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和解
다방 ‘오아시스’는 강정길에게 있어 아주 긴요한 곳이었다. 사막의 오아시스와 견줄 바는 아니었으나, 그에게 있어 그 다방은 참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의 유일한 연락처였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는 광화문우체국의 엇비슷한 맞은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광화문네거리에서 가까운, 서울의 중심지로 교통이 좋을 뿐만 아니라 다방 주인이 한 동네에 살고 있어 어디서 무슨 연락이 와도 그 날 통금 직전까지는 강정길이 그 연락을 받을 수가 있었다. 다방 주인은 강정길에게 온 전화의 내용을 알려주기도 했고, 사람이 직접 와서 맡겨 놓고 간 일거리나 책 또는 메모 따위를 가져와서 전해 주기도 했다. 또 강정길이 시내에 볼일이 있어 나가는 일이 있으면 으레 ‘오아시스’에 들러 자기에게 오는 전화를 받기도 하고, 누가 맡긴 메모나 서적 따위를 찾아오기도 했다.
어쨌든 이제 ‘오아시스’는 강정길의 연락처로 널리 알려졌고, 그곳 주인은 충실한 심부름꾼이 되어버렸다. 그 심부름꾼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3개월쯤 전, 강정길에게 따귀를 맞았던 세모돌이 김 형사였다.
세모돌이가 따귀를 맞은 이튿날 아침에 다시 강정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아침상을 물리고 나서 준용이를 어르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세모돌이의 출현을 알리며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강정길의 심정은 담담했다. 사표를 냈다는 김형사의 말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때문은 아니었다. 될대로 되라는, 다 젖은 발인데 물구덩이가 무서우랴는 심정이었다.
강정길은 대문 밖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세모돌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사표를 냈다는 말은 역시 거짓이었군. 오늘도 날 살피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소?’
상대를 비웃는 당당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세모돌이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 그 사표 얘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고소라도 할 작정이오? 경찰복 벗은 뒤에 따귈 맞았으니 공무집행방해죄로 옭아 넣을 수는 없을 테고….”
강정길이 계속해 비아냥대자 세모돌이는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대답했다.
“어제 일로 찾아온 게 아닙니다. 어제도 말했듯이 사과도 드릴 겸….”
강정길이 그의 얘기를 중간에서 잘랐다.
“순전히 그런 뜻이라면 어제 이미 다 끝난 일 아니오?’
“제 사과를 받아들이시는 뜻으로 차라도 한 잔 대접할 생각입니다만.”
“당신이 어제 술값을 냈으니 난 이미 사과술을 얻어 마신 셈이 됐소”
“길바닥에서 이럴 게 아니라
“그렇다면 차는 내가 대접하겠소 누추한 방이지만 들어오시오.”
강정길이 세모돌이를 데리고 오자, 그의 아내는 준용이를 안고 급히 방에서 나왔다. 그는 방 에서 나오는 아내에게 커피를 끓이라고 이르고 난 뒤 세모돌이를 방안으로 안내했다.
세모돌이는 강정길이 내놓은 방석 위에 앉아 방안을 샅샅이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책이 많군요 부럽습니다.”
강정길은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은 채 대답을 않았다. 장롱과 창 밑에 붙여 놓은 책상, 그리고 출입문을 제외한 벽면에 모두 책꽂이가 세워져 있었으므로 결코 적은 분량의 책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었다.
세모돌이의 얘기가 계속되었다.
“사람이 책을 많이 읽어야 되는데, 경찰이라는 직업은 책과 담을 쌓게 만듭니다. 경찰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책을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책 을 읽어야 할 무슨 자극이라도 받았나요?’
“책을 안읽으니까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기분 입니다. 가끔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그런 기분이 들곤 했는데, 어제도 선배님하고 얘기를 하는 동안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들었었습니다. 어제 법에 대해서 말씀하시잖았습니까. 직업상 법에 대해서 선배님보다도 제가 더 잘 알아야 하는데, 막상 선배님과 법에 관해 얘길 하다 보니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정말 부끄러웠어요. 앞으로 좋은 책 좀 소개해 주십시오 사실 저도 학교 땐 문학에 뜻을 둔 적이 있었습니다. 이젠 완전히 깨어진 꿈이 됐지만,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지녔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책은 많이 읽었겠군요?’
“웬걸요. 그저 한때 그런 꿈을 지녔던 때도 있었단 얘기죠.'
강정길과 세모돌이의 얘기가 한참 더 이어졌고, 그들 사이에는 찻상이 놓여지게 되었다.
