 끈기야말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가 아니던가? 자네한테 불세출의 배짱과 끈기를불어 넣어 준 세력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게나. 아직까지 그렇게 해 오지 않았는가? 자네가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내게 말했나? 자네는 지금까지 자네를 지배하는 세력이 시키는 대로 유능하게 행동해 왔네. 그 여자와 자네 사이에 끼어든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상관하지 않고 비켜 서 있겠네. 자네는 자네 뜻 대로 아니, 자네 괴수가 시키는 대로 실행하게나. 자네들 사업에 나를 끌어 들일 생각일랑 하지 말도록 하게. 알아 들었나? 그럼 건너가서 자게. 낼 아침 일찍 일 나가야 하잖나?'
그분은 내게서 눈길을 거두어 갔고, 옆에 밀어 두었던 밥상을 끌어다 앞에 놓고 접어 두었던 성경을 다시 펼쳤다. 나의 존재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태도였다. 그분의 주위로 찬바람이 일어 휘도는 것 같기까지 했다. 한밤 중에 자리끼를 떠 가지고 들어갔다가 생각밖에 그분과 긴 대화를 나누게 되어 흡족하면서도, 깨고 나면 사라질 꿈이 아닐래나 하고 불안해 했는데, 역시 꿈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높은 자리로 오르려다가 떨어져 내린 헛수고가 뼈아프게 가슴 속을 파고 드는 듯한 허전함과 좌절감이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나는 인사를 하고 내가 쓰는 건넌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자리를 보고 누웠다. 어두운 천정에 그분의 모습이 떠오르고,그분의 말소리가 들렸다. 표정이 바뀌고, 말이 달라졌다. '그 여자 마음 속을 눈여겨 살펴보게. 그 여자를 잘 살펴보구서 그 여자가 첫번째 경우라면 구해 줘야 할 것이구, 두번째 경우라면 동네 사람들이 그 행악에 다치지 않도록 막아줘야 할 것이네. 여기가 하느님이 나를 위해 예비해 두신 장소였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네’
이상이 아까 저녁 먹는 자리에서 그분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시간 뒤에 그분은 ‘그 여자와 자네 사이에 끼어 든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상관하지 않고 비켜서 있겠네.... 자네들 사업에 나를 끌어들일 생각일랑 하지 말도록 하게. 알아 들었나?' 하고 다른 말을 했다.
어느 쪽이 진심을 담은 말일까. 어느 쪽에도 진심은 담겨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양쪽 다 진심을 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동안 뒤척거리면서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그분은 나에게 어떤 행동을 지시한 것 같기도 했고, 전혀 무관심한 것 같기도 했다. 나에 대한 그분의 무관심은 근원적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애써 관심을 억제한 겉모습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나에게는 그분을 헤아릴 능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분의 높이를, 그분의 넓이를, 그분의 깊이를 내 능력으로서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분의 높고 넓고 깊은 뜻을 헤아려 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주제넘은 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주어진 역할대로 그분의 외형적 생활을 시중 들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내 분수를 확인 하고, 내 위치로 돌아오고 나니까 비로소 잠이 왔다.
나는 사흘 동안 일을 하러 다니며 정선택 문제를 되씹어보곤 했다. 정선댁 모습에 초희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그 위에 다시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사람의 행동이란 자신의 바람과는 다르게 엉뚱한 쪽으로 내달아갈 때도 있었다. 주저하는 초희를 다그치듯 졸라, 초희가 술집 작부 노릇으로 피나게 모은 돈으로 철물점을 차렸다가 망해서 돈을 다 날려버린 뒤, 내 마음 속에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가득 고여 올랐지만 내 행위는 오히려 이상한 쪽으로 드러나곤 했다.
'괜찮아요.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 얼마나 다 행이에요? 젊었을 때 실패를 경험하게 됐으니 말예요. 젊었을 때 실패는 보약이구, 늙어서 실패는 독약이래잖아요? 우린 이번 실패를 겪어 마음이 튼튼해졌어요. 세상이 어떤 데라는 것두 더 자세히 알게 되고 말예요. 우리 지난 일 잊어버리구 열심히 일해 벌어요. 둘이서 맘 단단히 먹구 벌어 모으면 몇해 가지 않아서 일어서게 될 거예요.”
초희가 몇차례나 내게 해 주는 말을 들으며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여자는 술집 작부 출신이 아니라 천사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초희는 술집 작부로 꾸미고 내 앞에 나타난 천사였다. 하늘이 나를 구해 주기 위해 내려 보내준 천사. 나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고 또 인정했다. 그래,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 날려버린 초희의 돈을 되찾아 놓으리라.
