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續 · 逆鳞
강정길은 네 평 남짓한 방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아니 갇혀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 이었다. 그 방안에는 딱딱한 나무 걸상과 탁구대를 연상시키는 대형 테이블 이외는 별로 눈에 띄는 집기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빛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광은 아니었다. 바닥의 넓이에 비해 턱없이 높은 천장에 장치된 막대꼴의 형광둥에서 발산되는 빛이었다. 그 막대꼴의 형광등은 천장 정중앙에 1미터쯤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출입문과 대각의 위치인 벽 상단에 손수건 크기의 환풍구가 있을 뿐 창조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환풍구조차도 환풍기로 막혀 있었다. 취조실로 꾸며진 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그곳에 갇힌 것은 30분 전이었다. 그러나 그 30분은 그에게 있어 세 시간, 아니 30시간처럼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때문에 지금 그의 마음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울리는 휴처럼 아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실은 아직까지 그는 연행해 온 사람들이나 또 그 건물에 있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자기가 그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전혀 얘기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갇히게 된 까닭을 알고 있었다. 물론 짐작이었지만 정확했다.
“나쁜 놈!”
그는 눈 앞에 떠오른 전무를 향해 욕설을 내뱉 았다. 군대물에 썩은 대가리라 머릿속에 든 것이 전혀 없어 전무냐고 했던 말과 “삼베로는 비단 주머니를 만들 수 없다.”고 했던 것이 군사정권을 욕한 것이 됐을 것이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부장의 입에서 얼결에 나왔다는 '3선개헌 반대 서명자’가 반체제 분자임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그가 연행된 곳은 ㅎ출판사 건물 앞이었다. 그는 회사 간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사표를 만지며 사장과 전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사표를 받아 든 그들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이유야 어떻든 직장에서 상사의 지시에 불복하고 욕설까지 퍼부은 행위는 분명한 하극상이었다. 설사 사장이 이용가치를 생각해서 사표를 수리치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더 이상 ㅎ출판사에 근무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 갈등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저축한 돈도 없는데 실직자가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식솔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사회질서 유지에 할당된 자기 몫에 공헌하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정치 적 야망을 달성시키기 위한 떳떳하지 못한 자서전을 대신하여 집필해 주는 행위는 떳떳한 노동 일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양시을 얻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듯 떳떳치 못한 노동은 사회질서 유지에 반하는 행위가 아닌가.
‘설마 산 입에 거미줄을 치랴. ’
그가 멈췄던 발을 옮기려 할 때였다.
“강정길씨요?'
한 사내가 출입문 안에서 나오며 그를 막아섰다.
“그렇습니다만···”
강정길은 사내 얼굴에 눈길을 꽂은 채 말꼬리를 삼켰다. 사내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낸 패스 포트를 펼쳤다간 잽싸게 되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사내는 단호하고도 위압감에 넘치는 얼굴이었다.
“갑시다!”
사내가 팔뚝을 거머쥐듯 잡아 끌었다.
“아니, 어디로….”
“가보면 알아!”
사내가 반말로 내뱉았다.
“뭣 때문에 이럽니까?'
“글쎄 가보면 다 알게 돼!”
“도대체 어딜 가자는 겁니까?'
강정길의 팔뚝을 거머쥔 사내가 손아귀에 잔뜩 힘을 주었다. 뼈가 저렸다. 대단한 악력이었다.
'한번만 더 주둥일 놀리면….”
사내의 모가 선 눈에서 퍼런 빛이 튀었다. 그 서슬에 강정길의 몸은 반사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
사내는 그를 10여미터쯤 끌고 가 엔진을 건 채로 대기하고 있던 검정 승용차의 뒷문을 열고 밀 어 넣었다. 마치 운반하기 불편한 물건이라도 다루듯이.
사내가 강정길의 옆자리에 올라타자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전진했다.
‘전무 그 사람이 뭔 짓을 할지 그게 걱정이오. 평이 안 좋은 사람이오. 강형한테 보복을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없소 ’
이부일 부장의 얘기가 되살아나며 그의 온몸을 오한 같은 불안으로 휩쌌다.
