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사위질빵
'부장님, 퇴근 안하세요?'
혜숙이 강정길의 책상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나 그는 숙인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꾸했다.
“난 일이 있어서…. 너 학교에 늦을라. 어서 가거라.”
“늦지는 않아요”
“좀 일찍 가는 게 낫지. 시간에 쫓겨 허덕이는 거보담.”
강정길은 여전히 숙인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 그러나 혜숙은 그의 책상 앞에서 물러설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는 혜숙의 그런 태도에 문득 마음이 쓰여 만년필을 원고지 위에 놓고 고개를 들었다.
“왜? 나한테 뭔 할 말이라도 있니?'
“아네요 ”
“그럼?'
“퇴근을 하셔야....”
혜숙이 살짝 붉힌 얼굴에 무렴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한 표정을 보고서야 그는 혜숙이 왜 퇴근을 못하고 있는지 그 까닭을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퇴근하기 전에 청소를 해놓고 학교엘 가곤 했었는데 강정길이 퇴근을 않고 있으니까 청소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나 원고 쓸게 있어서 그런다.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어서 청소해 놓고 학교엘 가렴.”
“먼지 때문에….”
“글쎄 괜찮대두! ”
강정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것이 그날 따라 여간 신경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짜증낸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라 생각하며 다시 원고지 위에 놓인 만년필을 집어들며 부드러 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매일같이 마시는 먼진데 내가 오늘 한 번 못마시겠니? 어서 청소해 놓고 학교에 가거라.”
“네.”
혜숙의 대답에는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그녀는 강정길 아내의 외사촌 동생 이었다. 장모에게 남동생 되는 이의 막내딸인 것이다.
그가 이 홍출판사와 인연을 맺기 전 어느날, 장모의 부탁이 있었다.
“애비 얼굴두 볼 수 없게 태어난 친정 조카딸년이 하나 있는데 걔 어디다 취직시킬 수 없나? 야간학교에 다니는 애야. 학자금이라두 지가 벌 어야지 그렇잖고는 형편이 어려워서… 자네가 힘 좀 써보게나.”
“예, 알겠습니다.”
강정길은 장모의 부탁에 가능할 것처럼 대답을 했으나 실은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할지 걱정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도 실직자나 마찬가지였으며 ‘제 코가 석자’인 주제라 남의 일자리를 부탁하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잘 되어 장모에게 점수를 딸 수가 있게 됐던 것이다. ‘현대여성교양전집’의 일이 끝나고 임시 직원들이 모두 떠난 뒤 사장이 그만을 불러 정식직원으로 채용하겠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부터 정식 편집부장이오. 그러니 다음에 낼 전집을 기획하도록 해요. 그리고 전활 받고 사무실도 지킬 만한 참한 여자가 있으면 데려다 써요.”
강정길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자기가 정식 직 원으로 채용된 기쁨 못지않게 장모에게 체면이 서게 됐다는 것 때문에 또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던 날부터 강정길은 혜숙을 생판 모르는 남인 것처럼 대했고 혜숙도 그랬다. 사장이나 다른 직원들이 둘의 사이가 인척간이라는 것을 알아서 이로울 게 전혀 없었으므로 직장에서는 남남으로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만 행세하자고 약속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정길 쪽에서는 혜숙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 었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청소하는 것이 안쓰러워 퇴근 때 미리 청소를 하게 한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혜숙은 사무실 바닥을 쓴 뒤 대걸레질을 끝내고 나서 인삼차를 타가지고 강정길에게로 갔다.
“청소하느라고 부산을 떨어 원골 못쓰셨죠? ’
“아냐.”
그는 혜숙이 갖다 놓은 찻잔을 들며 말했다.
“그렇잖아도 차 한잔 마시고 싶었는데… 고맙다.”
“그럼 진작 말씀하시지요. 어머, 한 장도 더 못쓰셨네요. 낼 아침에 일찍 나와서 청소를 하는 건데….”
“원고 못 쓴 거랑 네가 청소한 거랑은 아무 관계도 없어. 청소 다 끝냈거든 어서 학교에 가거라.”
“오늘 첫째 시간은 자습이랬어요. 선생님께서 무슨 일이 있으시댔어요
“그럼 조용히 책이라도 읽고 가든지.”