그런데 그런 나의 진심과는 달리 내 행위는 엉뚱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는 일이 끝나면 술집으로 내달았다. 공사장 옆에 있는 술집 들이어서 외상술을 주었다. 술 몇잔은 기분 전환도 시켜 주었고, 피로 회복도 되었다. 그러나 괴로움을 다스리려면 술 몇잔으로는 부족했다. 내 자신에게 들이댄 핑계였다.
'당신들은 인생이 어떤 건지 몰라.'
술이 취하기 시작하면 내 입이 만들어내는 말이었다. 나는 그렇게 던져 놓고 주위를 둘러 본다. 공사장에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거나 다른 술손님들이었다. 그들이 대꾸를 하지 않으면 낚시바늘에 다시 미끼를 끼워 던지듯 나는 다시 말을 했다.
“여보쇼. 당신들은 인생이 어떤 건지 몰라. 인생이 어떤 건지 아는 사람 있거던 나서보쇼.”
“그런 건 알아서 뭘해? 그냥 살아가는 거지 뭐.”
누군가 이렇게라도 북소리를 내 주면 나는 얼씨구나 힘이 솟아 본격적으로 사설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사람아, 어떻게 그냥 살아가? 자네 이 세상에 그냥 태어난 줄 아나? 자네 아버지 어머니가 자네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어떻게 힘을 썼는지 알아? 자네가 그냥 태어나 살아가는 게 아니라구, 자네 아버지 어머니한테 물어보라구. 자네 아버지 어머니가 아무짓도 안했는데 자네가 그냥 태어나 살아가는 게 아니야. 자네 아버지 어머니한테 물어보라니까.”
“이 사람이 왜 난데없이 남의 아버지 어머니를 쳐들고 나오지? 그래, 난 아직 내 아버지 어머니한테 물어보지 못했지만, 자네는 물어본 것 같으니 얘기해 주게. 자네 아버지 어머니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자네를 만들었지? 나는 자네가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물론 내가 자네한테 인생이 어떤 건지 한수 가르쳐 줄 수 있지. 있구말구. 그렇지만 배울 사람이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 거야. 일테면, 선생님이 아무리 아는 게 많아도 학생이 여섯살 일곱살은 돼야 가르치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자네 이 말은 알아들을 수 있을 테지? 자네는 아직 인생이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얘기해 줘두 알아들을 만큼 정신연령이 돼 있지 못한 것 같아. 인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얘기는 자네가 좀더 자란 뒤에 해줄 테니 자네는 우선 자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자네 아버지 어머니한테 물어보도록 하게. 알겠나?'
“자네는 자네 아버지 어머니가 자네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한 모양이니 내가 자네 아버지 어머니한테 물어봐 주지. 언제 나를 자네 아버지 어머니한테 데려다 주겠나?'
“자네가 지껄이는 걸 보니 자네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거꾸로 나온 게 분명해. 거꾸로 나온 작자는 세상이 인생이 어떤 건지 모르구 버릇 없이 까불어대기 일쑤거던.”
“이 자식아, 술 처먹겠거던 곱게 처먹어. 이 꺼꾸루 빠져 나온 배냇병신아.”
“이 자식이 조용히 살아갈래는 사람 맘을 들쑤성거려 부아를 돋궈 놓네? 너 몸 어디가 근 질거리는 모양인데 나더러 긁어 달래는 거냐?'
'네놈이야말루 살이 찢어지구 싶냐, 뼈가 부러지구 싶냐? 돈 안받구 네놈 소원 풀어 줄 수 있다.”
“그래, 살도 찢어지고 싶구, 뼈도 부러지고 싶다. 내 소원 풀어다우.'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면서 번개처럼 빠르게 물컵을 집어 던졌다. 물컵이 그 자의 눈을 쳤다. 그 자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말고 손바닥으로 눈을 감싸 쥐었다. 나는 그 특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술상 너머로 다리를 뻗어 그 자의 머리통을 차버렸다. 그 자는 끽 소리도 못하고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술상을 뛰어 넘어갔다. 그 자를 짓밟기 위해서였다.
'고만두지 못해?'
반장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못들은 척 그 자의 가슴을 내리찍듯 발뒤꿈치로 밟았다.
'고만두지 못해? 쌔끼야!'
반장이 소리질렀다. 나는 술상 하나를 뒤엎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 새끼가...”
