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회의가 있은 다음날부터 정선댁네를 제외한 마을의 모든 집에서 나와의 거래를 끊어버렸다. 가래나무집에 이틀 동안 퇴비를 해주기로 한 약속 중에서 그날 하루일을 했고 나머지 하루가 남아 있었다. 마을회의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돌아오면서 나는 이제부터 상당 기간 이 마을에서는 품팔이 노동을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머리속에 떠올렸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나는 남은 하루일을 해주려고 가래나무집으로 갔다. 미리 약속했던 일이야 서로 간에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에서였다. 품삯도 계산해 받아야 한다. 이틀 품삯이라야 다른 일꾼으로 치면 하루 품삯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었다. 그런데 가래나무집 바깥주인이 나를 맞는 얼굴 표정이 떨떠름했다. “미리 정했던 일 마쳐 드리려구요.' 나도 변명하는 투로 말했다.
“나 혼자 천천히 할까부야. 퇴비하는 일이래는게 썩 급하진 않으니까.'
바깥주인은 빙빙 돌려 대꾸했다. 하기야 그렇지요 뭐. 그럼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몸을 돌려 세웠다. “잠깐 기달려 봐. 하루 품삯 받아 가야잖아?' 바깥주인의 말이 내 등덜미를 잡듯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려 세웠다.
“유씨, 퇴방에라두 걸터 앉우..'
바깥주인이 내게 줄 품삯을 가지러 방안으로 들어가자 안주인이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딸 만 넷을 낳았다는 안주인은 바깥주인보다 겉늙어 육십살에 가깝게 보였다. 그러나 나를 대하는 안주인의 얼굴색은 차겁지도 굳어 있지도 않고 단지 딱하다는 표정이었다. '괜찮습니다.' '우리야 동네에서 시키는 대루 따라하는 거지 만서두, 유서방은 뭣 때매 그 예펜네한테 빠져가 지구 그러우? 하기야 그 예펜네가 예사 예펜네가 아니지. 그 예펜네는 물귀신이구 수렁이야. 그 중에서 두 남자들을 골라서 끌어들이구 빠뜨리는 물귀신이구 수렁이우, 시애비랑 서방을 빠뜨려 죽인 뒤에두 숱한 남자들을 홀렸다우. 첨엔 술취한 동네 남자들을 홀리다가 차츰 본색이 드러나니까 영문 모르는 외간 남자들을 홀렸우, 봄 가을 일손 바쁠 적에 품팔러 온 외간 남자들이 수두 옳이 그 예펜네가 파 논 수렁에 빠져가지 군 허우적댔우. 우리 여자들한텐 꼴같잖아 뵈더 구만서두 남자들 눈에 탐스럽게 보이는 겐지 원. 하기야 그 예펜네가 물귀신이니까 수렁을 파 놓 구는 햇솜 이부자리라두 깔아 논 거처럼 뵈두룩 요술을 부리는 걸 테지만 말이우. 정신 똑바루 채리지 않구 보믄 팔자 사나워 서방 잃구 어린 새끼 데리구 사느라 고생하는 불쌍한 젊은 여잘테지만, 정신 똑바루 채리구 보믄 백년 묵은 여우구, 한을 잔뜩 품은 물귀신이우, 정신 똑바루 채리우, 유서방. 유서방이 늙은 호래비유? 할 일 없어 빈들거리는 건달이우? 왜 그런 예펜네한테 홀리는 게유? 젊은 사내들은 치마 두른 사람만 보믄 피가 펄펄 끓어 올른대긴 한대지만 그래두 경우가 있구 한도가 있는 거라우. 어쩌다가 잠자리를 같이하는 건 젊은 혈기에 떠밀렸다 쳐 주 더래두 그 예펜네한테 장개를 들겠다구? 사지 멀쩡한 총각이 애 둘밖에 가진 거라군 없는 흔 여자한테 장개를 들겠대니 지 정신이우? ”
안주인은 숨을 가다듬을 생각에서인지 말을 멈 췄다. 그만큼으로 말을 마쳐도 되지만 말을 마칠 기색이 아니었다. 방에 들어간 바깥주인은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돈을 찾고 있는 것 일까, 방 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
'아주머니, 제가 보기엔 정선댁이 여우도 아니구 물귀신도 아닙니다. 단지 마을 사람들한테 따돌림을 받아서 두 자식 먹여 살리느라 허둥대는 딱하구 외로운 여자일 뿐입니다. 그런 힘없는 여자 하나를 두고 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야단법석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