강정길이 다시 원고지 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가 쓰고 있는 것은 수필이었다. 월간 O 지의 김연호가 청탁한 원고였다. 아무 내용이나 괜찮으니 15매쯤 써서 담배값이나 하라는 호의를 외면할 수 없어 청탁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그때 문득 ‘웃음’에 대한 것이 머리에 떠올랐었다.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웃는 웃음에는 열여덟 가지나 되는 웃음이 있는데 그 중 단 한가지만이 진실한 웃음이고 나머니 열일곱 가지는 모두 사회학적 웃음, 즉, 가짜 웃음이라는 것이었다. 그 웃음 얘기를 밑바탕에 깔고 쓰면 간단하게 15매 정도는 채울 수가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원고지를 메우자니 석장째에서 붓이 멈춰지고 마는 것이었다.
혜숙이 그가 비운 찻잔을 집어들며 말했다.
“부장님 책상은 천상 낼 아침에 닦아야겠어요”
“그래라.”
“아, 참!”
그녀는 깜빡 잊었던 생각을 돌이킨 모양으로 강정길 의자 뒤의 벽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오늘도 수명이 다 된 6월치의 캘린더를 뜯기 시작했다. 6월을 장식했던 사진은 불두화였다. 원예 · 화훼 · 조경 등이 주사업인 회사에서 찍어 돌린 그 캘린더는 열두달 모두 각기 그달에 피는 꽃의 사진들로 장식돼 있었다.
불두화의 사진 대신 어떤 토담을 온통 다 뒤덮 다시피 한 사위질빵 덩굴의 사진이 나타났다. 맨 처음 캘린더를 얻었을 때 한 번 보았을 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진이었다.
“혜숙아, 그 칠월달 사진 말이야. 그거 더럽히지 말고 칠월이 끝나거든 잘 뜯어서 날다구. 혹시 내가 잊을지도 모르니까 잘 기억해 둬. 알았지? ’
“액자에 넣어 거시려고요?'
혜숙이 영업부 쪽의 벽에 걸린 제비꽃 사진의 액자를 흘낏 쳐다보고 나서 물었다. 그 사진도 지난 봄에 캘린더에서 뗸 것을 액자집에 가져가 사진에 걸맞게끔 액자를 짜서 끼운 것이었다.
“액자 사진 하실려고요?'
혜숙이 다시금 물었으나 그는 그냥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사위질빵꽃?'
혜숙이 사진을 설명한 자디잔 활자를 읽고 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렇듯 볼품없는 꽃 사진을 뭣하러 액자에까지 넣으려 하는지 모르겠다는 투의 불만스런 목소리였다.
사실 이 세상의 어떤 꽃이든 각기 지니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잣대로 꽃들을 평가하고 무시해버리기 일쑤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자기 생각에 남들이 동조해 주길 바란다. 어떤 경우엔 강요까지도 한다.
“왜 그 꽃, 예쁘지 않니? 덩굴에 하얗게 다닥 다닥 매달리듯 피어 있는 게 마치 눈 같기도 하고. 혜숙이 넌 그렇게 안 느껴져?'
“이런 꽃이야 쌔고 쌨잖아요. ”
“사람들은 흔히들 호박꽃도 꽃이냐고 하지만 난 호박꽃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더라. 여자에 비유한다면 건강하고 복스럽게 생긴 그런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 하기야 이 세상 어떤 꽃도 아름 답지 않은 꽃이 어디 하나라도 있겠냐만….”
“부장님도 참, 호박꽃에는 호박이라도 달리잖 아요.사위질빵꽃? 이꽃에도 열매가 달려요? 설마 빵이 달리는 건 아닐테고, 빵 모양의 열매가 달리는 모양이죠? ’
“재미난 얘길 지닌 덩굴나무긴 하지만 먹는 빵 하곤 아무런 관계도 없다.”
강정길의 입에서 재미난 얘기를 지닌 덩굴나무란 얘기가 나왔어도 혜숙은 별다른 호기심은 나타내지 않았다. 이런 보잘것 없는 꽃이나 피우는 주제에 뭔 재미난 얘기를 지니고 있겠느냐는 투였다.
“부장님은 이 꽃이 어디가 그렇게 예쁘셔서 액 자에까지 넣으실 생각을 하셨어요?'
