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품앗이
강정길의 뇌리엔 문득 ‘불가능은 다만 시간이 좀더 걸릴 뿐’이라는 미국 속담이 떠올랐다. 좀더 더디게 해결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는 뜻이며, 저 유명한 나폴레옹의 명언 ‘불가능은 없다’와 다를 바가 없는 속담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고 그는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처제. 내 생각은 그렇게 서둘 일이 아닌 것 같아.”
대답이 없는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가랑잎도 떨어질 때가 돼야 떨어진다고, 뭔 일이든지 다 때가 있는 법이거든. 안그래?'
“그럼 형부는 우리 결혼은 일단 찬성하시는 거죠? 다만 시기가 너무 이르다, 그 말씀이세요?'
“그렇기도 하고···.”
“또 뭐예요?'
“결혼 자체를 ··· 아직은 결정할 단계가 아니잖느냐, 이런 뜻도 돼. 과일도 익어야 따듯이 결혼 결정도···.”
“우리 사이가 아직은 결혼을 결정하기엔 이르단 말씀이세요?'
'응'
그녀는 강정길의 대답이 너무나 의외라는 듯이 잠시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정길은 그녀가 자기를 더 이상 의논의 상대로 여기고 싶지 않아 자리를 뜨려는 동작으로 알고 급히 그녀의 옷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아직 내 얘기, 안끝났어.”
“가는 거 아녜요, 잠깐···.'
그녀는 일어선 자세로 강정길을 내려다보며 턱 짓으로 화장실 쪽을 가리켰다.
‘‘난 또···.”
그는 잡았던 그녀의 옷소매를 놓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은 토라져 나가려는 걸로 오해했던 자신의 무안함을 덮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고등학교 때의 수업시간에 일어났던 한 사건이 떠오르며 자아내게 한 웃음이었다.
여학교에서 전근온 지 얼마 안되는 수학 선생님의 시간이었다. 수업 도중에 한 학생이 선생님 앞으로 나가 소변이 급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여학생이면 허락하지 않을 수 없지만 너희들 사내놈들에겐 절대로 수업 도중에 변소행을 허락할 수 없어! ”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그 학생을 제 자리로 돌아가 앉게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질문들이 터져나왔다. 많은 학생들의 장난기 가득한 질문들이었지만 내용은 “어째서 여 학생에겐 허락하는 일을 남학생들에겐 허락하지 않느냐”는 한결같은 것이었다. 선생님이 그런 질문들을 묵살하자 이번에는 학생들의 입에서 여러 대답이 쏟아졌다. 여자의 요도는 남자의 절반도 못되게 짧다느니, 소변이라고 말하지만 월경일 경우가 많다느니 하는 대답들이었다.
강정길은 옛 기억을 지우고 나서 처제인 윤선미가 내놓은 의논거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근무 중인 그를 느닷없이 전화로 불러낸 그녀가 내놓은 의논거리는 자기의 결혼 문제였다. 그녀는 자기의 결혼 상대자부터 소개했다.
월남전에서 전사한 애인이 잉태시킨 아이를 남해안의 O시에 있는 그이 친가를 어렵사리 찾아가 출산한 뒤 6개월쯤 지나 일자리를 얻기 위해 혼자서 잠시 서울에 올라왔을 때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사내가 결혼 상대자라는 것, 그 사내는 그녀가 졸업한 ㅅ시의 남녀공학인 중학교 동창생이라는 것, 그의 도움으로 그녀는 그가 다니는 피혁공장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심 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으나 그가 그녀에게 그토록 헌신적인 도움들을 베푼 것은 단순히 동향이요 동창생이어서가 아니라 학교 때부터 열을 올렸던 짝사랑의 상대였기 때문이었다는 것, 그녀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만을 가까스로 졸업하고 상경하여 온갖 고생을 다했으며, 그럼에도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어떻게 보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성실하고 정직하다는 등등이었다.