“어허! 불여우, 물귀신한테 단단히 홀렸구만. 불쌍한 예사 여자처럼 보이는 건 남자 혼 빼낼라구 수단 쓰는 거래니깐 그러네. 그 예펜네네 집에 가거들랑 건넌방인지 구석방인지 문 잠궈 논 방이 있을 테니깐 문틈으루래두 몰래 들여다 보우, 그 예펜네 악귀를 꾀신 신당을 집안 어디 채려 놓구선 밤중이믄 스며 들어가 남자가 걸려 들게 해 달라구, 또 동네 사람들 망하게 해 달라구 빈대는 거야. 그게 자식 멕여 살리느라구 허 둥대는 불쌍한 예사 여자유? 유서방, 정신채리우. 멀쩡한 젊은이 망가질까봐 걱정이 돼 그래. 그 예펜네 그 동안 유서방 없이두 멀쩡하게 살아왔우, 그 불여우, 물귀신한테 혼 뽑히기 전에 정신 바짝 채리구 이 동네를 훌쩍 떠나버려. 아까운 사람이라 제 발루 떠난대두 붙들구 싶구만서두 그 불여우, 물귀신 요술에 걸려들라 그러는 판이니 안되겠우.” '아주머니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선댁이 여우두 물귀신두 아니구 예사로운 사람이라는 제 생각에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제가 정선댁과 가깝게 지내려는 건 그 여자한테 홀려서 혼을 뺏겼기 때문이 아니라 정선댁이 여우도 귀신도 아니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한테 증명해 보여 드리구 싶어섭니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저를 통해서 정선댁이 여우나 귀신인지 그냥 사람인지 실험을 해보시면 좋잖습니까? 정선댁이 여우나 귀신이더라도 혼을 뺏 기구 잡아먹히는 건 저니까 마을 사람들한테 해가 되지 않을 테구, 반대로 제가 정선댁이 여우나 귀신이 아닌 예사로운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 드린다면 그 동안 마을 사람들이 정선댁한테 품었던 오해를 풀게 돼 마을에 평화를 가져오는 결과가 되잖겠습니까? 제가 정선 댁과 결혼해 살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얼마 동안 참구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벌써 혼을 뺏겼구만, 쯧쯧.' 안주인의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바깥주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자, 하루 품삯이네. 받게. 이러믄 자네와 나와는 셈이 끝났네.” 바깥주인은 돈을 내 눈 앞에 내밀고 몇번 흔들어 보이다가 끌어들여 한 장 한 장 소리 내어 세어 보이고는 내 앞으로 다시 내밀었다. 모멸감에 다가 증오심마저 얹은 동작이었다. 방안에서 안주인과 내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태도가 훨씬 강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싶었다. 나는 돈을 받아 바지주머니에 접어 넣고는 가래나무집 울타리를 벗어났다. 길이 꺾이는 데서 힐끔 돌아보니 늙은 가래나무가 숱한 가지와 아직도 무성한 잎들을 거느리고는 지붕이 납짝해 보이도록 허공으로 치솟아 있었다. 그 동안 가래나무가 내 마음에 친근하게 다가서 있기라도 했었다는 듯 한 발 한 발 멀어지는 거리가 내 가슴에 허전함을 안 겨 주었다. 가래나무도 그 주인들처럼 나와의 사이에 매어져 있던 끈을 풀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유서방이 늙은 홀애비유? 할 일 없어 빈들거리는 건달이우? 왜 그런 예펜네한테 홀리는 거유? 왜, 왜, 왜............' 가래나무가 끈을 풀어내며 되뇌이듯 왜 왜 하는 소리가 내 귓바퀴를 맴돌며 따라왔다. 그래, 나는 왜 정선댁과 결혼까지 하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결혼을 하고 싶을 만큼 정선댁을 진실로 원하고 있는 것일까. 어서 대답해봐. 하고 나 자신에게 재촉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그렇다. 아니다. 어느 쪽으로도 명확한 대답이 아직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초희한테 진 빚을 정선댁을 통해서 갚으려고 하는 거냐. 그 물음에도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분이 내가 정선댁과 한 통속이 되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으리라는 암시를 받았기 때문이냐. 그런 물음에도 뚜렷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내 속 깊이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남아 그것이 나를 충동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물음에도 가부간 뚜렷한 대답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내 속 깊숙이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럴싸하게 여겨졌다. 초희 얼굴이 눈앞에 떠올라 보였다. 욱하는 성질 버려요. 참구 또 참아요. 욱하는 성질이 일어날 때마다 나를 생각해요. 내가 못다한 삶을 당신이 대신 살아줘야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욱하는 성질을 잘 다스리구 부지런해야 돼요. 알았지요? 초희가 말하던 욱하는 성질, 그것이 내 속에 남아 있는 풀리지 않은 응어리일지도 모른다. 