강정길은 아까부터 어릴 때 살던 고향집 울타리를 초록 일색으로 물들인 뒤 흰 눈이라도 내린 듯 착각하게 하리만큼 새하얀 꽃들을 소복하게 피우곤 했던 사위질빵 덩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자 어머니가 옛날 얘기처럼 들려주었던 얘기도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부지깽이도 덤벙댄다는 바쁜 가을철에는 사위들이 처가집에 가서 가을걷이를 도와야 하는 풍습이 있었단다. 그러나 사위를 사랑하는 장모는 그 사위가 무겁게 짐을 지는 게 안쓰러워 지게 위에다 아주 조금씩만 짐을 얹어주곤 했지. 그러자 다른 일꾼들이 샘도 나고 화도 나서 저 덩굴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어. 저 사위녀석의 지게 질 빵은 담장에 기어오른 저 덩굴을 잘라서 만들어 줘도 끊어지지 않을 거라고. 저 덩굴은 그렇게 맥없이 잘 끊어지는, 아주 약하디 약한 덩굴이거 든. 그래서 그때까진 아무 이름도 없던 덩굴에 ‘사위질빵’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거란다.
얘기 끝에 어머니는 긴 한숨과 함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외할머니께서도 네 아버지를 그토록 끔찍하게 위했었는데….”
강정길이 유년시절의 추억을 더듬고 있을 때 혜숙이 그를 그 추억의 장막속에서 끌어냈다.
“아마 부장님께서 지게질을 하신다면 우리 고모님께서도 그렇게 아주 가벼운 짐만 지게 하실 꺼예요”
“뭐라구?'
“고모님은 우리집에만 오시면 부장님 자랑하시 느라고 정신이 없으시다고요. 입에 침이 마른다니까요. ”
“그래?'
“그러믄요. 침이 마르는 정도가 아니라 입이 닳을 지경이라고요”
“너 학교 늦지 않니?'
“지금 가면 돼요.'
혜숙이 출입구 옆 자신의 자리로가 책상 위에 놓였던 가방을 들며 고개를 까딱해보이곤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그러나 강정길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자세를 풀지 않고 멍하니 앉 아만 있었다. 그는 다시 지난 일들의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사실 혜숙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모가 그를 그토록 끔찍하게 생각하기 시작한가 바람을 피워 ‘연애질’로 신세를 망치더니 이제는 큰딸년까지 바람을 피워 사내를 집안에 끌어들였다고 펄펄 뛰었으며 사내놈들은 누구나 다 늑대인데 강정길도 그런 늑대 중의 하나라는 것 이었다. 그런 늑대에게 큰딸이 몸이나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만을 지닌 채 큰딸과 그 딸이 소개한 사위감을 관찰했었다. 또 두 딸년들이 모두 바람이 난 것은 조상의 산소를 잘못 모신 때문이라며 푸닥거리까지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강정길은 그런 얼음같은 장모의 눈을 풀어 놓기 위해 그야말로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며 웃음을 뿌려대야만 했었다. 결국 그 웃음은 장모의 꽁꽁 얼었던 마음을 풀어 놓았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의 표본처럼 장 모의 태도가 바뀐 것이었다. 그에 대한 장모의 믿음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만큼 된 것이다. 그랬으므로 처제 선미의 결혼도 무난하게 성사 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자네가 믿는 사람이고 자네 뜻이 그렇다니 자네만 믿고 자네가 하자는대로 하겠네.”
장모는 처제와 김진철의 결혼에 앞서 몇 번이나 그 말을 되풀이했었다. 강정길이 김진철이란 사람을 오랫동안 겪어봐서 잘 아는데 그만치 성 실한 사람도 드물며 심성 또한 비단같이 고운 사람이라고 추켜세워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가 식구들이 그의 뜻에 따르게 된 데에는 또 다른 큰 까닭이 있었다. ‘바람이 나 몸을 망친 딸년’을 좋은 집안에 시집 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었다. 좋은 신랑감을 얻어주기는 고사하고 이목 구비만 성한 사내라면 어서 짝을 채워 놓곤 그 딸의 걱정에서 이제 좀 헤어났으면 하고 바라고 들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처제와 김진철의 결혼은 처제가 그토록 원했던대로 부모님의 축복을 받으며 이루어졌으며 그로써 강정길은 자 기네의 중신에미 노릇을 한 처제에게 품앗이를 한 셈이었다.
