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회의가 열린다는 전갈이 왔네.” 어느날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분이 말했다. 그분의 말투는 잘못 전해진 편지 소식을 전하는 것 같았지만 철두철미 그렇지는 않고 그 속에는 궁금증과 추궁이 용해되지 않은 채 섞여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 속을 비추고 천둥처럼 가슴으로 번졌다. 가벼운 번개와 천둥이었지만 그 섬광과 울림이 이는 동안 나는 좀 지체한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나와 자네도 이 마을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뜻인가?' 그분은 내게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시 물었다. 정선댁과의 관계를 그분 앞에 털어 놓고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마을 사람 들과의 갈등에 대해서 그분에게 자문을 구해야 옳은가 어떤가, 하는 생각이 헝크러져 나는 또 다시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정례회의 같은 걸 테지? 나더러도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데. 한 집에 한 사람 참석하면 되겠지. 자네가 나가도록 하게.” '어르신...” 나는 이렇게 불러 놓고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분이 살피는 눈으로 나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분은 평소에 내게 눈길을 잘 보내지 않았다. 피한다기보다는 무시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그때그때 한번씩 바라보는 눈길은 송곳 끝처럼 뾰족했고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다.
“마을회의가 언제 열리는지요?”
나는 또 하고 싶었던 말은 입 안에 담아 둔 채 딴소리로 둘러댔다.
“그렇군. 오늘 저녁밥 먹고 나서 이장네 마당으로 오라네.”
“네. 제가 가겠습니다. 어르신, 시장하시지요? 곧 밥상 차려 오겠습니다.”
나는 그분의 앞에서 물러나와 부엌으로 갔다. '나는 먹지 않겠네. 자네 혼자 먹게.’ 그분의 말소리가 내 뒤를 따라와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았다. 얼마 전부터 그분은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내가 감당해야 할 고행의 항목 속에는 사탄한테서 시중을 받으며 그 수모를 참아내는 일도 들어 있는가 보군. 자네도 자네 괴수한테서 지령받아 수행하는 노릇일 테지?' 그런 말을 몇차례 한 뒤부터였다. 나는 일해 준 집에서 얻어온 밥과 김치와 고등어토막조림에다가 언젠가 정선댁이 가져다 준 마늘쫑장아찌를 상에 얹어 안방으로 들여갔다. “어르신, 시장하셨지요? 긴긴 여름해에 점심두 거르지 말고 드십시오. 왼종일 책 읽고 기도 하고 묵상하는 것이 농사일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저두 잘 압니다.”
나는 그분이 이런 잔소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거쳐야 할 행사 순서인듯 입에 담았다. 입술에 바른 침처럼 금세 말라버릴 겉치레 말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그분에 대해서 책임과 임무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적으로나마 그때그때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부인이며 나의 실질적 주인에 대해 취해야 할 성실한 태도이기도 했다. 또 나 자신을 향해 그분과 그분의 부인에 대한 책임과 약속을 거듭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넨 참 끈질기네. 자네가 제법 성실해 보일 때면 내가 혹시 자네를 오해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품어보곤 했지만, 자네는 어쩔 수 없이 정체를 드러내 놓거든. 본질이 변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나는 점심을 먹지 않으면 정신이 더 맑아지니까 그 일에 대해서는 마음 쓰지 말게. 거기 쓸 힘을 자네가 더 관심 가져야 할 일에 보태 쓰도록 하게나. 그 여자... 그래, 정선댁을 지켜주는 일은 잘돼 가는가?” 그분의 말은 내 잔소리를 털어내며 야유하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자네와 나의 거리는 이 정도로 유지하면서, 장난질이나 못된 짓을 저지르고 싶거든 정선댁하고나 어울리게나.' 정선댁이 그분 입에 오르자 나는 다시 강한 암시를 받았다. 그분의 정선댁에 관한 관심은 그분이 지적한 내 본질처럼 변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그분은 내가 정선댁과 어울려 무슨 일을 저질러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러잖아두 정선댁을 두고 어르신께 의논을 드렸으면 싶은 생각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오히려 그 암시에서 격려를 받으며 대답했다.