그의 눈 앞엔 계속 아내와 아들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따금 사무실에서 그의 출근을 기다리고 있을 혜숙의 얼굴도 떠올랐다.
퇴계로를 지난 차가 남산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차는 비탈길을 오르면서도 쾌속으로 달렸고 좌우로 커브를 틀어댔다.
그가 승용차에서 사내로부터 끌려내린 곳은 말로만 들어왔던 정보부의 건물 앞이었다. 건물 안으로 끌려가 계단을 오르다 보니 충계참의 벽에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표어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그가 갇힌 방은 그런 충계 참을 세 번인가 네 번째 돈 뒤에 나타난 복도에서 오른쪽 맨 끝방이었다.
강정길은 다시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그가 갇힌 지 40분이나 됐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 하나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피를 말리겠다는 거야?’
강정길은 마른침을 긁어 시멘트 바닥에 퉤 뱉았다. 그러나 순간 그는 자신의 행위가 후회되었다. 방안에서는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감시구나 감시 렌즈 같은 것이 설치돼 있어 갇힌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모조리 체크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분 나쁜 금속성을 울리며 출입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혹시 어떤 감시의 눈초리에 마른침을 긁어 뱉은 것이 발각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어서 그의 가슴은 철렁했다. 그런 가슴인 채 출입구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린 그의 눈길에 잡힌 것은 그를 연행해 온 사내였다. 잠시 사내의 구둣소리가 빈 방안을 무겁게 울리다가 멎었다.
사내가 강정길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앙저엉기일! ”
그는 대답 대신 숙였던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에 눈길을 꽂았다.
“왜 여기에 왔는지 알아?'
“얘길 해주지 않았잖습니까.”
“이 새끼 봐라.”
사내가 말도 채 끝맺지 않고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귀가 먹먹했다. 그러나 충격을 받지 않은 쪽의 귀는 사내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빨갱이 새끼!”
사내는 여차하면 또 한 차례 뺨을 후려칠 기세 였다. 사내는 계속해 입을 놀렸다.
“너 개헌 반대 서명운동을 했지?'
“서명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서명을 했습니다.”
“새꺄! 그게 그거잖아!”
“그 껀으론 경찰서에서 조살 받았습니다.”
“얼씨구. 너 지금 일사부재리, 그거 얘기 하는 거야?'
'······.'
“건방진 새끼! 아가리질이 보통이 아니라더니만···. 어디 한번 여기서도 아가릴 놀려봐!”
정 그렇게 나온다면 말 못할 것도 없다 싶어 강정길은 당당하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개헌 반대 서명을 한 것은 그때 이미 조사를 받았고 또 그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는데 새삼스럽게···.”
“새꺄, 다 알고 있어. 전몰 경찰의 아들이라 경찰서에서 쉽게 풀려난 것까지 알고 있어. 그러나 여긴 경찰서가 아냐! 애비가 빨갱이 때문에 죽었는데 그 새끼는 빨간 물이 들어 있으니….”
강정길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신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으며 두 주먹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아무리 수사기관원이래도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
“헛, 이 자식이 죽을라고 환장을 했군.”
사내의 손이 다시 날아왔으나 강정길은 잽싸게 피했다. 사내의 화를 가지껏 돋군 행위였으나 왠지 사내는 더 이상 폭행을 가하려 들지 않았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더니만 나 원 기가 막···.”
사내는 입가에 웃음까지 띠고 있었다. 그 바람에 강정길도 분을 삭이며 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사내는 계속해 입을 놀렸다.
“강정길, 너 용꿈 꾼 줄이나 알아.”
'·····.'
사내는 들고 있던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너댓장쯤 되는 서류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정길은 사내가 흘린 ‘용꿈’이란 말에 어제 이부일 부장으로부터 들은 ‘역린’이 떠올랐다.
“용이 상상의 동물이지만 전설상으로는 사람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고 돼 있어요. 용을 타고 하늘을 나르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용이지만 사람이 크 용이 아주 싫어하는 짓을 하면 당장에 물어 죽이기도 하거든. 용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그건 다른 게 아니고 턱 밑에 있는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래요. 용의 턱 밑에는 다른 비늘들과는 방향이 반대되게 나 있는 비늘이 있는데, 직경이 한 자쯤 되는 그 비늘을 건드리면 그게 누구든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다는 거요. 그 전설 때문에 옛날에는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를 ‘역린을 건드렸다’고 표현했답니다.”