부모 슬하에서 생활하던 시절 나는 욱하는 성질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없다. 욱하는 성질은 내가 교도소에 다녀온 뒤부터 생긴 후천적인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기회 있을 때마다 내 성질을 불뚝불뚝 돋구어 놓곤 하는 내 깊은 속 풀리지 않은 응어리는 세상에 대한 반항심이기 쉽다. 교도소에 갇힐 때부터 내 가슴 속과 머리속에서는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향한 불평, 불만, 불신, 반항심, 적개심이 샘솟고 고이고 넘쳤다. 그 것이 응어리가 되어 내 속 깊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 응어리가 때때로 나를 미쳐 날뛰도록 만들곤 했었다. 초희를 만나고서 응어리는 풀리기 시작했고, 초희가 죽는 것과 함께 응어리는 남김없이 녹고 풀어져 없어졌다고 생각했었다.
응어리가 있던 자리에 대신 초희가 자리 잡았고, 나는 더할 수 없이 자신을 낮추고 그 낮춘 위치에서 불만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분의 고행에 따라 나서고, 정선댁의 편에 서고, 정선댁과 결혼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나의 자세 낮춤이 이루어낸 당연한 결과라고 치부해 왔었다. 하지만 내 속 깊이에는 나도 모르게 응어리가 남아 있었던 것일까. 따져보면 응어리가 남아 있대서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응어리가 다 삭아 없어졌다면 이상한 일일 터였다. 크나큰 깨달음에 이른 성자나 그런 경지에 닿을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그분이라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지만 나는 어림도 없을 터였다. 그러면 나는 무엇일까. 내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품삯을 벌려고 그분을 뒤따라온 처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교도소에서 나와 이런저런 직업을 거치는 동안 주인과의 계약에는 최선을 다해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은 터득 할 수 있었다. 계약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고, 낮추고 또 낮춰야 한다는 비결은 초희한테서 배웠다. 결국 나의 참고 낮추는 태도는 본성이 아니라 훈련된 직업의식에 가까운 것이래야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참고 낮추는 나의 태도는 자격지심과 열등의식을 다스려보려는 궁여지책일 수도 있다. 낮추고 또 낮추고, 참고 또 참는 일은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성 자와 가장 낮은 위치에 떨어져 있는 힘없는 자 만이 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나는 분명 그 말을 어디서 읽었거나 들었다. 그러나 깊이 음미 해 보지는 못한 채 기억의 한 구석에 밀어 놓았던 듯하다. 지금 와서 그 귀절이 모양을 갖추고 빛을 발하며 기억의 표면으로 떠올라 온다. 가장 높은 자의 낮춤과 참음은 온갖 얽매임의 사슬에서 해방된 데서 비롯된 것이고, 가장 낮은 자의 낮춤과 참음은 일신을 보존하기 위한 궁여지책에서 비롯된 것이니라. 결국 가장 높은 자의 낮춤과 참음은 응어리와 찌꺼기가 말끔하게 풀리고 씻겨 나간 상태의 모습이고, 가장 낮은 자의 낮춤과 참음은 응어리와 찌꺼기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 낸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낮은 자이다. 나의 낮춤과 참음은 내 속의 응어리와 찌꺼기를 감추기 위해 짜낸 궁여지책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내 속의 응어리와 찌꺼기는 원망과 시샘과 증오심과 적개심 그리고 열등감과 자기혐오와 자기멸시와 후회, 낙담, 절망 따위로 되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내 속에는 그런 것들만 들어 있지는 않다. 깨끗한 것, 순수한 것, 위대한 것, 거룩한 것, 지고한 것에 대한 선망, 그리움, 사랑, 존경, 경외심도 제법 진하게 남아 있다. 그러니까 내 속에는 상극되는 생각과 감정이 뒤엉켜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본다. 하지만 가로젓는 고개 짓을 자신감이, 확신이 뒷받침해 주지를 못했다. 나는 그분에 대해 계약상의 의무를 지고 있지 만 그것 못지않게 존경심도 지니고 있다. 나는 존경의 대상이 없으면 공허해진다. 