“자네 또 나를 함정으로 유혹해 가려고 잔꾀 부리나? 그렇지 않다는 약속을 전제로 자네 말을 들어 주겠네.” 그분은 선선하게 응했다. 그분이 선선히 응하니까 오히려 내쪽에서 멈칫하고 주저하는 심리가 되었다. 내가 그분에게 무엇을 의논하려고 했던가. 정선댁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만큼, 어느 수준으로 의논을 하려고 했는가.
“어르신, 제가 정선댁과 결혼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불쑥 물었다. 의논할 것이 있다고 말했으니 의논거리를 제시해야만 했다.
“자네가 정선댁과 결혼을 해?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수단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약속을 앞에 내세우고 하는 말이 틀림없나?'
'예, 그렇습니다.”
'하기야 약속과 맹세를 열번 백번 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자네 속에 깊숙하게 들어앉아 자네를 다스리고 부리는 사탄이 교묘하게 속임수를 쓰고 있는데야 어쩌느냐 말일세. 그래서, 자네와 정선댁이 결혼하면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대답을 하라는 겐가?'
'대답이라기보다 충고와 가르침의 말씀을 어르신께 듣고 싶었습니다.'
“충고와 가르침의 말이 제대로 먹혀들어 갈까? 내가 지금 자네한테 하고 싶은 말은 자네가 알고 하건 모르고 하건 다른 사람의 긍정적인 삶을 훼방놓고 파괴하는 쪽으로 행동의 방향을 잡고 있다는 걸세. 자네가 정선댁과 결혼 하는 건 끼리끼리 합해지는 일이니 그럴 법한 노릇이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바른 삶이 훼방받고 파괴될까 걱정이네. 우선 이 마을 사람들과 싸움을 벌여야 하지 않겠나? 정선댁과 결혼하고 나서 이 마을을 떠나겠다면 모를 까...”
“어르신, 마을 사람들이 정선댁을 쫓아내겠다고 하는 이유는 정선댁이 시집온 뒤루 시부모가 병들어 죽고, 남편이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구 객사해 정선댁한테 살이 끼고 귀신이
들렸다는 겁니다. 불쌍한 여자를 도와주기는커녕 불쌍한 여자가 당한 불행이 자기들한테 옮 겨지기라두 하는 듯 법석을 떱니다. 마치 정선댁을 무서운 전염병 걸린 여자거나 전염병 병균이라두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전염병이나 그 병균이 아니더라두 사람들이 그렇게 믿으면 전염병과 다름없는 해악을 끼칠 수가 있네. 사람의 마음가짐이란 그런 거야. 사탄은 사람의 그 마음가짐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재주를 지녔네. 정선댁이 귀신 들린 여자건 아니건 상관 없이 마을 사람들 마음 속에서 정선댁은 이미 귀신 들린 여자나 귀신이 돼 있다네.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렇게 정해졌다면 억울하건 억울하지 않건 실제로도 그렇게 되는 거야. 당사자도 그래, 나는 귀신 들린 여자가 아니야, 귀신이 아니야, 이렇게 주장하는 동안 귀신이라는 말이 생각이 마음 속을 차츰차츰 물들여 가고, 이윽고는 귀신물이 마음을 온통 물들이는 걸세. 그런데다가 자네가 결혼을 해보게. 사탄과 귀신이 결혼을 하면 어떻게 되겠나? 부부는 일신이 아닌가? 마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네가 사탄이 아니더라두 귀신과 한 몸이 되었으니 귀신이 된 걸로 보일테고, 내 입장에서 보면 정선댁이 귀신이 아니더라두 사탄과 한 몸이 되었으니 사탄이 된 걸로 보일 걸세. 하기야 자네와 정선댁이 합해지는 건 자네와 정선댁 뜻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겠지. 자네와 정선댁을 결혼하도록 이끄는 어떤 세력이 자네와 정선댁이 결혼해서 이 마을을 떠나가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게 아닐테지. 더 큰 힘이 되어 마을 사람들과 싸우고 마을 사람들의 삶을 흩어 놓고 무너뜨리라는 걸 테지.”