그녀는 한 10분쯤 그 사내를 만나게 된 경위와 사람 됨됨이를 아주 세세히 털어 놓은 끝에 강정길의 의견을 물었었다.
“김진철, 그 사람 이름이 김진철이에요. 그 사람이 벌써 일년 전부터 결혼을 하자고 졸라대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생각을 굳혔어요. 형부 의견은 어때요?'
'내가 겪어본 사람도 아닌데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에 이렇다 저렇다 대답하기가 곤란하군.”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람은 그만이라고요. 보탠 얘기도 또 뺀 얘기도 없어요. 미처 생각이 나질 않아 못한 얘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나야 처젤 믿지.”
“그럼 의견도 말씀하실 수가 있잖아요?'
“처제 얘길 전적으로 믿지만 그래도 심사숙고 해야 할 문제라구.”
· · ·
“이 얘길 아는 사람이 누구 누구야?'
“없어요. 오늘 첨으로 형부한테만 말씀드린 거예요. ”
강정길의 눈 앞에 장인 · 장모의 얼굴이 번차례로 떠올랐다. 그는 가볍게 도리질을 하고 나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뭣보다두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
그녀가 잽싸게 그의 말을 잘랐다.
“제가 형불 찾아 온 게 바로 그 때문이에요.”
강정길이 눈을 키우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장인 · 장모를 설득시켜 달라는 주문을 하러 온 것이구나. 악역 중에서도 악역이야. 그는 그런 악역을 자기가 어떻게 해낼 수 있을지, 전혀 자신이 없었다.
“갑작스레···”
입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을 그녀가 또 잽싸게 잘랐다.
“우리들에겐 갑작스런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빨리 해결이 돼야 하거든요.”
강정길은 처제와 나눴던 얘기들을 떠올리다가 문득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찾아와 서둘러대는 데에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또 임신이 된 게 아닌지 모르겠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나서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달렸다.
바로 그때, 화장실에서 돌아온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 동안 생각 좀 해보셨어요?'
강정길이 대답 대신 담배 연기만 내뿜고 있자 그녀가 재우쳐 물었다.
“뭐 좋은 생각 없으세요?'
“글쎄.”
“아버지랑 엄마만 설득시키면 되는 건데….”
“아니, 그게 전부지 무슨 문제가 또 있어?'
“그야 그렇죠.”
“그러니까 내가 아까부터 하는 얘기는 부모님의 반승낙이라도 받아 놓은 다음에 저쪽, 김진철이라고 했던가? 그 사람한테 얘길하는게 좋단 말이야.”
· · ·
“그리구 처제도 객관적인 입장이 돼서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고.”
“아까도 얘기했듯이 제 결심은 이미 굳어졌어요.”
“글쎄 내 생각은 처제의 결심이 너무 성급했다 그거야. 그리구 너무 감정만을 앞세운 결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두 들구.”
“뭔 뜻이에요?'
강정길은 처제의 물음에 짜증이 났다. 못알아 들을 얘기가 따로 있지, 그 얘기를 못알아 들으면 어쩌느냐 싶었던 것이다.
“우선 두 사람의 학력만 해도 그렇잖아? 김진 철이란 사람은 중학졸업자고 처젠 여고 졸업자 아냐?'