그분은 나의 공허를 메꾸어 주는 분이기도 하다. 한데 나는 그분에게 원망과 시샘과 증오심과 적개심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내 가슴 속은 불안한 듯 떨림이 일었다. 나는 머리를 가로저어 그 생각을 털어냈다. 내가 정선댁한테 다가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도 한 가지 색깔이 아닐까. 나는 정선댁 편을 드는 것이 억울하게 배척당하는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과 전혀 반대되는 생각도 섞여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일까. 반대되는 까닭이란 무엇 일까. 보호하는 것의 반대는 해치는 것, 망가뜨리는 것이다. 정선댁을 보호하겠다는 내 생각 속에는 정선댁을 더 망가뜨려 놓겠다는 생각도 섞여 있다는 것일까. 정선댁을 도와주면서 내 속에 도사린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꿔 놓고 싶어한다면 어떨까. 나는 더 떨어져 내리지 않으려고 틈틈이 책을 구해 읽고 라디오의 교양 프로를 귀담아 듣곤 했었다. 나는 나보다는 약한 자가 있고 내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에서 자위를 맛보려 한 것일까. 또는 정선댁의 몸뚱이를 즐겨보려는 속셈을 숨겨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은 말과 비슷했다. 생각지도 않던 일이 입 밖으로 꺼내 말하니까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처럼,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생각을 하니 그럴 듯하게 여 겨지니 말이었다. 나는 머리를 가로젓는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안간 할 일이 없어진 자신의 처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아 안 듯했다. 문득 불안해지려던 마음이 곧 가라앉았다. 몇 달 동안 품팔지 않고도 굶어 죽지 않을 돈을 벌어 놓았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놀고먹을 생각은 없었다. 내일부터는 다른 동네로 일거리를 찾아 나설 참이었다. 가래나무집 일이 틀어졌으니 오늘은 모처럼 마음 놓고 쉬리라. 나는 정선댁네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외면했다. 외면하면서도 얼굴에 비웃음과 적의를 담곤 했다. 나는 나대로 동네 사람들을 무시한다는 표정을 얼굴에 담았다. 이제는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정선댁은 집에 있었다. “웬일이래유? 이렇게 일찍...” 정선댁은 반가워하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오늘 할려던 일이 틀어져서 별안간 한가해진 데다가 갈 곳이 마땅치 않지 뭐예요. 나는 정선댁 얼굴을 바라보면서 백년 묵은 여 우와 물귀신을 생각했다.
“이 동네 사람들과는 아주 남남이 돼버렸으니 까 동네 사람 눈치볼 것 없지오 뭐.'
“장하시우, 참 어젯밤에 동네회 열렸대믄서유? 거기서 동네 사람들이 유씨더러 아주 남남이 되 자구 합디까?'
“정선댁과 헤어지든가 아니면 이 동네에서 떠 나가래요.”
“못된 것들! 그래 뭐라구 대답했우?' “정선댁이 백년 묵은 불여우구 남자만 끌어 들 여가는 물귀신이래요. 그래서 정선댁이 여우도 귀신도 아니구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 주겠노라구 대답했지오 뭐.' 정선댁 눈꼬리가 샐쭉했다. '대답을 그렇게 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 걸루 이 일을 끝냈다구 생각한대믄 잘못이예유. 얼마나 끈질긴 사람들인지 유씨는 잘 몰를 거유. 두구 보래유, 거머리처럼 달라붙을 테니까.' 달라붙어 보래지. 내가 끄떡이나 하나?' “장담 말아유.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 구,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낸다구 했잖수? ”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게 우리 부부가 돼 가지고 같이 사는 게 어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체념이라도 하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선은 정선댁과 결혼한다면 초희의 혼도 성을 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정선댁의 얼굴과 몸뚱이는 못나지 않았더라도 자식 둘 달린 촌 아낙이니 초희 혼이 질투할 상대가 되지 않을 터였다.