“어르신, 전 어르신 마음 속에서는 사탄이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사탄이 아닙니다. 제가 정선댁과 결혼을 하려는 까닭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만들어져 있는 정선댁 모습과 정선 댁의 실제 모습이 아주 딴판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려는 겁니다. 정선댁과 제가 결혼을 하고 바로 마을을 떠나간다면 정선댁이 귀신 들린 여자라는 마을 사람들의 생각을 고스라니 인정하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떠나더라두 마을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이 바르게 고쳐진 뒤에 떠나야 한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그럴 테지. 자네가 이 마을에 와서 정선댁과 결혼을 하고 마을 사람들과 싸움을 하며 살아 가는 대목은 자네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어떤 힘의 계획표에 들어 있는 항목일 테니까.
자, 이제 고만 마을회의에 참석하러 가게나. 그러고 보니 이상한 예감이 드네. 이번 마을회의가 자네와 정선댁 문제로 열리게 된 건 아닐래나? 조심하게나.”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르신.”
나는 밥상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하느님 사업을 위해 고행을 하는 처지로, 사탄의 졸개한테 몸조심 마음조심 하라구 당부하고 있는 모양이 우스꽝스럽구만.'
밥상을 들고 방문지방을 넘는 내 등뒤에서 그분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분의 그 말을 따라 내 모습도 우스꽝스럽게 바뀌는 듯했다. 그 분은 역시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먹기와 말의 되풀이가 사람을 또는 사물을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빚어 놓는다는 그 말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경지의 것이었다. 나는 정선댁과 육체관계를 맺고 나서도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떠올리지 못했었다. 결혼이란 말은 그분 앞에 임기응변으로 급조하듯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선댁과 결혼 한다는 말이 내 입과 그분의 입에 번갈아 오르내리는 동안 어느새 현실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그분 앞에 정선댁과의 결혼 말을 꺼낸 것은 임기응변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나도 모르게 뿌리내리고 있던 결정 상황이 어떤 계기를 맞아 땅위 물위 그 표면으로 끌어 올려진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는 이장네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심하게나' 그분의 말소리가 따라와 내 귓바퀴를 맴돌았다. 그분은 그 말이 생각지도 않게 튀어나온 듯 그 말을 한 당신의 모양이 우스꽝스럽다는 말을 덧붙였었다. 사탄의 졸개한테 몸조심 마음조심을 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냐는 것이었다. 그분의 가슴 속 깊은 곳에는 나를 사탄이라고 몰아대는 마음이 아니라 나를 염려하는 마음이 뿌리내리고 있는 중이라고 해석한다면 속단일까.
이장네 집 바깥마당 한 옆에서는 모깃불이 연기와 함께 매캐한 냄새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사랑채 마루 기둥에 매달아 놓은 전구는 촉수가 낮아 축대 밑 마당 쪽만 발그레하고 뽀얗게 밝혀 놓았을 뿐 마당 끝까지는 빛줄기를 제대로 뻗어 내지 못했다. 그래서 마당가에 둘러선 나무들과 그 밖으로 뻗은 텃밭은 밤의 숲속같이 깊어 보였다. 멍석 위에 모여 앉은 마을 사람들의 얼굴과 몸에도 빛을 받은 쪽과 받지 못한 쪽이 얼룩얼룩 불규칙한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잡으러 갈랬더니 오네.”
누군가 내 귀에 들리라는 투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모이는 시간이 저녁 먹은 뒤라구만 들어서 이제 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
내 사과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집에 사는 두 사람 다 오랬는데 혼자만 왔지?'
이장이 나무라듯 물었다.
'한 집에서 한 사람만 참석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대답하면서 무심코 마을 사람들을 둘러 보다가 섬뜩함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의 모든 눈이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예사롭게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이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적의와 멸시가 독나방 날개의 가루비늘처럼 눈길에서 묻어 나고 있었다.