강정길은 그런 모든 일이 잘 이뤄지게 한 것이 당시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스마일 운동의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 스마일 운동에 힌트를 얻어 그는 장모에게 웃음 작전을 폈던 것이고 그것이 먹혀 들었기 때문이었다. 장모가 그에게 최초로 호감을 보인 말은 ‘고생스럽게 자란 사람답지 않게 늘 웃는 얼굴’이라는 것이었다. ‘웃는 얼굴에 복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말로도 그를 칭찬했었다.
‘그래. 장모에게 웃음작전을 벌였던 얘기도 쓰고 사위질빵 얘기도 곁들이자.'
강정길은 둥받이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심호흡을 한 뒤 만년필을 집어들고 책상에 가슴을 붙였다.
[18] 逆鱗
강정길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던 혜숙이 쪼르르 다가서며 빠른 입으로 물었다.
“부장님, 도대체 어디서 점심 드셨어요? 근처 음식점이란 음식점은 다 뒤졌는데도 안계시더라고요 사장님께서 몇 번이나 찾으셨다고요”
“그래? 왜?'
그는 혜숙의 얼굴에 궁금증을 풀만한 무슨 단서라도 숨겨 있는 양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급한 일은 급한 일인 모양이더라고요”
강정길은 혜숙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팽 이처럼 몸을 돌렸다. 사장실로 갈 작정이었다.
“사장님 지금 안계세요. 어디 다녀오신다며 부장님더러 퇴근하지 말고 기다리시랬어요”
“그래?'
강정길은 자기 자리로 가 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사장이 자기를 찾은 용건에 대해 짐작을 해보았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통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함께 점심을 하자고 찾으셨나?'
그가 혼잣말로 뱉은 소리를 알아듣고 혜숙이 말했다.
“그건 아녜요. 점심 식살 하고 오셔서 찾으셨으니까요”
혜숙의 말에 그는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이 떠올라 픽 게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사장님이 날 찾은 게 몇 시쯤이야?'
“한 시쯤에요”
한 시라면 그때 그는 o 잡지사의 직장동료였던 김연호와 최준태 그렇게 셋이서 보신탕으로 유명 한 ‘재령집’에 앉아 있었다. 김연호와 최준태가 수필이 게재된 잡지와 원고료를 가지고 찾아온 것이었다.
“투사한테 원고료 몇 푼 타게 해주고 비싼 점 심을 얻어 먹으니 속이 안좋군 그래.”
“난 장궤 생각관 달라. 투사가 투사다운 시를 쓰고 받은 원고료라면 그렇지만 잡문 원고료니까 미안할 게 없다는 생각이야.”
김연호와 최준태가 각기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한마디씩 했으므로 강정길도 껄껄 웃고 나서 대거리를 했다.
“안달뱅이 말이 맞아.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할 일이 아냐. 왜냐하면 원고료 줬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모처럼만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서 기꺼이 사는 점심이니까.”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반주거리로 시킨 소주 병을 들고 빈 잔들을 채워주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물어보는 건데 이런 난 세에 투사가 입을 다물고 있는 건 뭐라고 하지? 그것도 결국은 직무유기라고 해야지?'
최준태의 얘기에 강정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안달뱅이한테 그런 욕 먹지 않을려구 근사한 시를 한 편 쓰긴 했지. 언젠가 장궤 자네가 들려 준 얘기 있지? 안면문답이라는 우화. 그걸로 이 시대에 맞는 새 타이어[풍자] 시를 만들었는데 막상 발표를 하려니까 내 새 타이어가 펑크날까봐 걱정이 돼서….”
“뭐가 자네의 새 타이어지?'
최준태가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다.
“그거야 모처럼만에 잡은 새 직장이지. 그리고 나도 나지만 어디서 실어줄 것 같지도 않더라구. 또 설사 실어주는 잡지가 있다 하더라두 나 때문에 그 잡지 발행인이나 편집자가 피를 보게 되면 내 기분이 또 어떻겠냐구. 그래서 내딴에는 멋있는 패러디라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두 서랍에 묻어 둘 수밖에.”