돌 같은 것이 날아와 내 눈을 후려쳤다. 정신이 흩어지듯 멍해지면서 한편 충격을 받은 눈에 심한 통증이 일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눈을 감쌌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내 머리, 얼굴, 몸통을 가격했다. 여러 사람의 발길질 주먹질이었다. 나는 쓰러졌고 그들은 나를 내버려 두고 술집을 떠나버렸다.
나는 술을 깨고 나면 후회했다.
“당신 왜 그래요? 매에는 장사가 없댔어요. 주먹힘 센 사람이 주먹에 맞아 죽는대는 말도 있어요. 주먹힘 센 사람, 주먹질 잘하는 사람이 당신 하나뿐인 줄 알아요? 당신 주먹힘을 당하지 못해 당신한테 매맞은 사람은 칼로 앙갚음 하러 들어요. 칼로 안되면 총으로라도 앙갚음하러 들어요. 당신 주먹이 칼과 총을 막을 수가있어요? 욱하는 성질 참지 못해 주먹질 함부로 하다가 병신 돼요. 죽기도 하구요. 감옥에 평생 갇혀 지내게 되기도 해요. 감옥살이 할 만큼 해봤잖아요? 제발 정신 차려요.'
“알았어. 술 안마실 거야. 술 마시구 싶으면 집에 와서 당신 앞에서 마실 테야.'
'약속할 수 있어요?'
“약속하지.”
“지켜보겠어요.”
나는 일을 끝내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반주를 곁들인 밥상이 얌전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차려져 있곤 했다. 색종이를 예쁘게 접어 놓은 편지도 있었다.
'여보, 미안해요. 당신과 마주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행복에 잠기고 싶은 유혹을 억지로 뿌리치고 집을 나와 직장으로 향합니다. 사랑해요. 여보.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고 황량한 들판 같고 살벌한 장마당 같은 직장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것도 당신과 나 우리의 튼튼한 보금 자리를 쌓기 위해서예요. 이해하시고 꾸욱 참으세요. 기껏 몇해 동안일 테니까요. 이삼년 동안이란 우리가 함께 살 긴 앞날에 비해 아주 짧은 순간 같은 시간에 지나지 않아요. 순간의 행복을 버리기 아까워 긴 앞날의 토대를 희생 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술은 냉장고 속에 더 있어요. 그렇지만 절대로 과음하지 마세요. 기분 좋을 때 멈추세요. 그리고 쉬세요. 당신의 건강을 지키세요. 당신의 건강이 우리 가정의 건강이고, 우리의 꿈과 행복의 토대니까요. 당신 생각하면서 열심히 건전하게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당신을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당신의 아내 초희.'
초희가 귀가하는 시간은 으레 자정을 지나서였다. 자정이나 자정을 조금 지나 돌아오면 이른 귀가였다. 보통 오전 한시에서 두시 사이가 초희의 귀가 시간이었다.
“열두시 안에 집에 도착할 수는 없나? 당신 피곤해 보여.”
맨정신이거나 술기운이 약할 때 내가 초희를 맞아들이며 하는 말이었다.
“열두시에 문을 닫는데, 설것이를 거들다 보면 시간이 이렇게 돼요. 당신한테 정말 미안해요.'
“나한테 미안하다니? 내가 당신한테 미안하지. 내가 좀더 신중했더라면, 또 내가 능력이 있다면 당신이 힘드는 직장을 다니지 않아도 될 텐데...”
“아니예요. 당신은 나한테 삶의 의미와 보람을 심어 준 사람이에요. 삶에서 의미와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지 아세요?'
그런 날은 초희와 나는 서로에게 오랫동안 굶주린 듯 열렬하게 탐하며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그러나 그런 날이 그렇게 자주 있지는 않았다. 혼자 술을 마시다 보면 술이 과해지기 예사였고, 내 혈관을 도는 알콜은 내 마음 속 몸 속에 숨어 앉아 있던 야성을 유혹해 일깨워내곤 했다.
“당신 이렇게 이른 시간에 뭐 타구 오지?'
“이른 시간이라구요? 하긴 한시 반이니 이른 시간이네요. 택시 타구 오지요 뭐. 버스도 끊어 지구, 지하철도 끊어졌으니까 택시밖에 없잖아요? 가끔씩 주인아줌마가 택시값을 쥐어 주곤 해요.”
술손님들은 택시값 주지 않나? 팁인가 뭔가 있잖아? ”
'고급 술집이 아니래서 팁 주는 손님이 별로 없어요.”
“자가용 자동차 태워 주겠대는 손님도 없어?'