“그건 우리 동네 사람한테만 해당되는 말이야. 거긴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지금이래두 가서 또 한 사람을 데리구 와.' 누군가 말했다.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였다.
'그분은 도를 닦는 분입니다.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제가 틀림없이 그분께 잘 전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래, 잘 듣구 잘 전해, 우리 동네를 떠나라.”
노인이 말했다. 그 말은 거쳐야 할 몇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온 듯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엇비슷하게 예측을 하기는 했지만 예측보다 훨씬 앞당겨 그 실체와 맞닥뜨렸을 때의 당혹감이었다. 정신을 추스리고 돌아보니 무수한 눈들이 그 노인의 말을 뒷받침하듯 나를 쏘아 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가슴을 펴며 물었다. 덮어놓고 겸손해야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세상 사람들은 겸손으로 보지 않고 약하다고 보기 일쑤였다. 때에 따라서는 강하게 보일 필요 가 있었다.
“귀머거리니?'
“잘 들립니다.”
“우리 동네에서 떠나가라는 말 다 들었는데 너만 못 들었니?”
“저두 들었습니다.”
“들었으믄서 왜 무슨 말이냐구 물어?'
'너무 뜻밖이어서 그랬습니다. 왜 떠나라는 겁니까?”
'그 까닭을 몰라서 묻는 거니?'
“모릅니다.'
'그래, 알려 주마. 지난번에 정선댁과 거래를 끊으라구 말해 줬댔지? 그러마구 대답하구선 넌 그 대답을 먹어버렸어. 넌 밤에 정선댁을 그 집으루 찾아가 만났댔다. 아니라군 못할 테지?'
“정선댁이 나를 찾아와 방고래가 꺼졌으니 고쳐 달라고 말해서 가 본 겁니다. 그런 것두 잘 못입니까?”
“잘못이구 말구, 정선댁 그 귀신을 집안으루 맞아 들이구, 그 귀신을 찾아가 만나는 거만으루두 큰 잘못이지. 그렇지만 넌 그 잘못만 저지른 게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을 테지?'
마을 사람들은 그날 밤, 나와 정선댁이 헛간으로 들어가 한 몸이 되었었다는 사실마저 알아버린 것일까. 아니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하고 있을 뿐인가. 나는 재빨리 머리 속 저울에 올려 놓고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가를 가늠해 보았지만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제 생각으로는 노인어르신들을 비롯해 동네분들께서 정선댁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셔야
할 줄 압니다. 제가 보기로는 정선댁은 운수를 못 만나고 사람을 잘못 만나 가난하고 외로워
진 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선댁이 시집 온 뒤로 시부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시구, 남편이 노름과 주색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구 객사한 것을 가지고 정선댁이 귀신 들린 탓이라거니, 정선댁이 바루 귀신이라거니, 하고 몰아 붙이는 건 잘못이라구 생각합니다. 정선댁은 그냥 예사 사람일 뿐입니다. 남편이 탕진하구 남은 자투리 논밭으로 두 자식과 먹고 사느라구 잡초처럼 악착스러워지긴 했지만 힘없고 불쌍한 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네 사람들한테서 따돌림 당해 마음 속에 원망과 한이 쌓여 있어 자칫 독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동네분들이 불쌍히 여기시구 이웃으로 받아들여 주신다면 정선댁은 금세 독이 빠져 나가 고분고분해질 겁니다. 그러니까 노인어르신들과 동네분들...”
“야, 집어치워! 우리가 너한테 연설 들을라구 모인 줄 아니? 넌 이쪽에서 묻는 말에 대답만 하믄 돼. 데려다 놓구 이것저것 물어봐 주는 것만으루두 큰 대접 받는 줄 알아. 이것저것 인사채리지 않구 몰려가서 때려 내쫓아두 그뿐이야. 묻는 말에 대답하는 줄 알구 내버려 뒀더 니만 연설을 하러 들어? 거두절미하구 이쪽에서 물은 말에나 대답해!”
그 말 끝에 그 말에 동조하는 외침이 회오리 바람에 먼지 떠오르듯 일었다.