“그래요 그렇지만 왜 그게 문제가 되죠? 형부, 그 사람은 날 죽자하고 사랑하고 있어요. 형부, 난 이제 사랑 좀 받으면서 살고 싶어요. 난 그 동안 너무 힘들었었다고요. 그러다가 이제 겨우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거라고요.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날 사랑하는 사람이지 학력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난 여고 때 늘 공부가 뒷전이었으니까 중학만 나온 그 사람과 아무 것도 다를 게 없어요. 다른 게 있다면 그 사람한테는 없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내겐 있다는, 그 종이 한장이 더 있다는 차이뿐이에요. 형부, 지금 내게 필요한 사람은 학력이 높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날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에요”
긴 얘기를 마친 그녀는 고인 눈물을 잦히기 위해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강정길은 그녀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의 입에서 뿜겨져 나오는 담배 연기는 유난히 짙었다. 그는 계속해 자신이 뿜어댄 담배 연기를 지켜보고 있다가 도넛형으로 떠 있는 연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작정을 하고 그렇게 만들려 해도 번번이 실패했던 도넛이 생각지도 않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담배 연기로 하트형을 만든 뒤 다시 연기로 만든 화살을 쏘아 관통시키는 한 컷짜리 만화가 생각났다. 그의 생각이 나래를 폈다. 그래, 누군가 말했어. 투 리브 이스 투 러브(To live is to love)라고. 강정길의 눈 앞에 꽃잎을 다물고 있는 꽃 한 송이가 떠올랐다. 그 꽃 주위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꽃은 꽃잎을 열기 시작했고 이내 활짝 피었다. 밤에 다물렸던 꽃잎이 따뜻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활짝 피어나 듯, 처제의 삶도 이제 어둠에서 벗어나 활짝 피기 시작한 거야.
“형부.”
강정길은 생각의 나래를 접고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잦힐 수 없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내며 그녀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형부, 우리 집안에선 형부만 알고 있는 사실 이지만···. 만약 저쪽 집안에서 내 과거를 안다고 해보세요. 날 며느리로 맞아 들이겠냐고요.”
강정길은 그녀의 얘기에 속으로만 수긍을 했다. 여고 졸업자의 남편감에게 중학 졸업장밖에 없다는 것은 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남자의 색 시감에게 다른 남자와 동거생활을 한 경력이 있고 게다가 출산까지 한 과거가 있다는 것은 얼마 나 큰 흠인가. ‘똥 묻은 돼지와 겨 묻은 돼지’의 비유조차도 약하지 않은가.
강정길이 담배를 재떨이에 꾹꾹 눌러대면서 말했다.
“이왕 처제가 먼저 꺼내 놓은 것이니까 그와 관련된 몇 가지만 물어볼 테니 솔직히 말해 줘.”
“형분 아까부터 솔직 솔직 그러시는데 내가 언제 형부 앞에서 솔직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어요? 형불 첨 만났던 날, 그 날도 내가 내 과걸 죄 털 어 놨었잖아요.'
“어휴 그만해. 미안하다구.”
강정길이 손사래를 치고 나서 말을 이었다.
“혹시 처제가 그 과거 때문에··· 말하자면 자학적으로 그 김진철이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아까 얘기했잖아요. 그 사람이 날 죽어라 하고 사랑하고 있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요”
“그럼 또 한가지. 김진철이란 사람이 처제의 그 일들을 알고 있어?'
강정길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 대신 힘없는 도리질만 해댔다.
그가 다시 물었다.
“그 얘길 할 거야?'
그녀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문제로 오랫동안 괴로웠어요. 그러나 결국 얘길 않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리고 난 내 아일 완전히 포기했거든요. 그 집에선 내가 그 앨 데리고 사라질까봐 나 없는 사이에 도망치다시피 이살 했거든요. 죽은 외아들이 남긴 단 하나밖에 없는 손잔데 내가 그 아일 데리고 간다든지 혹은 잘못 키워서 어떻게 될지 그것도 맘에 걸렸을 것이고 요. 또 그 앨 미끼 삼아 내가 돈이라도 울궈 낼지 모른다고 걱정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내가 그 앨 못찾게 만든 것이거든요. 한마디로 그 집에서 날 못믿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찾을 수 없게 숨었는데 내가 무슨 수로 걜 찾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걜 포기한 거예요. 낳지 않으려다 난 아이라고 생각하니까 포기하기가 좀 수월해지더라고요. 어머나, 내가 뭔 얘길 하다가 이렇게··· 아, 그 얘기였지. 긁어서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에요.”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이야. 실은 아까부터 그 문제가 걱정이 됐었거든.”