정선댁은 잠깐 놀란 기색이더니, '이런 일을 부모 승낙두 안받구 갑작스럽게 말 하니까 장난 같네유.” 하고 대꾸했다. 그래, 정선댁 말도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얘기하지 않았어요? 나도 정선댁과 다름없이 망망대해에 떠 흘러가는 조각배 같은 처지라구 말이에요. 하기야 정선댁 마음에 달린 일이 지만...” “유씨 말이 참 맘에서 한 거래믄 나야 마다할 까닭이 있나유?' “우리 그럼 당장이래도 혼인식을 올립시다. 꾸물댈 거 없잖아요? ” 정말이지 나는 무엇에 체념이라도 한듯 말이 쉽게쉽게 입 밖으로 나왔다. “귀 뒤에 대구 몰래 딱총 터뜨리듯 깜짝깜짝 놀래키네유. 얼만큼 채리는 혼인식이기에 오늘 당장이래두 치르재는 거래유?''
'여보란듯이 떠들썩하게 치르면 좋겠지만 구경 올 사람두 없을 테고, 우리 앞날을 생각해서 돈 처들일 필요도 없어요. 같이 읍내루 가서 반 지나 하나 사서 끼는 걸루 혼인식을 대신합시다.”
“근데 꼭 급하게 도망가야 할 사람처럼, 또 금 세 싸움터에래두 끌려 나가게 된 사람처럼 덤벙 댄대유? 정한수 한 그릇 떠 놓구서 맞절이나 하는 걸루 식을 때운다 치더래두 점쟁이 찾아가서 길일이래두 물어야 하잖아유? 그리구 동네 사람들은 오지 않더래두 유씨가 뫼시구 있는 으른은 오셔야지유. 혼인식 올렸다구 증명해 줄 사람은 있어야잖아유? ” 여자는 역시 남자보다 치밀하고 조심성이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너무 즉흥적이었구 나 하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날짜는 정선댁이 잡으세요. 혼인증명은 면사무소에 혼인신고를 하면 돼요. 오늘은 읍내로 반지나 사러 갑시다.” 정선댁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라 감돌았다. 정선댁은 좀 나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더니 내 옷을 훑어보았다.
“그 옷 일할 적에 입는 옷이잖아유? 그냥 그렇게 입구서 읍내에 갈 거래유?' “갈아입구 나올 테니 동구 밖에 먼저 가 있어. 나는 정선댁에 앞서서 정선댁네 담장을 벗어났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늦장마였다. 그분과 함께 지내는 집과 정선댁네에 쌀 한 가마씩 사들여 놓은 것이 마음 든든했다. 장마 때는 농촌에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전 같으면 가마틀을 차려 놓고 가마니를 짤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가마니가 麻袋로 바뀌면서 가마틀도 골동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장마 때는 우비(전에는 도롱이를 어깨와 등에 걸쳐 입었다) 입고 삽자루를 총대처럼 어깨에 얹고 봇둑과 논 물꼬 살피는 것이 고작이었다. 제법 장마다운 장마였다. 날마다 서너 차례씩 굵은 빗줄기를 쏟아 부었고 뜸한 사이사이로는 이슬비 안개비를 뿌려대곤 했다. 장마 때라도 거지 빨래해 입으라고 한나절씩 또는 하루씩 반짝 햇빛 나는 때가 있다는데 이 장마는 그렇게 여 유 있지가 못했다. 비가 쏟아지건 뜸하건 두터운 먹장구름이 하늘 가득 뒤덮여 있곤 했다. 질척거리는 땅과, 쏟아졌다가 질금거렸다가 하는 궂은 날씨로 사람들은 집안에 갇혀 마을길은 늘 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나는 그 질척거리고 한가한 길로 내 숙소와 정선댁네 집을 오가곤 했다. “날 잡았대유.” 어느날 정선댁이 말했다. '언젠데?'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궁금한 척 물었다.