“저한테 물으신 말씀이 뭐였습니까?' 나는 깜박 잊고 물었다. '니가 귀신 들린 여자네 집에 찾아간 날 귀신 들린 여자와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하라구 했다. 묻는 말을 슬쩍 피해 어줍잖은 연설이나 늘어 놓으믄 속아 넘어갈 촌놈덜이라구 깔보는가분데 어림반푼어치두 읎어. 얼른 대답해.'
“전 제가 한 일에 대해서는 거기 맞는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렇지만 정선댁과 마주앉아 꽤 오래 얘기를 해보니까 정선댁은 미친 여자도아니구 귀신 들린 여자도 아닌 단지 정에 굶주
린 여자였습니다.”
“정에 굶주린 여잔지, 서방질에 굶주린 여잔지, 그래서 그 여자가 굶주린 정과 서방질을 니가 채워 줬대는 얘기니? 어쨌든 그 여자와 한 짓을 불었으니 인제두 뭘 잘못했느냐구 덤벼들진 못하겠지? 할 말이 있으믄 해봐.'
“저두 정선댁두 동네 사람들한테 해가 될 만한 나쁜 짓을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나는 버티고 선 채 대꾸했다. 그렇다. 마을 사람들은 앉으라는 말 한마디 않고 나를 세워둔 채로 심문을 해 나갔다.
“어허, 어디서 몸 튼튼하구 맘 진실한 장정이 제 발루 걸어 들어와 웬 복인가 싶었더니 잘못 생각이랬구만, 돌덩이가 굴러 온 걸 금덩이가 굴러 온 걸루 잘못 알았대니까. 그렇지. 웬눔의 복덩어리가 제발루 굴러 들어올 까닭이 있겠나? 타관 사람인 너를 옆에 앉히구선 동네 속 사정 들려 주믄서 정선댁인가 뭔가 귀신 들린 여자랑 친하게 지내지두 말구 그 집 일 해 주지두 말아달라구 신신당부했댔지? 그 여자가 이 동네 화근 덩어리래서 동네 밖으루 내보내야 동네가 편안해질 거래서 그렇게 정한 거니 협조해 달라구두 했댔지? 그런 동네 사람들 뜻과 어긋나는 짓을 하는 날엔 동네 사람들이 가만 내버려 두지 않겠대는 말두 단단히 해 뒀댔구.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당부한 말이 아직두 색깔이 바래지 않았는데 그 여자를 찾아가 얼크러져? 그게 잘못이 아니믄 뭐야? 동네 사람 귀에 들리두룩 떠들썩하게 얼크러지구두 동네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거라구 생각했대는 거야? 그 잘 떠드는 입으루 얘기 좀 해봐.'
“책임을 지겠습니다.'
“옳지. 오래간만에 바른말 하는구만, 책임을 제대루 질래믄 이 동네에서 떠나가야 해. 인제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 제대루 알아 들었어?'
“정선댁과 결혼을 하겠습니다.”
“귀신 들린 여자랑 결혼을 하겠다구? 하기야 우리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그 여자와 결혼하
는 건 니 맘이다. 그렇지만 이 동네에서 떠나가야 한다는 것은 바뀌지 않아. 그래, 잘됐구만,
제대루 돼 갈 거 같다. 좀 늦긴 했지만 말야. 너는 이 동네를 떠나야 할 처진데 그 여자와 결혼을 한대니까 그 여자두 너를 따라 저절루 이 동네를 떠나가두룩 됐으니 말이다.”
“정선댁은 이 동네 사람입니다. 저두 정선댁과 결혼하면 이 동네 사람이 돼가지고 이 동네
에서 살 겁니다.” 나는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이장네 마당을 떠났다.
“저눔이, 어디서 굴러 들어온 개뼈다귀야? 야, 이눔아, 등 돌리구 가믄 그걸루 일이 끝난 줄 아니? 어림읎지.”
“저눔이 알구 보니 잡귀신이네 그려. 암퀴신 냄새 맡구 찾아온 수퀴신일세 그려.”