강정길이 이부일 부장의 얘기를 되살리고 있을 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봐, 너 이부일이라고 알아? ’
역시 반말이긴 했으나 그래도 욕지거리가 섞이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훨씬 부드러웠다.
“압니다.”
강정길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만 이부일 부장에게 피해가 없을지 분간이 되지 않아 잠시 망설인 끝에 대답했다.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이부장의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도 했고···.”
“그러기 전에 알고 지냈으니까 일꺼리를 줬을 게 아냐!”
“같은 출판 계통이니까, 그래서 잘 압니다.”
“이봐, 이부일씨를 봐서 이번엔 용서하지만 아무한테나 주둥이를 마구 놀렸다간 크게 다칠 줄 알라구.”
'······.'
“알았어?'
“알겠습니다.”
“여기 다녀간 얘기도 마찬가지야. 알아?'
“알겠습니다.”
사내는 강정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서류철에 끼어 있던 백지를 몇 장 뽑더니 책상 위로 떨구며 말했다.
“개헌 반대 서명을 하게 된 경위를 소상하게 써!”
“전말서를 쓰란 얘깁니까?'
“거 짜식 말 많군. 그 얘기가 그 얘기잖아!”
사내는 팽이처럼 몸을 뱅그르돌려 출입구 쪽으로 걸었다.
[20] 忘年會
강정길의 전세방에서 망년회가 시작되었다.
그의 처제 내외가 느닷없이 찾아와 술판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인데, 그 술판에서 그가 ‘금년도 다 저물었으니 망년회로 생각하고 다 같이 건배하자’며 건배를 제의했던 것이다. 그 제의가 나오기 바쁘게 모두 소줏잔을 높이 들었다 내리며 짤강짤강 잔들을 서로 부딪쳤다. 그리고는 잔들을 입에 붙였다. 강정길과 그의 동서 김진철은 첫잔을 깨끗이 비웠으나 처제와 아내만은 그대로 상에다 내려 놓았다.
“처젠 왜 안 마셔?'
강정길이 술을 권하자 그녀는 애교로 눈을 흘겨 보이며 말했다.
“형분 내가 술꾼인지 아시나봐.”
강정길은 처제의 말에 속이 뜨끔했다. ‘그래. 이젠 옛날의 윤선미가 아니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순식간에 과거이 일들이 연속적으로 눈 앞을 스치며 흘러갔다. 월남에서 전사한 애인 때문에 눈물을 흘리던 얼굴, 그 애 인의 아이를 갖고 입덧 때문에 카바이트 막걸리를 마시고 싶어하던 일, 술자리에서 성적 충동을 억제치 못한 자신에게 손을 잡히고 긴장하던 표정···.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강정길의 얼굴에 묘 한 표정이 어렸다. ‘그때 윤선미의 육체를 범했더라면 이런 모임이 이뤄질 수가 없었을 거야. 만약 그런 일을 범하고도 이런 가족관계가 이뤄졌다면 동서나 아내에게 얼마나 죄책감을 느끼게 됐을까. 천만다행이야’ 하는 안도의 표정이었다.
“형님, 속이 안 좋으십니까?'
김진철이 강정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아냐. 무얼 좀 생각하느라고. 자아, 내 잔 받으라구.”
강정길이 당황하며 자신의 빈 잔을 건넸다.
“난 형님이 뭔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다 압니다.”
받은 잔을 단숨에 비우고 되건네며 김진철이 말했다. 순간 강정길의 온몸이 마치 건들린 엄살 풀처럼 잔뜩 옴츠러졌다. 그에게 남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초능력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긴장을 풀며 눙쳤다.
“동서, 난 동서가 점도 치는 줄은 몰랐어. 어디 한번 말해보라구. 내가 뭔 생각을 했는지.”
“뻔하잖습니까.”
“뻔하다니?'
“아, 형님께서 생각하시는 거야 늘 시 쓰실 궁리 아니겠습니까.”
강정길은 그가 자기의 속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에 안도하며 빙긋이 웃었다.