강정길이 세모돌이에게 커피를 권한 뒤 물었다.
“왜 사푤 냈소?’
“우리 경찰관들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회가 아니잖습니까. 사실 경찰관은 주어진 권한을 행 사할 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찰관 앞에서 머리를 숙이긴 합니다만 속으로는 뱀 취급을 한 단 말입니다.”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요”
“없잖아 있는 정도가 아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경찰을 그렇게 취급하게끔 만든 것이 누구냐 하면 바로 경찰관들 자신이란 얘깁니다. 경찰복을 벗고 나서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입은 사람 들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것 같아 꺼림칙하긴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떡 합니까. 사실 경찰관 들에게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엄정하게 법을 집 행함으로써 시민들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대가거 든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라 이겁니다. 물론 모든 경찰관이 다 그렇다는 얘긴 아닙니다. 그러나 검은 돈 때문에 범법행위를 비호하는 데에 자기에게 부여된 그 권한이라는 걸 악용하는 경찰관이 의외로 많다 이겁니다. 뿐만 아니라 높은 데서 내려온 지시 때문에 죄도 없는 사람을 괴롭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보안과에 근무하는 형사들이 그렇습니다. 변명이 아니라 나도 그 때문에 선배님을 괴롭혀 왔잖습니까. 어쨌든 이제 경찰복을 벗었으니 저와 선배님 사이에 있었던 지난 일은 다 잊어 주십시오”
세모돌이의 진심어린 말에 강정길은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물었다.
“다른 일자리는 구했소?’
“예, 조그만 사업, 사업이라기보다 가게 하나 냈다는 게 옳겠군요”
세모돌이가 말을 마치며 양복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한 장 강정길에게 건넸다. 진초록의 야자수가 앙징맞게 도안된 명 함이었다. ‘김휘웅’이라는 이름 위에 오아시스라 는 다방의 상호가 박혀 있었고, 이름 밑에는 다방의 소재지와 전화번호가 깨알 같은 활자로 찍혀 있었다.
'다방을 차렸군요”
강정길이 명함에서 거둔 눈길을 세모돌이의 얼굴에 꽂았다.
“다방 이름이 촌스럽지요? 선배님께 부탁드렸더라면 싯적인 근사한 이름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오아시스도 괜찮은데요 뭘.”
“시인께서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찻손님은 많은가요?’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중심지인데다 교통도 좋고 해서요”
“다행이군요”
“우리 다방을 연락처로 삼고 있는 단골 손님들 도 많습니다. 선배님께서도 우리 다방을 연락처로 삼으십시오. 마침 제 집도 이 동네니 선배님께서 다방에 나와 계시지 않아도 제가 연결해 드릴 수가 있잖습니까.”
“아니, 김형사 댁도 이 동네라구요?’
“이제 김형사가 아니라니까요”
“실수했소 김사장···.”
“사장이 아니라 다방 주인입니다.”
“그래도 다들···.'
“다들 사장이라고 불러주면 좋아하지요. 하지만 전 사장이라는 호칭이 딱 질색입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사장님’하고 부르면 지게꾼까지도 돌아다 본다잖습니까. 구둣방 주인도 사장, 빵집 주인도 사장, 술집 주인도 사장… 회사도 아닌데 왜 사장이라고들 부르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강정길은 세모돌이가 쉬임없이 쏟아내는 얘기를 들으며 ‘이 친구가 보기보담은 수다스럽구나’ 생각하고 나서 그의 말을 잘랐다.
“집이 이 동네 어디요?’
“이 집 대문 앞으로 양쪽에 골목이 뚫려 있잖습니까? 그 오른쪽 골목으로 약 백미터쯤 들어가 면 왼쪽으로 또 샛골목이 뚫려 있는데 그 끝입니다. 집이 그곳에 있다 보니 선배님네 대문 앞을 지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때문에 선배님한테 오해를 받게 된 적도 몇번인가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선배님의 동태를 살피라니까 보고서는 써 올려야 하고 해서 우정 선배님을 찾아 왔던 적이 많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우리 다방을 연락처로 정해 놓으십시오. 요새 전화 한 대 따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렵다잖습니까.”
“전활 따낼 수 있대도 우리 같은 사람은 돈이 없어서….”
“그러니까 우리 다방 전활 이용하시란 말씀이지요”
“차 배달해 달라는 전화가 많을 텐데, 영업에 지장을 주면 곤란하지요”
“전화가 두 대니까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 다.”