내 등뒤로 갖은 욕지거리와 악담이 달음박질로 따라왔다. 나는 여보란듯이 정선댁네 집으로 갈까 하다가 그냥 내 숙소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어르신.”
나는 안방 축대 앞에 서서 말했다.
'그래 무슨 의논들을 하던가? 마을회의를 했다니 궁금하구만.'
그분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대꾸했다.
'어르신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저더러 이 동네에서 떠나랍니다.”
“방안으로 들어와 좀더 자세하게 얘기해 보게.”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 그분 앞에 좀 떨어져 앉았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자네가 나한테 죄송할 게 뭔가?''
그분은 내 표정을 살피는 기색이었다. 나도 틈틈이 그분의 표정을 살폈다. 그분의 안색이 굳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평상시 그대로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마을회의에 관해 궁금해 하는 기색은 뚜렷했다.
'어르신께서 잡념 품으시지 않고 고행에 정진 하실 수 있도록 조심했어야 하는데 소란을 떨어 어르신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으니 어떻게 죄송스럽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늘 대해봐도 입담 좋고 능청스러워서 웃음을 흘리게 되는군. 내 고행을 방해해서 죄송하다구? 허, 허, 그건 그렇고... 마을 사람이 언제까지 자네가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그러던가?”
“정선댁과 결혼해 이 동네 사람이 돼가지고 이 동네에서 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어허, 자네다운 대답이구만,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하라고 물러앉던가?'
“정선댁과 결혼하는 건 상관 않겠지만 결혼하면 정선댁과 함께 마을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마을을 떠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구 협박을 했습니다.”
“협박만으로 끝내지 않을 테지. 그래서 자네는 정말 정선댁과 결혼해 이 마을에서 살 작정 인가?”
“이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자네 말이 어설프고 엉성하게 들리네. 그리고 정선댁은 어떤가? 자네가 걸혼하겠다구만 하면 정선댁은 무조건 자네 결정을 따른다는 건가?”
“외롭구 불쌍한 여잡니다. 그 여자는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잡으려고 합니다. 자기 편이 되어 줄 독신남자가 결혼하자고 한다면 고마와하며 응할 태세가 돼 있습니다.'
“결혼은 언제 할 작정인가?'
“정선댁네 집에 들어가 살면 그게 결혼한 겁니다.”
“정선댁의 농토가 보잘 것 없다면서 어떻게 살아갈 작정인가? 정선댁과 결혼하면 동네
사람들이 일거리도 주지 않을 텐데?'
“다른 동네로 일을 하러 갈 수두 있습니다. 요즘 농촌 어디나 일손이 모자라니까요.'
“그걸로 끝나는 일이 아닐 텐데? 이 마을 사람들이 자네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견뎌 내겠습니다. 제 견뎌 내는 힘을 시험하려고 마련된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문제는 제가 아니라 어르신께 미칠 물살 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어르신한테까지 행패를 부릴까 걱정됩니다. 어르신, 가까운 이웃마을루 옮기시면 어떻겠습니까? 전 변함없이 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도 이제 짐작하셨겠지만 제 첫번째 임무는 어르신께서 성공적으로 고행을 마치실 때까지 정성껏 시중을 들어드리는 겁니다.”
“허, 허, 자네 또 능청 떠는구만, 내가 아주 먼 데로 옮겨가면 어떻게 하겠나?'
“만일에 어르신과 정선댁 가운데 한 쪽을 고르라구 한다면 당연히 어르신 쪽에 서겠습니다.” “나는 이웃마을로는 옮겨 앉지 않겠네. 정선댁과 나 사이를 수시로 오갈 수 없는 먼 곳이 아니면 이 동네에 그대로 머물 생각이네. 자네는 그 두 곳 중에 내가 어디를 택하는 걸 더 좋아하나? 자네가 골라 준다면 어느 쪽을 골라 주겠나? 능청 떨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보게나.'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분이 내 마음 속을 떠보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그런 시험을 내가 사탄의 지령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확신을 얻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싶었다.