“둘인데, 하나는 장마통이구 하나는 가을이래유. 당신은 어느 쪽을 골르실라우?' '당신 좋을 대루 해.” 나는 정선댁한테 맡겼다. 장마 진 뒤로 정선댁과 내가 상대방에게 쓰는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날씨야 가을이 좋겠지만 가을은 바쁜데다가 한참 기달려야 되구, 이왕에 치르게 된 거 너무 뜸을 들여두 안좋구 하니까 가까운 날루 증해유. 그날이 언젠지 알아 맞쳐볼래유?'' “글쎄, 오늘인가?'
“급하기는, 오늘 아니래유, 낼이래유, 부치기 줌 부치구, 국 끓여 놀 테니 그 으른두 뫼시구 와
“말씀은 드려보겠지만 오시진 않을 거야. 그분은 고행, 그러니까 도를 닦는 분이시거든.” 되두룩 뫼시구 와유. 신당에서 지낼테니까유.' 신당?' 나는 캐묻듯 물었다. “당신한테두 여태 숨겨온 데래유. 난 동네 사람들한데 따돌림 받은 뒤루 신당을 맨들어 신님을 꾀셔 왔대유. 내가 버티구 참아낸 것두 그신 님의 덕이랬어유.”
'어딘데, 나 좀 미리 구경시켜 줄 수 없나? 말하자면 혼인예식장인데 미리 봐 둬야 하잖아?'
'안돼유. 낼까지 참아야 해유. 신님이 그렇게 하라구 하신 걸유.”
'그렇다면 낼 보두룩 하지.” 나는 그렇게 물러나면서 가래나무집 안주인이 하던 말을 문득 기억해 냈다. 그 예펜네네 집에 가거들랑 건넌방인지 구석방인지 문 잠궈 논 방이 있을 테니깐 문틈으루래두 몰래 들여다보우. 그 예펜네 악귀를 뫼신 신당을 집안 어디 채려 놓구선 밤중이믄 슬며시 들어가 남자가 걸려들게 해달라구, 또 동네 사람들 망하게 해달라구 빈대는 거야.' 그러자 내가 정선댁네 일을 처음 해준 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정선댁한테 들은 정선댁 사정을 그분 앞에 털어 놓았을 때 그분이 한 말이 기억의 갈피 속에서 빠져 나왔다.
혹시 그 여자가 남 몰래 집안 어디에 귀신 섬기는 제단을 쌓아 놨을지두 모르지. 그런 여자는 막힌 길을 뚫으려는 궁여지책으로 귀신을 섬기게 되기 십상이네. 집안에다 귀신 섬기는 제단을 쌓아 놓지 않았더라두 그 여자 가슴 속 어디에 귀신 섬기는 제단이 있을 걸세. 그 여자네 집안이나 그 여자 마음속을 눈여겨 살펴보두룩하게 그분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분은 정선댁을 정확하게 뚫어본 것이다. 그분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집안은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석지붕에 빗방울 부딪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집안을 소란스럽게 뒤집어엎는 것이 아니라 고즈넉함 속에 잠겨들게 했다. 그분은 비오는 마당을 향해 가부좌하듯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묵상에 잠겨 있었다. 활짝 열린 방문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그분의 모습이 오늘 따라 성자나 고승처럼 높고 아득했다. 그러나 나는 살며시 내 방으로 들어가야지 하는 생각보다 그분과 마주 앉고 싶은 생각에 떠밀리고 있었다. 나는 축대 위로 올라서며 어험어험 헛기침을 했다.
“자네 나와 얘기하구 싶은가? 그럼 들어와 내 앞에 앉게.” 그분의 말소리가 빗소리를 밀어내며 들렸다. 나는 문득 낙숫물 떨어지는 댓돌 위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그분은 어떻게 기침소리만 듣고도 내 마음 속을 꿰뚫어보는 것일까..
“네, 잠시 들어가 뵙겠습니다.'
나는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빗물이 질질 흐르는 접은 우산을 툇마루가에 또한 공손하게 기대 세워 놓고는 그분의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좀더 가깝게 다가와 편안하게 앉게.”
그분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나는 두어 걸음 다가가 책상다리로 고쳐 앉았다. 그분과의 거리는 이미터 남짓 되었다. “할 말 있거든 하게나.'
'내일 저녁에 정선댁과 정한수 한 그릇 떠 놓구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됐구만.'
정선댁은 어르신께서 참석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를 자네들 패거리루 슬그머니 만들어버릴 꾀는 부리지 말게.”