“고맙소 ”
“전화번호 명함에 찍혀 있습니다. 외우기도 좋습니다. 하나는 오오아홉씩스, ‘오오아시스’로 외우면 되고요 또 하나는 넷팔구오니까 '네 팔 구 오'로 외우면 쉽습니다. 우리 다방을 연락처로 정해 놓으면 또 교통도 좋아서 편리할 겁니다. 꼭 그렇게 하십시오”
“고맙소 ”
강정길은 말끝에 쓴웃음을 흘렸다. 지난 밤에 그의 따귀를 갈긴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는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여 말했다.
“엊저녁엔 미안했소”
“천만에요. 전 선배님 심정 다 이해합니다. 전혀 그런 생각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저러나 글만 쓰셔서는 생활이 어려우실 텐데 어떻게 지내십니까?’
여러 친구들이랑 선배들이 아르바이트 거리를 마련해 줘서 그럭저럭 돈벌이를 하긴 하지만 늘 불안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모돌이에게 궁한 꼴을 보이기가 싫어 그냥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세모돌이는 그런 눈치를 챘는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이 있는데, 선배님 집에서 책들을 봤으니 한 권 빌려다 읽고 싶습니다.”
“그러시오. 한번 골라 봐요”
“다방 주인 자리라는 게 바쁠 때는 바쁘지만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간도 많거든요”
세모돌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꽂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책을 살핀 끝에 오른손 검 지로 토마스 만의「魔의 山」을 짚으며 말했다.
“소설이지요?’
“소설은 소설인데 재미는 없을 거요”
“선배님이 재밌는 걸로 한 권 뽑아 주십시오.”
강정길은「마의 산」바로 옆에 꽂혀 있는「아메리카의 비극」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세모돌이 에게 물었다.
“미국 영화「젊은이의 양지」보셨소?’
“그런 영화가 있다는 얘긴 들었는데 보진 못했어요 왜요? 그 영화 원작소설이 있습니까?’
“지금 그「마의 산」바로 옆에 꽂힌「아메리카의 비극」이 바로 그 원작소설인데 재미있을 겁니 다.”
“어떤 스토립니까?’
“얘길 먼저 듣고 영활 보면 재미 없듯이 소설도 얘길 먼저 들으면 읽는 재미가 떨어지지요”
“그래도 대충 연애 얘기냐 탐정 얘기냐 하는 식으로….”
“사랑 얘기도 있고 범인을 수사하는 얘기도 있지요. 그러나 그보다 읽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얘기가 있지요”
강정길은 일어나서 상 · 하 두 권으로 된「아메리카의 비극」을 뽑아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세모돌이도 뒤따라 앉으며 강정길의 얘기를 기다 렸다. 그가 시작한 얘기는 작자가「아메리카의 비극」 을 집필하게 된 시대적 · 공간적 배경에 관한 것 이었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당시의 미국은 물질주의의 팽배와 정경 유착, 도덕성의 상실 등으로 말미암아 미국 사회가 날로 부패해지고 있었다. 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온갖 사회악을 뿌리 뽑기 위해 그의 정치력을 발휘했으며, 모든 악에 철퇴를 가하고 대중의 이권 증진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정치력도 미치지 않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가슴 속에서 빠져 달아난 양심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 국민들이 상실한 양심과 도덕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문학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국내의 유수한 작가들을 백악관에 초대하여 만찬을 베풀었다. 그 만찬회 연설에서 루즈벨트는 미국의 장래를 위협하는 쓰레기들을 제거해 달라고 호소했다. 문학 작품만큼 대중 속에 파고 들어 그들을 교화 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학이 악을 고발함으로써 그것이 제거 된다는 루즈벨트의 주장에 모든 작가들이 동조했다.「아메리카의 비극」을 쓴 작가 데오도르 드라이저도 그때 백악관 만찬회에 참석했고, 또 루즈벨트의 연설에도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당시의 미국 현실을 폭로한「아메리카의 비극」을 집필했던 것이다.
강정길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상기되어 있었 으며 따라서 목소리도 점차 높아졌다.