강정길은 말을 끝내고도 계속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처제, 아까두 말했지만 이 일은 서둘 일이 아냐. 괜히 서둘다가 일을 그르칠 수가 있단 말야. 내 어떻게 해서든 성사되도록 할 테니까 그 대신에 시간 좀 줘.”
“형부, 난 형부나 언니처럼 아버지랑 엄마 오신 자리에서 축복받는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서둘지 말란 말야.”
“형부가 아버지랑 엄말 설득시킬 자신만 있다면···.”
“처제. 미국 속담에 ‘불가능은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라는 말이 있어. 뭔 뜻인지 알지?'
“형분 날 등신으로 아시나봐.”
강정길은 그녀의 밝은 웃음에 마음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방에서 나와 시계를 들여다보며 그는 사무실을 너무 오래 비웠구나 하고 생각했다.
“형부, 형부가 꼭 책임지셔야 해요 알았죠?'
“중신에미의 명인데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강정길이 사극 배우의 흉내를 내자 그녀가 깔깔거리고 나서 또 빠르게 입을 놀렸다.
“형부, 준용이 잘 크죠. 요즘 옹알이가 한창이라데요? 우리 언닐 못만났다면 그런 아들을 어떻게 얻었겠어요? ’
“거슬러 올라가면 그게 다 처제 덕이지. 품앗이는 책임지구 해줄 테니까 이제 중신에미 공치사 그만 좀 해.”
강정길은 처제의 어깨를 가볍게 쳐주고는 돌아서서 건널목 쪽으로 달렸다. 신호등이 파랗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16] 철새의 땅
눈이 떠졌을 때 창문이 훤했으므로 강정길은 깜짝 놀라 윗몸을 일으켰다. 아주 잠깐, 늦잠 때문에 지각을 하게 됐다는 걱정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달빛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창에서 거둔 눈길로 머리맡의 자명종 문자판을 쓸었다. 비쳐 든 달빛을 등지고 있는 자명종의 야광 바늘이 네시가 채 안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7분쯤만 지나면 통행금지를 풀어주는 사이렌이 울릴 것이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자명종의 문자판 위를 더듬었다. 종을 울리게 하는 바늘은 '6’자 위에 얹혀 있었다. 지난 밤, 잠들기 전에 그가 맞춰 놓은 그대로였다. 여섯시에 일어나야만 여덟시에 시작하는 회의에 늦지 않게끔 되기 때문이었다. 사장은 이상한 취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출근시간은 엄연히 아홉시인데 회의가 있는 날은 그 회의에 참석할 사람을 꼭 한 시간 전에 회의실에도 착하도록 지시하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강정길은 자명종에서 시선을 거두며 다시 눈을 붙일까 하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밑, 책상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완전히 잠이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공연히 달아난 잠을 억지로 청하느라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책이라도 몇 쪽 읽는게 낫겠다 싶었던 것이다.
강정길은 뒤를 돌아다 보았다. 달빛이 미치는 자리는 아니었으나 어린것을 끼고 모로 누운 아내의 모습이 어렵잖게 분간되었다. 해종일 어린 것에게 시달린 에미나 그 에미를 시달리게 한 어린것이나 한결같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렇긴 했지만 그래도 혹 잠을 깨우게 될지도 모른다 싶어 조심조심 책상 서랍을 열고 비상용으로 마련해 둔 초를 꺼내어 불을 밝혔다. 그리고 책꽂이에서 디어도어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 하권을 뽑아 서표가 끼워져 있는 갈피를 펼쳤다. 열심히 읽는다고 읽어 왔건만 구입한 지가 한 달도 넘는데 아직도 하권의 반 이상이 남아 있었다. 핑계가 아니라 그만치 바쁘고 피곤한 나날이었던것이다.
강정길의 근무처는 ㅎ출판사였다.