아무런 일도 않으면서 얼굴의 맨 윗자리를 차 지하고 있는 눈썹에게 눈과 코와 귀와 입이 힘을 합해 항의를 한다는 청나라의 학자 유월이라는 이의 우화로 이 시대를 풍자한 자신의 시에 대해 강정길은 계속 얘기했다.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더라면 그걸 가지고 나오는 건데, 사무실 서랍에서 계속 취침중이시 거든. 바람도 쐬지 못하구.”
“용기 있는 사람이 드문 시대야. 필자는 필자 대로, 편집자는 편집자대로, 발행인은 발행인대로 각기 몸들만 잔뜩 사리고 있으니 이 나라가 언제나 바로 서게 될는지.”
최준태가 한탄 끝에 한마디 덧붙였다.
“난 투사는 우리랑은 좀 다른 줄 알았더니만 오늘 얘길 듣고 보니 투사도 별수 없군 그래.”
“쓰긴 썼는데 발표를 해야 하나 어쩌나 갈등이 심했어. 허탈감도 크고.”
강정길은 홧술 마시는 사람처럼 급히 잔을 비웠다.
“이를테면 금의야행(錦衣夜行) 수지지자(註知 之者), 한밤중에 비단옷을 입고 다니면 누가 알아주겠느냐는 허탈감이겠군. ”
김연호는 중문과 출신답게 ‘금의야행’의 고사를 늘어놓았다. 그 얘기 끝에 최준태가 흥분하여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너무 요란해. 아마 곧 폭 삭 무너지고 왕창 깨질 거야. 와우아파트처럼 말야. 사실 지금 우리 나라는 커다란 와우아파트야. 삐걱거리는 걸 그대로 두면 우리 국민은 와우아 파트 주민들처럼 일시에 깔려 죽고 말꺼야.”
“차라리 무너질려면 빨리 무너지든지. 허구헌 날 삐걱거리기만 해대니 어디 불안해서 살 수가 있냐구.”
“옳은 소리야. 고름이 살 될리가 없지. 하루 빨리 폭싹 무너져서 다시는 삐걱거리지 않게끔 튼튼하게 다시 세워야 해.”
“그런데 누가 무너뜨리지?'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서.”
“젠장! 술이나 마시자구! ”
강정길이 주인을 불러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그들 세 사람이 마신 술은 반주로는 과한 양이 었다.
강정길은 두 사람과 헤어져 사무실로 향하다가 목욕탕이 눈에 띄어 그곳에 들렀다. 알근알근 취해 오르는 주기를 빼기 위해서였다. 온탕에 들어가 땀을 낸 뒤 냉탕에서 열기를 식히곤 했다. 그러다 보니 세 시가 가까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완전히 주기가 빠진 것도 아니었다.
한잠 자고 나면 완전히 술기가 가실 것 같아 그는 잔뜩 젖힌 고개를 등받이 위에 올려 놓고는 눈을 감았다.
그는 충출판사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사장의 눈에 거슬리는 짓을 했다. 점심 시간으로 무려 세 시간이나 썼고 게다가 술을 마셨으며, 뿐만 아니라 사무실에서 낮잠을 자려 하고 있는 것이 었다. 그러나 그는 조그마치의 가책도 느끼지 않 았다. 그 동안 대부분의 토요일과 일요일을 회사의 일에 바쳤고 숱한 밤을 사무실에서 새우잠으로 보내며 야간작업을 해 주었으며 특근수당이나 야근비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그저 식대 정도의 비용만을 지급받은, 봉사와 희생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과거를 보상받기 위해 오늘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신간 편집 계획안을 세워 놓았으나 지난 번에 출간한 30권 짜리 ‘현대여성교양전집’의 판매대금의 회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 신간 전집의 작업을 늦추고 있기 때문에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빈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장도 직접 그에게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될 때까지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그 동안 재충전을 하라고 했으므로 그가 점심 시간으로 세 시간이나 썼다든가 그리고 낮술을 먹었다든가 낮잠을 자는 일로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사장이 찾을 때 자리에 없었다는 것으로 하여 겁을 내거나 주눅들 어 있을 일도 아니었다. 대낮에 술내를 풍긴다는 것은 경영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강정길은 혜숙이 흔들어대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사장님이 부르세요.”