“미국의 장래를 위협하는 쓰레기, 그 쓰레기들을 제거해 달라는 ‘쓰레기 제거’가 영어로 MUCK RAKING, 즉, 머크 레이킹인데 그 연설 때문에 그 단어가 ‘폭로문학’이라는 뜻도 지니게 된 거지요”
세모돌이의 눈길이 강정길의 입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김형,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까 김형 얘길 들어보니 김형이 몸 담았던 그곳에도 그런 쓰레기 가 많았던 모양인데, 지금 우리 대통령이 그런 쓰레기를 제거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
“난 대통령이 전혀 그런 노력을 않는다고 생각 합니다. 유신헌법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썩게 만드는 쓰레기가 아니냐고요”
그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그의 아내가 창백해진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 리로 나직하게 그러나 강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당신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도대체 때가 어느 땐데 그런 소리를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난리예요? 난 당신 그럴 때마다 피가 바싹바싹 마른다구요. 그러니 제발 말 좀 조심하세요. 제 발 나 좀 살려주세요 제발!”
세모돌이가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밖에서 혹 술김에라도 그런 얘길 하시면 안됩니다. 큰일나지요. 하지만 이렇게 집안에서 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 어쨌든 난 오늘 선배님 말씀을 듣고 느낀 바가 많습니다. 이 책 열심히 읽고 돌려 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대로 우리 다방을 선배님 연락처로 정해 주십시오. 그래야 좋은 책도 빌려 볼 수 있고 오늘처럼 유익한 얘기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게 아닙니까. 절 위해서도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강정길이 아내를 향해 말했다.
“광화문 근처에다 다방을 차리셨다는군. 오아시스라는.”
“어머, 축하드립니다.”
그녀는 핏기를 되찾은 얼굴로 상냥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언제 외출하실 일이 있으면 한번 들르십시오. 우리 주방장 커피 내리는 솜씨가 일류라고들 합니다. 아, 깜빡 잊었었네요. 아주머니 커피 솜씨가 우리 주방장 솜씨 못잖습니다. 정말 커피 맛있게 마셨습니다.”
“놈담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듣기엔 좋군요.'
세 사림의 합친 웃음이 그 동안 무겁게 가라앉았던 방안의 분위기를 확 풀어 놓았다.
[23] 반가운 소식
오후 두 시경, 강정길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 밤을 꼬박 새워 일을 하고 잠을 자고 있는데, 김휘웅이 방문을 두드려대며 ‘강선배님! 강선배님!’ 하고 다급하게 불러댔기 때문이었다.
강정길이 잠에 취한 상태로 문을 열자 김휘웅은 불한당처럼 방안으로 뛰어들며 한바탕 늘어 놓았다.
“참 팔자도 좋으십니다. 지금이 몇 신데 오밤 중처럼 주무시고 계십니까?’
“몇 시지?’
“두 시예요 두 시!”
강정길은 김휘응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책상 위에 있는 사발시계로 눈길을 주며 잔기침을 했다.
“아주머니께선 어디 가신 모양이죠?’
“나 잠자라고 앨 데리고 나간 모양이야.”
“혹시 도망가신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낮잠만 주무시고 계시니…”
강정길이 또 다시 기침을 하고 나서 김휘웅의 농을 받았다.
“이 사람아, 어젯밤을 홀딱 새웠네.”
“작품 쓰셨어요?’
“작품? 발표할 데가 있어야 작품을 쓰지.”
사실 강정길은 ‘안면문답’사건 이후 작품이라고는 단 한 줄도 쓰지 않고 있었다. 쓸 수도 없지만 쓴대도 요시찰인의 낙인이 찍힌 그의 작품을 실어 줄 지면도 없었다. 그가 밤을 새워 한 일은 C출판사에서 맡긴 번역 원고의 윤문이었다. 크리스 슈타트랜다라는 독일인이 쓴「인간 베토벤」을 번역한 원고인데, 그 번역 원고의 문장이 거칠 뿐만 아니라 틀린 곳이 많아 매끄럽게 뜯어 고친 작업이었다.
“집사람이 없어 커피도….”
강정길이 기침 때문에 말을 끊자 김휘응이 딱 하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커피는 무슨 커핍니까. 선배님, 내가 커피 장삽니다. 그러나저러나 약을 좀 사 잡숫던지 하지 늘 기침을 달고 계시니원.”
강정길은 김휘웅의 잔소리가 질색이라는 듯이 또 다시 기침을 해댄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아 참, 이런 정신머리. 급하게 연락이 됐으면 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한테? 어디서?'
김휘웅이 대답 대신 양복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내 건네주었다. 근화학 홍보실에서 급히 연락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좋은 소식입니까?’
“글쎄. 홍보용 잡지를 낸다고 사람을 뽑는다기에 이력서를 내고 시험을 쳤었는데….”
“그럼 좋은 소식이겠네요 어서 연락해 보세요”
“불합격됐다고 연락하진 않겠지?'