“난 또 점보는 재주가 있는가 했더니만···. 틀렸네.”
“그럼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생각이라기보다 잠시 걱정을 했었어.”
“뭔 걱정거리라도 있습니까?'
“있지.”
김진철이 눈짓으로 걱정거리가 뭔지 털어놔 보라고 했다.
“자네 말마따나 뻔하잖나! ”
“뭔지 말씀이나 해보세요”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걱정.”
“에이, 난 또 큰 고민거리라도 생기셨나 했습니다. 그런 걱정거리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거 아닙니까? ’
“돈 있는 사람들이야 그런 걱정을 않겠지.”
“형님, 형님 말씀대로 그런 걱정거리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긴 있겠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또 다른 걱정거리를 끌어안고 사는 겁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돈 있는 사람들은 돈 없는 사람보다 어떻게 보면 더 불쌍합니다. 제가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꼴이 됐습니다.”
김진철이 말을 하다 말고 급히 마무리를 지었다. 그의 아내가 허벅지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쟤 좀 봐. 왜 말하는 사람을 찌르고 그래?' 강정길의 아내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말대꾸 대신에 애교로 눈을 흘겼다.
‘너 그 버릇 고쳐야 한다, 얘.”
강정길의 아내가 동생을 나무랐다.
“처형, 이 사람이 날 위해서 그런 겁니다. 말이 많으면 무식이 탄로나니까 말 많이 하지 말라고. 이 사람이 뭐라는지 압니까? 처형께선 늘 남의 말을 많이 듣고 자신의 말은 조금밖에 않기 때문에 덕을 보는 경우가 많은데, 자긴 언니랑은 반대로 남의 말을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늘 손해를 봐 왔노라고. 제가 말을 많이 한다 싶으면 꼭 얘기를 하곤 합니다. 사실이 또 그렇고요. 그래서 전 이 사람이 제 말을 막는 걸 나쁘게 생각지 않습니다. 장기 둘 때 누가 훈수를 해주면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듯, 안 그렇습니까, 형님?'
“맞는 말이지.”
김진철은 강정길의 맞장구질에 신이 나서 계속 입을 놀렸다.
“실은 아까 얘길 하려던 얘긴데요, 우리 가까운 친척 중에 그런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냥 저냥 먹고 살 때는 얼굴에 늘 웃음을 띠고 있던 사람이 어쩌다 돈을 벌게 되니까 사람이 달라지 더라구요. 웃음도 사라지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아주 멋대가리 없는 사람이 되더라구요. 그리고 늘 남을 의심하는 거예요. 누가 자기한테 돈을 꿔달라지나 않을까, 혹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닐까, 도둑이 들면 어쩌나에 별별 걱정을 다하는 모양이예요. 그러니 속이 그런데 얼굴에 웃음 꽃이 피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돈을 더 늘릴까, 어떻게 해야만 돈을 안 떼일까, 돈 꿔달라는 사람을 어떻게 따돌릴까…. 결국은 불면증에 걸리고 소화불량으로 고생하고 그럽디다.”
강정길의 처제는 남편의 얘기를 막기 위해 자기 잔을 홀짝 비우고 술을 권했다.
“당신도 알잖아. 나 술 취하면 말이 더 많아진다는 거. 이 잔 나한테 말 많이 하라고 주는 잔 이야, 아니면 말 막으려고 앵기는 술이야?'
김진철의 말에 모두들 한바탕 유쾌한 웃음을 웃었다. 그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강정길이 입을 열었다.
“아까 동서가 좋은 얘길 했는데…. 돈이라는 게 아무한테나 태어나는 게 아니야. 돈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한테 태어나면 그 사람은 그 돈 때문에 인생을 망치게 돼.”
“꼭 그렇지만도 않데요 뭐. 사람도 사람 같지 않는 사람들이 돈말 잘 벌더라구요.'
강정길의 아내가 불평을 늘어놓듯 말했다.
“언니, 우리 눈에는 사람 같이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큰 돈을 지니고 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 거야.”
“얘기가 그렇게 되나?'
방안은 또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웃음 끝에 김진철이 잽싸게 입을 열었다.