ㅎ출판사는 外販 조직이 강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외판이란 판매사원이 상품의 견본이나 카탈로그 등을 가지고 직접 가정 또는 직장 같은 곳으로 고객을 찾아 다니며 판매하는 것이므로 그 조직이 강하다는 것은 유능한 판매사원이 많다는 얘기였다.
이 ㅎ출판사 최사장은 원래는 출판인이 아니었다. 한창 나이 때 ㄷ시에서 사업을 하다가 집까지 날리고 빈 손으로 상경하여 밥술이라도 벌까 하여 서적 외판원 노릇을 시작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워낙 낯이 두텁고 간도 커 외판원 10년 동안에 큰 돈을 모았고, 또 그 돈으로 서적 전문 외판업체를 설립하여 크게 성공한 것이다. 이렇듯 서적 외판사업이 성공을 거두게 되자 그는 또 다시 그것으로만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남들이 잡은 고기를 떼다 파는 것보다 이왕이면 내 손으로 직접 잡아서 팔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외판사원들은 대개 정년퇴직을 한 공무원들이었으며,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도 소위 말하는 ‘마당발’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들은 주로 한 질이 20권 또는 30권씩 되는 전집류를 월부로 판매했는데, 그 판매액에 비례하여 수당이 높아졌으므로 어떤 수단으로든 판매 실적을 올리려고 기를 써댔다. 그러므로 교사로 정년퇴직을 한 판매사원들은 대기업의 간부 사원 봉급의 반년치도 넘는 월수입을 올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강정길이 층출판사 사장을 면담하던 날, 그는 “우리 외판조직은 종이에다 먹칠만 해 놓아도 순식간에 팔 수 있다.”고 장담했었다. 그 말에 허풍깨나 떠는구나 생각하며 그가 웃자, 최사장은 정색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뭔 책이든 만들어만 내시오. 삼십권짜리 아니라 삼백권짜리 전집이라도 오천질은 눈깜짝할 사이에 팔 테니!”
최사상의 그 자신만만한 말투로 보나 그의 표정으로 보나 순전히 허풍만은 아닌 듯하여 강정길은 기가 질렸었다.
강정길을 최사장과 연결시켜 준 사람은 ㄷ출판사 편집부장인 이부일이었다.
재작년 가을 어느날이었다. 그 날, 강정길은 매달 잊지 않고 아르바이트 거리를 마련해 주는 그에게 감사의 뜻도 표시할 겸 술 대접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벌써 오래 전부터 그런 뜻을 전했었으나 그는 그때마다 선약이 있네, 문상을 가야 하네, 집안에 뭔 일이 생겼네 하고 응하질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그 날은 왠지 마치 강정길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시오. 이 근처에 불고기를 썩 잘하는 집이 있습니다. 강형한테 할 얘기도 있고….”
“마침 잘됐군요. 그렇잖아도 불고기 생각이 나던 참이었는데···.”
강정길이 맞장구를 쳤다. 실은 불고기 생각이 났던 것은 아니었으나 불고기 얘기를 듣는 순간 저절로 침이 고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만치 고기맛을 본 지가 오래 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부장이 그를 데려간 곳은 음식점이 아니었다. 푸줏간이었다. 그 푸줏간 안쪽에 4인용 탁자가 딱 세 틀 놓여 있었는데 그 탁자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아니…. 좀 좋은 데로 가십시다.”
강정길이 놀란 눈으로 이부장을 바라보았다.
“난 여기보다 더 좋은 데가 없습디다. 고기가 싱싱하고 게다가 싸거든요. 그리고 여러 안주를 맛볼 수 있고···”
앞장서서 앉을 자리를 찾아가는 이부장에게 푸줏간 사내가 말했다.
“마누라가 병이 나서 오늘은 불고길 재어 놓은 게 없는뎁쇼. ”
“불고기만 고깁니까. 고기보다도 세상 좀 씹으려고 왔어요.”