“솔직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 욕심대로라면 어르신께서 여기 그냥 머무시는 쪽을 고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와 정선댁의 관계로 인해 어르신께서 피해를 입으실지 모른다구 생각할 때는 어르신께서 먼 데로 옮기시는 쪽을 고르겠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로군. 난 여기 그냥 머물겠네.” 그분의 그런 결정에는 그분 나름의 계산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떤 계산일지는 짐작해 낼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로 인해 어르신께서 동네 사람들의 적의 행패 모욕 앞에 서시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렇게 보면 어르신을 뫼시고 다른 고장으로 옮기는 쪽을 고르는 것이 옳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됐네, 자네 덕분에 까닭없이 미움과 핍박을 받고 행패와 모욕을 당하는 경험도 겪어보게
되나 보네. 그런 경험은 내 고행에 훌륭한 영양 소를 공급해 주네. 사탄의 시중을 받고 어리석은 백성들에게서 까닭없이 핍박을 받는 일을 참아내는 일이야말로 참된 고행이 아니겠나? 완전하게 회복될 수 있다면 중병도 앓아보는게 좋다고 하네. 자네는 늘 내게 병 주고 약 주고, 또 약 주고 병 준다는 생각이 드네. 핍박을 알선해 주는 일과 시중을 들어 주는 일은 어느쪽이 약이고 어느 쪽이 병인가? 사탄과 같이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흥미진진할 줄은 미처 몰랐네. 자네도 자네가 살아가는 일이 흥미진진 한가? 자네는 쉬지 않고 일을 꾸미고 분쟁과 갈등을 빚어 내야만 하잖는가? 평범한 사람이 라면 괴롭고 고달프겠지. 그렇지만 사탄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이 흥미진진하고 또 그래야만 하지 않겠나? 사탄은 그렇다 치고, 사탄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네 같은 사탄의 졸개들은 어떤가? 오늘 하루도 임무에 충실하느라 수고가 많았을 테니 이제 고만 건너가 쉬게.” 그분은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내 방으로 와 자리잡고 누워 그분의 자상함에 대해, 그분의 너그러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분은 날이 갈수록 내게 자상해진다. 그리고 사탄의 졸개를 시종자로 거느린 성자라는 구도에 대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흥미진진해 한다. 그런것이 진정한 성자의 경지일 것이다. 까닭없이 핍박과 수모를 겪는 일을 고행이 섭취해야 할 훌륭한 영양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란 성자의 경지가 아니고는 넘볼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성취되어가는 그분의 고행을 옆에서 바라볼 때의 나도 덩달아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 깨달음도 맛본다.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연습 상대가 필요하듯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공적인 고행의 과정을 겪어 내기 위해 서는 그 상대역으로 사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제법 깊은 깨달음이 아닐까. 그 깨달음과 더불어 나는 나의 역할에 대해 한층 뚜렷한 신념을 지니게 된다. 나는 그분의 고행을 위해, 그분의 고행이 필요로 하는 사탄의 역할을 훌륭하게 연출하고 연기해 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거부감이 차츰 녹아내리며 사탄의 역할이 차츰 즐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탄의 역할이 아니라 사탄의 졸개 역할이다. 내가 감히 사탄의 역할을 맡을 수는 없다. 나는 때때로 내가 연기로 하는 사탄의 졸개가 아니라 진짜로 사탄의 졸개일지로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신자들이 자신이 믿는 신을 만나 보고 싶어하듯 나는 사탄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가슴 속에 서리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사탄의 신도요 졸개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분의 고행을 시중들면서 내가 맡은 중요한 역할이 사탄이듯이 정선댁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수행해야 할 역할도 사탄인지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 사탄이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정선댁과의 만남이 시작되고 나서 나는 정선댁 이 마을 사람들에게서 악귀 들린 여자, 또는 악귀 자체로 취급받고 있음을 알았다. 악귀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이 나를 정선댁에로 이끌어간 것은 아니었다. 오리려 정선댁이 악귀가 아니라는 신념이 나를 그 여자에게로 이끌어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정선댁은 변할 수 없는 악귀였으며, 나는 그 악귀와 운명을 같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