“그래?'
그의 반사적인 눈길이 벽시계를 찾았다. 여섯 시 이십 분 전이었다. 그가 잠이 덜 가셔서 뻑뻑한 눈을 꿈뻑이고 있을 때 어느 새 혜숙이 물수 건을 가지고 와 건네며 말했다.
“주무실 때 전화 온 게 있는데요. 곤하게 주무 시길래 외출하셨다고 했어요 이부일 선생님이시래요 늦어도 좋으니 퇴근하시는 길에 들러 가셨으면 좋겠대요”
“알았다. 혹시 늦거든 너 먼저 퇴근하거라.” 강정길은 얼굴이며 목덜미에 끈적끈적 배어 있는 땀을 닦는 물수건을 내주며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실에는 전무가 와 있었다.
“점심 때 찾으셨다구요?'
그가 사장에게 묻자 전무가 대신 대답을 했다.
“강부장한테 높은 사람을 하나 소개할랬더니만 자리에 없어서 우리끼리만 가서 만나고 지금 막 왔소”
전무의 얘기가 끝나기 바쁘게 이번에는 사장이 똥단지 같은 질문을 했다.
“강부장, 전기 써 봤소?'
“전기는 써보지 않았는데요”
강정길의 눈길이 사장과 전무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그러는 동안 문득 ‘누군진 몰라도 높은 사람의 전기를 쓰라는 얘기겠구나’ 하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의 그러한 짐작은 적중했다.
사장이 그에게 내린 지시는 혁명주체세력인 한 예비역 준장의 전기를 쓰라는 것이었다.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가 스타로 출세하기까지의 고생담이 눈물겨울 뿐만 아니라 잘만 쓰면 소설 보다도 흥미로운 훌륭한 입지전이 된다고 덧붙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는 극심한 불쾌감에 휩싸 이고 말았다.
‘불쾌지수 탓인가?'
그는 치솟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전혀 날씨 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인내심이 허물어졌다.
“사장님의 영업이 목적입니까. 그분의 정계 입 문을 돕는 게 목적입니까? ’
사장과 전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잠시 후 사장이 입을 열었다.
“일석이조, 아니 일석사조지. 실은 그 사람이 국회의원에 입후보할 생각인데 그러자니 선거구에 뿌려야 되잖아. 그 숫자가 상당하니까 나는 가만 앉아서도 영업이 되어 좋고, 강부장은 원고 료를 받으니 좋고, 또 책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공짜로 재미있고 유익한 책을 읽으니 좋고. 그러니 일석사조지.”
“올바르게 군대생활을 한 사람이 아니로군요?'
“그게 뭔 소리요?'
전무의 눈에 순간적으로 뱀같은 찬 기운이 서렸다. 대위 때 공금유용 사건으로 군복을 벗기운 자신의 과거 때문에 민감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목청을 낮추어 말했다.
“군대생활 밖에 안한 사람이 도대체 무슨 돈으로 그렇게 많은 경비를 들여 책을 만들어 공짜로 뿌립니까?'
“그렇게 되면 정치자금을 대주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잖소! ”
전무가 언성을 높였으나 그는 계속해 공격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정치자금을 댄 사람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겠군요”
“그거야 인지상정 아니오?'
“그렇다면 훌륭한 정치가 노릇도 못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군인은 나라 지키는 일에 힘써야죠. 상인은 상도덕을 지켜가며 올바를 장사를 해야 하고….”
“아니 강부장! 당신 지금 누굴 교육시키는 거요?'
“아닙니다.”
“그럼 뭐요? 지금 그 얘기들이 올바른 장사를 해야 한다는 얘기, 우리에게 한 얘기요?'
“아닙니다. 전 다만 삼베로는 비단 주머닐 만들 수 없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겁니다. 삼베로 비단 주머닐 만드는 요술같은 재주가 있는 사람도 있겠죠. 글쟁이들은 독자들을 속이는 글을 써선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강정길과 전무가 주고 받는 얘기에 사장이 끼어들었다.
“강부장, 우리가 이럴 것이 아니라 낼 다시 얘 기하자구. 그러니 오늘 집에 가서 잘 좀 생각해 보라구. 세상살이엔 융통성이라는 것이…. 곧 기계에 있어 기름과 같은 것이야.”