이부장이 40대의 텁석부리 주인을 웃기고 나서 강정길을 돌아다보며 계속 입을 놀렸다.
“이 집은 고기도 싸고 좋지만 그보다도 조용한 얘기를 나누는데 아주 십상이거든요.”
강정길은 이부장의 말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는 이부장이 자기에게 뭔가 은밀한 얘기를 할 모양인데 그게 무슨 얘기일까 하는 생각에만 골똘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곳에서 구워 먹은 고기는 등심 · 곱창 · 양 · 염통 등이었다. 소주도 세 병이나 비웠다. 그런데도 그들이 나눈 얘기라고는 물가 오르는 얘기, 책 만드는 얘기, 여자 얘기, 취중에 실수한 얘기 따위가 고작이었다.
강정길은 진작부터 이제나 저제나 하고 이부장의 입에서 나올 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의 입에서는 아직도 ‘할 얘기’와 ‘은밀한 얘기’가 나올 기미가 없었다.
강정길이 참다 못해 변죽을 울렸다.
“뭐 좀 재미난 얘긴 없습니까?'
“강시인. 요즘 시 많이 썼습니까?'
이부장의 동문서답에 맥이 빠져 강정길이 입을 다물고 있자 그는 계속 입을 놀렸다.
“강시인. 칼 같은 시 좀 쓰시오! 폭탄 같은 시 좀 터뜨리시오! 속이라도 후련하게 한 방 터뜨리시오!'
'· · ·'
“강시인. 강시인은 유신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내가 아는 건 삼강오륜의 붕우유신 하고 일본의 명치유신밖에 없거든요.”
강정길은 술자리의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지는 것 같아 우정 농담을 내뱉었다.
“이제 강시인의 새 타이어가 슬슬 터지기 시작 하는군. 거, 얘길하고 보니 강시인의 새 타이어가 펑크를 내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됐군. 하하하. 웃을 일이 없을 땐 이래서 웃어보는 거요. 안그래요? ’
“옳습니다.”
강정길은 짧게 맞장구를 치고 석쇠 위의 고기를 뒤집는 체, 입을 다물었다.
維新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속이 끓어오를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술김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갑작스레 생겨나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한 ‘유신’의 정체를 확실히 알기 위해 얼마 전에 여러 책을 뒤져 보았었다. 그래서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만 알았던 그 ‘유신’이 「시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됐던 것이다.
德治를 베푼 임금으로 유명한 주나라 문왕을 칭송한 아악의 가사가「시경」에 실려 있는데, 그 가사 중 ‘文王在上(문왕이 위에 계시니) 於昭于天(아 하늘에 빛나시도다) 周雅舊邦(주나라가 비록 옛나라이나) 其命維新(그 명이 새롭도다)’에서 유신이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유신은 국가적 차원에서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이요, 그것은 발전적이고 과감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반민주적이요 헌정 질서를 짓밟아 역사를 후퇴시킨 독재정치체 제라는 비판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일부 헌법 조항들이 그 효력을 정지당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렸으며 입을 봉해 버렸다.
“흐르던 물길을 막아 가두면 언젠가는 반드시 둑이 터져 물난리가 나게 마련이라는 걸 왜 모르는지 난 그게 이해가 안된단 말이오!”
결국 이부장이 씹고 싶었던 세상사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생각만 할 뿐 강정길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까 내게 할 얘기가 있다고 하셨는데….”
“아! 그래요. 할 얘기가 있지요. 깜빡 잊고 있었소. 강시인, 혹시 철새떼 우두머리 노릇할 생각 없소?'