“처형, 그건 이사람 얘기가 맞습니다. 백번 옳은 말입니다. 보세요. 형님 같은 시인한테 시가 태어났지, 어디 돈이 태어났습니까? 그래서 고생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그깐 돈이 문젭니까? 그깐 고생이 문젭니까? 돈 버는 기계가 중요합니까, 시를 쓰는 시인이 중요합니까? 난 시인이 백배 낫다고 생각한다구요. 박목월 같은 시인, 그분이 빚어낸 시,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기가 막힌 시 아닙니까?'
“당신 자꾸만 공자 앞에서 문자 쓸래요?'
“정말 공자 앞에서 문잘 썼구먼. 미안합니다, 형님. 그러나 제 말씀은 형님이야말로 멋진 인생을 사신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형님,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이 김진철이가 형 님은 다른 걱정 않고 시만 쓰시게 하겠습니다. 형님의 스폰사가 되겠다 이겁니다. 이 김진철이는 돈을 벌 수 있다 이겁니다. 치사하게 벌지 않고 떳떳하게 벌 수 있다 이겁니다.”
“얼씨구. 큰소리는 잘도 하네. 하여튼 술만 들 어가면···. 형부, 요전에 그 얘기 한번 더 들려 주세요 저 허풍쟁이 코가 납짝해지게.”
“요전에 그 얘기라니?'
“그거 있잖아요. 포도밭에 짐승 피를 뿌린 얘기 말예요 형부 생신 때···”
“아, 그거. 들은 얘길 뭐하러 더 듣겠다고 그래?'
“그 날은 나도 정신이 없었지만 저이는 완전히 필름이 끊어져 그런 얘길 들었는지 어쨌는지 전혀 기억도 못하더라구요.'
“그렇게 취한 것 같지는 않던데.”
“말도 마세요 어쨌든 그 얘기 한번 더 해주세요 저도 듣긴 들었는데 다 까먹었거든요”
“별것도 아닌 얘긴데···.”
“재미나고도 좋은 얘기던데요 뭐.”
“알아두면 해로울거야 없지.”
강정길은 반쯤 남은 술을 마시고 나서 말문을 열었다.
“구약에 보면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노아라는 사람 이거든. 그 노아가···
강정길은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잠시 얘기를 중단했다가 다시 이었다.
노아가 포도밭을 일구고 있을 때 사탄이 찾아와 물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뭐냐고. 노아는 포도를 가꾼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탄이 그 포도를 어디에 쓰느냐고 물었다. 이 포도는 싱싱한 것이든 말린 것이든 단맛이 나는 아주 좋은 열매며, 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면 마음이 아주 즐거워진다고 말했다. 얘기를 듣고 난 사탄은 심술이 나서 양 · 사자 · 돼지 · 원숭이를 차례로 포도밭으로 끌고 가서 죽이고 그 피를 밭에다 흥건하게 뿌렸다. 때문에 포도주가 핏빛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 먹었을 땐 양처럼 순하나 약간 취하면 사자처럼 되어 이 세상에 자기와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허풍을 떨게 되며, 그보다 더 취하면 오물 속에서 뒹구는 돼지처럼 되며, 완전히 취하면 원숭이처럼 춤추고 만인 앞에서 음탕한 짓을 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한 일도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강정길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술을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되지만 과하게 마시면 독약이 된다는 말이랑 같은 얘기야.”
말수가 적은 강정길의 아내가 모처럼만에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잘 아는 당신은 왜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셨어요?'
“언니, 형부 요즘도 그렇게 술 많이 드셔?'
“요즘은 아니지만 몇달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이다시피 고주망태셨어.”
“현진건의 소설 제목 몰라?'
강정길이 무렴하여 껄껄 웃고 나서 말했다.
“언니, 형부 말씀이 맞아. 이놈의 세상이 술 권하는 세상이잖아. 그래도 있잖아요, 형부. 몸 생각하시고 술 줄이세요”
“요즘 홧술을 먹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먹는 판이야. 걱정 말라구.”
강정길이 또 너털웃음을 뿌렸다. 그 웃음소리는 묘하게도 서글픈 감정을 자아내게 했다.