'어르신께서는 도를 닦으시는 중이어서 참석 하지 못 하신다구 말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을 알아냈습니다. 언젠가 어르신께서 말씀하셨듯이 정선댁은 집안 어디에 잡신을 뫼시는 신당을 차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내 말 끝에 잠깐 만족스러워하는 빛이 얼굴에 떠올랐다. “결국 그 여자는 잡신의 힘을 빌어 마을 사람들에 대항해 왔으니 마을 사람들이 그 여자를 귀신 들렸다구 말하지 않겠나? 그래서, 그 신당이라는 델 들어가 봤는가?'
“내일 결혼식 치를 때나 들어가야 한다면서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자네는 정말 일을 벌려 놨구만, 자네는 그 여자와 하나가 돼서 이 마을을 싸움터로 만들어버릴 작정을 했구만, 자네의 괴수와 그 여자의 잡신이 한통속이 돼 이 마을이 온통 흔들구 찢기고 부서지겠네. 내일부터 자네는 그 여자네 집에서 지내게 되겠지?' '어르신 시중 들어드리는 제 임무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욕심 부리지 말게나, 마을 사람들과 싸우는 일만으루두 힘이 꽤 들 테니까. 혼인식을 올리고 나면 곧바루 본격적인 싸움을 해야 될 걸?' “어르신께서 고행을 마치실 때까지 어르신 시중을 들어드리는 일은 저의 첫번째 임무입니다. 혹시 제 손이 미처 닿지 못할 경우에는 정선댁을 시켜 시중 들어드리겠습니다.'
“여보게. 이제 자네의 그 임무 포기해두 되네. 나두 사탄한테서 시중 받는 경험은 이만큼으루 족하네, 할 말 웬만큼 한 것 같으니 그만 자네 방으로 가게.” 나는 명령에 따르듯 입을 다물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분에게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의무감과 존경심뿐이었다. 그 존경심 속에 그분에 대한 적개심이 섞여 들어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마저 깡끄리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분은 세상을 초월한 성자였다.
내가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해 품은 적개심을 억누르고 풀어내기 위해서는 그분과 같은 존재가 필요하고, 그런 존재에 대한 순순한 존경심이 필요했다. 내가 어떻게 계약기간도 끝나기 전에 그분을 시중드는 일을 포기할 수가 있는가.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그분에 대한 존경심을 계속 해서 간직해 나갈 것이었다.
이튿날 새벽 나는 우물물로 목욕을 했고, 방에 들어와 가부좌로 앉아 초희를 내 앞에 끌어내 앉혔다. “초희, 나 오늘 정선댁과 혼인식을 올리게 됐어. 초희가 말했지. 내가 결혼하는 여자 속에 초희가 들어가 있겠다구 말야. 정선댁은 내가 곁에서 거들어 줘야 할 여자야. 물론 초희는 이미 정선댁에 대해서 알구 있겠지. 초희는 벌써 정선댁 속에 들어가 나와 다시 합해질 준비를 끝냈을지도 몰라. 그리구 나는 초희한테 진 빚을 정선댁을 통해 조금이라도 갚아볼 속셈을 지녔는지두 몰라. 그렇더라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나는 결코 초희한테서 벗어나려는 게 아니니까. 초희 한테서 벗어나다니, 말도 안되는 생각이야. 나는 세상에 살아 있는 착한 여자, 불운한 여자한테서 초희를 찾고 있는 걸, 초희, 정선댁 속에 들어와 있겠지? 만에 하나, 미처 도착하지 않았거든 오늘 저녁 혼인식을 치를 때까지는 틀림없이 정선 댁 속에 들어와 있으라구.' 초희가 얼굴에 착한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시에 늘 짓던 모습이었다.
저녁이 되자 나는 그분의 저녁밥을 지어 상을 차려 들여 놓고는, 그 중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는 정선댁네 집을 향해 떠났다. 그분이 상을 물리면 설거지를 끝내고 떠나려고 했지만 그분이 막무가내로 나를 재촉했다. 잔뜩 낀 장마구름으로 인해 저녁 어둠은 빨리 덮여 왔고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으로 비를 막으며 질척한 땅에서 단단해 보이는 데를 골라 디디며 걸었다. 날씨 탓인지 마음이 울적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