“물론이죠. 어서 나가십시다.”
강정길은 세수를 하는둥 마는둥 허겁지겁 외출 준비를 한 뒤 김휘웅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서로 방향이 달라 찻길까지 나와 헤어질 때 김 휘웅이 강정길의 주머니에 뭔가를 넣어 주었다.
“이게 뭐야?’
“택시 타고 가세요”
김휘웅이 재빨리 건널목 쪽으로 달아났다. 강정길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빈 택시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세웠다. 택시 안에서 김휘웅이 넣어 준 돈을 꺼내 본 강정 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택시비가 아니라 강정길의 처지엔 거금이었다.
[24] 울면서 두드리나니
강정길은 탑골공원 팔각정 앞 벤치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가 무언가 마음을 굳힌 표정으로 무릎 위에 놓인 서류봉투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재정보증서였다. 그는 그 서류를 반으로 찢고 그것을 겹쳐 또다시 반으로 찢고 하여 화투짝만하게 잘게 찢은 뒤 봉투 속에 넣고는 또 다른 서류를 꺼내어 조각을 내었다. 재정보증서 · 신원증명서 · 서약서 등이 차례로 찢기어 봉투 안에 담겼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갑채로 봉투 속에 넣은 뒤 그 봉투를 쓰레 기통에 쑤셔 넣고 공원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화신백화점 쪽을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한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X선과 병원 앞 이었다.
병원 간판을 올려다 보는 강정길의 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한 시간쯤 전, 강정길은 그곳에서 의사의 소견서를 받았다. 소견서를 건네주며 의사가 말했다.
“취직이 급한 게 아니라 치료가 급해요. 보름 동안 매일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맞고 하이드라 지트랑 파스를 함께 복용한 뒤 다시 엑스레이 촬영을 해봅시다. 경과를 봐서 다시 처방을 해야 하니까요”
“소견서만 잘 써 주시면 취직한 뒤 치료를 받겠습니다.”
“폐결핵이 전염병이라는 걸 모르고 있소?'
'···.'
“다시 말하겠는데 취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치료가 중요한 거요”
“알겠습니다.”
강정길은 의사로부터 받은 소견서를 병원 테이블에 놓고 나왔던 것이다.
강정길은 X선과 병원 앞을 지나 다시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아내와 준용이의 얼굴이 크게 떠올랐다.
아침에 나올 때 그는 아내에게 말했었다.
“이제 우리 고생도 끝났어. 그 동안 당신 정말로 고생이 많았다구. 그리고 잘 참아주었고.”
그의 위로에 아내는 새색시처럼 수줍어하며 얼굴까지 붉혔다. 그리고 잠시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한테 말 못한 얘기가 있는데….”
“말 못한 얘기?’
“네.”
“그 비밀이 뭐야?'
“나 애기 가졌어요”
“그래?’
강정길이 깜짝 놀라며 눈을 키웠다. 그리고 화 난 사람처럼 목청을 돋구었다.
“왜 여태 얘길 안했어. 그런 좋은 일을 왜….”
“긴가민가 했는데 어제 병원 가서 확실하게 알 았거든요”
그녀는 병원에서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까 생각 했었다는 얘기는 끝까지 숨길 작정이었다.
“그런 기쁜 일은 바로바로 얘길 해야지. 사람도 참.”
“당신, 그렇게 기쁘세요?'
“그걸 말이라고 해? 기쁜 정도가 아냐!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야!”
강정길은 아내를 힘껏 포옹했다. 그러자 준용이가 제 어미를 괴롭히는 줄로 알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깜짝 놀라 아내를 풀어준 손으로 아이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
“임마, 네 동생이 생겨서 좋아 그런 거야. 이 바보!”
강정길은 준용이의 볼에 연신 뽀뽀를 해댔었다.
아들 아이와 아내의 모습을 앞세우고 걷는 강정길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도대체 이 시련이 언제 끝난다는 거야? 끝이 있기는 있는 거야?’
강정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어디 후미진 곳이라도 찾아가 통곡을 하고 싶었다.
강정길의 눈에 다시 눈물이 돌았다. 그 눈물을 잦히기 위해 고개를 젖히자 가로수의 짙푸른 잎새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것은 굳건한 초록의 성문처럼 높은 곳에 버티고 있었다.
‘내 울면서 두드리나니 이 문을 열어주세요. 내 울면서 두드리나니 이 문을 열어주세요!’
강정길은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흥얼거리면서 잦혀지지 않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