‘철새’란 철을 따라 먹이를 찾아서 옮겨 다니는 철새처럼 이 출판사에서 저 출판사로 이동하며 벌이를 해야만 하는 임시직 교정사원들을 일컫는 출판계의 은어였다.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자기네가 기획한 출판물이 본격적인 제작 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그 기간을 단축시킬 대로 단축시키기 위해 한꺼번에 그 ‘철새떼’를 끌어들여 교정이란 먹이를 뿌려 주었고, 제작이 완료되어 교정거리가 없어지면 ‘철새떼’를 풀어 날리곤 했다.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그런 ‘철새떼’를 끌어 모을 수가 있으므로 교정원을 정식 사원으로 채용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식사원에게는 도서 제작의 공백기에도 급료를 지불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당 · 퇴직금까지도 지불해야만 하기때문이었다.
“그런 자리가 있긴 합니까? ’
“한 일년쯤 임시로 편집부장 일을 맡는 일이오. 무슨 전집을 발간할 기획을 세워 놓은 모양인데 그 전집이 나올 때까지 편집을 책임질 사람을 구하지 못한 모양입디다. 날더러 좋은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거요.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 그래 내가 한 마디 해줬소. 유능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런 ‘철새 우두머리’ 노릇을 하겠다고 할 진 모르겠다고. 그랬더니만 일하는 동안 사람 됨됨이를 봐서 맘에 들면 정식으로 채용할 생각이라는 얘길 합디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보증인까지 세워 도장 찍은 서류도 못믿는 세상에 입에 발린 그 말을 어떻게 믿겠소 그렇잖소?'
강정길은 대답 대신 입으로만 웃어 보여 그의 말에 수긍을 표했다. 그러자 이부장은 잠시 후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하기야 남을 못믿는 것도 병은 병이지. 서로 들 남을 믿지 않으니까 세상이 이렇게 각박해진 거요. 그렇잖소? 얘기로는 보수도 다른 데에 비해 높게 책정할 작정이라니까 한번 해보시오.”
“생각은 있지만 추천해준 이부장님 욕이나 먹 이지 않을까 걱정부터 앞섭니다.”
“천만의 말씀.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밑져봤자 본전이니 한번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소”
이부장이 지갑 갈피에서 ㅎ출판사 사장의 명함을 꺼내 강정길에게 건네주며 말을 마쳤다. 그의 말대로 ‘밑져봤자 본전’이라고 생각하며 강정길은 ㅎ출판사 최사장을 만났고, 면담 끝에 임시직 편집부장 자리에 앉게 되었다. 비록 임시직이긴 했으나 강정길에게 일년 동안 맡겨진 임무는 중요한 것이었다. 기획업무를 비롯하여 편집 · 제작은 물론 임시직원의 채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의 권한이었고 따라서 그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강정길이 자신에게 맡겨진 그 책임들을 1년 동안 성실하게 수행했으므로 그는 흐출판사의 정식 편집부장이 된 것이었다.
강정길이 임시직으로 1년, 정식사원으로 채용된 뒤 1년, 도합 2년 동안을 충출판사에 근무하는 동안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었다. 그 변화는 그에게 있어 더없는 행운이었다. ‘불행은 어깨동무를 하고 다닌다’는 러시아의 속담과는 정반대인 그런 행운이었다. 임시직이긴 했지만 일자리가 생긴 것과 거의 동시에 윤진미를 아내로 삼게 되었고, 그 1년 뒤에는 정식사원이 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첫아들을 얻게 됐던 것이다. 사글세방 신세를 면하고 전세방에서 살 수 있게 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행운이 어깨동무를 하고 그에게 찾아들었던 것이다.
강정길에게서 회상의 장막을 걷어준 것은 아내의 기척이었다. 그는 아내가 잠이 깼나 싶어 뒤돌아 보았으나 여전히 아이를 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펼쳐 놓은 책 위로 눈길을 깔았다. 서표가 끼워져 있던 갈피에서 책장이 넉장이나 넘어가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책장 위로 사장의 얼굴이 그려졌다. · ‘무슨 회의일까? ’ 하고 여러가지로 추측을 해보며 그는 고양이걸음으로 문을 향해 다가갔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던 때문이었다.
<계 속>