“법도를 어기는 게 융통성은 아니잖습니까.”
강정길의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전무가 용 수철 튀듯 벌떡 일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보자 보자 하니까 가관이네. 저게 대가리에 먹물 좀 들어 있다구….”
강정길도 벌떡 일어서 전무와 마주 섰다. 그나 마 조금 남아 있던 인내심마저도 마치 달군 철판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순식간에 온데간데 없이 되었다.
“네 대가리도 군대물로 썩은 대가리라 전혀 아무 것도 든 것이 없어서 전무가 된 모양인데….”
사장이 일어나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들 이래! 강부장은 어서 밖으로 나가시오! 이전무는 자리에 앉고! ”
강정길은 밖으로 나왔다. 무슨 난리판인가 싶어 모든 사람들이 창문으로 고개들을 빼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차분해진 마음이었으므로 사열관처럼 유유히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이부일 부장이 생각나 그는 그의 사무실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출판사는 다섯 정류장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곳이어서 십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되었다.
이부장은 그가 도착하기 바쁘게 자기 단골인 푸줏간으로 데리고 갔다.
“오늘 회사에서 뭔 일 없었소?'
“최사장이 전활 했던가요?'
자리에 앉자마자 이부장의 질문을 받은 강정길이 불에 단 돌을 던지듯 즉각적으로 반문했다.
“그게 아니라 다섯시쯤 해서 날 만나고 갔소 · 내게 묻기를 강형에게 누구 전기를 쓰게 하면 제 대로 써낼 수 있겠냐는 거요. 그래 생각없이 그 사람이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인데 그깐 일을 못하 겠느냐고 말해 놓고 보니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누구 전기냐고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글쎄 국회의원에 출마할 예비역 준장인데 혁명주체세력이고 어쩌고 해서… 난 강형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게 할 생각으로 또 생각없이 불쑥 얘길 하고 말았던 거요 3선 개헌을 반대한 얘기랑…”
강정길은 이부장의 얘기를 끊고 회사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 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난 이부장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삼베로는 비단 주머니를 만들 수 없노라고 했단 말이죠? 군댓물에 썩은 대가리에 전혀 든 것이없어서 전무나? 온전 전, 없을 무의 전무. 그거 말이 되는 소리군! ”
“이부장님, 미안합니다. 절 소개하신 이 부장 님을 생각해서라도 참아야 되는 것인데….”
“아니오,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마시오. 그러 나 저러나 역린을 건드린 셈인데….”
이 부장의 얼굴이 갑작스레 흐려졌다. 뭔가 불 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역린이라니요? ’
“거슬릴 역(逆), 비늘린(해).”
그래도 강정길이 알아듣지 못하자 이부장이 친절한 교사처럼 차근차근 설명했다.
사람은 잘만 하면 용과 친할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용을 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이 아주 싫어하는 짓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며 용이 싫어하는 것은 턱 밑에 다른 모든 비늘과는 방향이 반대되게 붙어 있는 비늘 즉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다. 직경이 한 자쯤 되는 그 역린을 건드리면 용은 그게 누구든 당장에 죽여 버린다. 그 때문에 임금의 비위를 건드려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를 일컬어 ‘역린을 건드렸다’고 하게 됐다는 등의 얘기였다.
“한비자에 나오는 얘기요. 그런데 그것 참 딱하게 됐군.”
‘해선 안되는 일을 하느니 사푤 내는 게 훨씬 마음 편합니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나는 얘긴데요, 그 저자가 이렇게 말했더군요. 물질적인 재화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감옥을 쌓고 있다고요”
“일자리야 또 구할 수가 있겠지만 그 전무라는 사람이 뭔 짓을 할지 그게 걱정이오. 평이 안 좋은 사람이요 강형한테 보복을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없소”
“제가 그만 드면 그뿐이지 제까짓게 어떻게 보복을 하겠습니까! 제 걱정은 그게 아니라 제가 데리고 있던 사환 아입니다. 저 때문에 그만두게 되면 학굘 다닐 수가 없게 되는 아이거든요”
강정길의 가슴 속에는 계속 혜숙의 생각과 아내와 아들아이의 생각이 번차례로 들락거렸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