“그런 손님이 있더래도 핑계대고 사양해요. 술상 옆에 앉는 거처럼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사사로운 자리에서 술손님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는게 내가 지키는 원칙이거던요. 그렇지만 요즘 와서 자기 자동차 태워 퇴근시켜 주겠대는 손님도 많이 없어졌어요. 나보다 젊은 아가씨들이 말 한마디에 차에 올라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주는데, 나같이 나이 들고 뒤꽁무니 빼는 여자한테 애써 추근거리러 들지 않더라구요.'
“당신 인기가 그렇게 떨어졌어? 어쩌다가 그렇듯 가련한 처지가 됐지?'
“미안해요, 여보, 인제 고만해요. 난 당신한테만 인기 있으면 만족해요.”
“가만 있자. 당신 나와 만난게 인기 떨어진 뒤였나? ”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런 걸 물어요?'
내가 혹시 인기 떨어진 술집 여자의 낚시에 걸려든 쓰잘 데 없는 놈팽이가 아닐까 해서 말야.”
“여보, 오늘 당신 밖에서 기분 나빠져서 돌아 왔어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당신이 금방 한 말은 너무 심해요. 내가 어쩌나 보려고 그냥 해 본 소리지오? 그렇죠?'
“내가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팽이라는 말은 맞잖아? 술집 여자와 살면서 술집 여자가 웃음 팔구 뭣 팔아 모아 논 돈을 사업한 답시고 다 날려버리고, 그것두 모자라 같이 사는 여자를 다시 술집에 내보내 웃음 팔아 뭣 팔아 돈을 벌어오게 하면서 거기 얹혀 살구...그런 놈이 그래 쓰레기가 아니란 말야?'
“여보, 당신이 그런 얘기를 하면 난 지옥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에 휘말려요. 당신 내가 싫어졌어요? 나를 버릴라고 그러는 거예요? 무서워요, 여보, 나는 당신이 나를 버리고 떠나간 빈 자리를 메울 수가 없어요. 말 해봐요. 당신 나를 버릴 생각을 하는 거예요?'
“천만에. 그 반대야. 난 초희한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구 있는 참이야. 어느 날 초희 앞에 멋있고 돼먹은 사내가 나타나 초희를 데리고 가버릴까봐 겁이 잔뜩 나 있다니까. 술집에서 하룻밤에도 수많은 남자들과 술을 마시며 시시덕거리구 비비닥거리구 교성을 토해내며 아양 떨어 돈 버는 여자한테 얹혀 사는 못난 사내가 어떻게 버림 받을까봐 겁을 내지 않는단 말야. 안 그래? 어떤 때는 문득문득 내가 초희라는 여자한테 반말을 써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니까. 내 말이 틀려?'
“고만해요, 여보,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얼마나 고문 당하듯 고통스러운지 알아요? 당신이 괴로워한다는 것도 난 알아요. 그러니까 참아 달라고 미안하다고 말하잖아요. 술집이라곤 하지만 요즘 내가 주로 맡아 하는 일은 음식 나르기와 설것이예요. 손님이 청하면 어쩌다가 술자리에도 앉지만 난 인제 남자들한테 인기가 없다구요. 술집에서 요즘 내가 하는 일은 파출부와 별로 다를 게 없어요. 당신도 가끔 말하듯이 요즘 와서 일이 힘에 부치고 자주 피곤해요. 주인아줌마는 종합검진을 받아 보래는 말까지 하곤 해요. 그렇지만 아직 젊은 나이에 종합검진까지 받을 만큼 큰병이야 들었겠어요? 그렇지만 밤중에 직장에서 돌아올 때면 당신의 잠을 설치게 해 미안하면서도 당신한테서 위로를 받고 싶어진다구요. 당신이 괴로워하는 건 알지만 제발 그렇게 심한 말을 뱉어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내고 덧나게 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말아요. 여보, 당신 괜히 그러는 거지요? 당신도 나처럼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뒤틀려서 나오는 것뿐이지오? 여보 사랑해요. 우리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각기 입은 상처를 쓰다듬고 핥아 낫게 해 줄 수 있어요. 당신 마음 가라앉치구 꾸욱 참고 기다려줘요. 그래야 해요.”
초희는 참으려고 애쓰며 눈물을 참아내지 못했다. 웃음 지어 보이려고 애쓰며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심술을 부려 초희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초희를 이불 속으로 쓰러뜨려 힘껏 안았다. 그러나 그런 나의 심술은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었고, 초희의 몸에 뿌리 내린 병은 자꾸 깊어만 갔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