“형님, 조금만 더 참으세요 이 김진철이가···.” 김진철의 입을 잽싸게 막고 난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 조금만 더 마시면 이제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조금만 더 마시면 지금보다 조금 더 취하겠지 뭐.”
모두들 웃었으나 그의 아내만은 웃지 않고 있다가 남편에게 쏘아붙였다.
“돼지가 된다고요. 똥구덩이 속에서 뒹구는 돼지 알아요?'
“이봐 처제. 모처럼 벌인 술자린데 좀 취하기도 하는 거지 뭘 그래. 처제 답잖게 오늘은 바가지가 좀 심하군.”
“형님, 우리 마누라 바가지는 제게 훈수가 됩니다. 상대방은 훈수를 두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 만 아무도 훈수를 둬주지 않으면 그것도 열난다구요. 우리 인생은 장기와 같은 거 아닙니까? 그런 장기판에서 훈수 둬주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그래서 전 마누라가 바가지 긁어도 좋다 이겁니다. 그건 그렇고 형님 이제 몸은 괜찮습니까?'
“ 괜찮아. ”
“나랏일 잘되라고, 좋은 나라 되라고, 다 같이 잘 살아보자고 그래서 시인이 훈수 좀 뒀기로서니. 그랬다고 잡아다 매질하고 고문하고··· 이거 되겠습니까? 처형, 그렇게 억울하게 당하고 홧술 안 먹으면 언제 홧술을 마십니까? 그러나 형님, 처형께서 형님이 두는 인생장기판에서 훈수를 안 두면 누가 둡니까?'
“당신 술 취했어요! 조심하세요!”
김진철의 아내가 화를 벌컥 냈다.
“자아’, 어쩌다 보니 망년회가 아니라 돈타령 · 술타령 · 훈수타령 하는 판이 됐구먼.”
강정길의 입에서 '망년회’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또 김진철의 입이 참지를 못했다.
“망년회라는 게 뭡니까? 그 해의 온갖 괴로웠던 일을 다 잊자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잊어 버리는 게 문젭니다. 딴 건 다 잊어도 좋은데 형 님이 남산에 끌려가 매맞고 고문 당해서 골병 든 건 잊으면 안된다 이겁니다. 좋은 나라 만들자는 거였잖아요! 그런데 빨갱이로 몰아 매질을 해요? 대한민국이 북한 빨갱이 집단과 다른 게 뭔데요?'
“그만 하게, 이 사람아.”
“형님께서 그만 하라면 그만 하죠. 그러나 나처럼 못배우고 무식한 놈도 훤히 다 아는 걸 왜 높은 자리에 앉은 놈들이 모른단 말입니까! 그게 이상하다 이겁니다! 형님.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딱 한가지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천구백 칠십사년 십이월 이십일, 그러니까 오늘까지 있었던 한 해의 모든 일을 잊어 버립시다. 이 김진철이가 술주정한 것이랑 사업에 손댔다 실패한 것이랑 또 형님이 이런저런 고생하신 여러가지 모두 다 잊어 버리자 이겁니다. 그러나 형님이 남산에 끌려갔던 일은 잊으면 안됩니다. 그거 하나는 절대로 잊으면 안된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마지막으로 건배 한번 합시다. 찰칵찰칵 잔을 부딪칩시다. 그런데 형님 잔을 부딪치는 것은 왜 그러는 겁니까?'
김진철이 건배할 잔들에 술을 따르다 말고 뚱 딴지 같은 질문을 했다.
“그건 악귀를 물리치자는 뜻이야. 악귀들이 젤 싫어하는 소리가 쨍강쨍강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래. 그래서 귀신을 쫓기 위해···.”
“형님은 정말 모르는 게 없습니다. 이 김진철이가 떼돈을 벌어서 형님이 고생 않고 시를 쓰시게 할 겁니다. 이 김진철이가 이래 봬도···”
“어서 술이나 마저 따라요. 그래야 건밸 하든지 귀신을 쫓아내든지 할 게 아녜요”
김진철의 아내가 목청을 돋구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건밴 안해도 되겠어. 당신이 내지른 쇳소리에 악귀들이 벌써 다 도망쳤으니까!”
방안에 다시 웃음이 가득 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